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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94화 (94/1,497)

〈 94화 〉OMAKE #013, A Snowy Night (4)

허윤환은 좌절했다. 루살카는 어떻게든 제 몸의 마기를 억눌렀다.

루살카의 오른손, 벌레의 마디 같이 변한 손이 갓 태어난 아기에게 닿으려는 순간, 허윤환은 본능적으로 벽에 두었던 검을 빼들어 아이를 보호했다.

루살카는 허윤환의 행동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남은 마력을 이용해 허윤환의 몸을 얼렸다.

정말로 죽이려고 하는 걸까. 허윤환의 눈에 좌절이 담기고, 이내 체념이 서렸다. 속초에서의 첫 만남 이후로 루살카는 언제든지 저를 죽일 수 있었다.

1년간 행복했다. 언제든지 너에게라면 죽어줄 수 있다. 허윤환은 그렇게 눈을 감았다.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그 때, 둘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루살카의 왼손이 허윤환의 철검을 내렸다. 루살카는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나 허윤환과 마주섰다.

허윤환이 울부짖었다. 제발 그러지 말라고. 차라리 나를 죽이고 너라도 살라고.

"다크 레기온의 간부였다면 그 제안을 받아들을 겁니다. 하지만 루살카는 연인으로서, 어머니로서 죽기를 바랐습니다."

푹. 루살카가 허윤환의 철검으로 다가갔다. 날카로운 검끝이 루살카의 가슴을 찔렀다.

여전히 허윤환의 몸은 얼어붙어 움직이질 않았다. 루살카는 한걸음, 한걸음 허윤환에게 다가갔다.

"그만, 그만해."

석하랑의 거부에도 화상은 멈추지 않았다. 루살카가 윤환에게 다가갈때마다 철검은 심장을 찔렀고, 허윤환은 오열했다.

"그만 하라고!!"

석하랑이 소리쳤다. 내팽겨져진 아이도 시끄럽게 소리지르며 울고 있었다. 루살카는 검의 자루까지 걸어가 윤환을 끌어안았다.

- 내가 죽을게. 대신 서방님이 하랑이 지켜줘. 나말고 다른 여섯 명이 더 있을테니까. 서랍에 써놓은 일기장 꼭 확인하고....

루살카가 제 명치에 손을 박아넣었다. 알사탕크기의 작은 유리 구슬. 루살카는 제 코어를 꺼내 윤환의 심장에 박아넣었다.

- 이 힘으로, 하랑이 지켜줘. 부탁해.

그 말을 끝으로 루살카는 고개를 떨구었다.

"괴인으로, 괴수로 폭주하기 전에 허윤환의 검에 자살한다. 나쁘지않은 선택이었습니다. 다만...."

루살카의 몸이 무너진다. 허윤환의 볼을 쓰다듬는 손이 눈가루가 되어 흩날린다. 괴인으로 변한 갑주는 부서지는 빙하처럼 붕괴되었다.

"몰랐던 게 문제였습니다. 자신이 죽어도 장기는 남게 될거라는 것. 그리고 그게 당신에게 들어갈 수도 있다는 것."

허윤환을 꽁꽁 얼어붙게 만든 얼음이 깨어지고, 철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바닥에는 나비의 인분같은 눈가루가 소복히 쌓였고, 허윤환은 제 가슴에 박힌 코어에서 오는 격통에 무릎을 꿇었다.

허윤환은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코어가 루살카를 미치게 만들고 극단적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마저 타락시키려 한다.

"루살카도 허윤환도 판단할 근거가 없었습니다. 루살카는 당신과 허윤환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가득했고, 허윤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윤환은 바닥을 기며 철검을 들었다. 눈동자가 보라색으로 물들고 철검을 겨눈 그 끝에는 그들이 낳은 아이가 있었다.

"그저 코어가 아이에게 가는 것만은 막아야한다. 그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게 각성의 계기였습니다."

윤환이 검을 내려찍으려던 순간, 눈동자에서 금색 빛무리가 터지며 장기를 몰아냈다. 루살카의 코어를 통해 더 높은 경지로 각성한 윤환은 곧 정신을 차렸고 철검을 떨어뜨렸다.

정신을 차린 허윤환은 아이와 일기장을 챙겨 집을 불태웠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부산을 빠져나가다가 아이를 길가에 내팽겨쳤다.

아이는 고통에 울고, 아버지는 슬픔에 울었다. 철검을 아이에게 들었지만, 이내 곧 철검을 내팽겨치고 통곡하며 울었다.

하루 뒤, 허윤환은 아이를 요람에 넣어 고아원 문 앞에 두고 도망쳤다. 차마 딸을 죽이려 한 제 자신이 부끄러워, 루살카가 남겨준 하랑이라는 이름만 남겨둔 채 떠나버렸다.

그것으로 회상은 끝났다.

"이게 지금 뭐고...."

석하랑은 울고 있었다.

"이래서야 내가 태어난게 죄 아이가...."

"그건 아닙니다. 죄인은 성주입니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겁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뚝배기 깨버릴 때 조금 더 시게 때릴 걸 그랬네."

석하랑이 시원섭섭한 웃음을 지으며 눈물을 닦았다.

"그래서 지금 이게 끝이제? 여기서 더 있나?"

"큐브에 의한 회상은 이걸로 끝입니다. 당신께서 과거를 다 보셨으니, 이제 5분 정도면 이 세계도 무너질겁니다. 다만...."

창염이 무덤 너머 정원을 가리켰다.

"그동안 이야기할 시간은 있을겁니다. 회포를 푸시기에는 모자라지만, 아무쪼록 못다한 말씀 다 나누시길 바랍니다."

창염이 손가락을 튕겨 불길을 만들어냈다. 그 불길의 끝에는 석하랑이 1년을 넘게 그리워했던, 그리고 1년을 넘게 원망했던 남자의 뒷모습이 있었다.

"이게, 무슨."

"시공간이 뒤틀리고 세계선이 흔들리는 순간이라면 이런 일도 생길 수 있다, 그런겁니다. 요컨대...."

창염이 처음으로 입꼬리를 살짝 들어올렸다.

"세계를 구한 용사님께 제가 재량으로 드리는 서비스 타임, 이라는 겁니다."

창염이 몸을 불사르며 사라졌다. 동시에 하랑이 손에 쥐고 있던 큐브가 먼지로 바스라졌다.

또각. 또각.

하랑은 흔들리는 발걸음으로 남자에게 다가갔다. 남자는 아무말없이 정원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가 몸을 돌렸다.

"......죽었더니 이런 일도 다 있군."

너털웃음을 지으며 머쓱한듯 머리를 긁적이던 남자는 하랑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약 다섯 발자국. 남자와 하랑이 훈련을 할 때마다 두었던 거리였다.

"......쌤은, 저승가셨더니 한 5년은 더 젊어지신 것 같네요."

"너는 그 사이에 많이 자란 것 같구나."

서로가 웃는다. 부끄러움이 많은 건 유전인건지, 서로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세계는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아버지."

석하랑이 입을 열었다. 광검, 허윤환의 눈이 커졌다.

"왜 나를 버렸는지, 왜 나를 12년동안 찾지고 않고 고아원에 던져뒀는지 묻지 않을게요. 대신 하나만 여쭤볼게요."

"......."

광검은 묵묵히 석하랑의 질문을 기다렸다.

"엄마랑 사랑해서 행복했어요?"

"...그래."

광검이 긍정했다. 목소리는 그답지 않게 흔들렸다.

"행복했다. 루살카를 만나서. 내가 인생에서 가장 잘한 두 가지가 있다면, 하나는 그 날 속초 바닷가에 밤 산책을 나간거다."

"다른 하나는요?"

광검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 날, 고아원에 너를 찾으러 간 날. 발걸음을 돌리지 않고 너를 찾아갔던 것."

"12년이나 걸릴 발걸음은 아니었죠?"

"그래. ...하랑아."

평소에도 그는 하랑을 이름으로 불렀지만, 하랑은 그 목소리에 담긴 여러 가지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

"행복해라.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게 전부다."

"당연하죠. 행복할 거에요. 아버지랑 어머니가 행복했던 것보다 더. 같이 세계 여행도 다녀보고, 같이 바다 보이는 집 하나 사서 캠핑하면서 놀고...."

세계가 무너진다. 5분이라는 시간은 거짓말처럼 빠르게 감겼다.

"...아버지, 그래도 저 아버지 용서한 거 아니에요."

"그래. 이해한다."

"그러니까 아버지도 저 용서니 뭐니 뭐라하지 말아요."

"...내가 왜?"

석하랑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었다. 그 쳐진 눈꼬리가 꼭 루살카를 닮았다고, 윤환은 생각했다.

"저 이ㅁ-"

세계가 무너졌다.

* * *

"잘 다녀왔어?"

남자는 걱정어린 눈으로 하랑을 맞이했다. 하랑은 눈을 비비며 남자의 어깨를 주먹으로 쳤다.

"니, 다 알고 한기제?"

"...아니?"

남자는 고개를 돌렸다. 하랑은 남자의 멱살을 쥐고 흔들어댔다.

"최소한 사람 마음의 준비라도 하게 뭐가 나오는지는 알려줘야 카는거 아이가, 이 문디야!!!"

"아니, 나, 안 봤어, 진짜로!!"

"주둥아리 안 다무나! 내가 보다가 세ㄱ...."

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남자가 조용히 멱살을 풀고 거리를 벌렸다.

"무슨 일 있었어? 세?"

"...새삼스러웠는지 아나!"

그게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하랑의 명예와 수치심을 위해 애써 말을 삼켰다. 하랑이 겨우 진정하고 말을 이었다.

"...아무튼! 나 이제 부산 안 올 거야. 너 따라서 서울에 살겠어."

"갑자기 서울말?"

"닥치라."

"네."

바닷바람이 머리칼을 흩날려 볼을 간질였다. 하랑은 머리를 정돈하며 말했다.

"알고 싶은 것도 알았으니 이제 됐어. 기일 때 종종 찾아오면 돼. 생일이랑 똑같으니까 외우기도 쉽네. 쳇."

"......화해했구나?"

남자의 말에 하랑은 쑥쓰러운 듯 남자의 가슴을 쳤다.

"화해는 무슨. 애초에 싸우지도 않았다. 내 혼자 짜증내고 내 혼자 빡친거지. 아버지가 왜 그랬는지 이제는 온세상 사람들 다 아는데 내가 그러면 되겠나? 나만 못된 년 되지."

"알긴 아는구나."

"니 오늘따라 되게 시건방지네."

남자는 슬며시 웃었다. 하랑은 그 웃음을 어떻게 깨뜨려줄까 고민하다가, 표정을 굳히며 진지한 분위기를 잡았다.

"내 오늘 왜 여 왔는지 아나?"

"...글쎄? 유나가 부추겨서 그랬을까? 아니면 우리 하랑이 내가 준 생일 선물에 너무 감동해서 그랬을까? 이유가 뭐야?"

유들유들한 얼굴이 어떻게 무너질까. 하랑은 속으로 쿡쿡 웃으며 대답했다.

"진짜 나 하나도 이해못했는데, 부모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이해가 가더라."

"......응?"

남자의 표정에 의아함이 스쳤다. 하랑은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웃었다.

"내 생일 선물로 큰 거 줬으니, 나도 그만큼 좋은 거 줘야겠제?"

안주머니에서 뽑힌 물건에 남자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하랑은 분홍색의 긴 물건을 남자에게 내밀었다.

"아, 아냐. 너 애기 가지기 싫어했잖아. 아버님처럼 애한테 안 좋은 일 저지를까봐."

"그랬지. 한 번도 콘돔 안 쓴 적 없었고. 근데 있다 아이가...."

남자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랑은 제 손에 들린 테스트기에 선명히 그어진 두 개의 줄을 가리키며 웃었다.

"니 잘 때 윽수로 잘 자드라?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하랑이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말고, 그 사이를 검지로 넣었다 뺐다하며 웃었다.

"축하한다. 니 이제 아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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