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1부 5장 (22)
결국에는 부산에 왔다.
서울은 이미 어느 정도 안정되었고, 굳이 신서울에 들릴 이유는 없어졌다. 광검은 은유하와 계약을 맺었고, 사실상 은유하의 사람이 되었다.
"후우."
원래라면 굳이 만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정령으로 각성했다면 얘기해줘야 할 게 너무나도 많다.
또각. 또각.
입구에서부터 익숙한 구두 굽 소리가 들린다. 얼음과도 같은 유리구두를 신은 백발의 여인. 루살카에게서 태어났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석하랑의 키는 컸다.
"......."
석하랑이 나를 찾았다. 마력 감응이 뛰어난 아이인 만큼, 내가 풍기는 마력을 통해 내 정체가 무엇인지 느꼈을 것이다.
"앉아요."
내 손짓에 석하랑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나와 마주 앉았다. 일부러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자리를 잡았기에, 누군가의 시선을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주문은?"
"필요 없어."
석하랑이 손짓을 하자, 앞에 있던 잔에 물이 차올랐다. 나는 컵을 들어 물을 들이켰다. 물은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정령으로 각성해보니까, 어때요?"
"지금 그 따위 말을 하려고 여기에 온 거야?"
석하랑의 손에 얼음으로 된 나이프가 생겼다. 언제든지 내 목을 찌르려는 듯 날이 바짝 서 있었다. 나는 애피타이저로 먼저 나온 빵을 가리켰다.
"나이프 따로 있는데."
"이게 빵이나 자를 거로 보여?"
칼날은 예기가 흐르고 끝은 송곳처럼 날카로웠다. 나는 내 목을 가리키며 웃었다.
"찌르고 싶어요?"
"네가 우리 스승님 죽인 사람이라면."
"같은 정령인데도?"
"착각하지 마. 나는 히어로야. 너 같은 괴물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 말은 틀린 게 아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정령의 힘을 가진 존재가 되었을 뿐이다. 나는 애써 속에서 끓는 화를 삼켰다.
"...좋아요. 그래서 나와 진심으로 겨뤄보고 싶어요? 아직 제힘을 갈무리하지도 못하면서?"
석하랑이 인상을 썼다. 광검이 사망하고 국장을 치르며 어느새 정령의 힘을 각성했지만, 갑작스레 상승한 경지에 지우지 못한 존재감이 부산에서 서울까지 닿을 정도였다.
"그쪽에서 먼저 나를 불러냈잖아. 부산까지 내려와서."
석하랑 본인도 느꼈을 것이다. 서울에 있는 내 존재를. 내가 부산에 내려오는 그 순간도 느꼈고, 내가 따로 약속을 잡지 않았음에도 이렇게 내 앞에 제 발로 나타났다.
나는 물컵을 집었다. 차가웠던 물이 적당히 기분 좋은 온도로 데워졌다.
"나는 당신을 죽이러 온 게 아니에요. 도움을 요청하러 왔죠."
"무슨? 정체도 모르고 남의 속만 뒤집어놓는 빌런의 도움을 히어로가 받을 것 같아?"
석하랑이 나이프를 흔들며 비꼬았다. 나는 손가락을 튕겨 나이프를 녹였다.
"이게...!"
"진정해요. 사람 오니까."
주방에서 음식을 들고 온 종업원이 흠칫하며 그릇을 식탁에 올렸다.
로제 파스타. 고르곤졸라 피자. 스테이크 조각이 섞인 리코타 치즈 샐러드.
기다리는 동안 미리 주문해둔 메뉴가 하나씩 들어올 때마다, 석하랑의 굳어있던 표정이 살짝씩 풀린다. 버섯 크림 리소토가 마저 도착하고, 종업원은 트레이에 들린 음료를 들고 난감한 얼굴로 웃었다.
"딸기 에이드는 어느분께...?"
"저요."
종업원은 내 앞에 딸기 에이드를 놓고, 다른 음료를 하랑의 앞에 두었다. 블루베리 에이드. 석하랑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니 진짜 언제 내랑 만난 적 있나?"
석하랑이 흠칫 놀란다. 친한 사이거나 마음을 놓은 상대에게나 의식하지 않던 사투리가 튀어나오는 석하랑의 특성을 생각해보면,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글쎄요. 관악에서 처음 만났는데요?"
"크흠, 근데 어떻게 이렇게 잘 알아? 스토커야?"
"그냥 촉이 좋다고 생각하세요. 설명하기 귀찮으니까."
내가 식기를 집어 들자, 석하랑은 우물쭈물하며 식기를 집어 들었다.
"먹으면서 들어요."
내가 컷팅기로 자른 피자 한 조각을 석하랑의 앞접시에 올렸다. 피자를 내려다보는 그 모습이 마치 경계심 가득한 길고양이 같았다.
"아직도 의심돼요?"
"당연한 거 아니야? 서울 수복 작전을 실패로 만든 빌런이 떡하니 나타나서 밥 사주는데."
나는 내 앞접시에 피자 조각을 덜었다. 종업원이 미처 켜는 걸 까먹은 심지에 푸른 불꽃을 붙였다. 피자 아래 있던 도자기에 아주 작은 초가 피어올랐다.
"싸울 거면 진작에 부산 엎었어요. 나는 그쪽과 히어로대 빌런이 아니라, 정령 대 정령으로 이야기하러 온 거니까."
"진짜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석하랑이 나이프를 식탁에 탁 내려놓았다.
"그놈의 정령, 정령. 이게 판타지야? 좀 이해할 수 있게 말할 수 없어?"
"그래서 설명하려고 하잖아요."
나는 에이드로 목을 축였다. 어차피 이 에이드를 제외하면 다 석하랑 취향으로만 주문한 음식들밖에 없다.
"당신 어머니, 정령이에요."
"무슨 말이야. 내 어머니를 어떻게- 잠깐. 그럼 너 내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아?"
"당연하죠."
나는 컵을 내려놓았다. 석하랑도 초조한 듯 블루베리 에이드를 삼켰다.
"당신 아버지, 광검 허윤환이잖아요."
"......풉."
석하랑은 간신히 입을 틀어막았다. 은유하 때처럼 내가 옷의 커피 흔적을 지워주거나 하는 참사는 다행히 발생하지 않았다.
"뭐, 뭐뭐, 뭐?!"
석하랑이 몹시 놀란 얼굴로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말인데? 쌤이 내 아버지? 참말이가?"
"지금 당신 빼고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인데...."
나는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다가 퍼뜩 생각이 들었다. 은유하가 일부러 이야기하지 않은 이상, 아직 석하랑은 아무것도 모르는 순박한 아이다.
출생의 비밀도, 세계의 진실도 모르는 새하얀 도화지.
"좋아요. 그러면 설명해주죠. 하나부터 끝까지."
나는 에이드를 석 잔 더 시켰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제법 길어질 것 같았다.
한 잔. 출생의 비밀을 이야기해줬다. 광검과 루살카 부부의 딸 석하랑이 꺼이꺼이 울었다. 리소또가 사라졌다.
두 잔. 세계의 비밀을 이야기해줬다. 히어로 석하랑이 사명감을 불태웠다. 파스타 그릇에는 소스만 남았다.
세 잔. 광검의 죽음에 대한 내막을 이야기해줬다. 석하랑은 고개를 숙이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종업원이 빈 그릇을 모두 치워버렸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은유하와 나의 거래는 비밀로 했다. 은유하는 나를 도와 석하랑을 지켜주는 대신, 철저하게 제 존재를 숨기고자 했다.
마지막 에이드가 도착하고 나서야, 겨우 진정한 석하랑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까 너는 결국 세계를 구하기 위해 쌤, ...아버지를 죽였다는 거네?"
"네."
석하랑이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은 또 울 것처럼 눈물이 고여있었지만, 그건 눈가에서 새어 나오는 수속성 마력의 흔적이다.
"나를 적으로 만들 수도 있는데, 후회는 없나? 앞으로 평생 니 따라다니며 죽이러 다닐 수도 있다."
"그래도 상관없어요. 마지막에 딱 한 번, 성주를 죽이고 이계신을 막는데 도와주기만 하면 됩니다."
"내가 미친 척하고 안 도와주면?"
"이 지구는 멸망하는 거죠. 나는 다시 성주에게 세뇌당하고, 당신은 세뇌된 간부들에 의해 제압당해 새로운 침략 병기가 되겠죠."
석하랑이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좋든 싫든 석하랑은 제가 살기 위해서라도 성주와의 결전에 참여해야 했다.
"내 하나 물어봐도 되나?"
"얼마든지."
"그럼 당장 그 성주인지 생쥐인지 그 새끼 뚝배기 깨러 가자. 지금 상처 입고 치료하고 있다며? 당장 둘이서 금마 조져버리고, 내도 니 죽여삘란다."
석하랑이 전의를 불태우며 나를 노려본다. 그릇을 깨끗이 비워 배가 든든히 찬 만큼, 그 열의 또한 높아 보였다.
"불가능해요."
"왜? 세뇌될까 봐? 내 S급이다. 내가 원탁들한테 요청하면 암만 원탁이라도-"
"지금 여기 없어요."
나는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하랑이 두 손으로 테이블을 내리치며 일어섰다.
"그, 그럼 비행기 타고 해외 가자! 왜?! 겁나나! 내가 니 진짜로 죽이기라도 할까 봐?!"
"진정해요. 사람들 보잖아."
이미 S급 영웅 석하랑이 이곳에 온 순간부터 바깥은 술렁거렸다. 결계를 쳐서 시선을 차단하기는 했지만, 석하랑이 시끄럽게 난동을 부리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석하랑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웃었다.
"와! 무섭나! 힘은 더럽게 센 게 속은 쫌생이 만치로 겁 드럽게 많네!"
"야, 죽을래?"
...나도 모르게 본성이 튀어나왔다. 석하랑이 흠칫거리며 주저앉았다. 마력이 순간적으로 끌어 오르는 것을 겨우 진정시켰다.
"지금은 성주 죽이고 싶어도 못 죽여...요. 성주가 이곳에 올 때까지 기다려야해...요. ...하, 씨."
"그냥 관악처럼 말 편하게 하면 안 되나?"
내가 한숨을 쉬며 말하자, 석하랑이 슬슬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사람들 대상으로 이야기를 하면 피닉스를 연기해야 하는데, 석하랑도 나름 정령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렸다.
정령의 힘 때문일까. 평정을 유지하기가 힘들다.
"......."
한 명 정도는 편하게 대해도 좋지 않을까. 어차피 같은 정령이니 다른 정령이 깨어날 때까지, 앞으로 인간과는 조금 다른 시각에서 나를 그나마 이해해 줄지도 모른다.
"어휴."
나는 석하랑에게는 편하게 말하기로 했다. 의식의 끈을 놓고, 애써 들어올렸던 입꼬리를 편히 내렸다.
"성주는 지금 지구에 없다."
"...지구?"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자기 영토인 명왕성에서 상처를 회복 중이다. 그래서 못 가."
원작 기준으로 세계 멸망의 날인 2025년 12월 25일.
"성주는 그날 상처를 완치하고, 지구로 날아올 거다. 그 놈이 도착하는 게 2025년 크리스마스다."
"미친나? 우주에서 날아온다고? 금마 뭔데?"
"정령인 나로서는 그 이름을 말할 수 없지만...."
이 세계의 히어로들과 빌런들이 이명을 가지듯, 다행히 성주도 또 다른 이명을 가지고 있다.
"<어둠 속에서 속삭이는 자>."
석하랑의 표정이 굳었다.
"그게 뭔데? 니 중이병인가 뭔가 하는 그거가?"
"......."
그냥 주인공이나 찾으러 갈까, 심히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 * *
<미국, 팔로마산 천문대>
"아직도 못 찾았습니까, 오라클?"
금발의 남자는 초조한 얼굴로 답을 재촉했다. 막 망원경에서 눈을 뗀 분홍머리칼 소년, <오라클>이 인상을 찌푸렸다.
"입 다물어 가웨인 경, 피쉬앤칩스 냄새나니까."
오라클이 코를 막자, 금발 남자-영국의 원탁 가웨인이 충격을 받은 얼굴로 옆의 남자에게 물었다.
"이거 국가 모독입니다. 그렇죠?"
"영국 요리가 개판인 건 맞잖아."
말총머리의 흑발 남자는 제 팔을 붙잡는 가웨인의 손을 쳐냈다.
"아저씨 오늘도 피쉬앤칩스 먹었을 거야. 그렇지?"
"질풍객, 그렇지 않습니다! 영국인이 피쉬앤칩스만 먹는다는 편견을 버리세요! 저도 일본인이 매일 스시만 먹는다는 편견은 질풍객 덕분에 버렸잖습니까?!"
흑발 남자, 질풍객은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서 오늘 뭐 먹었어?"
가웨인은 가슴을 탕탕 치며 자랑스레 떠들었다.
"매쉬드 포테이토와 트뤼플로 가니쉬한 훈제 연어 크래커입니다!"
"......."
질풍객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오라클은 양손을 들어 어깨를 으쓱였다.
"모든 영국인이 저렇지는 않을 거야. 그렇지?"
"...이 남자가 왕위를 물려받으면 난 앞으로 영국 안 가. 국빈 대접용 만찬으로 정어리 파이가 나올 거야. 분명히."
"맛있던데, 괜찮지 않나요?"
오라클과 질풍객의 표정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가웨인은 그 이명처럼 영국 출신의 세계 최강의 히어로였지만, 그 순박한 얼굴과 비슷한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었다.
"누가 히어로 랭킹 1위의 가웨인 경의 혀를 이따위로 만들었을까?"
"이제 파워 랭킹 1위도 아니지만."
오라클이 농담 식으로 가웨인을 놀리자, 거기에 질풍객이 사족을 덧붙였다. 명백히 화제를 돌리려고 하는 듯한 태도에 질풍객은 능청스럽게 웃었다.
"왜? 틀렸어? 한국의 광검이 먼저 벽을 넘어섰잖아. 원탁 중에 그 벽 넘어간 사람이 있어?"
질풍객이 자신을 포함한 셋을 가리키며 비꼬았다.
"S급에 레벨이 있다면 우리 모두 한계까지 성장했어. 그중 누가 그 벽을 넘겼지? 아무도 없다고. 그마저도 죽어버렸고."
"한 명 있습니다."
가웨인이 담담히 말했다. 오라클이 떪떠름한 얼굴로 쏘아붙였다.
"그 정체불명의 빌런? 가웨인 경, 아무리 그래도 빌런을 최초의 SS등급에 올리자고?"
"그건 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히어로들 뭐가 되냐, 그러면?"
가웨인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둘을 번갈아 봤다.
"히어로든 빌런이든 뭐가 중요합니까? 인류의 존망을 건 싸움 앞에 인류가 둘로 나뉘어 싸워야겠습니까? 제가 원탁을 만든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 초기 멤버 아니어서 몰라. 너는 아냐?"
"나도 몰라."
가웨인은 말을 잃었다. 큰 충격을 받은 모습에 질풍객이 가웨인을 어깨동무하며 흔들었다.
"야, 너무 실망 마라. 그래도 우리는 너 도와서 이렇게 따라 움직이잖냐."
"뭔 소리야. 넌 너 가고 싶은 대로 막 가는 거잖아. 오키나와에서 지금 S급 괴수 떠서 난리 났던데."
오라클이 지적하자 질풍객은 휘파람을 불었다.
"고래 정도야 알아서 잡겠지. 일본 전 세계 제1의 포경 국가 아니냐."
"저거는 그 말이 제 얼굴에 침 뱉기인 것도 몰라요."
"뭐래? 내 나라는 말이야."
질풍객이 가웨인과 어깨동무한 손을 튕기며 오라클에게 윙크했다.
"내가 결혼할 아내의 나라야."
"......."
오라클이 흘러내린 안경을 중지로 치켜올리고는,
"퉷."
질풍객에게 침을 뱉었다.
"안됩니다!"
가웨인이 빛처럼 검을 휘둘러 오라클의 침을 불태웠다. 오라클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헛웃음을 짓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래서 S급 검사들은 글러 먹었어. 망할 놈들. 야, 너 빨리 너 태어난 나라로 돌아가라. 가서 S급 처리하라고. 너 때문에 우리 아빠도 나한테 계속 전화하잖아."
"그 정도로 심하냐?"
질풍객이 표정을 굳혔다. 서슬 퍼런 눈빛은 금방이라도 허리춤의 검을 뽑아낼 것 같았다. 오라클이 스크린을 띄웠다.
"일본에서 한국에 지원 요청 했단다. 거기 있는 S급 둘 다 데려와달라고."
가웨인이 얼굴을 굳혔다.
"......안됩니다. 질풍객, 당장 당신의 본국으로 갑시다. 오라클, 전세기 하나 부탁드립니다. 저도 갑니다."
"왜?"
질풍객의 눈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고작 S급 괴수 아냐?"
"뉴스 좀 보고 살아라. 이 망할 살인귀야."
오라클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광검 죽었어. 그럼 일본은 괴수 때문에 난리가 났네? 그럼 중국이 가만히 있겠냐?!"
"운장 있잖아?"
"FUCK!"
오라클이 질풍객에게 달려와 멱살을 흔들었다. 저보다 훨씬 큰 장정을 잡기 위해 까치발을 든 모습이 조금 우스웠다.
"운장이 남정네들 가득한 원탁에 소속감이 크겠냐, 아니면 제 아빠가 이인자 자리에 있는 자기 나라에 더 소속감이 있겠냐?!"
"소속감이...뭔데?!"
"아아아아악!!!!"
오라클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주저앉았다. 가웨인이 잠시 고민을 하다가 질풍객에게 말했다.
"남쪽이 난리 난 사이에 중국에서 평양의 S급 괴수를 죽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가웨인의 설명에 질풍객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 그건 안 되지! 그거 내가 잡으려고 침 발라놓았는데?! 야, 오라클! 당장 네 아빠한테 전화해! 비행기 띄워!"
"......."
오라클이 초점 잃은 눈으로 흔들흔들 방을 빠져나갔다. 질풍객은 호들갑을 떨며 신이 나 있었다.
"크으, 평양의 괴수 말이야. 아저씨가 보기에는 어때? 그놈이 아저씨가 말하는 그 '괴물'보다도 더 강해?"
"아뇨. 괴물이 훨씬 강하죠. 그건 인간이 어떻게 해볼 자가 아닙니다. 다행히 어떻게든 상처를 입혀서 도망쳤으니 다행이었지, 계속 싸웠으면.... 후우."
가웨인은 한숨을 내쉬며 질풍객의 어깨동무를 풀었다.
"아무튼 한국으로 갑시다. 일본의 괴수를 처리하고, 한국의 S급을 직접 만나서 판단해보겠습니다. ...간 김에 중국도 간접적으로 견제하고."
"그 애송이, 13번째에 넣게?"
"언제까지 비워둘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요."
가웨인은 전화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오라클의 안내에 따라 공항으로 향하는 리무진에 올라탔다.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는 동네야.'
저물어가는 태양을 보며, 가웨인은 사색에 잠겼다.
* * *
석하랑에 대한 변명은 끝났다.
이제 석하랑은 나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우겠지만, 최종적으로 성주, 명왕성의 주인을 쓰러뜨리는 데에는 협력할 것이다.
"그러니까 그 정령의 힘, 적당히 갈무리해라. 슬슬 따갑다."
"나도 하고 싶다고...."
석하랑이 테이블을 손으로 긁적거렸다. 나는 대놓고 한숨을 쉬며 석하랑의 손을 잡아당겼다.
"?!"
석하랑이 놀라 손을 빼려했다. 나는 그대로 손을 낚아채 두손으로 꼭 잡은 후, 마력을 불어넣었다.
두근, 두근.
석하랑의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다 느껴진다.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석하랑에게서 끌어넘치는 마력을 진정시켰다.
"...어?"
석하랑은 제 가슴에 나머지 손을 올리고 놀랐다. 어딘가 혼란스러워하는 기운에 나는 손을 놓았다.
"이제 당분간 괜찮을 거다. 누구한테 반했는 지 몰라도, 섹스는 하지 마라. 그거까지 해버리면 영영 그 사람에게서 헤어나오지 못 해. 알겠나?"
"......."
석하랑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나는 뒷목을 긁적거리며 설명을 덧붙였다.
"정령이라는 게 참 아무나 좋아하기 일쑤다. 손만 잡아도 사랑에 빠지고 머릿속에서 손자손녀까지 본다. 감정 관리 잘 해."
"그기 무슨 말이고?"
"...잘 들어라."
나는 테이블을 두드렸다. 석하랑의 귀가 쫑긋 열렸다.
"정령이라는 족속은 죄다 아무한테나 사랑을 느끼는 금사빠 밖에 없다. 남녀노소, 심지어 종족도 가리지 않아. 너는 특히 어리니까 조심해야 해."
"그럼 지금 내가 유하 언니야한테 느끼는 이건...."
말문이 턱 막혔다. 유하? 내가 아는 유하는 은유하밖에 없는데. 하지만 석하랑에게서 나온 마력의 잔향에는 은유하에 대한 감정이 무엇인지 명백히 느껴졌다.
석하랑은 사랑을 하고 있다. 하필, 은유하에게.
"...그건 틀림없는 사랑이다."
"리얼?"
"그래. 젠장, 미쳐버리겠군."
이제는 내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설마 감시하면서 잘해주라고 붙여놨던게 역효과가 날 줄이야. 메인 히로인(정령)이 메인 히로인을 사랑할 거 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빨리 석하랑 옆에 주인공을 앉혀놔야 하나? 아니다. 그랬다가는 주인공이 광검에게 썰린다.
"끄으으으응."
"니는."
석하랑이 입술을 벌벌 떨며 물었다.
"니는, 누구를 사랑하는데?"
"나?"
나는 고개를 들어 석하랑에 웃으며 손가락을 들었다.
"당연히, 피닉스지."
내 손가락은 나, 창염의 피닉스를 가리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