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화 〉1부 6장 (8)
<4시 18분, 서울 청화단 아지트.>
간부들이 피닉스의 펜트하우스에 모였다. 1층 라운지로 내려갈 틈도 없는 긴급 소집이었다.
"무슨 일이야, 갑자기?"
"일본 쪽에 괴수가 해안에 상륙했다나 봐. S급이."
지화가 스크린을 띄웠다. 아직 그의 천리안은 서울 안에만 닿기에, 이렇게 협회나 정부의 위성 사진으로 대신 확인해야 했다.
스크린에 관련 정보들이 나열되고, 간부들이 현상을 파악했다. 가장 먼저 류천성이 입을 열었다.
"S급 괴수 모비딕. 2011년 나하 게이트에서 나타나 오키나와를 침몰시키고 심해로 숨었다는 고래 괴수지. 수마룡 2형태라는 건 몰랐네만."
"아, 기억난다. 평양 이전의 그 동아시아 최강 괴수?"
류천성이 설명하고 제임스가 받았다. 천가을이 손톱을 물어뜯으며 물었다.
"S급이 갑자기 활동하는 것도 문제인데, 왜 모습을 숨겼다가 대마도에 나타난 거야?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이유요? 이유야 있죠."
시선이 자연스레 피닉스에게 모였다. 소파에 앉아 턱을 괴고 있던 피닉스가 혀를 찼다.
"쯧. 설마 이렇게 될 줄은."
"혼자만 알지 말고 얘기 좀 하지?"
"......."
피닉스가 잠시 숨을 골랐다. 길게 이어질 설명에 간부들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굳게 닫혀있던 피닉스의 입술이 떨어졌다.
"모비딕이 석하랑을 죽이러 오는 거예요."
"......?"
"그걸로 끝?"
"......설명이 더 필요해요?"
간부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피닉스가 기가 막힌 얼굴로 말을 이었다.
"왜요? 나, 나름대로 설명 간추려서 한건데?"
"너무 줄였다."
덕배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피닉스가 고개를 떨구었다. 얼굴이 토마토처럼 벌겋게 익었다.
"여, 열심히 줄이고 줄였는데...."
"단장님."
지화가 손을 들어 피닉스를 불렀다.
"제가 이해가 가지 않아서 그런데, 오키나와에서 있던 괴수가 왜 하필 설화공주를 죽이러 오는 겁니까?"
"조, 좋은 질문입니다!"
피닉스가 귀를 쫑긋 세우며 고개를 들었다. 간부들이 피닉스 안 보이게 지화에게 엄지를 들었다. 피닉스는 곧 고개를 들어 헛기침했다.
"이게 자세하게 설명하려면 테라의 존재, 그리고 정령과 마수(魔獸)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하는데...."
피닉스가 슬쩍 간부들의 눈치를 봤다. 내색하지는 않지만, 살짝 질색하는 눈치였다. 그나마 가을이 웃으며 피닉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일단 말해봐. 내가 알아서 적당히 정리해줄 테니."
"......이건 고맙다고 해야 하나요?"
피닉스가 물을 마시며 바싹 마른 입을 적셨다.
"차원문을 넘어오는 괴수들, 마수들의 1순위 제거 대상은 인간이에요. 하지만 그 전의 1순위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정령이죠. 지구 말고, 이 세계 테라에서."
"그건 지난번에 들었어. 보스 원래 세계, 테라는 지금 괴수로 가득 찼다며? 와, 괴수들이 그러면 보스 세계에서 넘어오는 거야?"
제임스의 말에 피닉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셈이죠? 차원문 열리고 괴수들이 튀어나오니까. 그중에서도 특히 코어는 없는데, 보라색 빛을 내는 위험종들이 '마수'입니다. 정령과 인류를 죽이려 드는 것들이죠."
피닉스가 슬쩍 눈치를 보며 헛기침을 했다.
"한 마디로 정령의 반응을 느끼고 모비딕이 잠에서 깨어난 거예요. 석하랑의 마력 반응을 느끼고."
"아. 관악 차원문의 화마룡도 혹시?"
유이신이 손뼉을 쳤다. 간부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피닉스를 향했다. 피닉스는 눈알을 굴리며 변명했다.
"아, 아니. 그건 저도 예상 못한 거라.... 그때는 마력을 잘 숨기지 못하기도 했고.... 워, 원래 차원문은 원래 갑자기 생기는 거잖아요! 저도 몰랐어요!"
"그럼 보스가 힘 조금만 쓰면 차원문 또 열릴 수 있다는 건가? 그 화마룡 나오는 차원문으로?"
제임스의 질문에 덕배가 사색이 되었다.
"야, 너 그 네 짝퉁. 간부급이라며?"
"무슨 소리인가?"
"펜릴인가 페링인가 하는 간부. 관악의 그 화마룡이 딱 수준이라며?"
"그걸 기억하고 있어요?"
피닉스가 기가 막혀 하지만, 다른 간부들이 더 어이가 없어 했다. 지화가 호들갑을 떨었다.
"그, 화권한테 일격에 죽은 화마룡이 단장님과 비슷한 급이었다는 말입니까? 말이 안 맞는데요?"
"2형태로 넘어가자마자 화권에게 일격에 죽었지. 화속성에는 뭔가 특별한 게 있는 건가? 흐음. 이해가 잘 안 되는군."
류천성이 피닉스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피닉스가 가을을 가리켰다.
"제가 가을 씨 구했던 게 차원문 막으러 가면서였죠. 일단 그때, 저로서도 차원문은 있으면 곤란한 거 였으니. ...제 쉐도우가 나올 줄은 몰랐지만."
"뭐야. 그럼 너 이승형한테 주먹 한 방에 죽어? 그것도 아니잖아."
가을이 따지자 피닉스가 두 손을 세웠고, 한쪽을 반대쪽으로 쭉 밀며 답했다.
"그 화마룡으로 알려진 쉐도우 피닉스, 제가 체력 한 90%는 깎아놨어요. 날갯죽지를 꺾어놔서 날지도 못하게 만들었죠."
"......□□."
아픈 추억이 떠오른 덕배가 욕설과 함께 한숨을 쉬었지만, 그 누구도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피닉스는 머쓱한 얼굴로 가을을 가리켰다.
"그날, 차원문 열려서 바로 닫으러 가다가 가을 씨 구하고 곧장 차원문 발생지로 달려갔죠. 마침 쉐도우 피닉스가 저 보고 달려들길래, 바로 빠따로 날개를 꺾어버렸어요."
"...하긴, 안양의 전투 데이터 보니까 재생된 날개가 비대칭이긴 했지."
"거기에 날개를 재생시키지 못하도록 창염을 붙였죠. 만약에 히어로들이 아니었어도, 한 10분만 놔뒀어도 알아서 죽었을 거예요. 도트템으로."
"그러면."
류천성이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그럼 화권 이승형은 뭐지? 관악에서 각성했던 것은...설마?"
"네. 제가 각성시켜줬어요. 적당히 아무한테나 공을 떠넘기고 여의도로 도망치려 했거든요."
"단장. 지금 당장 내 속성 정령 잡아오시게. 내 성심성의를 다하지."
"또 이야기가 산으로 갑니다. 잠시만요."
지화가 재빨리 다시 손을 들었다.
"단장님. 제가 이해한 게 맞습니까? 관악의 화마룡-쉐도우 피닉스가 단장님을 습격했듯이, 오키나와의 수마룡-모비딕도 물의 정령인 석하랑 님을 공격한 건가요?"
"......퍼펙트."
피닉스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화가 왠지 쑥스러워했다. 가을이 촉수로 지화의 옆구리를 찔렀다.
"너 적절히 잘 끼어든다?"
"흐흐. 대리 시절에 산으로 가는 회의 도중에 끼어드는 건 상상도 못 했으니까. 꼭 중요한 얘기 하다 보면 딴소리 하게 만드는 사람이 하나는 있거든."
지화가 덕배를 노려봤다. 덕배가 코웃음을 쳤다.
"아니, 나도 억울하다고. 쟤가 화마룡 뭐로 때렸는지 아냐? 나를 잡고 휘둘렀어, 나를!"
"......? 무슨 개소리야."
"......<괴인의 무기화>라는 거예요. 예를 들면-"
피닉스가 번쩍 몸을 움직여 유이신의 뒤를 잡고는, 등짝을 두드렸다.
"조금 간지러울 거예요."
"햐앗?!"
유이신이 비명을 냄과 동시에 코어에서 빛이 났다. 유이신의 몸이 빠르게 녹색 빛으로 흩어지고, 코어를 중심으로 마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 뭐야?!"
"이신 씨?!"
곧, 옥색의 몸체에 푸른 불꽃무늬가 들어간 리커브 보우가 피닉스의 손에 들렸다. 중앙 라이저의 손잡이 부근에는 유이신의 녹색 코어가 자리 잡고 있었다.
피닉스는 활을 스틱처럼 휘두르다 탁자에 놓았다.
"짠! 이게 바로 괴인의 무기화! 유이신은 괴인에서 코어웨폰이 되었습니다!"
"......다시는 내게 괴인이 되라는 말하지 마시게."
류천성이 식은땀을 흘렸다. 제임스가 신기한 얼굴로 손을 뻗어 활대를 잡았다.
"우와, 이건 또 재밌네."
하필 엄지가 유이신의 코어를 스쳤다.
[햐으아아앙!]
제임스가 엄지로 짚었던 유이신의 코어가 빛이 나며, 유이신의 신음이 터졌다. 순간적으로 방안에 정적이 내려앉고, 제임스는 굳은 얼굴로 활을 내려놓았다.
"원상복구."
"네."
피닉스가 재빨리 활을 잡아 마력을 불어넣었다. 활이 다시 빛으로 사라지고, 유이신이 다시 육체를 되찾았다.
"하아,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는 유이신을 보며, 덕배가 어이없다는 듯 유이신을 가리켰다.
"야, 얘는 저렇게 멋지게 바꿔놓고 나는 왜 내 몸째로 배트처럼 휘둘렀냐?"
"아, 그거요?"
피닉스가 뭘 당연하다는 걸 묻냐는 듯 대답했다.
"원래 등급 높은 무기가 간지나잖아요. 덕배 씨 그때 D급이었나, C급이었나? 쪼렙 무기가 원래 텍스쳐 거지 같은 거 몰라요?"
"야 이 □□ □□□ □□□야!!"
"단장님...?"
"야. 또 샛길로 새잖아."
지화가 낮게 웃으며 피닉스를 부르고, 가을이 거들었다. 피닉스는 머쓱한 듯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그리 급한 일은 아니잖아요? 고작해야 S급 괴수일 뿐이고. 뭣보다 부산에는 석하랑이 있으니까. 우리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어요."
"설화공주 혼자서 대처할 수 있는가?"
류천성의 질문에 피닉스가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이미 친화율은 95 뚫었어요. 나머지는 이거만 각성하면 바로 96, SS에요."
피닉스가 검지로 관자놀이를 두드렸다. 류천성이 잠시 부러운 얼굴로 탄식했다가, 곧 헛기침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 그러면 부산은? 아무리 설화공주라도 모비딕을 상대하다 보면 신경을 쓰지 못하는 곳이 생길 텐데?"
"히어로들 지금 부산으로 부리나케 달려가고 있잖아요? 괜찮을 거예요."
피닉스가 웃으며 물컵을 들었다. 가을이 새초롬한 얼굴로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은유하도 부산에 내려갔는데?"
피닉스의 표정이 굳었다.
"저 잠시 산책하러 좀 나갔다 올게요."
곧 날개가 펼쳐지고, 피닉스가 막 창문을 뛰쳐나가려 했다. 가을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광검이랑 같이 갔어."
"아, 그럼 뭐."
피닉스의 날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제임스가 십 년 감수한 얼굴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럼 부산 일은 히어로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우리는 서울이나 신경쓰도록 하죠. 궁금한 거 더 있나요? 없으면 해산합니다."
"정말 그래도 돼? 안 도와줘도 괜찮아?"
가을이 걱정어린 눈빛으로 묻자, 피닉스는 제 흰나비 배지를 만지작거리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네. 혼자서 될 듯 합니다."
"......하아."
지화가 울상인 얼굴로 한숨을 내쉬자, 유이신이 지화의 무릎을 손으로 토닥이며 위로했다.
"힘내십시오. 저는 지화 님의 고충을 잘 알겠습니다."
"매번 이런 식이긴 하지.... 긴장감 없고."
"긴장감 있을 일이 뭐 있겠어요?"
표정이 굳은 지화의 어깨를 두드린 피닉스가 활짝 웃었다.
"제가 신경 쓸 만큼 큰일인 것도 아닌데, 푸흐흐!"
* * *
<4시 24분, 일본 도쿄.>
"당장 히어로들 파견해야 합니다! 그게 안 되면 해자위라도!"
외무상이 성을 내며 제 의견을 강하게 주장했다. 새벽에 긴급하게 소집된 NSC-국가안전보장회의에도 외무상의 목소리는 거침이 없었다.
[오카모토 외무상, 진정하시지요.]
스크린 너머 사가미 관방장관이 오카모토 외무상을 진정시켰다. 사안이 사안이고 시간이 시간인 만큼, 그들은 총리 관저에 모일 틈도 없이 즉각 각자의 위치에서 원격으로 회의에 들어갔다.
[다행히 우리의 자랑스러운 원탁, 질풍객이 미국에서 오고 있지 않습니까. 가웨인 경과 함께 말이죠.]
"몇 시간은 걸릴 겁니다. 그 사이에 쓰시마에 피해라도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히어로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능히 피해를 막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오라클>의 트위터에 따르면....]
관방장관이 작게 스크린을 띄웠다.
[모비딕은 대마도를 스치듯 움직이다가 부산으로 방향을 꺾었다고 합니다. 한국으로 가겠죠.]
"그, 그렇습니까? 하하하."
외무상은 티가 나지 않게 웃었다. 그는 스크린 아래가 드러나지 않는 것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했다. 관방장관이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물었다.
[혹시 지금 외무상님...?]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쓰시마의 분들이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하고, 뭣보다 여객선도 있지 않습니까?"
[한국으로 가지 말라 그리 선전을 했음에도 한국으로 떠난 사람들입니다. 설령 유족들이 난리를 피워도 적당히 평소대로 얼버무리면 될 일입니다.]
"그, 그래도 여객선은 제때 도착하기는 해야겠죠. 한국에서 시끄럽게 외교 문제로 떠들지 않도록."
관방장관이 피식 웃었다.
[꼭 여객선이 도착해야만 한다는 말씀 같습니다만.... 뭐 좋습니다. 외무상 입장이야 그렇죠. 하지만 안심하십시오. 광검이 죽은 마당에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이빨 빠진 호랑이지요.]
"하, 하하. 그렇죠?"
외무상은 침대 위에서 하반신을 움직였다. 훅 꺼졌던 침대가 올라오며, 침대 위에 곤히 누워있던 흑발의 소녀가 흔들렸다.
"그.... 저도 곧 움직이겠습니다. 총리님 관저에서 뵙지요."
[알겠습니다. 언제든 연결이 되도록 스마트워치는 켜두십시오. 그럼 30분 뒤 뵙겠습니다.]
삑. 스크린이 꺼졌다. 외무상이 한숨을 내쉬며 주섬주섬 바지를 끌어 올렸다.
"모처럼 즐기고 있었거늘...."
외무상은 아쉬운 얼굴로 소녀의 심장 부근을 눌렀다. 곧 소녀의 눈꺼풀이 들어 올려지며 나타난 적색의 기계안이 외무상의 얼굴을 스캔하고, 기계음으로 말했다.
[오카모토 주인님의 명령에 따라 휴면 상태에 들어갑니다. 오늘도 유성의 X로이드를 즐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소녀의 모습을 한 기계 인형의 전원이 꺼졌다. 옷을 챙겨 입은 외무상은 아쉬운 듯 혀를 차며 휴면상태에 들어간 X로이드를 바라봤다.
"유성이 또 저런 건 참 잘 만든단 말이야."
외무상이 실실 웃었다. 외무상은 슬쩍 돌아와 소녀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흑발 적안의 소녀는 꼭 누군가를 닮아있었다.
"고작 화물 좀 통과시켜주고 이런 걸 또 받고 말야."
외무상은 다음을 기약하며 재빨리 방을 떠났다.
외무상이 떠나고 남은 싸늘한 방. 침대 위에 내팽개쳐진 기계 인형이 그 누구도 모르게 제 데이터를 어딘가로 전송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