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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98화 (98/1,497)

〈 98화 〉1부 6장 (4)

<오후 10시, 서울.>

피닉스는 서울로 돌아왔다.

평소대로 혼자서 돌아왔다면 10분 남짓한 시간에 서울에 복귀했을 테지만, 지금 피닉스는 신서울에서 나온 일행을 호위해야 했다.

"허허, 고맙네. 단장."

류천성이 중절모를 쓰며 짧게 목례했다. 피닉스는 화답하듯 손을 흔들었다.

"뭘요. 시장님 혼자 적진에 떨어뜨려 놨는데 이쯤이야."

"껄껄, 적진도 아니지 않나? 이제 위험은 없으니."

류천성이 뒤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협회에서 파견된 팀장, 강소연이 이를 갈며 서 있었다.

"......."

피닉스가 주위를 슬쩍 둘러보고 품 안에서 큐브를 꺼냈다. 강소연의 눈에 핏발이 섰다.

"왜요. 억울해요? 억울하면 빼앗아 보던가."

"......."

강소연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돌렸다. 아예 상종하지 않겠다는 듯, 류천성을 따라오면서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피닉스가 깝죽거렸다.

"어이쿠, 불쌍해서 어쩌나. 한 5년만 더 열심히 노력하면 S급 돼서 마음껏 썼을 텐데."

"......뭐?"

강소연이 처음으로 반응했다. 피닉스는 큐브를 품 안에 다시 집어넣으며 딴청을 피웠다.

"뭐, 그거야 다 이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상관없네요~! 그럼 시장님. 안녕히 주무세요."

"단장, 잠시만."

류천성이 피닉스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 나는 얼마나 남았는가?"

정치인 류천성의 인생 목표가 서울 시장이었다면, 이능력자 하늘성의 인생 목표는 S급 등극이었다.

피닉스는 오묘한 얼굴로 웃었다.

"...저나 배추흰나비로는 시장님 각성 못 시켜드려요."

"그거야 알고 있네. 됐으면 더 일찍 했겠지. 이보게, 단장."

하늘성이 허리를 앞으로 숙여 피닉스와 눈을 맞췄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게 꼭 마피아가 위협하는 것 같았다.

"나 신서울까지 갔다 왔네. 그 모진 수모와 굴욕을 당하면서 밥도 제대로 못 얻어먹고 왔어. 신서울 사람들이 뭐라 하는지 아는가? 서울 꽃거지라 하더군."

"옷부터가 공정 방법이 다르니 어쩔 수 없죠?"

피닉스가 강소연과 류천성의 옷을 번갈아 가리켰다.

류천성이 구시대의 명품이라면, 강소연의 옷은 코어 공정이 들어간 새로운 시대의 의복. 당연히 신서울 주민들의 입장에서 류천성은 거적때기를 두르고 나타난 꽃거지였다. 피닉스가 류천성의 팔을 두드렸다.

"걱정 마요. 그래도 조만간 유성에서 공장 차리러 올 테니까. 시장님은 그 부지를 어디로 할지 미리 생각해둬요."

"그 계획이야 이미 구상해뒀다. 아키택트한테 코어 좀 쥐여주면 공장이야 뚝딱 만들어줄 테니. 그보다 말 돌리지 말게, 단장."

류천성의 근육이 꿈틀거렸다. 피닉스는 난감해 하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아, 좋은 생각 났어요."

피닉스가 류천성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괴인 되시면...."

"됐네."

류천성이 칼같이 거절했다. 피닉스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은 어떻게 해드릴 수 없어요. 이게 A급과 S급의 경계가 섬세한 거라-"

"하, 큐브 들고 무슨 개소리야?"

강소연이 쏘아붙였다. 류천성도 순간적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너 큐브 쓸 수 있다며. 그러면 그걸로 뭐든지 다 하면 되잖아? 이봐요, 하늘성! 당신 저 큐브 빼앗으면 당신도 S급 될 수 있을 거예요!"

"어머. 쟤 지금 이간질하는 거죠? 그렇죠?"

"의미 없는 짓이지. 큐브가 어떤 물건인지 다 아는데. 자네만 몰라."

피닉스의 말에 류천성이 피식 웃으며 허리를 폈다. 그리고는 곧장 강소연을 들쳐멨다. 하필이면 그 곰만한 손이 강소연의 하복부를 스쳤다.

"꺄악?!"

강소연이 붉어진 얼굴로 새된 비명을 지르며 아등바등했다. 류천성은 피닉스에게 호텔 안쪽을 가리켰다.

"등대에게 인계하겠네."

"고마워요. 수고하셨어요, 하늘성. 조만간 이명 새로 달기를 기대할게요."

"말이라도 고맙군."

류천성이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여의도의 이 C 호텔은 청화단의 아지트인 동시에, 강소연을 더욱 엄중히 감시할 감옥이다.

"협회에서 파견해도 하필이면 저걸 파견하네. 고맙게."

피닉스는 날개를 펼쳐 여의도에서 날아올랐다. 밤바람을 스치며 마포대교를 지나고, 용산으로 향했다.

"...윽."

마포대교를 지키고 있던 남자가 피닉스를 보자마자 양팔을 Y자로 치켜올렸다. 피닉스는 슬며시 손을 흔들고 곧장 날갯짓의 속력을 높였다.

"저건 아직 저기서 저러고 있네."

피닉스는 용산에 복구된 아파트 단지 옥상에 착지했다. 마포와 용산의 행정구역상 접경지에 있는 고급 아파트.

과거 천가을이 서울에 살던 아파트였다.

'용산을 고집한 게 이유가 있었네.'

피닉스는 아직 아지트의 펜트하우스에서 지내고 있지만, 천가을은 아키택트에게 부탁해 제집을 복구했다.

아역배우 시절부터 돈을 차곡차곡 모아 부모님과 함께 살던 곳이라는 설명에 아키택트는 졸다가 벌떡 일어나 건물을 세웠다.

아직 입주자라고 해봐야 천가을 단 한 명뿐인 아파트지만, 서울이 좀 더 안정되면 서서히 강북에도 사람들이 채워질 것이다.

"그런데 천가을 반응이 없네요...?"

피닉스는 천가을의 집 앞에서 초인종을 눌렀다. 안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아지트에 있나?'

피닉스는 곧장 다시 아파트의 옥상으로 달려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또 어떻게 마포대교의 그 남자는 피닉스를 알아챈 것인지, 이제는 다리 한가운데 가로등에서 만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아, 아하하."

피닉스는 어색한 미소로 아지트 옥상에 착지했다. 피닉스의 마력 반응에 옥상 바닥이 열리고, 피닉스는 곧장 현관에 착지했다.

'꼭 출격했다가 복귀하는 것 같네.'

아키택트는 계속해서 유리창을 깨 먹는 피닉스의 행동에 분노해 옥상에 장치를 만들었다. 피닉스는 날개를 접어 옥상에 착지했고, 곧 바닥이 꺼지며 펜트하우스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여기를 아지트로 하기 잘 했어. 역시.'

피닉스는 기쁜 마음에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스위트룸이 있는 층에 대부분의 간부들이 자리를 하나씩 차지하고 있었다.

똑똑똑. 피닉스가 천가을의 방문을 두드렸다. 안에는 반응이 없었다.

'아직 잘 시간 안 됐는데.'

피닉스가 문 앞에 귀를 대었다. 아주 미약한 숨소리가 하나 들렸다.

"......흐음."

"뭘 그렇게 남의 방 앞에서 그러고 있어?"

지나가던 덕배가 땀 냄새를 풀풀 흘리며 피닉스에게 물었다. 조금 전에 운동이라고 하고 온 듯 그의 코어는 빠르게 박동하고 있었다.

"운동?"

"깃털 놈들이랑 한 판 뜨고 왔다."

"아아. 훈련이군요."

피닉스는 손가락을 튕겨 덕배의 땀을 모두 소멸시켰다. 노폐물들이 모두 사라지자 덕배는 상쾌한 기운에 떨떠름하게 고개를 숙였다.

"고맙다."

"뭘요. 누구랑 다르게 성실히 자습하는 게 제가 다 고마운걸요?"

"...석하랑 얘기냐?"

덕배의 물음에 피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표상으로는 SS급에 이르렀는데, 애가 아직 사고나 전투 방식이 S급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어요. 보면 답답할 노릇이죠. 사랑놀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닌데."

"너도 지금 사랑놀이 하려고 온 거 아니냐?"

덕배가 천가을의 방을 가리켰다. 피닉스가 헛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돌아왔다고 신고하려고 왔어요. 안 그러면 또 나 찾아다닌다고 촉수로 벽 타고 다닐 테니까."

"...끄응."

덕배는 목덜미를 긁적였다. 무언가 딴청을 피우는 기색이 느껴져, 피닉스가 눈을 반쯤 감으며 덕배에게 물었다.

"어딨는지 알죠?"

"알기야 아는데...."

피닉스가 손가락을 튕기려 하자, 덕배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관악에 히어로 한 명 나와서 요격하러 갔어."

"...아, 그래요? 난 또 뭐라고. 그럼 금방 돌아오겠네요. 방에서 기다리지 뭐."

피닉스는 손을 흔들며 천가을의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덕배가 목에 걸고 있던 수건을 당기며 소리쳤다.

"하나 물어보자!"

"네! 부르셨나요?!"

피닉스가 그대로 몸을 돌려 덕배의 앞에 달려왔다. 푸른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났다. 우물쭈물하던 덕배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SS급 되면, 신도 죽일 수 있냐?"

"신이요? 흐음...."

피닉스가 잠시 고민을 하다가 주먹을 들었다.

검지 하나를 펼쳤다.

"S급이면 도시를 부수고."

중지를 펼쳤다.

"SS급이면 나라를 부수고."

엄지를 펼쳤다.

"SSS급이면, 지구를 부술 수 있어요."

"...지구?"

피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엄지로 펼친 SSS급을 다른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SS, 그러니까 친화율 99로는 하아아안참 부족해요. SSS, 친화율 100이 되어야만 이계신을 죽일 수 있게 돼요. 아 씨, 발음하기 힘드네. 에쓰에스엑ㅅ...."

"그 친화율 100이 되는 방법이 뭔데?"

피닉스가 손뼉을 치며 반색했다.

"우리 덕배 학생, 드디어 선생님의 명강의가 그리워진 거군요!"

"...됐고, 대답이나 하지?"

피닉스는 실실거리며 양손을 들어 올려 각각의 검지에 불꽃을 피웠다.

"자, 여기 이능력자 한 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여기에 각성한 정령 한 명이 있습니다."

"엉."

피닉스가 두 불꽃을 하나로 합쳤다. 정령의 불꽃이 이능력자의 불꽃에 흡수되었다.

"인간과 정령이 합쳐지면 돼요. 뭐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광검처럼 정령의 힘을 이어받는 거예요. 정령은 힘을 주고 소멸하지만, 이능력자는 강해지죠. 괴인들이 코어 흡수하는 것처럼."

"두 번째는?"

"오늘따라 열의가 넘치네요!"

피닉스가 다시 불꽃을 피웠다. 이번에는 정령의 불꽃이 인간의 불꽃에 아주 작게 들어갔다.

"두 번째는 빙의예요. 정령이 영체(靈體)가 되어 인간에게 빙의하는 거죠. 이 경우 육체는 그 인간의 것이지만, 정령이 인간의 영혼을 억누르고 몸을 조종하는 경우에요. 은유하가 은재민 기계 인형 조종하는 것처럼."

"또 있냐?"

"네. 마지막이 있기는 한데...."

벌컥! 천가을의 방문이 열렸다. 그곳에는 온몸을 회백색 점액질로 뒤덮은 나신의 유이신이 나타났다.

"와오."

덕배가 황급히 눈을 돌리고, 피닉스가 시큼한 냄새에 감탄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불꽃이 타오르며 점액을 모두 소멸시켰다.

"일단 뭣 좀 입겠어요?"

유이신은 떨리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방 안의 가운을 걸쳤다.

"가,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

유이신의 얼굴이 화산처럼 뻘게졌다. 피닉스는 유이신의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투명한 액체에 피식 웃으며 유이신의 어깨를 두드렸다.

"히얏?!"

"고생하세요. 촉수꺼비 욕망이 참 가을 씨를 힘들게 만들어서. 육욕을 풀 곳이 당신밖에 없는 걸 이해해줘요. 당신 책임도 어느정도 있으니까."

"그, 그건 괜찮습니다만 가을 님이 저로 욕구를 해결하는건 사실-"

유이신이 눈알을 굴리며 고민했다. 설명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순간, 피닉스 뒤에 있던 덕배와 눈이 마주쳤다.

덕배가 검지를 들어 피닉스를 가리켰다.

덕배가 그 검지를 제 귀에 대고 두드렸다.

덕배가 양손을 펼쳐 엄지만 접고 아홉 손가락을 흐느적거렸다.

덕배가 다른 검지로 유이신을 가리켰다.

덕배가 마지막으로 엄지로 제 목을 그었다.

개떡같이 전해진 수신호에도 유이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복화술로 말했다.

'신께서, 아시면, 가을 님이, 나를, 자를 거다.'

완벽했다. 덕배가 엄지를 치켜올렸다.

"둘이서 자꾸 뭘 속닥거리고 있는 거예요?"

피닉스가 고개를 올려 앞뒤를 살폈다. 까치발을 들어도 정수리가 눈에 닿을 정도니, 둘의 소리 없는 대화는 피닉스의 머리 위에서 누구도 모르게 이루어졌다.

덕배가 얼버무리기 위해 유이신을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였다.

"천가을이 제 혼자 해보겠다고 유이신 버리고 갔거든."

"아, 그래요? 내가 화장실까지도 같이 다니라고 했던 것 같은데?"

피닉스의 표정이 굳었다. 유이신이 덕배에게 배신감이 짙은 표정으로 놀랐다가, 곧 피닉스에게 무릎을 꿇으며 매달렸다.

"이해해주십시오, 신이시여! 저는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가을 님의 촉수에는 이길 수 없었습니다! 제 안을 파고드는 촉수가...흑흑!"

"......아, 그, 그래요?"

피닉스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유이신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제 가슴에 손을 올리며 선언했다.

"예! 이제, 저는 가을 님의 촉수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몸으로, 조교 되고 말았, 흑!"

유이신이 바닥에 쓰러지며 꺼이꺼이 통곡하자, 피닉스는 슬쩍 뒷걸음질치며 손가락으로 유이신을 가리켰다.

"덕배 씨! 유이신을 방으로 옮겨주세요!"

"얘 방 없는데?"

"밑에 방이 천지인데 아무 데나 쓰게 해줘요!"

피닉스가 빽 소리를 지르고 천가을의 방으로 들어갔다. 쾅! 방문이 굳게 닫혔다. 복도에 정적이 흐르고, 유이신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표정으로 일어섰다.

"감사합니다. 조덕배 님."

"......일단 가운은 좀 추스르고 말하지?"

덕배의 시선은 천장을 향해있었다. 유이신은 붉어진 얼굴로 제 가운의 앞섶을 여몄다.

* * *

방 안.

피닉스는 입구에서부터 한가득 이어진 점액질의 흔적에 코를 막았다.

"...얼마나 박아댄 거야?"

침대까지 이어진 흔적에 피닉스는 불꽃을 일으켜 점액을 태워버렸다. 단백질 타는 냄새가 방안을 가득 채워, 피닉스는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시원하네."

차가운 밤공기가 창문으로 들어와 공기가 순환되었다. 피닉스는 난장판이 된 방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튼 하나같이 다 생활력 개판이라니까."

피닉스가 소매를 걷어붙였다.

* * *

결착이 났다. 이승형은 땅에 대자로 누운 팬텀의 머리 옆에 주먹을 꽂았다.

"제, 승리입니다."

"...그렇네. 져버렸어."

가을은 순순히 인정했다. 복사한 이능력을 사용하고, 아홉 개의 촉수를 조종하고, 마지막에는 이승형의 능력까지 복사해 싸웠지만 패배했다.

"마력은 저와 비슷한 경지이실지 모르지만, 아직 경험이 부족하십니다. 그게 당신의 패인입니다."

"...그러게. 제대로 S급 노릇 하기 참 어렵네."

이승형은 땅에서 손을 떼고 일어섰다. 손을 제 허벅지에 살살 턴 그는 팬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체포 안 해?"

"제가 왜 체포하겠습니까. 저도 듣는 귀가 있습니다. 당신이 마음속까지 악인이 아니라는 건."

"......."

팬텀이 손을 맞잡고 몸을 일으켰다. 공교롭게도 그들이 서 있던 자리는 4월 초의 그 자리였다.

"자, 이제 말씀해주시죠. 천가을 씨는 어디에 계십니까?"

"너 바보지?"

"네?"

팬텀, 천가을이 마스크를 벗어 제 머리에 걸었다. 가을에게서 마력 반응이 가라앉았다.

"????"

팬텀은 마력을 더는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변신이 풀리지 않는다. 이승형이 손뼉을 치며 놀랐다.

"와, 마력을 쓰지 않아도 변신이 유지되는군요!"

"야. 나야. 내가 천가을이라고."

가을이 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승형의 표정이 사라졌다. 가을이 코웃음을 치며 손을 풀었다.

"차원문 닫고 바로 온다던 사람이 이제야 나타났네. 그래, 하고 싶었던 말이 뭐야?"

"가, 가가, 가을 씨?!"

"가가가가을이 아니고 천가을."

가을은 흰 셔츠의 단추를 위에서 세 개 풀었다. 창백한 명치가 훤히 드러나고, 심장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할 부근에는 검은 보석이 박혀 두근대고 있었다.

가을이 자조하며 다시 단추를 잠갔다.

"뭐, 누구 씨가 늦게 도착한 덕분에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어. 왜?"

"아, 아아, 아아...."

다리가 풀렸다. 이승형은 그대로 두 무릎을 꿇었다.

관악에서 나타난 듀라한들. 그들은 하나같이 모두 심장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코어가 자리 잡고 있었다.

천가을이 무심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

"들어는 준다고 했지? 그래. 들어줄게. 어디 한번 말해봐."

가을이 쪼그려 앉으며 시선을 마주했다. 가을의 뒤로 아홉 개의 촉수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거야? 응?"

이승형은 그저 이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살아계셔서, 다행...."

이승형이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가을은 잠시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 완전 나쁜 년 됐네."

가을은 촉수로 이승형을 휘감고는 강의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을이 깨어나고 피닉스와 처음 이야기를 했던 바로 그 강의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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