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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101화 (101/1,497)

〈 101화 〉1부 6장 (7)

정령이 느껴진다.

우우웅-

괴수가 보낸 초음파가 바다 전역으로 퍼졌다. 괴수를 따라오던 조무래기 괴수들이 눈에서 보랏빛 장기를 흘리며 폭주하기 시작했다.

■■■■!!

괴수가 유선형의 몸을 흔들며 파도를 가르며 전진했다. 수많은 해저 괴수들이 그 뒤를 따라 움직였다.

목적지는 북쪽. 정령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

새벽 4시 13분.

모비딕이 대마도 인근 해상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 * *

<6분전. 4시 7분, 밀키웨이 크루즈 조타실.>

"당장 배의 속도를 올려요! 아니면 우리 다 죽는다고요!"

소녀는 조타실에 쳐들어와 소리를 질러댔다. 선장 이하 선원들은 난감한 얼굴로 소녀의 제안을 거절했다.

"지금은 수면 시간이다. 괜히 엔진 더 밟으면 손님들한테 클레임 들어와."

"지금 목숨이 걸렸는데 클레임이 곤란해요?!"

"저희로서는 학생이 여기서 이러는 게 곤란합니다."

선장이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담배와 커피믹스 냄새가 섞인 역한 숨에 소녀는 두 발자국 크게 물러섰다.

"지금 시간이 벌써 4시를 넘겼습니다. 앞으로 4시간 정도면 부산에 도착하고요."

선장이 지도를 가리켰다. 배는 어느덧 대마도 인근을 지나 부산항을 향해 바다를 가로지르며 움직이고 있다.

"선상 파티가 끝나고 승객 여러분이 잠자리에 들어가신지 벌써 대여섯시간입니다. 지금쯤 한창 깊게 자고 계실, 이렇게 난동을 부리시면 저희도 어쩔 수 없습니다."

"난동? 나아아안도오오옹?? 지금 사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 난동이라고 했어요?"

흑발 소녀의 핏빛 같은 붉은 눈이 반짝였다. 선장은 마력이 움직이는 이능력의 발현에 흠칫거렸지만, 곧 정신을 가다듬으며 완고하게 답했다.

"승객이 조타실에 와서 항로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부터 난동입니다. 아직 학생이고 어리니까 이번 한 번만 봐주겠습니다. 지금 빨리 가지 않으면...."

선장의 가슴근육이 꿈틀거렸다. 흰 제복 가슴에 걸린 명찰이 순간적으로 튕겨 나갔다.

"강제 구인 후에 해경에 넘길 겁니다."

"아, 진짜! 아저씨, 저 몰라요?!"

소녀는 제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제 요구사항을 들어주지 않는 것 이상으로 소녀는 은근히 분해하고 있었다. 선장은 웬 미친개가 짖느냐는 듯 손을 휘저었다.

"학생, 좋은 말로 할 때...."

"무슨 일입니까?"

조타실의 소란에 검은 정장의 남성이 나타났다. 선장은 잠시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아무 일 없다는 듯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호기심 많은 학생이 배를 구경하다가 조타실까지 와서 조용히 타이르는 중입니다."

"객실까지 소란이 다 들리던데 무슨.... 질풍객?"

남자는 소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든 생각을 그대로 내뱉었다. 소녀는 부끄러워하면서도, 이 보라는 듯 발을 크게 구르며 소리쳤다.

"그래요! 질풍객 히메지 하야테(姫路 疾風)의 동생, 히메지 히카리(姫路 光)! 이제 좀 말귀가 통하는 사람이 왔네!"

"......살인귀 동생이라고?!"

선장이 기겁하며 거리를 벌렸다. 조타실에 있던 조타수 한 명은 아예 들고 있던 빗자루를 검처럼 쥐며 경계했다.

소녀, 히카리가 어깨를 떨구며 좌절했다가 곧 고개를 들었다. 눈썹까지 내려오는 앞머리 사이로 비친 적안(赤眼)에 사람들이 공포에 휩싸였다. 히카리가 악에 받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니까 당장 배 돌려요! 오빠한테 죽기 싫으면!"

이딴 식으로 협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고작 올해로 중학교 1학년에 불과한 히카리의 머리에는 이렇게라도 배를 멈추게 할 생각밖에 없었다.

물론 그 정체가 드러남으로써,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뭐야?! 어떻게 탄 거야?! 질풍객 부모 없잖아! 보호자 없이 어떻게 탔어?!"

"......해킹했거든요?! 왜요! 중1은 혼자서 타면 안 돼요?! 저 클 만큼 컸거든요!"

히카리가 허리에 주먹을 올리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정장의 남자는 그 기행에 멋쩍은 얼굴로 시계를 가리켰다.

"지금 새벽 4시야, 히카리 학생. 그쪽이 원탁 히어로의 가족이라고 해도 여객선을 강제로 멈추게 할 수는 없다고."

"그, 지금 괴수가 올라온다니까요! S급 괴수, 모비딕이?!"

히카리가 울 것 같은 얼굴로 소리쳤다. 그러나 조타실의 그 누구도 그 말을 쉽게 믿기가 어려웠다.

"그러면 연락이 왔겠지! 괴수 레이더에 걸렸거나!"

"워, 원탁 관계자잖아! 뭔가 다른 알 방도가 있었겠지!"

"야! 이 배에 타고 있는 일본인만 200명이야! 승객만 500명이라고! 방위성이나 협회에서 아직 아무런 연락 없었어!"

"......설마."

정장 남자가 숨을 헛들이켰다. 모두의 이목이 남자에게 쏠리자, 남자는 저도 모르게 제 생각을 내뱉었다.

"<오라클>에게 연락받은 거야? 그걸 질풍객이 학생한테...?"

"그래요! 당신들이 살인귀라고 부르는 그 남자가 오라클한테 연락받고 지금 나한테 얘기해준 거라고요! 곧 방위성에서도 발표가 있을 거고!"

히카리의 말에 조타실은 패닉에 빠졌다. 일본 내에서도 내놓은 자식 취급받는 질풍객이지만, 같은 원탁의 히어로인 예언가 <오라클>의 예언은 그 무게감이 달랐다.

선장이 재빨리 모자를 고쳐 쓰며 소리쳤다.

"빠, 빨리 배 돌려! 아무 항구에나 정박해!"

"아이, 써!"

선원들이 당황해 제대로 답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다행히 위치적으로 대마도를 막 지나온 시점이라, 선미를 돌려 대마도 근처로 돌아가기만 하면 됐다.

항해 지도를 살피던 항해사가 소리쳤다.

"히타카쓰! 제일 가까운 히타카쓰항 국제터미널이 있습니다! 약 30km!"

대마도의 동북부, 바다가 육지로 깊게 들어간 만의 국제항. 그나마 이 위치에서 갈 수 있는 항구는 그곳이 제일 가까웠다.

현재 시각, 4시 13분.

대마도 남남서 방향으로 약 60km 지점의 해상에 수많은 붉은 점들이 레이더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괴, 괴수?!"

"한 마리가 아니야!"

히카리가 바로 근처의 PC를 점거해 타자를 두드렸다. 이름처럼 손가락이 빛의 속도로 타자를 두드려, 조타실 상황판 스크린에 해당 지점의 위성 사진을 띄웠다.

"수마룡 2형태라고요! 그럼 혼자 왔을 리가 없잖아!"

오키나와 열렸던 차원문에서 나타나 심해로 숨어들었던 마룡이다. 근 10여 년의 오랜 수면 끝에 모습을 드러낸 바다의 폭군이, 홀몸으로 나타날 리가 없었다.

"숨어있던 게 아니야...! 바다를 돌면서 괴수들을 긁어모아 왔어!"

위성 사진이 수마룡이 내뿜는 장기에 흐려지기 직전, 해상에 나타난 괴수들의 수는 족히 기백을 넘었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역시 괴수 무리의 최전방에서 대마도를 향해 헤엄쳐오는 거대 고래.

그 길이만 맨눈으로 봐도 얼핏 50m에 이르러 보였다.

히카리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배 그대로 달려요!"

"뭐?!"

"부산까지 전속력으로 달리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히카리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며 외쳤다.

"S급 괴수가 쓰시마 섬 가만히 두겠어요?!"

모비딕의 기수는 가장 가까운 인간이 있을 곳, 대마도를 향해 있었다.

* * *

<새벽 4시 17분. 대마도 최남단, 쓰쓰자키 전망대.>

인적조차 없는 고요한 전망대, 파도가 절벽에 부딪혀 넘실거리는 뭍에 왠 사람 그림자가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키키킥.

그들은 사람처럼 두 발로 서있으며 두 팔을 축 늘어뜨려 있지만, 사람이 아니다. 새벽녘의 달빛에 입에는 톱니처럼 날카로게 뒤틀린 이빨이 비쳤다.

캬각!

20여 년 전, 알래스카에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 이후 전 세계 해안가에 종종 출몰하는 어류형(魚類形) 괴수-심해아귀.

단순히 팔다리만 난 물고기에 불과했던 그 심해의 괴수들이, 마치 걸음마를 배운 아기처럼 뭍에 올라와 육지를 향해 기어가듯 발걸음을 옮겼다.

우우웅.

눈은 아예 없지만, 머리에 달린 촉수 끝의 발광체에서 마력을 뿜어낸다. 보라색으로 빛나는 발광체에서 나온 장기가 주변으로 흩어지며, 심해아귀들은 그 파장을 읽으며 서서히 움직였다.

아주 가까이에 있을, 민가를 향해.

* * *

<같은 시각, 베링해 상공.>

"야! 더 빨리 못 날아?!"

질풍객, 히메지노 하야테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저보다 강한 괴수 앞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던 남자가 보이는 조급함에, 기장석에 앉아있던 오라클이 덩달아 조급해져 소리쳤다.

"지금 600노트로 달리고 있어! 한계속도 넘겼다고!"

"젠장! 느려 터져서!"

"야! 지금 우리 아빠 전용기 무시하냐?!"

"사실상 핑키 파이 네 거잖아!"

핑크빛 유선형 동체가 구름을 가르며 하늘을 달린다. 기장석에 앉아있던 오라클이 연분홍 머리칼을 흩날리며 질풍객에게 따지고 들었다.

"야 이, 그래서 내가 너보고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했잖아!"

"그럼 좀 진작에 얘기해주던가! 벌써 모비딕 떴다며! 예언 하나도 안 맞아떨어지네!"

"진정하세요, 둘 다."

가웨인이 검을 뽑아 들어 사이를 갈랐다. 여왕으로부터 하사받은 검, 갈라틴에서 흘러나온 빛에 두 사람은 간신히 진정했다.

원탁 최강의 기사인 동시에 전 세계 최강의 히어로. 아직도 협회에서 기준만 잡아두고 그 누구도 오르지 못한 SS급에 오를 1순위 예정자.

자신의 이름마저 전설 속 기사의 이름으로 개명한 가웨인이 숨을 고르며 지도를 확인했다.

"제때 도착할 것 같습니까?"

"몰라. 정상항로로 날아가는 것도 아니니. 적게 잡아도 4~5시간은 걸릴 거야."

"젠장, 운장은?! 제일 가깝잖아!"

질풍객이 신경질적으로 원탁 전용 스마트워치를 두드렸다. 그는 이미 캘리포니아에서 날아오는 그 순간부터 중국에 있는 원탁, <운장> 샤오린을 호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운장은 묵묵부답이었다. 질풍객이 벽을 주먹으로 치며 짜증을 냈다.

"왜 연락을 안 받는 거야! 이런 시급한 때에!"

"......연락을 못 받는 걸 겁니다."

가웨인이 침음성을 흘렸다. 그는 원탁 내에서 최고 경력자이자 각국의 정치 판도를 훤히 꿰고 있어야 하는 위치인 만큼, 운장이 가진 애매함에 대해서도 익히 알고 있었다.

"뭐?!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

"야, 너 진짜 진정해라. 동생 때문에 지금 안달 난 건 알겠는데...."

"내 하나뿐인 가족이다."

질풍객이 옥색의 눈빛을 번뜩였다. 거슬리는 것이라면 오라클이라도 베어버리겠다는 듯, 살기가 넘실거렸다.

"진정하라고 했습니다, 질풍객."

하지만 곧 마력을 끌어올린 가웨인의 기세에 질풍객은 마력을 누그러뜨렸다.

"...멍청한게 왜 갑자기 한국으로 간다고 해서!"

"뭔가 발견한 게 있나 보지. 예언가인 나랑은 달리 뭔가 과학적으로 발견한 무언가가."

오라클이 씁쓸하게 웃었다.

"네 동생 초등학생 때부터 우리가 도움받았던 게 한 두 번이냐. 다저스 때도 마룡들 약점 분석 걔가 다 해줬잖아. 안 그랬으면 미국 지금 절반은 사라졌어. 그리고 운장도 너랑 마찬가지야."

"뭐?"

가웨인이 이를 갈며 설명했다.

"운장도 가족이 엮여있습니다."

당신과는 조금 다르지만. 가웨인은 두 눈을 감아버렸다.

* * *

<그 시각, 중국 베이징.>

오금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칼이 바람에 흔들린다. 평소에는 훈련용 무복(武服)을 입고 전투에만 연연하던 여인은 감색의 치파오를 입고 정원을 산책했다.

흡사 중세 배경의 드라마 세트장처럼, 정원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넓은 호수에는 연잎이 고요히 떠다녔다.

"......."

여인의 발걸음이 정자를 향했다. 정원에 박힌 가로수에 늘어진 나뭇가지 사이, 둥지에 앉아있던 작은 참새 한 마리가 놀라 하늘로 날았다.

"아...."

여인은 탄식하며 손을 뻗었다. 참새는 하늘 높이 올랐으나,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듯 정원을 빙빙 돌았다. 참새가 날아간 둥지에는 아주 작은 새끼 참새들이 눈을 뜨지 못한 채, 아주 노곤히 자고 있었다.

"후후."

여인은 슬며시 마력을 방출했다. 전전긍긍하던 어미 새는 여인의 마력을 느껴 아주 편안한 날갯짓으로 정원으로 내려왔다.

♩♬

"해치지 않아."

♬♪

어미 새는 여인의 손바닥에 두 발을 디디고, 곧 머리를 여인의 손가락에 비볐다. 여인은 흐뭇한 미소로 둥지를 향해 손바닥을 올렸다.

탕-!

총소리가 울렸다. 어미 새는 마탄에 몸이 꿰뚫려 그대로 흙바닥에 떨어지고, 놀란 아기 새들이 삐약거렸다.

"해로운 새다."

남자는 무덤덤한 얼굴로 수신호를 보냈다. 곧 무복을 입은 남자들이 나타나 허리를 숙였다.

"치워."

"예."

남자의 명령을 받은 무복 사내들이 기계처럼 움직였다. 마탄을 맞은 어미 새의 시체를 챙기고, 둥지는 통째로 들고 정원에서 사라졌다.

아마, 저 새들은 곧 괴수의 먹이가 되리라. 여인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입술을 뗐다.

"......아직 눈도 못 뜬 아이들이었습니다."

"떡잎부터 글렀다면 뿌리부터 뽑아야지. 마음을 단단히 잡아라."

남자가 여인의 옆에 섰다. 남자는 그리 나이가 많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눈가의 자글자글한 주름이 불혹은 훨씬 넘겨 보였다.

"너는 중화의 미래다. 무(武)에만 전념해도 모자랄 시간에, 여기서 무엇을 하는 게야."

"...저 멀리서, 싸움이 느껴집니다. 사람들의 죽음이 바닷바람을 타고 이곳까지 흘러오고 있습니다."

남자는 혀를 찼다. 이능력자라면 누구나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을 스마트워치가, 여인의 손목에는 없었다.

남자가 일부러 주지 않았다. 악독한 이들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행여나 쓸데없는 사상을 주입 당하지 않도록.

"바람이 저를 부르고 있습니다. 아버님."

여인이 고개를 들었다. 남자와 여인의 처진 눈꼬리는 분명히 닮아있었다. 남자가 눈을 부라렸다.

"그래서, 지금, 내 말을 거역하겠다는 것이냐?"

"......."

여인이 말을 삼켰다. 그게 여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남자가 여인을 다그쳤다.

"너를 학대하던 생모로부터 너를 구해준 게 나다. 나도 존재를 몰랐던 아이를, 이렇게 넓은 집과 3대가 먹고 살 자산을 주었어. 정적에게서 사생아가 있다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너를 거두었다. 잊었느냐?"

"...아닙니다. 그 구명(救命)의 은혜를 제가 어찌 잊겠습니까. 다만-"

"되었다. 더는 듣고 싶지 않다. 샤오린(小林), 네가 할 일은 당장 준비를 마쳐 선양(沈阳)으로 가는 것이다. 이각(二刻)을 주마. 적토는 이미 준비해뒀다. 채비하라."

남자는 몸을 돌려 그대로 사라졌다. 달빛에 비친 가슴팍의 명찰에는, '괴수대책관리국'이라는 소속과 '모택평'이라는 이름이 박혀있었다.

"......."

여인이 무릎을 굽히며, 오른손으로 어미 새가 쓰러졌던 땅을 짚었다.

"당신은 죽어서 편히 떠났겠지요, 광검."

여인의 마력이 땅속으로 흩어지자, 곧장 어미 새의 피가 흙 속으로 사라졌다. 여인은 몸을 일으켜 고개를 올렸다.

"어떻게, 저승은 평안하십니까?"

대답이 있을 리가 없다. 여인은 옛 기억을 반추하며 쓰게 웃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라고 하셨지요. 그대는."

여인이 손을 올렸다. 흙먼지가 바람을 타고 밤하늘로 흩날렸다.

"틀렸습니다. 당신이."

여인은 망연히 그 흙먼지를 바라보다가, 표정을 굳히고 복도를 걸었다. 복도의 끝에는 녹색의 전포와 붉은 가면이 걸려있었다.

"무덤에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머리카락을 앞으로 밀어 넘기며, 여인은 얼굴에 가면을 썼다.

잠시 뒤, 정원에서 언월도를 든 녹색 전포의 군신이 붉은 말을 타고 밤하늘을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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