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99화 (99/1,497)

〈 99화 〉1부 6장 (5)

<오후 10시. 신서울 유성일가 저택.>

은유하가 헤드기어를 벗었다. 다른 일곱 명의 기계 인형을 조종해 수면 상태에 들인 후, 은유하는 본격적으로 제 업무를 시작했다. 광검이 빼갈 뚜껑을 닫으며 걱정했다.

"너무 힘들게 일하는 거 아닌가? 다 정·재계 인사들인데."

"어쩔 수 없어요. 고객님한테 빚 지워두는 중이라."

"빚?"

은유하가 스크린을 띄웠다.

"고객님은 청화단의 존재가 서서히 드러나는 걸 바라고 있죠. 자, 보실래요?"

허윤환이 은유하가 보인 스크린을 확인했다. 그곳에는 제 딸인 석하랑과 괴인형 피닉스가 관악에서 싸우는 영상이 멀리서 찍혀있었다.

"아직도 이런 걸 업로드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제가 지금 하는 일은...."

재생되던 영상이 일시 정지되었다. 그리고는 곧 영상이 차단되었다.

"이렇게, 고객님의 존재를 숨기고 있죠. 청화단의 존재도. 100%는 지우지 못해도 말이에요."

"과연. 유성 차원에서 움직이는 거군. 그러니 사람들이 별 반응이 없지."

"선의철 대통령도 빌런의 존재감이 커지는 걸 원치 않을 거예요. 윈-윈이죠. 최근에 화권 이승형이 유독 방송에 많이 나오죠? 그게 다 시선을 돌리는 거예요."

"그렇군."

허윤환은 술을 들이켰다. 그는 의외로 정치 쪽으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은유하가 의외라는 얼굴로 커피잔을 들었다.

"아버님은 그런 쪽으로 관심 없으세요?"

"히어로가 정치 쪽으로 신경 쓸 일이 무어 있겠나. 사람들 지켜야지. ...이제는 괴인이기는 하지만 내 근간이 변한 건 아니야. 자네와의 계약도 그런 거 아닌가. 언제든지 사람들의 위험에 투입될 수 있는 사설 무장 조직이라는 게."

"그렇죠. ...뭐, 지금 당장은 그럴 위기가 없지만요."

저로서는 위기가 있으면 좋지만요. 은유하가 커피와 함께 뒷말을 삼켰다.

잠시 서로 티-허윤환은 술이지만-타임을 즐기는 사이, 은유하의 스마트워치가 울렸다.

[아가씨. 백상우입니다.]

"어, 왜?"

[말씀하신 구호품의 물량을 전량 확보했습니다. 그런데....]

"뜸들이지 말고 본론부터."

백상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딸기가 다 떨어졌답니다. 일단 급한 대로 오사카에서 올 여객선에 화물로 실었습니다.]

"딸기를 구하려고 일본에서...? 굳이? 그게 가능한가?"

허윤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은유하는 커피를 마시며 능청스럽게 웃었다.

"사업이니까요. 여러 품종을 비교해서 가장 적절한 품종으로 선정해서 메뉴에 집어넣을 생각입니다. ...세관은 뒷돈 좀 찔러줬습니다."

[여객선은 아침 9시 경에 부산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부산?"

허윤환이 반색했다. 은유하는 커피를 홀짝이다가 스케줄을 점검했다. 다행히 시간이 비었다.

"백상우. 내가 직접 내려갈게. 카페 프랜차이즈는 내 소관이니까 별 의심 안 할 거야."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은유하가 코웃음을 쳤다.

"내 옆에 어느 분이 있는지 잊었니? 내일 아침...아니다, 지금 가자. 부산에 연락해. 호텔에서 잘 거야."

[알겠습니다.]

전화가 끝났다. 은유하가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윤환이 마력을 일으켜 술기운을 전부 날려버렸다.

"...미안하군. 나는 아직 하랑이 보기가-"

"그래서 준비했죠. 아버님 전용 슈트."

"그게 벌써 만들어졌다고?"

허윤환이 어린아이처럼 반색했다. 은유하는 웃으며 검지와 엄지를 동그랗게 붙였다.

"돈으로 시간을 샀죠. 자, 가실까요?"

잠시 후, 신서울에서 부산으로 차량이 빠져나갔다.

* * *

꿈을 꿨다.

그날, 서울에 차원문이 열린 날.

이승형은 히어로의 수칙을 버리고 천가을을 데리고 도망쳤다.

우후죽순으로 튀어나오는 괴수들, 차원문에 놀라 소요를 일으킨 빌런들, 그리고 지하에서 호시탐탐 약탈의 기회를 일삼던 난민들.

그 모든 마수를 피해 이승형은 천가을을 대피시켰다.

구로. 그가 서울 수복 작전에서 각혈하며 쓰러졌던 옛 디지털 단지에서 이승형은 그 일대의 왕인 등대지기를 만났다.

등대지기는 둘을 환대했고, 빌런이나 난민들과는 다른 친절한 그들의 모습에 이승형은 안심했다.

꿈이지만, 이승형은 방심하지 말았어야 했다.

잠시 괴수를 쫓아내고 돌아왔을 때,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던 천가을은 등대지기와 그 수하들에 의해 윤간을 당하고 있었다. 이승형은 분노에 치밀어 달려들었지만, 관악에서 도망쳐 등대지기와 합류한 빌런에게 살해당했다.

눈물을 흘리며 교성을 내지르는 천가을을 보면서 이승형의 의식은 깜깜해졌다.

* * *

"...악몽이다."

"무슨 악몽인데?"

이승형이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낯선 천장, 낯선 소파, 낯선 방 안에 익숙하고 그리운 목소리가 귀에 울렸다.

"환청인가...?"

"정신 차려, 이승형 씨."

천가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승형은 퍼뜩 정신을 차려 고개를 돌렸다. 맞은 편 철제 의자에 회백색 천가을이 앉아 있었다.

"지금 벌써 11시야. 히어로는 통금 없어? 혼자 이렇게 막 다녀도 돼?"

"......정말 가을 씨인가요?"

이승형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천가을은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천가을이야. 증명할 방법은 없지만."

"아뇨. 당신은 가을 씨입니다. 이렇게 보니까 알겠어요. 하하, 하하하...."

이승형의 기억 속 천가을은 이능력자가 아니었다. 평범한 배우였고, 이승형은 평범한 배우임에도 노력하는 그 모습에 반했다. 가을이 머리의 가면을 벗어 매만졌다.

"나참. 이긴 건 당신인데 왜 당신이 기절하고 난리야. 스마트워치는 왜 벗고 왔어?"

"...협회 사람들 저 서울에 올라오는 거 안 좋아해요. 또 각혈할까 봐."

유독 이승형은 서울에만 오면 마력이 역류했다. 화마룡이 이승형에게 남기고 간 저주가 아닐까 하고 사람들은 가정했고, 결국 이승형은 광검의 빈자리를 메꿀 신서울의 대들보가 되었다.

"흥. 대단한 사람 됐네."

"가을 씨 많이 변하셨네요. 성격도 그렇고 외모도...."

"변해? 당연하지. ...."

성격이나 외모뿐만 아니라 종족도 변했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대신 목을 가다듬고 본심을 꺼냈다.

"크흠.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굳이 이렇게 남았어."

천가을은 의자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천가을이 기절한 이승형을 내버려 두거나 죽이지 않은 이유도, 굳이 이 휴게실에 데려와 그와 얼굴을 마주한 이유도 그 감사 인사 때문이었다.

"내 장례식 상주 해줘서 고마웠다고. 우리 부모님 옆에서 도와줘서 정말 고마웠어."

"...가을 씨는 죽은 사람으로 사실 겁니까?"

"당연하지. 이미 신서울에 내 자리는 없어. 내 자리는 이제 여기야."

천가을이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이승형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정말 신서울로 돌아오실 생각이 없으십니까?"

"그래. 애초에 나 원래 서울 사람이야. 자꾸 질척거리지 마."

"......."

이승형의 웃는 얼굴에 금이 갔다. 속내를 들켰다는 생각에 흠칫 놀랐다. 천가을이 두 손으로 턱을 받치며 씁쓸하게 웃었다.

"나도 짝사랑 하다 보니까 알겠더라고. 이승형 씨가 나한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지. 나 참 둔했지? 옆에서 남자가 대놓고 좋다고 들이대는데 눈치도 못 채서."

"...천가을 씨는 연기에 꽂혀 있으셨죠. 괜찮습니다. 저는 그런 모습에 당신에게 반했으니까요."

"지금도?"

"네. ...가능성은 없어 보이지만."

이승형의 얼굴에 우울함이 스쳤다. 천가을 또한 이능력자가 되어서 그런지, 그도 상대의 마력에서 느껴지는 감정에 대해 어렴풋이 느껴졌다.

천가을은 제 마음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그래. 나 이승형 씨 안 좋아해. 다른 사람 찾아봐. 버스 떠났어."

"만약에 제가 그때 뒤돌아서서 가을 씨를 구하러 갔다면...."

"얘 구질구질하게 왜 이래? 너 마지막 회 대본 못 봤어? 언제 첫사랑이 끝까지 이어지든?"

"허. 저 첫 사랑 가을 씨 아니에요."

"정말?"

"......."

이승형이 입술을 삐죽였다. 너무나도 모진 천가을의 벽에, 이승형은 절로 심술이 났다. 굳이 이렇게까지 철벽을 칠 이유가 있을까 싶어 섭섭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승형은 마음을 애써 접기로 했다. 천가을의 사랑은 저와 다른 축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대본 바뀌었거든요? 결국에는 남주인공이랑 여주인공, 결혼했어요."

천가을 사후 제작진은 아이돌 출신의 연기파 여배우를 섭외했고, 대본을 그에 맞춰 수정했다가 거하게 말아먹었다. 가을이 화들짝 놀랐다.

"거기서 대본을 바꿨다고? 작가님이 허락했어? 그 언니 대쪽같은 사람인데."

"작가님도 때려치웠어요. 감독이 급하게 작가 섭외했었어요. 가을 씨 데뷔작 작가."

"와. 안 봐도 훤하다. 그 스토리 개판이었는데. 시청률 반 토막 났을 걸?"

"시청률 한 자리 수로 떨어졌어요. ...가을 씨 너무하네요. 찾아보지도 않았어요? 검색하면 나올 텐데."

"내 주연 자리 강판한 드라마를 내가 왜 봐. 열받게."

천가을이 콧방귀를 뀌었다.

"나 죽었으면 그냥 거기서 끝냈어야지. 주연 배우를 잃은 미완의 명작! 그러고 나중에 시간이 흘러서 리메이크로 한 번 더 하는 거야. 추억보정 좋잖아? 이승형 씨가 다시 주인공하고! 어차피 드라마 보는 사람들이 나보려고 보겠어, 아니면 네 얼굴 보려고 보겠어?"

"가을 씨 갑자기 신나셨네요?"

"...흐흠!"

배우 시절의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에 가을이 흥분을 가라앉혔다. 마침 가을의 스마트워치에 문자가 오고, 천가을이 그걸 확인하고는 반색하며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이제 상태 괜찮은 것 같으니까, 나는 이제 갈 거야."

"저, 저기...."

"연락처 안 줘."

이승형이 일어나 손을 뻗었지만, 천가을은 그걸 무시하며 등을 돌렸다. 아홉 촉수가 휴게실 바닥을 찔러 구멍을 만들었다.

"그럼 안녕. 앞으로 볼 일은 없을 거야. 평생. 그러니까...."

천가을이 얼굴에 가면을 썼다.

"새 사람 찾아. 당신 좋아해 줄 여자로. 괜히 마음 주지도 않는 사람 좋아하지...아, 젠장. 이 말은 차마 못 하겠네. 야! 이승형!"

팬텀이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나 말고 다른 여자 찾아! 알겠어?! 괜히 나처럼 꼭대기도 안 보이는 나무 오를 생각도 하지 말고!!"

대놓고 차였다. 이승형은 팬텀의 당찬 포부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한국에는 없을 것 같네요."

"그럼 국제결혼이라도 하시던지. 흥."

팬텀의 발밑이 훅 꺼졌다. 땅을 다지며 땅굴 속으로 들어간 팬텀이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남기고 관악을 떠났다.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세요, 히어로. ...여러모로 고마웠어."

팬텀이 땅속으로 사라지고, 이승형은 멍하니 수 분을 서 있었다.

"하하, 하.... 드라마 속 첫사랑으로 결혼까지 이어지던데."

이승형이 소매로 눈가를 닦았다.

곧, 밖에서 히어로들이 급히 뛰쳐 들어왔다.

"괜찮으십니까?!"

운사가 놀라 소리치고, 운사의 스마트워치에서 집정관의 호통이 울렸다.

[야 이 개새끼야! 너 나 속 뒤집어지는 거 보고 싶어?]

"...죄송합니다."

히어로 화권 이승형, 무단이탈 약 2시간 만에 서울에서 검거되었다.

* * *

<오후 11시 30분, 서울 여의도 청화단 아지트.>

가을은 힘없는 발걸음으로 아지트에 들어왔다.

아니, 발걸음도 아니다. 걸을 힘조차 없이 수평으로 누워 촉수로 땅을 디디며 움직였다.

흡사 거미의 걸음걸이처럼 여덟 개의 촉수가 대리석 바닥을 디디고, 나머지 하나의 촉수는 원피스 끝자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강하게 잡고 있었다.

"으아악?!"

막 라운지에서 TV를 보고 있던 아키택트가 가을을 보고 기겁했다. 가을은 누운 상태로 아키택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왜. 뭐가. 꼽냐?"

가을은 몹시 저기압이었다. 평소보다도 더 기운이 없어 보였지만, 아키택트는 맥주를 마저 삼키고는 소리쳤다.

"공포영화 찍는 줄 알았다! 좀 정상적으로 다니지 못하냐?! 암만 괴인이라도 그렇지 이제 인간을 포기할 셈이냐?"

"그럴까 봐."

감정 없이 무덤덤한 말에 아키택트가 혀를 차며 캔맥주를 던졌다. 가을이 촉수 하나를 들어 캔맥주를 낚아챘다.

"웬일이니? 네가 술을 다 나눠주고."

"아니, 뭐 내가 너 보고 너무 놀라기는 했는데...."

아키택트가 머리를 긁적였다.

"너 오늘 좀 술이 필요해 보여서. 청승 떠는 거 보니 혼자서 못 잘 것 같네. 하나 더 줘?"

"......하나면 충분해. 고마워."

아키택트가 스크린으로 눈을 돌렸다. 막 촉수로 기어가던 가을이 스크린 속 영상을 보며 반색했다.

"어? 나네?"

스크린 속에는 가을이 분한 <마지막 사랑>이 재생되고 있었다. 아키택트는 쑥스러워하며 맥주를 홀짝였다.

"아니, 이거 너 나오는 부분까지는 꽤 재밌더라고. 동작 지하에서 뭐 드라마 보거나 할 수 있었겠냐? 지금 6년 치 몰아서 보는 중이다."

"안 피곤해?"

아키택트가 제 품에 들린 포션을 흔들며 웃었다.

"이거 좋더라. 밤샘하는데 딱 좋아. 이제 딱 한 편 남았어. 근데 가기 전에 하나 물어보자."

아키택트가 영상의 재생목록을 가리켰다.

"덕배가 너 죽고 다른 연예인 나와서 들어온 순간부터 쓰레기 같다면서 욕하려 하더라. 너 주연 배우였으니까 수정 전 대본 알지? 어떻게 돼? 주인공 커플끼리 이어지냐?"

"......."

가을은 입을 우물거렸다. 전직 배우로서 알려지지 않은 것을 스포일러 해도 좋을까 싶었다.

"내가 맡은 여주인공 있잖아...."

아키택트가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했다.

"결혼 프러포즈 직전에 트럭 치이고 기억상실증 걸려서 병원 입원했는데, 자기도 몰랐던 병을 알게 되고 시한부 판정받아서 병으로 이틀 만에 죽어. 근데 그거 남주한테 얘기 안 하고 죽어서, 남주 서브 여주랑 이어짐. 그러고 끝."

"...Pardon?"

"첫사랑이 어디 성공하는 거 봤니? 이거 막장드라마야."

가을이 촉수를 부리나케 움직이며 계단을 올랐다. 라운지에서 아키택트의 온갖 슬랭이 울리지만, 가을은 차가운 맥주를 이마에 대고 머리를 식혔다.

"그래.... 이제 다시 TV 나오기는 글렀지."

스위트 룸에 다다른 가을은 몸을 바로 세웠다. 모퉁이를 지나 제 복도에 들어가려던 순간, 막 내려오려던 덕배와 눈이 마주쳤다.

"어머. 아직 안 잤어?"

"...너 술도 마시냐?"

덕배가 가을의 손에 들린 맥주를 가리켰다. 가을은 웃으며 맥주캔의 뚜껑을 땄다.

"오늘 한잔하고 자려고. ...뭐야. 왜 뺐어? 죽을래?"

덕배가 캔맥주를 가을에게서 빼앗았다. 어이가 없어진 가을은 촉수를 날카롭게 세웠다. 덕배가 맥주에 X자를 손으로 그리고는 뒤를 가리켰다.

"너 술 먹고 네 방 들어가면 분명 사고 칠 것 같다. 그냥 들어가라."

"뭐? ...야, 너 미쳤어?! 내 방 들어갔지?!"

가을의 얼굴이 더 창백해졌다. 덕배는 원샷으로 캔맥주를 들이켜고는 계단 아래로 뛰어내렸다. 가을이 난간을 잡고 씩씩대며 소리쳤다.

"야! 너 죽을래! 어딜 아녀자 방에 몰래 들어가! 너 다 봤지?!"

"천가을. 분명 너 나한테 고마워할 거다."

계단 아래에서 덕배가 콧방귀를 뀌며 사라졌다. 천가을은 헛웃음을 지으며 촉수 끝을 날카롭게 벼렸다.

"그래. 올라오기만 해봐."

천가을은 성큼성큼 방으로 걸어가 문을 열어젖혔다. 이승형을 요격하러 나서기 전, 가을이 마지막으로 저질러 놓았던 참상은-

"................"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순간 가을은 대학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한창 연애를 해보고 싶다고 미쳐서 대한 근처에 자취방을 구했던 시절, 특정 주기만 되면 집은 우렁각시가 든 것처럼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항상 그 뒤로 어머니의 '정리 좀 하고 살아라'는 연락이 왔다.

".........아, 아니. 유이신이 정리를-"

"Zzz...."

방안에서 노곤한 숨소리가 들렸다. 귀에 익은 숨소리에 가을은 발소리도 들리지 않게 촉수로 바닥을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흐읍."

가을은 숨을 삼켰다.

침대 위에는 피닉스가 몸을 웅크린 채 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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