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91화 (91/1,497)

〈 91화 〉OMAKE #013, A Snowy Night (1)

파도가 산책로를 넘어 부딪혔다. 전투의 여파로 망가진 산책로는 더는 사람이 걸을 수 없는 길이 되었다.

쩌적. 그 산책로가 얼어붙었다. 얼음은 파도마저 얼리며 길을 만들었다.

또각. 또각.

백발의 여인이 얼음길 위를 걷는다. 머리칼은 눈 내린 설원처럼 희고, 눈은 바다처럼 맑고 투명했다.

"......."

여인의 발걸음이 산책로의 작은 공터에서 멈췄다. 그곳에는 주인 없는 묘비 두 개가 붙어있었다.

2000.10.13. 2025.10.13.

공교롭게도, 두 묘비의 주인이 죽은 날짜는 여인의 생일이었다.

"내 왔어요."

여인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손에 든 국화를 묘비에 올렸다. 두 묘비 사이에 서 있던 여인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후우."

여인의 심경은 몹시 복잡해 보였다. 수도 없이 갈등했고 외면하려 했지만, 여인의 평생을 함께할 반려는 여인이 이곳에 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2026년 10월 13일. 여인, 석하랑의 생일임과 동시에 석하랑의 양친이 모두 죽은 날. 여인은 두 묘비의 한 가운데에 서서 입을 열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참 많은 일 있었어요."

석하랑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가 다 죽일 뻔했죠. 유나도, 라온 언니야도, ...싹 다."

"다행히 제정신 차렸어요. 내 참, 얼라들 만화도 아니고 기절할 만큼 뚜드려 패서 정신 차리게 만든다니. 나중에 영상보고 얼마나 쪽팔렸는지 알아요? 한 명씩 내 정신 차리게 추억 읊어가는데, 남의 흑역사만 전 세계에 다 까발라삐고."

"...덕분에 그 정령인지 뭐시긴지 힘 각성하고, 성주 놈 뚝배기도 깨버리고 왔네요. 살다 살다 우주까지 가보고. 흐흐."

"그리고 말이에요...."

석하랑은 왼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왼손 약지에는 은색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내, 결혼했어요. 벌써 10개월은 넘게 지났구요. ...솔찌 유나나 라온 언니랑 결혼할 줄 알고 포기하고 있었는데, 저 미친 또라이가 내 폭주하는데 거서 프로포즈 하더라고요. 또 등신 같은 가스나, 거기에 훅 넘어가서 퍼뜩 정신 차렸지 않습니까. ...웃기죠?"

"그 또라이가 여 와보라 하데요. 꼭 봐야 할 게 있다면서. 딱 한 번만 보고 오라고."

석하랑은 울 것 같은 얼굴로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게 이 세상에 마지막 남은 큐브랍니다. 모든 소원 다 들어주는 건데, 나보고 이걸로 내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보고 오래요. 아버지가 왜 어머니를 죽였어야 했는지."

"그래서 왔어요. 딱 한 번, 평생 딱 한 번만 보고 앞으로 안 올 거니까. 최소한 이유라도 알아야 욕하지 않겠어요

"이거 쓰면 이 큐브도 이제 망가지는데, 그걸 나보고 생일 선물로 주면서 여기에 쓰랍니다. 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 바다에 던져버릴라 카다가...."

"그래도 뭐라도 알고 욕해야 내 맘이라도 편할 것 같아서 왔어요. 어떻게 일기 한 장 안 남기고 그렇게 말없이 가버려요?"

"그러니까 말 해줘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나를 버려야 했고, 왜 아무 말도 없이 가버렸는지."

큐브가 반짝였다. 석하랑의 마력과 의지가 깃든 큐브는 백색의 빛을 뿌리며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석하랑의 의식이 가라앉았다.

* * *

<1999년 12월 31일 목요일, 강원도 고성군.>

"야! 쏴!!"

남자가 악을 쓰며 총을 쏜다. 사냥용 엽총의 납탄이 빛처럼 쏘아져 괴수의 피부를 때린다. 남자의 지시를 받은 사람들이 다 함께 총을 쏘아 괴수의 돌격을 저지했다.

캬아아악!

늑대 같은 모습의 괴수는 비처럼 쏟아지는 총탄을 그대로 몸으로 받아냈다. 괴수의 신체 표면에 흐르는 푸른 막은 총탄을 전부 막아내 도탄 시켰다.

점퍼를 입은 남자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리쳤다.

"저딴 게 어딨어?!"

"여기 있으니까 이 지랄이지, 시벌!"

남자가 욕지기를 내뱉으며 괴수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푸른 막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고, 괴수는 온몸을 때리는 총탄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이대로 가면 제압할 수 있다.

라고 생각한 순간, 괴수가 크게 뛰었다.

캬아아악!!

3m 넘는 거리를 한순간에 도약하며 날카로운 발톱을 세웠다. 가장 앞에 있던 청년이 비명을 지르며 총을 놓치고, 그걸 본 남자가 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윤환아아아아아!!"

스릉. 검이 칼집에서 뽑히는 소리와 함께 유일하게 군복을 입고 있던 청년이 앞으로 뛰었다. 청년은 총탄 사이로 파고들어 괴수에게 달려들었다.

청년의 철검에는 아주 미약하지만, 금빛의 기운이 서려 있었다.

키아악!

괴수가 군복 청년에게 시선을 돌린다. 날카로운 손톱이 청년을 베어 가를 듯 번쩍였다.

탕! 사선에 있던 남자가 괴수의 눈을 집중사격 했다. 안구 역시 마력의 막으로 보호되어 총알은 공중으로 도탄 되었지만, 괴수는 순간적으로 시야를 잃었다.

그리고 군복 청년은 괴수의 몸 아래로 파고들어 철검을 양손으로 쳐올렸다.

푹!

철검이 괴수의 심장을 찔렀다. 심장에 박혀있던 코어가 반으로 갈라지며, 괴수는 그대로 옆으로 축 늘어졌다.

쿵!

곰만한 괴수가 쓰러지며 땅이 흔들리고, 사람들은 잠시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행을 이끌던 남자가 군복 청년에게 달려와 머리를 긁었다. 청년의 머리는 몹시도 짧았다.

"크, 역시 병장님! 충성!"

"...선배님. 저 이미 전역했지 말입니다."

"뭐래. 군복부터 벗고 이야기하던가."

군복 청년, 허윤환은 한숨을 내쉬며 괴수의 심장을 찌른 철검을 뽑았다. 인근 주택가에서 주운 진검은 이능력자의 손에 들려, 총도 통하지 않는 괴수를 아주 수월하게 무찔렀다.

남자가 혀를 내두르며 괴수의 시체를 건드렸다.

"히야. 진짜 이능력자 작살나네. 너 근데 왜 초인병으로 안 가고 현역으로 갔냐?"

"저 25일에 이능력 각성했습니다."

"...아, 그래?"

주변 남자들의 시선에 동정이 생겼다. 윤환은 머쓱한 표정으로 철검을 검집에 꽂았다.

"그래도 덕분에 이렇게 살아남았잖냐.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지! 이능력 각성한 덕분에 전역하자마자 차원문 터져도 이렇게 괴수들 죽이고 말이야."

남자는 두 팔을 벌렸다. 다른 이들 모두 제 무기를 들며 어깨를 으쓱였다. 윤환은 고개를 떨구었다.

"우리 언제까지 이렇게 해야 합니까?"

윤환은 지쳐있었다. 거듭된 전투 속에서 가장 고생한 사람은 역시 유일하게 괴수의 숨통을 끊을 수 있는 허윤환이었다. 남자는 슬쩍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몰라. 위에서 무슨 지시도 없는데."

"...다 도망친 거 아닙니까? 아니면 이미 몰살당했거나."

"부정 탈 소리 마라."

"......이제 다 싫습니다. 괴수들 앞에 나서서 목숨 걸고 싸우는 것도. 저 전역자인데 왜 여기서 이래야 됩니까?

남자가 윤환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기분은 몹시 언짢았다. 윤환이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남자를 노려봤다.

"뭐, 뭐? 꼽냐? 한 대 치겠다? 너 혼자 부산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아닙니다."

남자가 윤환과 어깨동무를 하며 흔들었다.

"야. 잘하자. 너 임마, 네가 잘해야 우리도 사는 거야. 나라에서 괜히 남자들 긁어모아서 난리 피우겠냐? 어려서 혈기 넘치는 건 이해하겠는데, 여기 너 말고도 힘들어하는 사람 많다."

"......알겠습니다."

윤환이 뒤로 숨긴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1999년 12월 24일 금요일.

허윤환은 전역을 했고, 미쳐 부산으로 내려가는 차편을 구하지 못해 강원도 속초에 하룻밤 머무르게 됐다.

그리고 그다음 날인 12월 25일 토요일.

전 세계에 일곱 개의 차원문이 열렸고, 국가 비상사태 속에서 허윤환은 영문도 모른 채 다시 군부대로 끌려와 괴수를 퇴치하는 부대에 끌려왔다. 군복을 입었기에 외박이나 휴가를 나온 병사로 오인받고, 곧장 부대에 처박혔다가 방위 부대로 편성되었다.

전 세계적 재난에 모두가 나라가 혼란에 휩싸였다. 방위 부대에는 제대로 군장조차 지급되지 못할 정도로 국경선은 어지러웠다.

그리고 야심한 시각 막사를 덮친 괴수에 의해 중대장 이하 십 수명의 병사가 죽고, 막 깨어난 허윤환이 괴수와 맞서다 그대로 이능력을 각성했다.

등급은 낮지만 인근에서 유일하게 괴수를 죽일 수 있는 자.

갓 만기전역을 하고 집으로 돌아갈 꿈에 부풀어 있던 허윤환은 그대로 강원도에 발이 묶였다.

* * *

그날 밤.

"푸엣취!"

허윤환은 차가운 밤바다의 바람에 기침하며 주변을 살폈다. 해안선은 군부대가 지키고 있지만, 모든 군병력이 해안선을 상시로 지키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25일. 처음 차원문이 열린 날 쏟아진 괴수들의 홍수에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중 가장 많은 사상자가 나온 집단은 민간인을 대피시키고 괴수들과 응전한 현역 군인들이었다.

만약 전역일이 하루만 늦었어도 허윤환은 전역신고를 하지 못하고 그대로 부대에 있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는 순간 속에서, 허윤환은 홀로 백사장을 순찰하며 몸을 떨었다.

"으으."

야간에 홀로 산책이라는 담대한 짓을 저질렀음에도 허윤환은 태연했다.

그가 요 며칠 동안 괴수들을 죽이면서 얻은 정신적 피로감,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병, 그리고 전역일 이후에 터진 재해로 인한 피로감은 극에 달해있었다.

"...어?"

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보았나? 허윤환은 두 눈을 비볐다.

"해파리...?"

검은 바다 위로 흰 물체가 둥둥 떠다닌다. 부표라고 보기에는 어딘가 생명체같이 흐느적거린다. 허윤환은 마력으로 시야를 강화했고, 곧 백사장을 달렸다.

"사람!"

옷을 벗어야 한다는 생각도 없이, 준비운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도 없이 허윤환은 바닷물을 가르며 달렸다. 곧 발이 닿지 않는 깊은 곳에 이르러, 허윤환은 헤엄치며 사람이 있는 곳에 다다랐다.

"이봐요!!"

허윤환은 등만 떠오른 사람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백색의 소녀였다. 저 멀리 북유럽에서나 볼법한 서구적인 이목구비를 가진 소녀는 의식을 잃은 것처럼 보였고, 착각이 아니었다면 숨도 쉬지 않았다.

"젠장!"

허윤환은 죽을힘을 다해 소녀의 몸을 붙잡고 육지로 헤엄쳤다. 남아있던 마력이 전부 고갈되었지만, 허윤환은 소녀를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간신히 육지로 끌고 올라왔다.

"하아, 하아."

허윤환은 입안의 바닷물을 뱉어내고 곧 소녀를 땅에 눕혔다. 목젖 옆에 검지를 눌러보니 숨은 쉬지 않았다. 하지만 아주 미약하게나마 고동이 울린다.

허윤환은 주변을 살폈다. 불행히 이 야심한 새벽에 그 누구도 그를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허윤환은 재빨리 소녀의 이마를 뒤로 젖히고 손을 겹쳤다. 심폐소생술로 의식을 잃은 환자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 찼다.

"흡, 흡, 흡."

머리와 몸이 기억하는 대로 흉부를 압박한다. 잠깐잠깐 의식이 돌아왔는지 확인하지만, 소녀는 정신을 차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직접 숨을 불어넣어야 하나...?'

잠시 망설였지만, 허윤환은 곧바로 결행하기로 했다. 소녀의 코를 막고, 입을 살짝 벌린다.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입술을 덮기 직전, 눈을 뜬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

"......Человек, ты умрешь?"

"예?"

허윤환은 멍청하게 반문했다. 소녀는 허윤환의 손을 '탁' 치고는 몸을 일으켰다.

움찔. 빈혈기가 있는 것처럼 소녀의 몸이 쓰러졌다. 허윤환은 재빨리 소녀의 뒤에서 어깨를 잡아 지탱했다.

"괜찮아? 너 방금 물 먹고...아, 젠장. 말 안 통하지."

소녀는 허윤환의 입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허윤환은 소녀의 몸에서 손을 떼고 전전긍긍했다.

머리통 두 개를 더 쌓아도 모자랄 정도로, 소녀는 허윤환보다 키가 한참 낮았다.

"어, 그러니까 할로? 하와유?"

"......풋."

소녀가 입술을 깨물며 웃었다가 곧 표정을 굳혔다.

캬아아아악!!!

검은 바다가 출렁이며 흉포한 괴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윤환은 소녀의 앞을 막아서며 검을 뽑아 들었다.

"야! 튀어! 아, 씨. 뭐더라? 께러웨이! 아무튼 도망치라고!!"

허윤환의 두 다리가 덜덜 떨렸다.

육지로 모습을 드러낸 괴수들은 심해에서 뛰쳐나온 것처럼 흉측한 외형이었다.

그러나 소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쯧."

소녀는 혀를 차며 허윤환의 앞으로 나섰다. 그 힘이 저보다 강해, 허윤환은 그대로 멍청히 엉덩방아를 찧었다.

우우웅---

소녀의 머리칼이 살랑거리며 손끝에 하얀 안개가 뿜어졌다. 허윤환은 소녀의 손에서 뿜어진 마력에 화들짝 놀랐다.

"이능력자?!"

캬아아악!

괴수들이 달려든다. 소녀는 손을 그대로 바다를 향해 쭉 뻗어 주먹을 움켜쥐었다가 펼쳤다.

그리고 허윤환의 눈에는,

"와...."

설원이 펼쳐졌다. 백사장, 괴수, 그리고 바다 전체가 얼어붙었다.

소녀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몸을 돌렸고,

"......웁."

마력 고갈로 쓰러졌다. 허윤환은 황급히 앞으로 달려가 소녀를 부축했다. 소란을 눈치챈 이들이 하나둘 다려오고, 허윤환은 소녀를 안아 들고 의무실로 달려갔다.

"......저는 누구죠?"

기절한 소녀가 깨어나자마자 한 말에 허윤환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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