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OMAKE #013, A Snowy Night (3)
새해가 밝았다.
전 세계에 열린 일곱 개의 차원문은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고, 더이상 괴수는 쏟아지지 않았다.
비록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아직 차원문에서 튀어나온 괴수들이 거리를 배회하고 있지만, 이능력자들이 하나 둘 나타나며 괴수들을 쓰러뜨려나갔다.
어느덧 한 달이 지나고, 2월 1일.
한국은 민족대명절인 설을 앞두고 있었다.
* * *
<2월 1일.>
"정말 이걸로 되겠는감?"
"충분합니다."
허윤환은 여관 주인에게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했다.
루살카와 하룻밤을 묶었던 날 아침, 여관을 습격한 괴수를 퇴치한 덕분에 여관 주인은 무상으로 방을 내주었다.
허름한 방을 내어줘서 미안했다며 주인이 좀 더 좋은 방을 주려고 했지만, 허윤환은 한사코 괜찮다며 호의를 거절했다.
그렇게 약 한 달간 여관에서 묶으며 윤환은 방위 부대에서 큰 활약을 했다.
밤이면 밤마다 방에서 기다리던 모 괴물에게 쥐어짜내어지기도 했지만, 이상하리만큼 자고 일어나면 활력이 기이할 정도로 회복되었다.
그렇게 한 달을 보냈고, 윤환은 드디어 군복을 벗고 강원도를 떠나기로 했다.
"부산까지 어떻게 가려고? 차도 아직 안 다닐텐데."
"걸어가려고요. 동해 해안선 따라 쭉 내려가면 될 것 같습니다."
"그거야 그렇지. 총각이야 그 이능력인지 뭔지 각성했으니까.... 그런데 그 아가씨는?"
여관 주인이 새끼 손가락을 흔들었다. 윤환은 헛기침을 했다.
"큼. 곧 내려 올겁니다."
"준비 다 됐어. ...아주머님, 그간 감사했습니다."
백발의 소녀, 루살카는 제 몸보다 더 큰 짐을 등에 메고 여관 주인에게 허리를 숙였다.
"그려. 내려갈 때 조심해. 괜히 또 밤에 어디서 하다가 잡혀가지 말고."
"다시는 안 그럴 거예요. 후후."
루살카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웃었고, 윤환은 먼 산을 바라봤다. 주인이 피식 웃으며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자, 챙겨."
"??"
루살카는 제 손에 들린 물건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윤환은 곧 그 물건을 빼았아들며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어르신!"
"흐흐, 내가 저기 박 씨한테 부탁해서 하나 챙겼지. 자네들한테 이게 꼭 필요할-"
"이게 뭐에요?"
루살카가 윤환의 손에 들린 물건을 낚아챘다. 여관 주인의 눈초리가 점점 사나워졌다.
"아가씨, 그거 뭔지 몰라?"
"네. 처음보는 건데.... 아, 약이에요?"
루살카가 비닐을 찢었다. 윤환이 놀라 손을 뻗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안의 내용물이 바닥에 떨어졌다.
탁. 루살카는 곧장 그 물건을 집어들었다.
"...고무?"
루살카는 고리 형태로 감긴 고무를 이리저리 만지다가 안을 후 불었다. 고무는 바람에 부풀어올라 긴 기둥 형태를 만들어냈다.
여관 주인이 윤환에게 손짓을 했다.
"총각. 잠깐 나 좀 볼까?"
허윤환이 여관 주인에게 1시간 넘게 이야기를 듣고 오는 동안, 루살카는 그것을 제 손가락에 끼우며 놀고 있었다.
그렇게 그 둘은 부산으로 떠났다.
* * *
<2월 4일. 부산 해운대.>
"여기가 서방님 집이야?"
"...루살카? 서방님이란 거는...."
"알아. 부모님 앞에서는 바로 말씀 안드릴거란다."
루살카가 검지를 입술에 붙이며 찡긋 웃었다. 장난기 서린 그 눈빛에 윤환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우여곡절은 많았지만, 결국 루살카 덕분에 부산으로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다.
무너진 도로는 얼려서 통과했고, 절벽을 내려온 괴수는 루살카의 손짓 한 번에 얼음동상이 되었다. 중간에 포항 부근에서 나타난 뱀 형태의 이무기조차도 루살카의 얼음창 한 번에 절명했다.
물론, 그렇게 마력을 사용할 때마다 윤환은 짜내졌다. 마력 회복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루살카는 고무를 단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임신하면 어떻게 하지.'
윤환 혼자서 고민하고 고민했지만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그저 일단 부모님을 찾아뵙고 시간을 들여 고민을 하자. 그게 루살카를 데리고 내려오며 든 생각이었다.
쾅쾅쾅.
윤환이 푸른 철문을 세게 두드렸다.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어머니, 아버지! 윤환이 왔습니다!"
안쪽까지 크게 들릴 정도로 거세게 철문을 쳤다. 그러나 안에서는 그 누구도 나오지 않았고, 오히려 옆집에 있던 중년 남자가 나왔다.
"누가 이리 시끄럽.... 윤환아!"
"아저씨!"
양씨 아저씨가 달려와 윤환을 와락 안았다. 윤환은 그 격한 포옹에 어쩔 줄 몰라했다.
"와 이제 오노?! 중간에 느이 아버지 못 봤나?!"
"...예?"
윤환의 얼굴이 굳었다. 자연스레 옆에있던 루살카도 윤환의 감정을 읽고 표정이 굳었다.
양씨는 포옹을 풀고 윤환의 집 안을 가리켰다.
"...일단 기다려라. 느이 집 드가서 얘기하자."
양씨는 잠시 자신의 집에 들어가서 열쇠 하나를 가져왔다. 그 열쇠는 윤환의 집 열쇠였다.
"......."
윤환은 정신이 아뜩해졌다.
* * *
<2월 5일. 허윤환의 집.>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분다. 연탄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차가운 골방에 밤바람이 스며든다.
"괜찮니?"
루살카는 윤환의 몸 위에 누워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윤환은 루살카의 손을 제 손으로 덮으며 웃었다.
"괜찮아. 살아계실 거야."
"......내가 어떻게 해볼까?"
루살카의 눈동자에 흰색의 빛이 서렸다. 윤환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루살카를 끌어안았다.
"아냐. 너 그러다 지난번처럼 기절할 수 있어. 그러지 마."
포항에서 죽였던 괴수. 훝날 A급이라고 불릴 이무기는 루살카에게 살해당했지만, 루살카는 과도한 마력의 사용으로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살아계신다면 연락 해주시겠지. 강원도에 연락도 넣어뒀으니까, 혹시 도착하시면 이쪽에서 올라가면 돼."
편지도 전화도 먹통이 되어버렸지만 조금씩 간신히 복구되고 있다. 기적적으로 윤환은 속초 여관의 주인과 짧게나마 통화하는데 성공했고, 사정을 파악한 주인은 혹시나 윤환의 부모가 오면 곧장 연락을 주기로 했다.
"나 혼자 이런 것도 아니고 세상 전체가 이렇게 되었으니 어쩔 수 있겠어? 옆집 양씨 아저씨는 자식들이 다 괴수에게 잡아먹혔다고 하잖아. 그에 비하면......."
루살카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윤환은 곧바로 루살카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며 사과했다.
"아니다. 미안해.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미안."
"네가 미안할 게 뭐 있어? 읏차."
윤환이 루살카와 몸을 뒤집었다. 작은 체구가 곧장 뒤집혔다.
"오면서 마력 썼지? 피곤할테니까 내가 움직일게."
"...그, 서방님?"
루살카가 부끄러운 얼굴로 말했다.
"오늘은.... 서방님 하고 싶은 대로 해."
"루살카?"
팔을 뻗어 목에 감는 루살카의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동정과 슬픔을 담고 있었다.
"내가 지금 해줄 수 있는 게 이런 거 뿐이라, 미안해."
"...괜찮아."
윤환의 몸이 루살카와 겹쳐졌다.
* * *
"저 때 내가 생긴기가...."
석하랑은 머쓱함에 머리카락을 비비 꼬았다. 어느덧 허리까지 내려온 머리칼은 루살카의 것처럼 새하얬다.
"아뇨. 한 달 전입니다. 최초로 교합했던 그 날. 넘쳐흐를 정도로 과한 착정에 바로 임신한 겁니다."
석하랑의 옆에 푸른 머리칼의 소녀가 나타났다. 생전 처음 보는 존재였지만, 하랑의 안에 있는 정령의 힘은 곧장 그 소녀의 정체를 파악했다.
"니, 피닉스가?"
"그럴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습니다. 단지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건...."
창염이 앞의 화상을 가리켰다.
"당신의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보내진 재담꾼, 그 정도로 생각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뭘 이야기 하려고?"
창염은 무표정한 얼굴로 화상을 보며 말했다.
"루살카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가. 그에 대한 진실."
화상이 하나둘 흐르며 두 남녀의 일상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해운대 바닷가를 산책하고, 괴수 습격을 퇴치하고, 부모의 연락을 기다리며, 사람을 구하고, 사랑을 나누는 수많는 회상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루살카의 배가 조금씩 불러오기 시작했다.
* * *
<9월 9일. 허윤환의 집.>
어느덧 루살카의 배는 만삭이 되었다. 이제는 제법 걷는 것도 힘들어 마력을 써서 움직이지만, 그 마력도 교합을 통해 받아들이지 않았다.
"츄, 츄읍. 후아."
루살카는 달뜬 숨을 몰아쉬며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정을 입으로 삼켰다. 윤환은 앉아있던 자세 그대로 루살카의 머리를 쓸었다.
"괜찮아?"
"당연하지. ...내가 더 미안한 걸. 이렇게밖에 해결 못 해줘서."
윤환의 기둥은 아직 풀릴 기미 없이 딱딱했다. 벌써 세 번이나 입과 손을 사용해 정을 빼냈지만, 윤환의 물건은 여전히 서있었다.
"서방님."
루살카가 기둥 옆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
하지만 곧 말을 삼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윤환은 루살카의 몸을 들어올려 인형처럼 마주안았다.
"왜 그래. 무슨 할 말 있어?"
"......아냐. 내가 말하면 실망할 것 같아."
루살카의 눈에는 두려움이 잔뜩 서려있었다. 윤환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해도 돼. 뭐든지."
"...그럼 말이야, 서방님."
루살카가 입술을 깨물었다가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내 뱃속의 아기, 지우면 안 되겠니?"
"......."
윤환의 표정이 굳었다. 안고 있던 손에서 힘이 풀렸다. 루살카는 충격을 받은 윤환의 모습에 고개를 떨구었다.
"......어째서."
윤환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루살카. 혹시 원치 않았어? 그래서 그런 거야? 아니면 혹시 내가-"
"아니야, 그런 건 절대로 아니야. 단지...."
루살카의 얼굴은 몹시 혼란스러워 보였다.
"이 아이를 낳고 나면, 내가 더이상 내가 아니게 될 것 같단다. 그게 무서워."
루살카는 떨고 있었다. 윤환은 살포시 루살카를 끌어안아 등을 토닥였다.
"예전에 아버지께 들은 이야기인데, 내 어머니도 그러셨대. 나를 낳기 전에 수도 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힘들고 지쳐서 포기하고 싶어지기도 했다고 하시더라."
"......."
루살카가 윤환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윤환은 머리칼을 손으로 섬세하게 쓸었다.
"그런데 그게 다 어머니가 되는 과정이라고 하더라."
"어머니. 내가?"
루살카의 질문에 윤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네가 내 아이를 낳아줬으면 좋겠어. 가진건 쥐뿔도 없고 너보다 마력도 낮은 놈이지만, 앞으로 노력할게. 나한테 네가 첫 여자이자 마지막 여자가 될 수 있도록.
"...옆집 양씨네 둘째는?"
"걔는 나랑 아무 사이도 아니었어. 나한텐 너밖에 없어, 루살카."
윤환은 표정을 굳혔다. 루살카는 슬쩍 마력을 훑어 윤환의 감정을 읽었다.
진심이었다. 루살카는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애써 참으며 물었다.
"만약에 낳다가 문제라도 생기면 어떡하니? 지난번에 도서관가서 찾아보니까 죽을만큼 아프다던데."
"네가 조금 체구가 작은 편이기는 하지만,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야. ...내 것도 그렇게 다 감싸안아줬잖아?"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
루살카가 새침한 얼굴로 윤환을 노려봤다가, 엉덩이에 닿는 뜨거운 감촉에 화들짝 놀랐다. 윤환은 생리현상으로 인한 발기에 고개를 돌렸다.
"......미안."
"......어머니. 푸훗."
루살카가 살포시 미소지으며 슬쩍 몸을 들어올렸다.
"서방님. 그런데 그거 알아?"
"...뭘?"
루살카가 또 개구쟁이 같은 눈빛으로 윤환을 올려다봤다.
"우리 아직 그 쪽으로는 안 해본거?"
"......저기, 잠깐? 아기한테는-"
"괜찮아. 마력으로 충격완화할 거야."
* * *
"......어머니도 저런 고민을 하셨었나."
석하랑이 두 주먹을 불끈쥐었다. 창염이 옆에서 하랑을 위아래로 훑으며 물었다.
"당신도 비슷하지 않나요?"
"......기지."
하랑이 두 손을 깍지끼고 제 배 앞에서 꼼지락거렸다.
"나도 내 아버지처럼 내 애 버릴까봐 무서웠다. 혹시나 나도 그렇게 될까봐 두려워서.... 근데 어머니란 사람은 진짜 너무하네. 내 태어나기도 전에 죽일라 칸거 아이가."
"루살카는 그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석하랑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니 지금 저거 못 봤나? 애 떨구자고 카는게 지금 할 소리가?"
"어머니로서는 최악이지만, 이전에 다크 레기온의 간부였기에 했던 말이기도 하죠. 당신이 태어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 지 직감하기도 했고."
"......그게 무슨 소리고?"
창염이 턱으로 화상을 가리켰다. 화상 속의 루살카는 산고에 시달리며 아이를 낳고 있었다.
창염의 무표정한 얼굴에 우울함이 스쳤다.
"당신은 태어나면서 루살카 속의 정령의 힘을 가져가버렸죠. 루살카에게 남은 건 테라의 마기밖에 없었습니다."
"마기만 남은 정령이라 카면 세뇌된 정령이랑 다를게 없잖아."
석하랑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창염은 고개를 끄덕였다.
"괴인이 되는겁니다."
화상속 루살카의 몸이 조금씩 뒤틀리기 시작했다.
* * *
"루살카?!"
아이를 받고 탯줄을 잘랐던 윤환은 변모하는 루살카의 모습에 경악했다.
몸의 오른쪽이 마치 나비처럼 변했다. 검은 갑주 사이로 불쾌한 느낌의 물이 차오른다. 그나마 루살카의 왼쪽은 온전했다. 루살카는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이게 내 정체야. 다크 레기온의 간부. ...경멸했어?]
"루살카!"
윤환이 아이를 안고 루살카에게 달려갔다.
"아이 이름.]
"너 지금!"
"아이 이름은, 하랑이야. 강의 아가씨. 한자 공부 좀 했는데...예쁘니?]
"지금 그런 말을 할 때까 아니잖아! 어떻게 된 거야!"
루살카는 조금 놀란 얼굴로 윤환을 바라봤다.
"이런 모습인 거, 안 놀라니?]
"......어찌됐건 너잖아!"
"...후후, 그래. 그러면 말이야. 마지막으로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 서방님?]
"야!"
루살카가 왼손을 들어 제 심장을 가리켰다.
"나를 죽여줘. 서방님 손으로."
[내가 미쳐서, 너희를 죽여버리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