〈 104화 〉1부 6장 (10)
<4시 29분, 베링섬 상공.>
"아, 답답해서 못 기다리겠네!"
질풍객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도저히 이렇게 미적지근하게 기다리기에는 너무 초조했다.
"...야, 너 그 짓 할 생각하지 마라. 이거 비싼 거야."
오라클이 점잖게 설득했다. 선홍색으로 상기되있던 그의 볼이 핏기가 가셨다. 질풍객이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었다.
"왜?"
"너 또 랩터한테 쫓기고 싶냐?"
오라클의 딴지에 가웨인이 난처한 표정으로 질풍객의 어깨를 눌렀다.
"그러다 또 미확인비행물체로 난리가 날 수 있습니다."
"내가 가고 싶은 곳 내가 가겠다는데 지들이 날 쫓아온 거지."
질풍객. 본명처럼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남자. 문제는 그 방랑벽이 너무나도 강해, 여권도 없이 세상을 주유하며 떠도는 바람에 일으킨 국제 문제만 수 십건에 이른다.
그리고 항상 그 문제의 수습은 가웨인과 오라클이 도맡았다. 오라클의 입꼬리가 떨렸다.
"너 두 달 전에도 중국이랑 시비 튼 거 잊었냐?"
"어? 그거 나 아닌데?"
막 제자리 점프를 하던 질풍객이 오라클의 말을 부정했다. 오라클의 입꼬리가 내려갔다.
"무슨 소리야."
"나 그냥 그때 바다 걸어서 집으로 가고 있었어. 아, 하늘에 뭔가 날아가기는 하더라."
"야! 왜 그걸 지금 얘기해?!"
"안 물어봤잖아."
질풍객은 마력을 끌어올리며 목의 스카프를 동여맸다.
"야, 문 열어. 안 그러면 베고 간다."
질풍객이 머리에 쓴 고글을 내리자, 오라클은 황급히 비행기의 문을 열었다. 가웨인이 놀라 의자에서 일어서며 제지하려 했다.
"자, 잠깐! 오라클!"
"나 이번에도 이거 망가뜨리면 아빠한테 죽어!"
거센 바람이 비행기 안에 휘몰아쳤다. 가웨인은 오라클의 어깨를 붙잡으며 질풍객에게 소리쳤다.
"위험한 행동은 하지 마세요!"
"사람 구하러 가는 거잖아!"
질풍객이 그대로 비행기 문으로 뛰어내렸다. 낙하산도 없이 뛰어내리는 행동은 무모하기 짝이 없었지만, 질풍객의 그런 기행은 원탁에게는 일상이었다.
부우웅--
비행기의 문이 공기저항을 무시하고 빠르게 닫혔다. S급 코어로 제작된 엔진에서 흘러나온 마력에 동체는 아주 빠르게 자세를 바로잡았다.
웅, 웅, 웅!
레이더에서 푸른 점이 초음속으로 사라졌다. 강력한 소닉붐을 일으키는 질풍객은 그야말로 바람처럼 허공을 달리고 있었다.
오라클이 위성에 뜬 그 사진을 보고 빈정거렸다.
"바람 속성 애들은 저게 다 패시브인가?"
"마음이 급한 거죠. 까딱하다가는 여동생이 죽을 위기에 처했으니."
삑. 공용 채널에서 신호가 잡혔다. 오라클은 상대방의 얼굴을 보며 비웃음을 지었다.
"왜, 얼음땡이."
[지금 남의 영공 신고도 없이 가로질러가는 놈 누구니?]
스크린에 나타난 머리부터 발끝까지 눈이 내린 것처럼 새하얀 여인은 자다가 일어난 것처럼 심통이 나 있었다. 여인의 손에는 보드카가 들려있었다. 가웨인이 황급히 답했다.
"지, 질풍객입니다."
[그래? 그럼 너희들은 왜 이쪽을 지나가고 있는데?]
"질풍객 도와서 한국가는 중."
오라클의 답에 여인은 잠시 보드카를 마시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질풍객이 먼저 간 거지? 그 녀석, 안 그런 척하면서 자기 나라가 그 상황이니 은근히 신경쓰이나보네.]
"나라는 아니고 동생이 위험에 빠졌어."
[어찌됐든. 질풍객이 갔으니 크게 위험하지는 않겠지. 마침 잘 됐다. 너희 사할린 잠깐 들려.]
"왜?"
오라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전력으로서는 상당히 우수하지만, 상대하기에는 조금 껄끄러운 사람이었다.
"물론 저희야 당신이 오면 좋습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문제 될 거 있니? 내가 가겠다는데. 10분 내로 사할린으로 갈게.]
"너 지금 어디인데?"
[모스크바.]
여인이 보드카를 흔들며 사라졌다. 오라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가웨인은 창밖을 바라보며 회한에 잠겼다.
"원탁 2기는 왜 이렇게 개성이 강한 사람들만 모인 걸까요."
"......몰라."
곧 항로가 업데이트되었다. 오라클은 항로를 따라 자동조정 상태로 바꾼 뒤, 품에서 안경을 꺼냈다.
"나 일단 '관측' 좀 할게. 무슨 일 있으면 깨워줘."
"갑자기요?"
안경을 쓴 오라클이 아주 조용히, 그 누구도 듣지 못할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두 달 전 서해에 나타난 미확인비행물체, '예언'에 없던 거란 말이야."
* * *
<새벽 4시 44분,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
키아악!
심해아귀들이 하나둘 백사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엉금엉금 기어오며 물에서 나온 괴인들은 촉수 끝의 발광체를 뽐내며 모래를 디뎠다.
저벅, 저벅. 처음에는 어린아이의 걸음마 같던 발놀림이 해변의 가운데 즈음에 다다랐을 때는 제법 걷는 시늉을 하고 있다.
심해아귀 하나가 드디어 계단의 끝을 디뎠다. 발광체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이 이상을 감지했다.
키악?!
의문을 표할 틈도 없이, 심해아귀의 명치에 얼음의 창이 꽂혔다. 동료 아귀가 당해 옆에 있던 아귀가 포효했지만, 곧 그 아귀도 얼음 창이 말뚝처럼 명치에 꽂혔다.
"서, 설화공주님?!"
급히 슈트를 입고 나타난 히어로들이 놀라 소리쳤다.
설화공주, 석하랑은 계단 위에서 팔짱을 낀 채 백사장을 심해아귀들의 명치에 말뚝을 꽂았다.
"지, 지금 뭐 하시는-?"
"나중에 저것들, 코어 빼내세요."
일방적인 지시였지만, 히어로는 하랑의 말에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청회색으로 빛나는 하랑의 모습은 지난 몇 년간 봐왔던 것과는 다르게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다행히 저것들은 코어를 채취할 수 있는 녀석들이니까."
얼음창 하나가 또 다른 심해아귀의 가슴을 찔렀다. 하랑의 얼음창 끝은 심해아귀의 코어를 정확히 꿰뚫어 땅에 박았다.
캬아악!!
심해아귀들이 다리를 절며 걸어온다. 그 수는 눈으로 훑어도 족히 수십을 넘었다. 히어로는 긴장하며 제 무기를 들었지만, 곧 펼쳐진 장관에 넋을 잃었다.
파바바밧!
하랑은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 수백 개의 얼음창을 만들어 심해아귀들을 찔렀다. 얼음창들은 해운대 백사장에 긴 얼음벽을 세웠다.
히어로가 중얼거렸다.
"목책...?"
얼음창이 축을 만들고, 그 사이사이를 심해아귀의 사체가 채웠다. 새롭게 바다를 올라오는 심해아귀들이 기어오다가 얼음창에 부딪혔다.
캬악? 심해아귀의 촉수 끝 발광체가 얼음창에 닿았다. 곧 얼음창에서 뿜어진 한기가 심해아귀를 그대로 얼려버렸다. 하랑은 팔짱을 풀고 오른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말은 필요 없었다. 그저 손을 쥐었다가, 펴는 것으로 충분했다.
파바바밧! 하늘에서 얼음창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엉금엉금 기어가던 심해아귀들이 그대로 백사장에서 절명하는 가운데, 막 백사장을 디딘 심해아귀가 본능적으로 물속으로 도망쳤다.
"칫."
하랑이 혀를 찼다. 백사장을 중심으로 약 1km 길이의 얼음 울타리를 만들어냈지만, 심해아귀들은 생각보다 영리했다.
캬가악!
굳이 얼음의 벽을 넘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부술 생각도 하지 않는다. 심해아귀들은 벽을 돌아가기 위해 좌우로 산개했다.
하랑의 눈이 좌우를 훑다가 시선이 섬에 꽂혔다.
"저긴...?!"
D섬. 광검이 피닉스에게 사망한 곳임과 동시에 하랑의 생모가 잠든 묘지. 그 섬의 절벽을 심해아귀들이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하랑이 곧장 스마트워치에 대고 소리쳤다.
"여기는 설화공주! 지금부터 저는 벽을 칠 겁니다! 벽을 넘어오는 괴수들을 먼저 처리하세요!"
지휘관이 없는 현장에서는 최고 등급의 히어로가 현장 지휘를 맡았다. 석하랑의 명령을 받은 히어로들이 하나둘 좌우로 흩어졌다.
"후."
짧게 숨을 골라 마력을 정돈하고, 그 마력을 등으로 분사했다. 새벽 바다 백사장에 흰 나비가 날개를 펼치며 날아올랐다.
"엄청 많네."
바닷속을 헤엄치는 심해아귀의 수만 족히 백을 넘었다. 백여 마리의 D급 괴수 정도야 하랑의 선에서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지만, 저 괴수들이 이곳 해수욕장에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스마트워치를 통해 작은 스크린이 나타났다. 부산 해안선을 따라 거제에 이르기까지, 약 90km에 이르는 해안선 전체에서 붉은 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랑은 협회의 지원을 확인했다.
부산 지부에 자리를 잡은 히어로의 수는 약 100명. 그들 전부가 파도처럼 밀려오는 괴수의 상륙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1시간?"
신서울의 히어로들이 달려오고 있다. 말 그대로 부산의 위기에, 도로를 주파하고 산을 넘으며 일직선으로 부산까지 달려온다.
그 선봉에는 화권, 이승형과 삼사가 있다. 선두에 선 그들이 도착할 예정 시간이, 1시간이었다.
하랑이 오른손을 뻗었다. 섬에 부딪히던 파도가 곧 얼어붙고, 절벽을 기어오르던 심해아귀들은 그대로 파도 속에 파묻혀 얼어붙었다.
"어딜 올라가려고."
"설화공주님! 무리하지 마십시오!"
히어로들이 얼음벽 사이로 머리를 들이민 심해아귀에게 창을 꽂으며 소리쳤다. 지난 서울 수복 작전의 실패 이후, 설화공주가 절치부심하며 훈련을 한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로 인해 지금 무리를 하는 게 아닐까. 히어로들의 걱정은 어찌 보면 당연해 보였다.
"무리하지 않아요. 걱정 마세요."
하랑은 괜찮다는 듯 웃으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실제로 하랑의 마력은 조금도 소모되지 않았다.
'정령 각성하고 마력은 넘쳐.'
수치로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심해아귀 수백의 코어를 꿰뚫었음에도 마력은 단 1%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럼 해야 할 일은 하나.'
시간이 흐를 때마다 심해아귀보다 더 강한 괴수들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이 난리를 가장 빠르게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여기는 설화공주. 협회 응답해주세요. 모비딕을 처리하겠습니다."
곧 스크린이 나타났다. 다크서클이 짙은 집정관이 떡진 머리카락도 정리하지 못하고 그대로 나타났다.
[안 돼! 지금 모비딕 일본 영해에 있어!]
집정관은 모비딕의 위치를 가리켰다. 대마도의 서쪽에서 육지를 비껴가듯 북상하고 있었다. 하랑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지금 이쪽까지 영향받잖아요!"
[어쩔 수 없어! 공해도 아니고 일본 영해에 있으면 우리도 어떻게 하지 못해! 협회에서 공투 요청 보냈으니까 기다려!]
"쳇, 그럼 일본에서 저거 빨리 처리하게 해줘요!"
하랑은 답답한 마음을 억누르며 날개를 움직였다. 마음 같아선 당장 바다를 가로질러 날아가고 싶었지만, 히어로인 입장에서 국제법을 어길 수 없었다.
'일단 막고 본다.'
원탁인 질풍객이 있는 만큼, 일본의 히어로 전력도 만만찮다. 특히 섬나라인 만큼 해안이나 해상 전투는 상당히 뛰어났다.
'해안선을 따라서, 벽을 친다!'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했듯이, 얼음창들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사이를 괴수의 시체로 채운다.
'마력은 아껴야 해.'
아무리 마력이 넘쳐나도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야 했다.
모비딕의 부산 상륙. 하랑은 바싹 마르는 입술을 깨물며 해안선을 따라 이동했다.
시각은 어느덧 새벽 다섯 시.
거대한 얼음의 벽이 길게 늘어졌다. 하랑은 날아다니며 제 머리에 걸어둔 머리핀에 손을 올렸다.
[부산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래줘야겠다. 이쪽은 북으로 가야 할 것 같으니.]
"북?"
이동하는 경로를 따라 얼음 창을 비처럼 쏟아내던 하랑의 날갯짓이 멈췄다. 곧 미니피닉스를 통해 피닉스의 의사가 전달되었다.
[중국에서 평양의 괴수를 깨우려고 하고 있다. 그거 잠에서 깨면 모비딕보다 천 배는 더 위험해.]
[그런 게 왜 평양에, 잠깐만. 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하랑은 언뜻 스치는 생각에 사색이 되었다. 피닉스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린 것은 분명 착각일 것이다.
[무얼. 빌런답게 행동하는 것뿐이다. 얘기했잖나. 남쪽은 네가, 북쪽은 내가. 아직 평양의 괴수를 건드리기에는 위험해.]
[설마 다 죽일 셈이야?!]
[......그것도 생각해봤지만, 기각당했다.]
하랑이 광안대교를 따라 바다를 얼리는 사이, 피닉스가 잠시 뜸을 들이며 말을 이었다.
[괜찮다. 시선을 좀 돌릴 뿐이야.]
[무슨 수로?]
푸흐흐. 그 순간만큼은, 피닉스의 장난기 어린 웃음이 들렸다고 하랑은 확신했다.
[나중에 알려주지. 일단 부산부터 확실하게 처리해라. 모비딕은 정령인 너를 노리고 올라오고 있다.]
그 말을 끝으로 대화는 끊겼다. 하랑은 계속 연결을 시도했지만, 상대는 답이 없었다.
"나중에 따지고, 일단 지금은 여기부터...!"
피닉스가 이 상황에서 굳이 허언할 리는 없으니, 모비딕은 분명 부산으로 올라올 것이다.
광안대교의 끝자락에 다다른 하랑의 눈에 넓은 자연공원이 눈에 띄었다. 이 넓이라면 제 마력을 아무리 퍼뜨려도 문제가 없으리라.
하랑은 자연공원의 한가운데로 날아가 마력을 끌어올렸다.
"여기는 설화공주. 현 지점에서 궁극기를-"
[멈춰! 미안하다. 하지만 지금 너 말고 움직일 사람이 없어!]
집정관이 하랑의 궁극기 사용을 거부했다. 집정관의 말에 의아해하던 하랑에게 작은 스크린이 나타났다.
"배?!"
하랑이 위치한 지접에서 남동쪽으로 약 30km 지점, 모비딕을 피해 크루즈 한 척이 꽁지 빠지게 바다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비행 가능한 사람이 너밖에 없다! 할 수 있겠어?!]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하랑이 날개를 접고 허공에 얼음길을 만들어냈다. 슬리퍼의 아래 만들어진 스케이트 날이 얼음길에 미끄러지며 바다 위를 달렸다.
"해야 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