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103화 (103/1,497)

〈 103화 〉1부 6장 (9)

<4시 29분, 경부고속도로 동대구 JC>

"...흐음."

은유하가 불쾌한 내색을 내며 핸들을 꺾었다. 특별히 개조한 25톤 트럭이 달려드는 괴수를 로드킬하며 도로를 달렸다.

[무슨 일인가? 안색이 좋지 않군.]

"별 일은 아닙니다, 아버님. 일본 쪽에서 소식하나가 들어왔는데, 조금 기분이 안 좋아서요."

스크린 속 가면의 남자, 허윤환이 마스크 너머로 말했다.

[무슨 소식인가? 설마 모비딕에 무슨 문제라도?]

"모비딕은 그대로 부산으로 올라오고 있어요. 하랑이랑 다른 히어로들이 뭍으로 올라올 괴수들 요격할 준비에 들어갔고요. 진짜 문제는 지금 해상인데...."

은유하는 다시 스크린에 속속들이 들어오는 데이터를 눈으로 훑었다. 본인이 직접 조종하는 기계 인형 외에, 상품으로 팔려나간 기계 인형들에서 보내진 극비 정보였다.

"딸기 실은 여객선이 지금 좀 위험하네요. 지금 대마도 들어가기는 그른 것 같은데."

[대마도? 거기 협회에서 지부를 철수시켰을텐데?]

"여객선 자체는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아요. 그 배에 질풍객 동생이 타고 있거든요."

[질풍객? 그 한량 지금 미국에 있을텐데?]

허윤환의 말에 은유하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잘 도착해야하는데."

[사람 말인가, 아니면 딸기 말인가?]

"당연히 사람들이죠. 그 배에 탄 사람들, 다 유성 배에 돈내고 탄 제 고객님들인데. 회사 오너로서 당연히 책임을 져야지요."

[...칭찬하기에는 뭔가 묘한 느낌이 있군. 아무튼 빨리 가세. 벌써 4시 반이야.]

은유하는 울컥했다. 턱밑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트럭의 엑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그런데 이 슈트 말일세.]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을 검은색으로 통일한 히어로 슈트. 허윤환은 마스크를 장갑으로 만졌다.

[내가 제안한 디자인이랑은 조금 다른 것 같네만.]

"그거 그대로 썼다가는 저작권으로 소송당해요."

[그건 그렇군. 지금 디자인도 나쁘지 않네만.]

허윤환은 헬멧같은 마스크의 윗부분을 가리켰다. 허윤환이 의뢰한 디자인에서 군모와 같던 머리 부분이 사라지고, 대신 조금 다른 형태의 디자인으로 변형되었다.

[이래서야 암흑 군주라는 이명도 의미가 없어지지 않나. 조금 아쉽군.]

"...머리 부분 제외하면 비슷하시잖아요. 그거로 만족 하세요. 그거 바꾼다고 세 시간 썼으니까."

[유구무언이군.]

은유하의 일곱 인형들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차마 허윤환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한숨을 쉴 수는 없었다.

광검 허윤환과 생전과는 달리 허물없이 친해진 것 까지는 좋은데, 옆에서 보니 은근히 나사를 풀고 다니는 성향이 있었다.

물론 은유하도 이전보다는 허윤환에게 살갑게 대했다. 피닉스처럼 마음 편하게 제 속사정을 털어놓을 좋은 대화상대였다.

쿵! 트럭이 다시 괴수를 쳤다. 은유하의 몸이 크게 흔들렸지만, 곧 자세를 고치고 차체를 바로세웠다.

[그런데 자네, 보면 볼수록 놀랍군. 여인의 몸으로 이런 대형 트레일러도 운전하고 말이야.]

"이능력 때문에 알게됐습니다. 다른 인형들의 경험들, 저한테 다 들어오게 되더라고요."

[남들보다 일곱 배나 되는 인생을 살고 있다니, 자네도 고생이야.]

"대부분 재벌이지만요."

잠시 대화가 끊겼다. 허윤환의 가면 렌즈가 빛났다.

[...혹시 X로이드들도 자네?]

"어머. 무슨 말씀이실까요?"

은유하가 핸들을 좌우로 흔들었다. 트럭 뒤가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허윤환이 넘어질뻔하다가 벽을 짚었다.

"설마 제가 X로이드들에 이능력을 연결했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시죠?"

[합리적인 의심이지. 은재민같은 기계 인형들도 결국에는 모델만 다르지 안드로이드 아닌가?]

허윤환의 질타섞인 물음에 은유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연결은 할 수 있는데, 그러진 않아요. 저도 어디 몸 험하게 굴리면서까지 그러고 싶지는 않아서. 대신 이론은 빠삭해요. 유성의 데이터베이스에 차곡차곡 모아두거든요."

[뭐?]

허윤환의 목소리가 떴다. 마스크 너머에서 당황이 느껴졌다.

"서버에 저장되어있죠. 대한민국, 전 세계의 어떤 누가 유성의 X로이드를 샀는지. 누가 어떤 취향을 가지고 X로이드를 가지고 노는지. 그리고 그 X로이드는 제게 온갖 데이터를 보내요. 아, 직접 받는건 아니고 따로 단말이 있어요. 그걸 처리하는 전용 인형이."

[자네....]

은유하가 쓰게 웃었다.

"오빠들 다 죽고나서 방법이 없었어요. 누구는 다 결혼해서 자식도 있고, 저랑 다르게 진짜 망나니도 있었으니까. 더러워도 최소한의 성생활은 했어야 했죠.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에요. 제 몸은 순결을 유지하면서."

[......여러 생각은 들지만.]

허윤환이 인자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생 많았군. 정말.]

은유하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쵸? 그래도 이렇게 되서 좋은 것도 있어요. X로이드 산 사람들 무슨 생각하고 사는지 다 듣고볼 수 있거든요? 그게 되게 재밌어요. 밖으로는 신사인척 하면서 X로이드 상대로 피학을 부리는 사람도 있고, X로이드를 진짜 인간처럼 여기는 사람도 있어요. 아. 그러고보니 아버님 2011년에-"

[그만.]

허윤환이 황급히 말을 끊었다. 은유하가 피식 웃었다.

"그냥 구매하셔놓고 한 번도 안 쓰셨으면서. 특수주문이라서 기억이나네요. 분명 신체 사이즈가 14-"

[...내가 뭘 잘못했나?]

"별로요. 디자인 고집 부리셔서 세 시간이나 지체한 것 빼고는?"

차가 또 덜컹거렸다. 도로에 방치된 괴수의 시체가 트럭 바퀴에 갈려나갔다.

[그럼 자네가 나중에 진짜로 결혼할 사람이 여자라면, 인형으로 결혼을 시킬 생각인가?]

"어, 그 생각은 안해봤는데요."

은유하가 핸들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고민에 빠졌다. 은유하는 그닥 결혼에 대해서 생각이 없었다.

"저는 돈이랑 결혼한 여자라서."

[이거, 결혼 사기를 당했군.]

허윤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은유하가 엑셀러레이터를 세게 밟았다.

"뭐, 저한테 돈보다 더 가치있는 사람이 있다면 저도 생각을 달리 해보겠지만요."

[그런 사람이 있겠나?]

은유하는 아무 말 없이 웃었다.

* * *

<4시 29분, 피닉스 펜트하우스.>

"괜히 소집했네요."

나는 의자에 앉아 종이를 넘기며 민원을 처리했다. 류천성이 서울 시장이 되었지만, 이미 서울 주민들은 청화단을 통한 문제 해결에 익숙해져 있었다.

'이제는 서울시에 민원 넣으라고 해야지.'

겉으로는 류천성의 업적이 되겠지만, 실제로 그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건 청화단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부산이야 석하랑이 알아서 잘 처리하면 될테고.'

나하 게이트, 오키나와의 차원문에서 나온 괴수라고 해봐야 중간보스 수준이었다. 수마룡 제 2형태니 어떠니 떠들어대도, SS급 히어로라면 1:1로 충분히 이길 수 있다.

'나머지 잔챙이들은 알아서 처리하라고 하지.'

청화단이 서울을 수복했으니, 부산의 문제 정도는 히어로들이 알아서 처리해야했다. 이정도 위기도 처리하지 못하면 앞으로 있을, 지금보다 더 심각한 위험에 너무나도 쉽게 무너질 것이다.

'지금 SS급이면 거의 세계 최강이잖아. 누가 가르쳤는데 그 정도는 이겨내야지.'

원작 시점에서도 10여명 밖에 되지 않는 등급의 전력이다. 석하랑은 벌써 5년 뒤 자신의 경지를 넘어섰으니, 제 밥 값은 해야했다.

'문제는 평양인데.'

히든 보스이자 난이도만 따졌을 때 탑 3안에 들어가는 괴랄한 평양의 괴수, <뉴클리언>.

'최소 SS 넷은 모여야 안전하게 잡는다고, 그 망할 고양이.'

혼자서 못잡는 건 아니다. 본체를 꺼내면 되니까. 하지만 그랬다가는 한반도가 전투의 여파로 인해 반도가 아니라 섬이 되고 말 것이다.

'나, 석하랑으로 둘. 광검은 보류.'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고 해도 트라우마는 무시 못한다. 광검은 평양 전투에서 폭주하여 의형제와도 같은 동료들을 제손으로 죽였다.

"둘이 모자란데. 흐음."

이 시점에 SS가 될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싶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후보들은 역시 원탁. 그 중에서도 세계 최초로 SS에 오른 태양의 기사가 떠올랐다. 가웨인 경. 정의감이 넘치는 영국의 수호신이자 원탁 히어로들의 리더.

"아니, 보류. 어디서 태양을 들먹여요. 건방지게."

진짜 태양이 여기에 있고, 태양에 준하는 정령이 또 하나 있는데 어디서 인간 따위가 태양을 논한단 말인가. 감히 죽여 마땅한-

"...흠흠."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았나 싶어, 종이를 가지런히 정리해 책상 옆으로 밀었다.

고요했다. 천가을 습격사건 이후, 펜트하우스에는 내 허락없이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결계를 쳤다. 이 방안에 있는 자라고는 창염의 피닉스, 단 한 명. 차분히 화를 가라앉히고 편안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역시 전력을 더 들여야 해.'

생각보다 간부들의 성장이 더디다. 평양에서 쏟아지는 괴수들을 사냥해 어미새처럼 코어를 먹이지만, 그마저도 한계가 있다.

'애초에 친화율은 한계 레벨 같은거니까 성장 시키기도 어렵지.'

만약 게임의 시스템이 있다면 친화율은 곧 '레벨'로 표시될 것이다. 하지만 아직 개인의 친화율을 수치화 할 '마력 스캐너'는 출시되지 않았다.

"히메지 히카리."

모종의 이유로 한국으로 넘어온 메인 히로인. 일본 박사학위를 바탕으로 대전 연구 단지에서 연구를 하다가 코어의 존재를 알게 되고 주인공 일행에게 도움을 요청한 여자. 청송이 이쪽에 있으니 그런 미래는 생기지 않겠지만, 히메지 히카리에 의해 그 스캐너가 개발되기 전까지는 객관적인 친화율 파악이 힘들기는 하다. 아무나 껴안아 댈 것도 아니니.

"지금 걔 중학생일텐데."

은유하가 재벌 천재라고 한다면, 히카리는 마법과 과학에서 천재다.

"질풍객 동생만 아니었어도 바로 데려오는건데요."

석하랑에게 아버지인 허윤환이 방해 요소이듯, 히카리에게는 그의 하나뿐인 친오빠 하야테가 상당한 걸림돌이다. 틈만나면 주인공을 죽이려드는 살인귀가 바로 질풍객, '히메지 하야테'다.

"...아니지, 여기서 더 감당 어떻게 하려고."

천가을, 은유하, 석하랑.

세 명만으로도 벅찬데 거기서 메인 히로인을 더 늘렸다가는 분명 수라장이 될 것이다. 안 그래도 지금 자꾸 사람 마음을 흔들어서-

"에이, 괜히 멀리 나가지 말고 가까이에서 찾죠."

자연히 한국의 S급들이 떠올랐다. 성녀(聖女) 이유나, 청운(靑雲) 박라온, 야황(夜皇) 김누리.....

"아니 어떻게 죄다 여자판이죠?!"

이건 여러모로 문제가 있다. 어떻게 메인 히로인 셋만 먼저 떠오른단 말인가. 이 세계의 대한민국은 여존남비의 세계란 말인가. 원탁의 비중도 보면 그것도 아닌데.

'...제일 많이 키웠으니 먼저 떠오르는 것도 당연하기는 하지.'

애초에 저 셋이 주인공의 최초 팀원이다. 초짜 힐러, 상이병사, 문제아. 메인 히로인이라는 점을 빼고서라도, 셋 다 자력으로 S에 이를 수 있는 포텐셜을 지니고 있다.

굳이 떠오르는 남자라고 한다면-

"브라더는 아직 한국 안 왔고, 지금 S급은 이승형...."

잠시, 고민에 빠졌다.

"진짜 키워봐? 제대로?"

이쪽은 화권, 김철수의 직전제자나 다름없다. 이승형이 그 집정관을 통해 그 이름을 이어받은 이상, 나와는 무예적으로 애매모호한 사제지간이 되어버렸다.

"천가을 좋아하던 남자는 죽여야, 아니! 정신 차리죠! 과거에 얽메이지 말고 미래만 생각합시다! 타도 성주! 타도 이계신!"

남의 과거가 무어 중요하단 말인가. 천가을이 이승형과 커플이었든 키스를 했든 섹스를 했든, 일단 세계를 구하고 내가 살아남는게 중요-

쾅! 나는 이마를 그대로 책상에 찍었다. 이마가 아프진 않지만 마음이 아팠다.

지금 이 싱숭생숭한 감정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꼭 예전에 헤어진 여자친구에게서 새로운 썸남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은 것 같다. 왜 그런지는 몰라도, 야밤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그 남자의 SNS를 몰래 찾아보던 그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래. 굳이 말하자면 이승형에게 천가을을 NTR 당하는-

쾅! 쾅쾅!

내가 뭐라고 그걸 논한단 말인가. 천가을이 내게 약간의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내가 그걸 받아주기에는 너무 미안한게 많았다. 여러 의미에서.

나는 책상에 그대로 이마를 박고 숨을 골랐다. 빨라지던 마력 박동이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객관적으로. 전력으로서만 판단하자. 이승형을 아군으로 들일지 말지.'

"일단 천가을한테 물어봐야겠네요...."

천가을을 통해 이승형을 청화단에 묶어두는 방법도 떠올랐다. 하지만 천가을을 상대로 그렇게까지는 하고싶지 않았다.

'쿨해지자. 이승형은 좋은 인재야.'

인정할 건 인정해야했다. 내가 그를 S급으로 만든만큼, 당장의 전력이라는 조건만 두고 보면 충분히 가치가 있는 남자다. 내가 화속성 정령인만큼, 그를 본격적으로 키우면 최고 경지에 까지 오르게 할 수 있을 터.

'히어로가 될 지, 빌런이 될지, 아니면 괴인이 될지는 천가을에게 달렸지만.'

그렇게 머리속에서 이승형을 지웠다. 이승형을 빼고 나면 다른 S급은-

"......다 부질없는 생각이네요."

어차피 당장의 전력으로는 사용할 필요도 생각도 없다.

'뉴클리언은 먼저 깨우지 않으면 그냥 계속 잔다.'

"큐브를 코어로 쓰고 있으니 잡기는 해야겠지만, 괴수들을 생산해주는 걸 생각하면 굳이 당장 잡을 이유가 없죠."

건드리지만 않으면 게임 끝날 때 까지 땅속에서 잠만자는 녀석이다. 일부러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간을 가를 필요는 없다.

어느덧 시간은 새벽 4시 33분. 인간이 가장 피곤해 할 시간이지만, 정령은 육체의 피로감이 없다.

"민원 마저 처리하고 코어 노가다 뛰러 가야겠네요."

나는 종이를 집어 빨간 줄을 긋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약 10분 뒤인 새벽 4시 44분, 중국 산양에서 히어로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협회도, 중앙당도 아닌 대의로 뭉친 의용군을 자칭하며, 만주의 평화를 위협하는 평양의 괴수 타도를 천명했다.

나는 급히 간부들을 깨워 펜트하우스에 소집했다.

기습 작전에 참가한 히어로의 수만 약 4천.

그 선봉에는 녹색 전포를 휘날리는 원탁 소속이자 메인 히로인, 운장 샤오린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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