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화 〉1부 6장 (6)
천가을은 눈을 의심했다.
뭐지? 이건? 누군가 일부러 내 마음을 시험하는 몰래카메라인가? 안 그래도 일부러 매몰차게 이승형을 쫓아내고 심신의 위로가 필요하던 찰나에, 가장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당사자가 제 침대 위에 누워있다.
'왜 왔...아. 방 청소 해줬구나.'
아무렇게나 던져놓았던 옷들은 가지런히 정리되어 옷걸이에 걸려있다. 유이신으로 연습하면서 생긴 점액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촉수 특유의 악취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유성에서 보급된 샤워 가운은 뽀송뽀송하게 말라 햇빛 향기가 났다.
'단 냄새도 나는데.'
가을은 소리 없이 냄새의 근원을 쫓았다. 테이블 위에는 'Padre Juan'이라는 문구와 함께 밀짚모자를 쓴 농부 남자가 캐리커처로 그려져 웃고 있었다. 가을은 슬쩍 비닐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케이크네?'
작은 조각 케이크가 형태를 잃지 않고 상자 안에 들어있었다. 하나는 조각난 딸기가 겹겹이 쌓인 쇼트케이크, 그리고 다른 하나는 티라미수.
'티라미수는 그렇다 치고 얘 진짜 딸기 좋아하네.'
가끔 보면 심하다 싶을 정도였다. 인천에 마실 나갈 때마다 손에 쥔 음료 상자에 보면 항상 딸기 음료가 하나씩 들어있었다. 피닉스의 기호를 눈치채기는 너무나도 쉬웠다. 음료를 사 오면 항상 피닉스는 자신이 마지막에 골랐지만, 딸기 음료가 선점당하면 조금 기분이 가라앉고는 했다.
'딸기 못 먹어서 죽은 귀신이라도 씌웠나?'
만약 조각 케이크를 둘이서 나눠 먹기 위해 사 온 것이라 가정한다면, 티라미수는 가을의 것이고 쇼트케이크는 피닉스의 것이리라.
'나 기다리다 그냥 자버리는 것 같은데.'
시간이 벌써 자정에 가까워졌다. 시청사의 뱀을 공략해 광검을 부활시키고 난 이후에도 피닉스는 자는 시간을 최소화하여 일했고, 간혹 잠깐 쉴 시간이 있을 때마다 눈을 붙였다.
'깨우면 또 일하러 나가겠지?'
청소는 끝내놓고 가을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잠깐이라도 쪽잠을 자려 했을지 모른다. 가을은 조심스럽게 촉수 끝을 들어 피닉스의 볼을 찔렀다.
"......."
미동이 없다. 가을은 이번에는 제법 세게 촉수로 볼을 눌렀다.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
가을이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피닉스와 몇 번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면서 느낀 거지만, 피닉스는 한 번 잠에 빠지면 제법 깊게 자는 편이었다.
'기회다.'
가을은 속으로 생각한 제 말에 스스로 놀랐다. 무엇이 기회란 말인가. 도대체 무슨 기회가 있길래 이리도 마력이 쿵쾅거린단 말인가.
오랜만에 잠자고 있던 악마가 깨어나 가을의 귀에 속삭였다.
'농후한 민달팽이....'
가을이 퍼뜩 고개를 가로저었다. 피닉스와 자신의 관계가 어떤 관계란 말인가. 저속하게 육체적으로 얽히고설킨 질척한 사이가 아니라, 서로서로 정신적으로 보듬어주고 지탱해주는 동반자적 관계다.
조금, 아주 조금 사심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 그런 문란한 생각은 해본 적도 없다. 악마가 비웃었다.
'유이신 가지고 연습한 거는 무엇?'
'그건 어디까지나 촉수를 잘 쓰기 위한 훈련이에요!'
천사가 나타나 악마의 명치를 때렸다. 그러나 악마는 이번에는 굴하지 않겠다며 반론했다.
'유이신 발정 내놓고?'
'그건 그 여자가 물이 많은 거고! 가을이가 유이신에게 설레거나 그런 적 없잖아요!'
천사가 나타나 악마에게 문답을 펼쳤다. 천사와 악마. 플라토닉과 에로스. 이성과 본능이 수도 없이 엎치락뒤치락 싸우며 가을의 정신을 뒤집어놓았다.
"내가 진짜 너 때문에 미친다...."
가을이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저 좋다는 남자를 매몰차게 차버리고 와서 안 그래도 마음이 싱숭생숭했는데, 그 마음을 흔드는 장본인이 이렇게 자신의 침대에 누워있었다. 악마가 가을을 부추겼다.
'지금 옆으로 누워있는 S자 각도 안 보이냐? 지금 엉덩이 뒤로 빼고 있는 거 안 보여?'
'착한 생각! 착한 생각! 착한 생각!'
그냥 둘 다 좀 꺼져줬으면 좋겠다. 누구에게 조언을 구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가을의 마음은 타들어 갔다.
순간 웬 두꺼비 한 마리가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갔다.
선이 곧게 들어간 정장 차림의 신사 두꺼비가 가을을 꾸짖었다.
'조덕배가 한 말 잊었어요? 술 마시고 들어왔으면 사고 쳤을 거라는 거.'
천사와 악마가 침묵했다. 본능과 이성을 억누르는 양심이라는 신사의 말에 속이 쓰렸다.조덕배는 가을이 술을 마시고 들어가면 어떤 미래가 그려질지 훤히 꿰고 있었다.
'그럼 이대로 그냥 기다려? 지난번 처럼 옆에서 앉아있기만 하라고?'
광검과의 전투가 끝나고 얼마나 허망하게 피닉스를 기다렸던가. 장장 9시간가량을 밤새워 기다렸는데, 막상 돌아온 피닉스는 가을보다 훨씬 어린 여자와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 개망나니.'
가을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은유하라는 여자가 은근슬쩍 자꾸 피닉스에게 꼬리를 친다는 걸.
'미친 거 아니야? 어딜 여자끼리.... 내가 할 말은 아니네.'
잠시 머쓱해진 가을은 가면을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니야! 괴인형으로 바뀌면 다르잖아! 말없이 세상 진지하고!'
가을은 자신이 이능력자로 각성한 날을 떠올렸다. 몇 번이나 가을을 걱정하며, 무심하게 베일을 여미던 그 괴인의 모습을.
'인간형의 말투가 굳이 일부러 하는 거라면....'
그 무심하면서도 은근슬쩍 챙겨주는 듯한 말투가 피닉스 본래의 성격이라고 가을은 확신했다. 그리고 그런 성향은 굳이 따지자면 여성이라기보다는 남성에 가까웠다. 하지만 활동 대부분은 소녀 같은 인간형으로 하지 않는가?
촉수가 가을의 뺨을 때렸다. 가을은 정신을 차렸다.
'그래. 난 여자한테 반한 게 아니야. 피닉스에게 반한 거야.'
가을은 굳이 성별의 문제를 따지지 않기로 했다. 애초에 피닉스는 자신을 정령, 인간을 초월한 존재로 표현했다. 성별 따위는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약에 그걸 신경쓴다면....'
가을이 가면을 다시 머리에 걸었다. 피닉스가 인간과 괴인을 오가듯, 가을도 타인의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다. 피닉스가 원하는 이상형의 남자를 찾아, 자신이 그 모습으로 변신하면 될 일이다. 가을은 그렇게 속으로 되뇌었다.
'그래. 술 먹고 사고 칠 바에야 천천히 마음을 열게 하자.'
천사와 악마가 실망해 어깨가 축 늘어졌다. 양심은 손뼉을 치며 조용히 사라지자, 악마가 기다렸다는 듯 속삭였다.
'당신 내년이면 아홉수. 내후년이면 계란 한 판.'
가을의 심지가 흔들렸다. 천사가 반대편에서 속삭였다.
'그에 비해 은유하는 지금 파릇파릇한 20대 초반. 올해 21이었던가?'
가을의 심지가 뿌리째 뽑혀나갔다. 외모나 몸매는 절대 밀리지 않는다고 자부했지만, 어쩔 수 없는 세월의 흐름이라는 건 이길 수 없었다.
'그, 그렇지만 암만 그래도 자는 사람 상대로 그런 파렴치한 짓은 할 수 없어!'
'은유하로 끝날 것 같아?'
'혹시 알아? 석하랑도 그렇고 그런 관계일지.'
천사와 악마가 동시에 속삭였다. 천가을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머릿속에 수많은 망상이 떠올랐다.
촉수가 피닉스의 사지를 들고 전신을 희롱하는-
짝!
가을은 촉수로 제 뺨을 강하게 때렸다.
'...에이, 됐어. 고생하고 왔는데 일부러 깨우면 더 피곤해할 거야.'
피닉스는 수면도 반납하고 서울과 부산, 그리고 개성을 수도 없이 오다니며 서울의 살림을 혼자 도맡아 책임져왔다. 의복이야 서울의 백화점이나 의류매장을 뒤지면 된다고 하더라도, 서울에 보급되는 식자재는 피닉스가 아니었으면 괴수의 고기를 먹었어야 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내가 뭐가 아쉬워서 먼저 고백해?'
그리고 슬슬 가을도 오기가 생겼다.
'내가 그렇게 쉬운 여자인 줄 알아? 어디 한 번 내가 이기나 네가 이기나 해보자, 그래.'
피닉스에게 먼저 고백을 받겠다. 피닉스의 입에서 '천가을 사랑해'라는 말이 튀어나올 때까지, 절대로 먼저 고백하지 않을 것이다. 이건 절대로 이승형이 했던 것처럼 질척거리는 게 아니다. 상대의 마음을 얻기 위한 전략이고, 결코 사그라지지 않을 맹렬한 투지의 발현이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그 개망나니는 이긴다.'
"...으음."
피닉스가 서서히 눈을 떴다.
가을은 슬쩍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1시. 가을이 고뇌에 빠지어 온갖 망상을 하며 마음을 다잡기까지 무려 한 시간의 시간이 흘렀다.
"아. 왔네요?"
피닉스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방긋 웃으며 가을을 맞이했다. 살짝 흘러내린 옷에 순간적으로 촉수가 꿈틀거렸지만, 가을은 초인적인 인내를 발휘해 촉수를 뒤로 갈무리했다.
설레는 건 설레는 거고, 따질 건 따져야 했다.
"...남의 방에서 지금 뭐 하는 거야? 누가 함부로 들어오래."
"푸흐흐. 우리 사이에 무슨."
가을은 따지고 싶었다. '우리 사이가 뭔데?'라고. 그러나 아직 그걸 따져 물을 용기는 없었다. 괜히 겨우 유지하고 있는 이 아슬아슬한 관계마저 무너질까 봐, 가을은 노심초사했다. 가을의 마음이 어떻든, 반한 쪽이 지는 거였다.
"일단 먹으면서 얘기할까요? 할 얘기가 있어서."
아직 비몽사몽하는 피닉스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테이블에 앉았다. 이미 무엇을 꺼내는지 알면서, 가을은 모른 척 고개를 빼꼼히 들었다.
"그거 뭐야?"
"이거요? 세계 최고가 될 바리스타가 만든 케이크요. 서면 출장 간 김에 하나 사 왔어요."
"그 미래 지식인가 뭔가 하는 그거?"
"네. 후후후. 진짜 맛있어요, 여기."
피닉스가 박스 뚜껑을 열었다. 가을은 제 앞에 티라미수를 놓고 플라스틱 포크를 집었다. 피닉스가 조금 울상을 지었다.
"......."
"......."
가을이 슬쩍 티라미수를 앞으로 밀었다. 피닉스가 금세 빵긋 웃으며 티라미수 끝을 퍼 올렸다. 가을은 피닉스의 입에 들어가는 티라미수에 눈을 못 떼며 놀라 물었다.
"너 딸기 케이크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 아. 하, 하하."
피닉스가 티라미수를 삼키고는 곧장 딸기를 찍었다.
"좋아하죠. 엄청."
날름. 티라미수 때와는 달리 쇼트 케이크를 크게 퍼서 입에 꾸역꾸역 넣었다. 가을은 촉수를 움직여 피닉스의 입가에 묻은 생크림을 핥았다.
"너 혹시 딸기 물렸어?"
"아뇨? 없어서 못 먹죠. 푸흐흐."
피닉스가 제 목에 걸린 베일을 손가락으로 비비 꼬았다. 가을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가, 포크로 쇼트케이크를 퍼냈다.
"하긴 그렇지. 요즘 딸기 구하기 얼마나 힘들 텐데. 같이 먹자."
"그럴까요? 가을 씨. 이 티라미수 진짜 괜찮아요. 먹어봐요."
"야밤에 먹으면 살찔 텐데."
"괴인은 살 안 쪄요. 먹는 거 다 마력으로 전환되니까."
가을이 케이크를 씹지도 않고 삼켰다. 손이 빛처럼 움직여 한 조각을 움푹 퍼냈다.
"진짜?"
"네. 장기에서 섭취물을 다 마력으로 바꾸니까요. 제가 언제 화장실 가는 거 봤어요?"
"...그건 그렇네. 할 얘기라는 게 뭐야?"
피닉스가 티라미수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이번에 저 중국 좀 다녀오려고요. 마침 잘됐네요. 거기 있는 정령, 환속성이거든요. 잘하면 가을 씨 친화율 한계 더 늘려줄 수 있겠다."
"...진짜?"
"네. 덕배 씨한테 얘기하다가 말았는데, 정령과 인간이 하나로 합쳐지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 마지막 세 번째가 <싱크로> 예요. 정령과 인간의 물아일체. 서로서로 영혼의 파트너 삼아서 한계를 초월하는 신화(神化)의 경지. 거기에 다다르면...."
피닉스가 쇼트케이크 위에 올려져 있던 딸기를 포크로 짓이겼다.
"성주를 넘어서, 이계신을 죽일 수 있게 되죠."
"그럼말이야...."
가을이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정령이랑 괴인도 그 싱크로라는 거, 가능해?"
"괴인이랑요? ...글쎄요. 그건 모르겠는데."
피닉스가 짓이긴 딸기를 포크로 들어 입에 넣고는 손뼉을 쳤다.
"아! 덕배 씨로 실험해보면 되겠네요! 푸흐흐."
"결국 만만한 게 조덕배지? 어휴."
가을은 덕배에게 미리 애도를 표했다. 피닉스가 음흉한 눈빛으로 희죽 웃었다.
"검증된 모르모트 아니겠어요? 아 참. 내 정신 좀 봐. 이 말 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가을 씨. 그래서 저 중국 가기 전에 가을 씨한테 하나 제안하려고 왔어요."
"...뭔데?"
가을은 소수를 세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피닉스가 할 말을 기다렸다. 마지막 티라미수 조각을 삼킨 피닉스가 입을 열었다.
"서울 안정화 되면 가을 씨 부모님 서울로 모시고 오는 건 어때요?"
"아......."
가을은 탄식했다. 피닉스는 손을 테이블에 올려 꼼지락거렸다.
"이번에 광검 죽이고 석하랑이랑 이야기하면서 조금 느꼈어요. 가족이라는 게 참 중요하구나...하는? 예전에 가을 씨가 왜 그렇게 부모님께 전화라도 하려고 애썼는지 이해가 되기도 했고."
"......."
가을은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피닉스의 입에서 나올 거란 거는 전혀 생각지 못한 말이라 몹시도 당황했다.
"지금이야 촉수꺼비 코어가 더 영향력이 커서 촉수를 숨기지 못하지만, 나중에 가을 씨가 진정한 SS의 경지에 이르면 촉수도 완전히 제어할 수 있을 거예요. 몸 안에 집어넣는다거나, 진짜 꼬리처럼 둔갑시킨 다거나."
"몸은? 핏기 하나도 없고, 시체가 걸어 다니는 수준인데?"
"...이능력 각성하면서 생긴 특징이라고 말씀드리면 되지 않을까요? 서울에서 살아남으려고 하다 보니 이렇게 됐다고 하면.... 뭣보다 가을 씨."
피닉스가 눈짓으로 용산을 가리켰다.
"아키택트한테 가을 씨 옛날 집 복구시켜달라고 한 것도, 부모님 그리워서 그런 거죠?"
"......하, 너 진짜."
가을이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다. 도저히 지금 피닉스를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마력이 울렁거리고, 가을의 코어가 미친 듯이 박동하기 시작했다.
피닉스가 가을에게 다가가 등을 토닥였다.
"미안했어요. 그런 선택을 강요하게 해서. 앞으로 다시는 안 그럴게요."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어서 그래?"
고작 한 달 반 사이에 피닉스에게 무슨 변화가 생겼기에 이렇게 사람이 아주 약간은 순해진 걸까. 가을은 그 이유가 너무나도 궁금했다.
피닉스는 제 옷 셔츠 카라에 건 흰 나비 모양 배지를 만지작거리며 멋쩍은 듯 웃었다.
"그냥, 가족이라는 게 참 소중한 거였구나 싶어서요."
* * *
<6월 2일 새벽 4시, 밀키웨이 크루즈.>
[야! 너 죽을래?! 당장 안 뛰어내려?!]
"오빠라는 게 여동생한테 말하는 거 봐라? 여기 바다 한가운데거든요? 에베베~ 싫거든요~ 나 한국 갈 거거든요?!"
[미친년아! 거기 지금 전쟁 날 수도 있다고!]
"아 그러니까 서울만 한 번 쓱 다녀오고 말 거야! 눈으로 확인만 한 번 하자고! 내 예상 분명 들어맞는다니까?"
너무나도 닮은 두 남매가 서로를 죽일 듯이 티격태격한다. 이불속에서 고개만 빼꼼히 내민 흑발적안의 긴 생머리 소녀와 스크린 너머 말총머리를 한 흑발녹안의 청년.
"오빠. 뭐가 그렇게 걱정돼? 한국에 그 불주먹인가 하는 히어로, 오빠네 식탁 동료로 들일 예정이라며?"
[뭐? 누, 누가 그래? 누가 그런 거짓을 퍼뜨려?]
"오빠 또 눈 돌아간다. 내가 오빠 구라에 하루 이틀 당한 줄 알아? 이 허풍선이야."
[젠장. 야! 어찌 됐든 너 부산 도착하면 꼼짝말고 있어! 나도 지금 그쪽으로 가고 있으니까!]
실실대던 소녀가 한순간 움찔했다.
"또, 또 사람 죽이거나 그런 거 아니지? 오빠 이번에도 본국 소환령 떨어지면 벌써 일곱 번째-"
[아니야! 가웨인이랑 같이 간다, 지금! 오키나와에 있던 괴수 잡으러!]
"그거 벌써 오키나와에서 사라진 지가 언젠데."
소녀는 피식 웃었다. 고래를 닮은 괴수는 다행히 아주 미약한 파도만 일으키며 모습을 감췄다. 섬에 사는 일본인들에게 그 정도 쓰나미는 이 시대에 달거리처럼 겪는 일상이었다.
"헛걸음하겠네. 방위성에서 성명 냈어. 괴수는 태평양으로 갔-"
[이 등신아! 지금 다시 방향 꺾어서 올라가고 있어! 젠장, 애가 왜 어수룩하게 그걸 믿냐?!]
"어?"
소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금 S급 괴수 모비딕, 갑자기 대마도 쪽으로 올라가고 있다고!]
* * *
"역시. 내는 천재다."
석하랑은 슬리퍼 안의 바닷물을 털어내며 백사장으로 올라왔다. 초여름이기는 해도 옷이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석하랑은 피닉스가 바꿔준 코디와 비슷한 차림으로 해변에 서 있었다.
석하랑의 눈에는 밤이라도 샌 것처럼, 다크 서클이 살짝 내려와 있었다.
"이제 얼음 말고도 물도 쓸 수 있겠구먼."
피닉스와 카페에 가서 뜨거운 커피를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만들었던 그 순간, 석하랑의 뇌리에 아이디어 하나가 번뜩 스쳤다. 석하랑이 지닌 힘이 수(水)속성 정령인 만큼, 이제는 얼음뿐만 아니라 물도 조종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곧장 바다로 튀어나왔다. 3선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와 발목이 바닷물에 잠기게끔 서서 마력을 방출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아주 약간이지만 바닷물을 석하랑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게 가능해졌다.
"부산 내려오기만 해봐라."
해운대 바닷물 맛을 쬐끔 맛보게 해주리라. 석하랑은 싱글벙글 웃으며 물을 조종했다.
제 마력의 잔향이 바다에 퍼져 무언가를 꾀고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