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1부 6장 (1)
6월 1일.
어느덧 봄꽃이 지고 초여름이 되었다. 대한민국은 광검이라는 큰 별을 잃었지만, 남은 히어로들의 활약에 국내의 주요 괴수들이 하나둘 퇴치되었다.
화권 이승형과 설화공주 석하랑. 두 S급 영웅은 광검의 공백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팔도 전역을 누비며 괴수의 씨를 말려버렸다.
그리고 서울에서 전해진 믿을 수 없는 소식이 신서울을 크게 흔들었다.
- 난민들이 진짜로 서울을 되찾았다고 하더라.
푸른 불꽃을 심벌로 삼고 괴수를 퇴치하는 정체불명의 빌런 조직, '청화단'의 존재가 서서히 양지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 * *
<2020년 6월 1일 오전 10시, 신서울 정부청사.>
"감히 이 막중한 역할을 맡아 감개무량합니다. 서울을 되찾은 이 모든 공을 우리 시민 여러분께 바칩니다."
하늘성, 이제는 서울시장-임시-가 된 류천성이 세상 행복한 얼굴로 카메라에 인사했다. 리포터의 얼굴이 흙을 씹은 듯했다.
물론 류천성에게 서울시장의 임명장을 쥐여준 백세준은 아예 표정이 없었다. 그는 임명장을 기계처럼 대독하고 류천성에게 던져버렸다. 류천성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번 서울 수복에 큰 도움을 준 의협, <청화단>이 대한민국의 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끝없이 설득하고 설득하겠습니다. 신서울 주민 여러분,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류천성이 제 가슴을 치며 포부를 밝혔다.
"우리는 서울에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빼앗긴 옛 땅을 다시 찾을 것입니다! 제가 그 선봉에 서겠습니다!"
* * *
<같은 시각, 서울 여의도 청화단 아지트.>
"저 양반은 카메라 앞에서 제일 신나더라?"
"아직 S급도 안 된 양반이 서울 한복판까지 가서 무리하기는."
"인생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기쁘겠지."
덕배가 헛웃음을 짓고, 가을이 고개를 가로젓고 지화가 답했다. 세 괴인 간부들은 그간의 동고동락을 통해 나름 우애를 다졌다. 덕배가 지화에게 물었다.
"야. 그러고 보니 너 등급 올랐냐?"
"아니. 천가을, 너는?"
덕배는 여전히 저보다 몇 살은 형인 지화에게 말을 막 했지만, 지화도 큰 용기를 내고 둘에게 말을 놓았다. 어차피 다 죽은 목숨이니, 같은 간부로서 친하게 지내기나 하자는 의미였다. 천가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야, 나는 너희랑 달라. 난 S급의 벽이고, 니들은 A랑 B라고. 희소가치가 달라."
가을은 눈을 흘겼다. 지화도 덕배도 아직 B급과 C급에 머물러 있었다. 지화가 선글라스를 고쳐 올렸다.
"단장님이 C급 D급 너무 쉽게 만드셔서 이젠 죄다 이능력자라...."
"불귀족이든 물가촉천민이든 이젠 지나가는 개미처럼 흔하긴 하지."
광검이 관뚜껑을 부수고 괴인으로 부활한 이후, 피닉스는 본격적으로 서울의 주민들을 이능력자로 각성시켰다.
화속성 친화율 50의 벽에 걸려 각성한 사람의 수는 불과 100여 명도 되지 않았지만, 그마저도 기적으로 여기고 각성한 모두가 청화단에 입단을 신청했다.
그 100여 명 말고도 수백 명이 더 입단 신청을 해놓은 실정이었다. 지화가 스크린 속 입단 신청서를 하나둘 폐기하며 물었다.
"설화공주는 어떻게 끌어들이셨을까? 철천지원수나 다름없는데."
지화의 의문에 둘이 고개를 끄덕였다.
피닉스 왈, 한국은 루살카 덕분에 20년 전부터 물의 기운이 충만한 곳이라 하더라.
덕분에 알게 모르게 사람들의 수속성 친화력이 높아졌고, 이는 대한민국 히어로 중 30%가 수속성의 이능력을 가진 기이한 비율로 나타났다.
그래서 수속성 이능력자는 한국에서만큼은 물가촉천민이라 불렸다. 그리고 이제 수속성 이능력자는 발에 치일 정도로 많았다.
"아니, 5천이 뭐냐. 율곡 이이야? 히어로 10만 양병설 주장하게?"
"서울 생존자들 대부분 친화율 높은 사람만 살아남았다잖아."
"다른 사람들도 물이랑 불만 낮지, 다른 정령 오면 곧장 각성할 거라고 했죠."
서울 6만 주민 중 무려 5천이 수속성 이능력자로 각성했다.
물론 그 대부분이 D급보다 못한 정도였지만, 최소한 대기 중의 수분을 끌어다 물줄기를 쏘는 정도의 능력은 갖추었다.
A급은 한 명도 없고 B급도 고작 20명 밖에 없었지만, 그들 스스로 괴수에게 대항할 힘이 생겼다는 게 주민들에게는 기적이었다.
"덕분에 니들은 아주 신났지, 응?"
"신의 은총이니까요. ...또다른 신께서 있다는 건 조금 마음에 걸립니다만."
유이신은 눈썹을 으쓱였다. 온갖 표정을 지으며 과장하듯 말하는 태도에 덕배는 몹시 아니꼬웠다.
"저거 A급 됐다고 자랑하는 거 봐라?"
"후후. 각성해서 겨우 머리를 되찾은 겁니다. 자랑스럽죠, 당연히."
잘려나간 머리가 아니라 각성하며 새로 돋아난 거라 가을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듀라한 중에서 유일하게 목을 찾은 유이신은 나름 준 간부의 위치에 이르렀다. 지화가 떫은 얼굴로 말했다.
"덕분에 아주 깃털들만 신났어. 서울에 종교 생기겠더라."
유이신이 지화의 팔뚝을 치며 웃었다.
"몰랐습니까? 벌써 생겼습니다. 정령신앙이라고요."
"그거 설마?"
덕배의 말에 유이신이 두 팔을 하늘로 들어 올렸다. 보는 이가 부끄러워지는 자세였다.
"저는 불의 정령을 믿는 태양교단의 신도입니다. 비록 지금 서울에는 물의 정령을 믿는 호수교단의 신도들에게 밀려 세력은 약합니다만...."
"21세기에 웬 애니미즘? 사람들이 그걸 믿어?"
가을의 지적에 유이신이 검지를 들어 좌우로 움직였다.
"이미 사람들은 정령의 힘을 실감했습니다. 무능력자에게는 이능력을, 이능력자에게는 다음 경지로의 각성시켜주는 정령의 권능. 신이 아니고 무엇일까요?"
"신이 신 다워야 신이지."
덕배가 비꼬자 유이신의 눈이 차가워졌다. 금방이라도 활시위를 당길 것 같은 기세에 덕배가 역으로 성질을 냈다.
"맞잖아! 여기 천가을 빼고 다 그 신이라는 놈한테 죽었다가 부활한 거! 신이 아니라 악마야, 그건!"
"부활의 권능까지 가지고 계시죠. 신이 아니고 무엇일까요?"
"아악! 됐어! 말이 안 통하네, 진짜!"
덕배가 의자를 내팽개치며 라운지를 떠났다. 가을은 촉수로 의자를 정돈하고는 커피를 홀짝였다.
"쟤 요즘 들어 히스테리 심해졌다. 생리하나?"
"...크흠, 크흠흠!"
지화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리자, 가을이 짓궂은 얼굴로 지화에게 슬쩍 속삭였다.
"어머. 숙맥은. 근데 놀라운 거 알려줄까? 여자가 괴인이 되면 말이야...."
가을은 세상 행복한 얼굴로 제 하복부를 쓰다듬었다.
"생리 안 한다?"
"아아! 벌써 이런 시간이?!"
지화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는 청화단에서 상당한 권력자에 올랐음에도 여전히 동정이었다. 유이신이 쭈뼛쭈뼛 가을의 옆에 앉았다.
"저, 너무 등대님 놀리지 않으셨으면...."
"왜? 너 설마...."
유이신은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가을은 촉수로 머리를 긁적이다가 몸을 일으켰다.
"...좋을 때다, 정말. 누구는 아직도 짝사랑인데."
"가을 님 아직 젊으십니다."
"시끄러워. 곧 계란 한 판 인데 무슨. 아, 생각해보니 괘씸하네?"
가을이 촉수로 유이신의 사지를 묶었다.
"다른 임무 없지? 그럼 방에 들어가자. 이거 능숙하게 쓰려면 연습 더 해야 하거든? 나중에 피닉스랑 본게임 들어가면 초보 티 내기 싫단 말이야."
"시, 싫습니다! 촉수는 이제 그만으읍읍?!"
유이신의 입에 촉수가 박혔다. 가을은 싱글벙글 웃으며 유이신을 촉수로 묶고는 라운지를 떠났다.
* * *
<오전 11시. 신서울, 유성일가 저택.>
"자요. 코어 100개."
"물건 확인했습니다. 매번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호갱님."
은유하는 가방에 들어있는 코어를 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피닉스는 제 앞에 놓인 딸기 프라페를 숟가락으로 크게 떠서 입에 넣었다.
"A급 22개. 나머지는 최대한 B나 C로 모았어요. 이게 사실상 서울에서 모은 전부에요."
"충분합니다. 안 그래도 이번에 히어로 슈트 하나 오더메이드 들어왔는데 잘됐네요."
"오더메이드?"
피닉스가 숟가락을 문 채 물었다. 은유하는 우아하게 커피잔을 들어 올려 커피를 한 모금 홀짝였다.
"네. A급 히어로들한테는 특별히 맞춤제작으로 슈트를 제작하거든요. 운사님이 거의 전 재산 털어서 요청하셨어요. A급 코어 한 일곱 개는 쓸 재산을요."
"......싸게 해줘요. 서울 와서 개고생하다 갔는데."
피닉스는 평정을 가장하며 다시 파르페에 숟가락을 찔렀다. 은유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장난을 쳤다.
"어머. 운사 박라온한테도 마수를 뻗쳤어요? 운사님이랑 애는 몇 명까지 낳으셨을까?"
"......에휴. 내가 진짜 말을 말아야지."
피닉스가 숟가락을 들어 끝을 은유하에게 향했다.
"거꾸로 물어보죠. 내가 그쪽이랑 결혼해서 애를 몇이나 낳았을 것 같아요?"
은유하가 기다렸다는 듯 두 손을 펼쳤다. 손가락 세 개가 접혀있었다.
"일곱!"
"...아, 진짜."
피닉스가 고개를 의자 뒤로 젖혔다. 막 막걸리 뚜껑을 열려던 허윤환과 눈이 마주쳤다. 허윤환이 더러운 오물을 본 것처럼 막걸리 뚜껑을 닫았다.
"뭘봐, 쓰레기. 술맛 떨어지니 눈깔 돌려라."
"뭘요, 로리콘. 공권력이 무섭지도 않아요? 요즘 초딩보다 루살카가 더 작은데?"
"루살카와 함께 살 수 있다면 그깟 공권력 따위야. 그보다 너 회장님이랑 일곱 명이나 낳았냐? 세상에서 가장 예쁜 우리 딸 놔두고?"
"경찰은 뭐하나. 저딴 성희롱 범죄자 안 잡아가고."
허윤환과 피닉스가 으르렁거렸다. 은유하는 그 누구의 편에도 끼지 않고 조용히 커피를 마시다 입을 열었다.
"그보다 말이에요. 하랑이는 어떻게 설득하신 거예요?"
"그건 나도 궁금하군."
허윤환이 의자에 앉았다. 피닉스는 손가락으로 베일을 만지작거렸다.
"뭐, 뭐가요?"
"고객님 성격상 어쭙잖게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고 그냥 사실대로 다 얘기했을 텐데, 하랑이가 왜 고객님을 안 죽이려 들고 서울 사람들 각성시켜주냐고요."
"......성주 죽이기 전까지는 일시적으로 협력하기로 했어요. 석하랑도 서울 지키고 싶어 하니까."
"음. 그래야 히어로지."
피닉스가 짜게 식은 눈으로 허윤환을 노려봤다.
"뭐래. 당신 살아있는 거 알면 우리 셋 중에 당신부터 냉동창고 행이에요. 혹시나 딸 보고 싶다고 예전처럼 고아원 나무 뒤에서 기웃거릴 생각 꿈에도 마요."
"......안 들키면 되지 않나?"
"야 이-"
피닉스가 쪼듯 입을 열려고 하자, 은유하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럴 일은 없으니까 안심하세요, 아버님. 아버님을 위해 절대로 들키지 않는 특별한 히어로 슈트를 준비했으니까. 말씀하신 디자인대로."
"그냥 디자인 자체가 스포인데.... 잠깐, 아버님?"
피닉스가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허윤환이 은유하를 가리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당찬 아가씨더군. 하랑이 짝이 나타날 때까지, 자신이 결혼하겠다고 했다. 대외적으로는 은재민과 결혼하는 것으로."
"하랑이는 저도 아끼는 동생이에요. 임신한 아내 놔두고 다른 여자 후리고 다니는 놈팡이한테 맡길 수야 없죠."
"......그래요, 저 쓰레깁니다. 됐죠?"
피닉스가 두 손을 들었다. 은유하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상체를 쓱 가까이했다.
"피닉스 님."
"녜?"
은유하가 최초로 피닉스를 이름으로 불렀다. 피닉스의 두 손이 의자 손잡이를 꽉 붙잡았다.
"저와 사랑하실 때는 행복하셨나요? 아직도 당신의 기억 속에 있는 저를 사랑하시나요?"
"......."
피닉스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사랑했었죠."
"......그래요?"
은유하가 의자에 앉아 커피를 들이켰다. 제법 길게, 커피잔으로 얼굴을 가렸다.
"누군진 몰라도 참 복에 겨운 사람이네요. 고객님 사랑을 가져가다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죠."
피닉스는 파르페를 크게 떠 앙 물었다. 은유하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그럼 적대적 M&A 하지 뭐."
"...무슨 말씀이시죠?"
피닉스가 의미를 모르겠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은유하는 눈썹을 으쓱이며 커피를 다시 마셨다. 허윤환이 막걸리병을 만지작거리며 혀를 내둘렀다.
"회장님도 참 대단한 여걸일세."
"칭찬으로 받아들일게요."
"...광검? 설명 좀 해주실래요?"
"싫다."
노골적으로 숨기는 둘의 태도에 피닉스는 입술을 삐죽였다.
그리고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목 카라에 건 배지에 손을 올리며 키득키득 웃었다.
"...푸흐흐. 은유하 아가씨. 아무래도 제 걱정을 할 때는 아닌 것 같네요."
"그게 무슨, 아. 하랑이 전화 왔다."
은유하가 자리를 떠났다. 피닉스가 막 막걸리를 들이켜려던 허윤환에게 짓궂은 얼굴로 물었다.
"이봐요, 광검. 하랑이가-"
"내 딸 친한 척 부르지 마라."
"...석하랑이 만약에 결혼-"
철컥! 광검이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검끝이 피닉스의 미간에 종이 한 장 들어가기도 힘들 정도 위치에 멈췄다. 광검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괴인이 되니 이게 문제군. 쓰레기를 치우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니."
"......."
피닉스는 해탈했다. 진실을 밝혔다가는 혹시나 광검이 주인공을 살해할까 봐, 그냥 피닉스는 쓰레기가 되기로 했다.
"하아. 알겠어요. 근데 그건 명심해요. 광검, 당신...."
피닉스가 손가락을 튕겼다. 하반신이 불에 타오르며 피닉스의 육신이 다른 곳으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피닉스는 공간 전이를 마치기 직전, 아주 빠르게 입을 놀리며 사라졌다.
"석하랑 결혼식에 신부 측 아버지로 설지, 아니면 신랑 측 아버지로 설지 저는 모릅니다?"
피닉스가 사라졌다. 다 먹은 파르페 그릇 안에 놓인 숟가락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허윤환은 조용히 피닉스가 남기고 간 말을 곱씹었다.
"응, 하랑아. 언니 지금 쉬고 있어."
예민한 청각에 옆 방으로 간 은유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야, 언니 하나도 안 피곤해. 정말? 서면에 그런 카페가 있어? 알려줘서 진짜 고마워! 언니 조만간 직접 부산 내려갈게. 뭐? 사랑한다고? 어머, 얘 사람 부끄럽게 만드네. 알았어, 언니가 너 엄~청 사랑하는 거 잊지 마? 알겠지?"
"......설마."
농담조로 던진 립서비스가 현실이 되지는 않겠지.
갑자기 턱시도를 차려입은 석하랑의 모습이 떠올랐다. 허윤환은 루살카가 보고 싶어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