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90화 (90/1,497)

〈 90화 〉1부 5장 (23)

- 야. 창염도 금사빠아님? 딴 애들 다 각성하니까 쵸로인이던데? (좋아요 19, 싫어요 993)

ㄴ절 대 성 주 찬 양 해

ㄴ크으, 그냥 간부들 보내면 하찮은 지구인 따위에게 공략당할 거라고 걱정해주신 성주 님의 큰 그림 인정합니다

ㄴ 솔직히 세뇌해서 보냈으니 제정신이지 세뇌 안 했으면 지나가던 개한테도 반했겠더라

ㄴ루살카 솔직히 장인어른 첫 만남에서 '도망쳐!' 시전에 반했다. ㅇㅈ?

ㄴ 그래서 피닉스 루트 진입 조건이 뭐냐고ㅡㅡ

ㄴ 같이 딸기 드쉴?

- 커뮤니티, 잡담 게시판 중.

* * *

서로가 마음에 담아둔 사람을 커밍아웃하면서, 우리는 잠시 휴전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서로 감탄했다.

아, 이 녀석 보통이 아니구나.

결국 이야기해줄 것은 다 이야기해줬고, 석하랑이 마음에 품은 이가 누구인지도 알았으니 그만 자리를 뜨려 했다.

[가을 : 10시 전에는 돌아와라.]

왜 단장인 내가 통금시간이 있는 건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내가 통금을 어기는 다음 날이면 천가을은 천겨울이 될 정도로 까칠해졌다. 그에 대한 간부들의 민원에 내가 다 지칠 정도였다.

그래서 막 떠나려 했다. 계산은 진즉에 긁어놓았고, 더 할 말은 없었다.

그때, 석하랑이 내 소매를 붙잡으며 말했다.

"니, 잠깐 우리 집 좀 온나."

그렇게 나는 석하랑의 집에 끌려갔다.

왜?

* * *

"어, 어서 들어온나."

나는 어쩌다 이곳에 들어오게 된 걸까. 석하랑은 얼굴을 붉히며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빨리!"

"......아아."

석하랑에게 연기와 내숭을 포기한 순간부터, 은근히 석하랑은 나를 편안하게 대했다. 왜지? 굳이 따지자면 나는 원수 같은 존재인데.

삑. 방문이 닫히고 잠금장치가 걸렸다. 석하랑은 구두를 대충 벗고 잠시 안을 둘러보다가 등을 돌렸다.

"야! 5, 5분만!"

"너 막사는 거 안다."

나는 석하랑의 손을 밀치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이능력까지 쓰며 나를 막으려 들어서, 곧장 뒤로 불꽃을 둘러 공격을 막고는 방문을 열었다.

심각했다. 돼지우리가 다름없고, 그 안이 온통 은유하로 가득 찼다.

"역시, 중증이군."

석하랑이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동시에 수많은 은유하의 얼음 인형들이 수분으로 바뀌어 흩어졌다. 석하랑이 머뭇머뭇하다가 확 성질을 냈다.

"무, 문제 있나?!"

"많지. 일단 앉자."

나는 구석에 놓인 방석 하나를 대충 던져 그 위에 앉았다. 석하랑은 옆방에서 테이블을 들고 와 가운데 놓고 나와 마주 앉았다.

"그래서 뭘 그렇게 듣고 싶은 거냐? 나 같은 빌런에게. 집까지 데려오고."

"와, 은근 적응 안 되네. 같은 사람 맞나?"

"......흠흠, 이쪽으로 얘기할까요?"

"고마 치아라. 내도 내 편한 대로 이야기할끼다."

그럼 나야 고맙지. 내 손이 탁자 위의 허공을 만졌고, 석하랑은 곧장 냉장고로 달려가 음료를 들고 왔다. 상표는 다양했지만 죄다 블루베리 음료였다.

"...그래! 내 블루베리 좋아한다! 불만 있나?!"

"됐고, 본론부터. 나 슬슬 들어가야 한다."

"와? 집에 마누라라도 있...."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석하랑은 고개를 숙이며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그래. 나같이 여자랑 사랑에 빠지는 년이 미친 거지."

"은유하는 남녀 안 가린다."

"진짜가?!"

석하랑이 반색했다. 제 목소리가 뒤집히자, 석하랑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은유하가 뭐가 그리 좋은 거지?"

"...그냥 쌤,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윽수로 힘들었는데 계속 내 옆에 있어주드라. 솔직히 언니야 밖에 나오는 거 싫어하는 거 나도 알거든? 근데 계속 나 따라댕기면서 챙겨주더라. 그러다 보니...."

석하랑이 발그레하며 배시시 웃었다. 나는 애써 진실을 삼켰다.

자기 알아서 정령으로 각성했으니, 석하랑은 굳이 주인공이 필요 없다. 나머지야 주인공을 통해 각성시킨다고 해도, 석하랑은 이미 정령이다.

괜히 이상한 동네 아저씨한테 결혼시키느니 은유하와 맺어지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원작 주인공이 등장할 때까지 은유하가 방파제 역할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내가 원작 주인공이었는데. 이제는 중매쟁이를 서게 됐다.

"......이건 NTR로 봐야 하는 건가?"

"뭔 소리고? 그기 뭔데?"

"아무것도 아니다. 넌 몰라도 돼."

나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면 전 갑니다. 청승은 혼자 떠세요."

"아, 아직 시작도 안 했다! 니는 내가 왜 니를 여기로 불렀는지 궁금하지도 않나?!"

"몰라도 될 것 같으니 그냥 갈 거예요. 늦게 들어가면 소박맞는다고요. 지금 당장 가지 않으면...."

석하랑이 내 소매 끝을 잡았다.

"...고맙데이."

"뭐가요?"

"그냥. 진실을 알려줘서. 내 평생 얼굴도 모르는 부모님 원망하면서 살 뻔했다 아이가. 이제라도 내가 왜 버려졌는지 알게 돼서, 니한테 그건 고마웠다.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고마워하거나 죽이고 싶거나 둘 중 하나만 하면 안 돼요?"

석하랑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무리다. 네가 계속 빌런으로 사는 이상, 내는 히어로로서 니를 감옥에 처박을 거다. 잊지 말그라."

"그러다 성주 오면 감옥에서 꺼내주시려고?"

"당연하지. 어딜 남의 아버지 죽이고 발 뻗고 살라카노? 근디 말이다...."

석하랑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 좀 도와주라. 니라도 없으면 지금 이 나라 못 지킬 것 같다. 니도 서울 지키고 싶어서 그 짓 거리 한 거 아이가? 많이도 안 바란다. 그냥 한국에 있으면서 사람들 좀 지켜주라. ...내가 우리 아버지 자리 떠맡아서 사람들 지킬 수 있을 때 까지라도."

"그게 히어로가 빌런에게 할 소리예요?"

"와? 같은 정령끼리 너무한 거 아이가? 정없데이, 가스나."

"...씁."

한차례 쥐어박으려다 겨우 참았다. 나는 석하랑의 손을 잡고, 그대로 내 쪽으로 잡아당겼다.

"?!"

석하랑이 내 품에 안겼다. 내가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키가 커서 내가 그의 품에 안긴 꼴이 되었지만, 아무튼 나는 석하랑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힘든 일 있으면 연락해요. 도울 수 있는 선에서 도와줄 테니까."

"와, 큰일 났다. 나 니한테 지금 두근거리는 거 맞나?"

"그러니까 멘탈 잘 잡으라니까."

나한테 반해서는 곤란하다. 나는 석하랑과 살짝 떨어져 두 손을 맡잡았다.

"키스까지는 괜찮을 거예요. 하지만 섹스는 NG입니다. 그거 하는 순간 바로 상대한테 영혼이 예속되는 거예요. 알겠죠?"

"......여자끼리도 그게 가능하나?"

나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21세의 석하랑은 생각보다 더 순진했다. 나는 야릇한 미소를 띠며 석하랑을 밀어뜨렸다.

"꺅?!"

비명을 지르며 석하랑이 빈백에 쓰러졌다. 나는 그대로 석하랑의 위에 올라타 지긋이 노려봤다. 몸과 몸이 그대로 겹쳐지고, 석하랑의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다.

"아, 안 된데이. 내한테는 유하 언니야가...."

"이거봐요. 또 넘어왔죠? 정신 못 차리죠?"

"아니 그러면 유혹 좀 하지 말던가?!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고!"

내가 검지를 들어 석하랑의 입술에 붙였다.

"여자 끼리 하는 법, 가르쳐줄까요?"

석하랑이 침을 꿀꺽 삼킨다. 슬며시 끄덕여지는 고개에 나는 그에 웃으며 손을 들어 올리고,

"정신 차려요, 이 발랑 까진 반푼이!"

빠악! 손바닥으로 석하랑의 이마를 때렸다. 석하랑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

"......와, 미치겠네. 또 넘어간기가, 지금? 내 이래서야 까딱 잘못하다가는 걸ㄹ-"

빠악! 다시 손바닥이 이마를 때렸다. 석하랑이 씩씩거리며 성질을 냈다.

"와 자꾸 때리는데!"

"정신 못 차리니까 그러죠. 안 되겠어요."

나는 손가락을 들어 올려 불꽃을 피웠다. 다른 때보다 더 섬세하게, 석하랑 루트에서의 나의 기억과 광검의 석하랑에 대한 사랑을 생각하며 불꽃에 마력을 실었다.

'성주 님, 얘 아무에게나 반하지 않게 지금 한 번만 도와주세요.'

화륵. 미니피닉스가 날개를 펼쳐 석하랑의 머리 위에 올랐다.

"석하랑이 또 휩쓸리면 이마를 쪼아버리세요."

- 잘 지켜보겠다는 거시야

"...이건 또 뭔데?"

석하랑이 제 머리에 놓인 미니피닉스에 관심을 보였다.

"정령의 힘을 이용한 분령(分靈)이에요. 당신도 나중에 익숙해지면 사용 가능한...."

"이렇게 하는기가?"

석하랑의 손가락에 얼음으로 된 나비가 생겼다. 나비는 곧장 내 옷깃에 붙어 날개를 접었다.

- 뭘 보니? 당장 그 눈 안 깔련?

"...이건 미니루살카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미니하랑이라고 해야 할까요?"

"말이 쪼매 험하기는 하네."

나는 치솟는 짜증을 애써 삭이며 옷깃의 미니하랑을 손으로 짓눌렀다. 곧 미니하랑은 내 옷 속에 스며들어 나비 모양의 배지가 되었다. 석하랑이 놀라며 물었다.

"그거 어떻게 한 거고?"

"잠시만요. 마력의 실체화라는 건데...."

나는 까치발을 들어 석하랑의 머리칼 위를 손으로 쓸었다. 미니피닉스의 마력이 결정으로 굳으며 새 날개 모양의 머리핀을 만들었다.

"자요. 항상 차고 다녀요. 씻을 때도."

"물 먹으면 죽는 거 아이가? 이거 방수되나?"

"당신 전력으로 적셔도 안 죽으니까 괜찮아요. 그거 끼고 있으면 혹시 당신이 지나가던 바퀴벌레한테 욕정 해도 정신 차리라고 이마에 부리를 박아줄 거에요."

"...니 은근 막말 심한 거 아이가? 바퀴벌레는 좀 너무하지 않나?"

나는 조용히 석하랑을 노려봤다. 석하랑은 두 손을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내 조심할게. 근데 유하 언니야는...."

"그건 당신이 알아서 하세요. 진짜 사랑이라고 느낀다면 도전해서 쟁취하고, 아니면 다른 진짜 사랑을 찾아보시고."

"거 까탈스럽네."

나는 흰나비 배지에 손을 올려 마력을 불어넣었다.

[불만 있나?]

"히익?! 귀, 귀신이가?!"

기겁하는 석하랑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령들끼리 가능한 원격 통신이에요. 서로의 분령을 통해 세계 어디를 가도 대화가 가능한 거죠."

석하랑이 파랑새 머리핀에 손을 올렸다.

[이, 이렇게 말이야?]

"어? 사투리 안 나오네?"

"...낸들 알겠어요."

석하랑은 신이 나서 계속 손을 머리핀에 올렸다.

[그럼 앞으로도 계속 부탁해도 돼? 힘 다루는 법이나, 사랑 고민이나, 빌런 퇴치나 여러모로 물어볼 게 많아질 것 같아.]

"그걸 나보고 지금 도와달라고요? 나 빌런이라니까?"

석하랑이 다른 한 손으로 내 볼을 잡아 문질렀다.

[에이, 그러지 말고. 너도 나랑 불편한 건 싫잖아?]

"본심은 나한테서 뽕을 빼먹고 나를 잡아 죽이려고 하는 거잖아요?"

[들켰네. 후후.]

석하랑이 머리핀에서 손을 떼며 웃었다.

"아버지 생각만 하면 졸라 싫기는 해도, 니가 나보다 더 많이 알고 강하니까 배워야지 않겠나. 왜? 내가 니보다 더 강해져서 진짜로 질까 봐 무섭나?"

"그럴 리가요. 얼마든지 물어봐요. 대신 중간에 말 끊기 없기입니다?"

"...그건 좀 그런데."

나는 벽으로 다가가 창문을 열었나. 밤바람이 슬슬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그럼 잘 자요. 조카. 서울이 좀 바빠서."

"언제 한번 죽고 싶으면 부산 내려온나. 내가 확 복어 산 채로 먹여줄 테니."

나는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석하랑 본인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나는 석하랑의 마력에서 나에 대한 본심과 감정을 읽어낸 지 오래다.

애증. 같은 정령으로서 동질감을 느끼며 가족애를 느낌과 동시에, 스승이자 아버지를 죽인 원수에 대한 증오가 서려 있었다.

순간 광검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창틀에 오른 상태로 석하랑 에게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죠."

"뭔 똥폼잡고 앉았는데? 이제 끄지라. ...가는길 조심하고."

"츤데레는 아지다하카 속성인데."

"뭔 소리고?"

나는 그대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서늘한 바닷바람이 피부를 스쳤다.

"...쯧."

창문에 다가온 석하랑이 손은 흔들어 인사한다. 주먹을 쥐고 가운뎃손가락만 올려 흔들고 있다.

"자식새끼 잘못은 부모한테 따져야 하나?"

나는 빠르게 날개를 회치며 서울로 날았다.

왠지, 짜증 나는 여동생이 생긴 기분이었다.

* * *

"...휴우."

석하랑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빈백에 그대로 몸을 파묻었다.

"망할 년, 빈틈이 없네."

석하랑이 손을 쥐었다 펼쳤다. 손가락 끝마다 날카로운 얼음의 송곳이 생겼다 다시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고맙기는 한데...."

머리로는 이해가 간다. 석하랑 본인도 만약 세계 평화와 타인의 가족을 저울질하라면 당연히 세계 평화를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다. 그 가족이 실은 제 스승, 아버지라는 걸 알게 된 시점부터, 석하랑은 피닉스를 이 세상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다.

고맙고, 밉고, 미안하고, 짜증 나고, 사랑스럽고, 증오스럽다. 상반된 두 감정이 끊임없이 뒤바뀌며 마음이 들끓었다.

"...넷에 물어봐야지."

석하랑은 곧장 스마트워치를 눌러 스크린을 띄웠다. 종종 자주 들리는 히어로 커뮤니티의 비밀 게시판에 제 심정을 담아 질문했다.

삑. 곧바로 댓글이 달렸다.

[YU☆HA★ : 친오빠 새끼들이라는 게 원래 다 그래요. 세상 하나 쓸모가 없는데 막상 필요할 때 없으면 허전함.]

[MAZITENSI : 언니ㅠㅠ핵공감ㅠㅠㅠ내가 댓 단 줄ㅠ]

"...저게 오빠야라고?"

석하랑이 본격적으로 남매지간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했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기 위해 프로그래밍 된 존재들. 찾으면 찾을수록 애매해지고 머리가 아파졌다.

"이건 아닌 것 같은데...."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있다.

"시간 지나면 다 알게 되겠지."

죽여야 할지, 아니면 밉지만 용서해야 할지. 성주를 쓰러뜨리고 난 뒤에 판단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당장은 여러모로 피닉스가 필요했다.

석하랑은 그대로 빈백에 묻혀 잠에 빠졌다.

"...근데 저 새끼가 어떻게 유하 언니야를 알지?"

석하랑은 태양이 떠오를 때까지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 * *

<베이징, 중앙당사.>

"각하.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남자가 허리를 숙였다. 테이블에 앉은 유약한 청년은 남자에게 벌벌 떨며 겨우 입을 열었다.

"그, 그대 뜻대로 하시오."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에 청년은 더욱 움츠러들었다.

"주석 각하. 이때가 아니면 기회가 없습니다. 요동을 넘어 반도의 절반을 우리가 차지할 기회입니다."

"나, 난 아무것도 모르니 그대가 알아서 하시오. 그대가 괴수에 관한 총괄 아니오?"

"제가 비록 대괴수관리대책국의 국장이라는 한직을 맡고 있사오나...."

남자는 포권을 취하며 맹수처럼 웃었다.

"장차 천하의 천자가 되실 분은 오직 각하뿐이십니다."

"모택평 국장. 나는 그저 아버님의 자리를 물려받은 것뿐...."

"그야말로 적통이라는 증거지요. 주석 각하. 제가 옆에서 보좌하겠습니다. 이 나라가 세계를 통일하고, 제가 그 옆에서 보좌하겠습니다. 그러니...."

모택평은 으르렁거리며 소리를 높였다.

"평양으로의 진군을, 허가해 주십시오."

* * *

<오사카, 넷카페 오오사카이치방.>

"그치. 오빠라는 것들 하나도 도움 안 돼."

흑발의 소녀는 흰 가운의 소매에서 빼꼼히 뺀 작은 손을 놀리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기계식으로 된 청축 키보드가 시끄럽게 울린다.

딩동. 데스크에서 알람이 울렸다. 소녀는 곧장 헤드셋을 썼다.

[손님. 이용 중에 대단히 송구합니다. 옆자리에서 키보드 소리가 들린다고 하니, 소리를 조금만 낮춰주심이....]

"아니, 장난해요? 넷카페에서 타자 소리 시끄럽다고 하면 여길 왜 와?"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넷카페는 화상 키보드를 기본으로 하므로 손님께서 가져오신 개인 키보드는....]

"아, 됐어요! 나 지금 온 지 3시간도 안 됐거든요? 이런 식이면 환불받고 나갈 거야!"

막 나가기까지 하는 소녀의 강짜에 데스크의 점원이 난처해했다. 소녀는 헤드셋을 벗고 다시 키보드를 두드렸다.

"안 그래도 지금 머리 아파 죽겠는데."

소녀의 앞에는 스크린이 여덟 개 가까이 켜져 있었다. 저마다 제각각의 영상이 재생되고, 그 영상들은 모두 서울수복작전의 관련 영상들이었다.

소녀가 테이블 위에 올려둔 에너지 드링크를 쭉 들이켰다. 이미 테이블에는 캔으로 된 에너지 드링크가 다섯 개는 더 놓여있었다.

"지금 막 분석 끝나는 타이밍이었는데...."

똑똑똑. 닫힌 문 너머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소녀가 신경질을 부리며 문을 열었다.

"아, 왜요?!"

문 앞에는 쇄골에 뱀 문신이 튀어나온 남자가 사납게 서 있었다. 반팔 아래로 드러낸 팔뚝에는 칼자국이 가득했다. 소녀는 고개를 퍼뜩 숙였다.

"...죄송합니다."

야쿠자. 남자는 제 조끼를 슬쩍 들어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려줬다. 칼이었다.

"학생, 자꾸 시끄럽게 굴면...히익?!"

야쿠자가 소녀의 얼굴을 보고 놀라 기겁했다. 소녀는 그에 팍 인상을 썼다. 야쿠자가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사, 살인귀?!"

"......여동생입니다."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허리를 푹 숙였다. 야쿠자의 두 눈에 당혹감이 스쳤다.

"시끄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지금부터라도 조용히 하겠습니다. 폐를 끼치게 되어...."

"아, 아니야! 하하! 넷카페에서 그럴 수 있지! 하하! 나, 나는 이제 집으로 가니까 마음껏 하라고!"

야쿠자가 황급히 떠났다. 소녀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문을 닫았다. 데스크에서 연락이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평소에는 양 옆자리 비워두는데 오늘 워낙 사람이 많아서....]

"아니에요.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자제할게요."

헤드셋을 벗은 소녀가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다 키보드를 쾅 내리쳤다. 자판 하나가 튕겨 나가고, 순간적으로 주변이 정적에 휩싸였다.

"오빠 새끼가 나 닮은 거라고......."

소녀가 검색창을 열어 신경질적으로 타자를 두드렸다.

질풍객. 검색 결과에 나온 인물 정보 속 남자는 너무나도 소녀와 닮아있었다.

"...응? 이게 뭐야."

갑자기 실시간 검색창의 순위가 요동친다. 소녀는 안경을 고쳐 쓰며 표정을 굳혔다.

"오키나와 S급 괴수가 수마룡의 제2형태로 판명...? 현재 북상 중......?"

* * *

정령의 기운이 느껴진다.

십수 년을 잠자고 있던 쉐도우가 눈을 떴다.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북쪽이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

괴수는 휘하 군단을 이끌고 바다를 가로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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