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1부 5장 (20)
광검이 괴인으로 부활하고 난지 어느덧 일주일이 흘렀다.
5월 22일. 토요일.
병상에 누워 자택에서 두문불출하던 선의철 대통령을 대신해, 임시로나마 권한 대행 업무를 맡은 백세준은 예상외로 광검 사후의 사태에 대한 수습을 잘 해냈다.
다시 업무에 복귀한 선의철은 시민들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서울에서 전해진 낭보를 눈물을 머금고 널리 알리기로 했다.
광검이 죽기는 했지만, 서울이 수복되었다.
서울에 있던 빌런 연합은 블랙마켓 네트워크에 시청사의 뱀을 공략하는 영상을 업로드했고, 아주 성공적인 괴수 레이드의 표본이라고 일컬어지며 조회수가 어느덧 천만에 이르렀다.
정부, 협회, 신서울, 빌런, 서울, 그리고 부산.
폭풍전야같은 고요함 속에 모든 이들은 각자 맡은 바 제 역할에 따라 준비에 착수했다.
* * *
<신서울, 정부청사.>
쨍그랑!
도자기가 벽에 부딪혀 깨졌다. 벽에 시립해있는 비서관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직 못 찾았어?!"
선의철은 씩씩거리며 성질을 부렸다. 넥타이는 풀어헤치고, 안경은 한 쪽 안경알이 떨어져 덜렁거렸다. 평소의 단정한 이미지를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선의철은 지금 망가져있었다.
"시간을 조금만 더 주시면...."
"시끄러워! 이 무능한 것들! 어떻게 사람 하나를 못 찾아?!"
"소나무 부대도 서서히 명령에 불복종하기 시작했습니다. 저희만으로는 청송님을 찾는데 한계가-"
퍽! 책상 위에 있던 재떨이가 비서관의 머리를 맞고 깨졌다. 비서관의 이마에 붉은 피가 흘렀다.
"찾아! 어떻게 해서든 찾으라고! 그 망할 년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당장 찾아내란말야!!"
똑똑똑.
"대통령님, 백세준입니다."
"들어와!"
후덕한 인상의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현재 대외적으로 중병을 앓고있는 선의철을 대신하여 국정을 운영하고 있는 총리, 백세준이었다.
저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연장자임에도 선의철은 백세준에게 말을 막했다. 그만큼 선의철은 지금 정신적으로 몰려있었다.
"찾았나?"
"...대통령님. 지금은 소나무 부대가 문제가 아닙니다. 현재 외교부를 통해서 들어오는 문의와 문제들이 산더미입니다. 대통령님께서 입장을 정해 주셔야-"
"알아서 하라고 장관 앉혀놨잖아! 그 놈은 뭐해?!"
"거의 포기했습니다."
백세준은 제가 정리해 온 외교부의 문제들을 쭉 읊었다.
"협회의 공식지원 요청에 대한 응답 방향, 광검에 대한 국제적 조사, 원탁 파견에 대한 용의, 평양의 괴수에 대한 국제사회의 공동 대처, 서울에 자리잡은 빌런 연합에 대한 제휴, 그리고 S급 히어로 화권과 설화공주에 대한 파견 요청...."
"그 둘은 왜?"
"일본에서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오키나와에 S급 괴수가 나타났는데 조속히 처리할 수 있도록 지원을 바란다고...."
"무시해. 절대로 해서는 안 돼."
어느새 선의철의 정신이 조금 진정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재림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는 병적으로 외국과의 교류에 대해 꺼려했다.
"오키나와로 S급 둘을 파견? 웃기지도 않는 군. 내 지난번에 얘기했지? S급 자리 비운 사이에 전쟁 치르려 할 놈들이야."
"설마 중세 시대도 아니고 21세기에 그런 만행을...?"
"만행을 저지를만한 놈들이 아닌가? 러시아를 보게. 극동을 포기하자마자 중국과 일본이 제 땅이라고 달려들었어. 결국 괴수들 때문에 무주공산이 되었지만."
"알겠습니다. 그러면 그에 대해서는 무시하겠습니다."
총리가 다음 스크린을 넘기며 의견을 물었다. 대통령은 그에 하나하나 답하며 국정 방향을 제시했다.
청송이 없을 때 상당히 광증을 보이더라도 아직 그의 정치 감각은 죽지 않았다. 단지 이전과는 달리 언론과 여론에 대한 통제망에 구멍이 생겼다는 게 선의철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비서관. 오늘 지지율은?"
"84%입니다. 아직 높습니다."
선의철이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아직이라니! 차원문 사태 막아냈을 때만 해도 95%를 찍었던 지지율이야! 벌써 11%나 떨어졌다고!"
"...서울 수복 작전의 실패와 광검의 사망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계속 하락세를 면치 못할 듯 보입니다."
"...젠장! 여론은?"
옆에 있던 비서관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공영방송은 여전히 저희의 의견을 참고해 방송 중입니다. 다만 인터넷 방송국이나 개인 채널 같은 것 까지는 완전히 차단하기는 어렵습니다."
"쳇. 소나무 부대를 움직이지 못하니 답답해 미치겠군. 어떻게 방법 없나?"
선의철이 의견을 묻자, 이능력자 출신의 경호팀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A급 한 명만 하더라도 같은 경지 셋 이상은 달려들어야 안전한 제압이 가능합니다. 광검께서 돌아가신 이후, 체포된 빌런 뿐만 아니라 기존 소나무 부대도 서서히 반항을 시작했습니다. 문장이 사라지지 않은 걸로 봐서는 청송님이 살아계신 거 같습니다만...."
"그래! 그러니까 누가 청송을 납치해갔냐, 이 말이야! 국정원은 뭐라 하던가?! 역시 유성인가?!"
"...당시 행적이 묘연한 은유하를 제외하면 모두 알리바이가 있습니다."
"그 망나니?"
의심이 시작되니 모든게 의심된다. 선의철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하다 과격한 수단을 생각해냈다.
"정식으로 초청하게. 은유하의 사업 파트가 뭐지?"
"요식업과 우주산업입니다. 특히 유성의 '스타라이트'를중심적으로 운영합니다."
"그럼 대충 그쪽으로 해서 몇 명 꼽사리 불러봐."
"대통령님, 그 망나니는 왜...?"
총리가 당황했다. 선의철은 안경을 들어올리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인질을 잡아야겠어."
* * *
<신서울, 유성그룹.>
"감사합니다. 총리님.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은재민이 인자한 미소로 총리에게 화답했다. 스크린 속 총리는 초조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튼 약속한 거네! 나중에 내가 은퇴를 하고 나면 말일세!]
"여부가 있겠습니까. 원하는 자리가 있으면 얼마든지 말씀해주십시오. 유하의 생명의 은인 아니십니까?"
[자네 동생 사랑은 정말 극진하군,하하하!]
삑. 시덥잖은 잡담을 이어간 은재민은 총리와의 전화를 끊었다. 그와 동시에 은재민의 눈에 서려있던 금빛 기운이 사라졌다.
"교도소 흉악범죄자들 방이면 되겠지."
은유하는 누운 상태로 다른 인형들을 조작하다 몸을 일으켰다. 머리에 헬멧처럼 쓴 연산보조장치가 빛을 반짝이며 다른 인형들을 조종하고 있었다.
"후우."
은유하는 기계인형들의 행동을 자율행동 패턴으로 변경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지금부터 대할 이는 인형들의 제어를 함께 하면서 설득할 정도로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아가씨."
"고마워."
은유하는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집사를 따라 복도를 걸었다. 심처에 위치한 은유하의 방과는 달리, 햇볕이 잘 드는 응접실에 도착한 은유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성공한다."
무조건 성공하겠다는 일념으로 은유하는 응접실의 문을 열었다.
진한 포도향 속에서 금발의 남자는 오른손에 레드 와인을, 왼손에 화이트 와인을 들고 있었다. 글라스도 없이 병나발을 불며 와인을 맛보는 모습에 은유하는 기분이 언짢아졌지만, 애써 이해하기로 했다.
"시간이 되었습니다. 어르신."
"그래? 벌써 그리 되었나."
남자는 금빛 수염을 슥 쓸며 와인을 전부 들이켰다. 싸구려 포도주스를 마시듯 두 개의 빈명을 만들어낸 남자는 탁자를 앞에 두고 척 앉았다.
"그러면 시작해보시게. 내가 왜 그대를 도와야하는지."
광검 허윤환. 은유하의 제안하에 괴인으로 부활한 남자. 그는 피닉스를 상대로 석패를 거두고, 은유하에게 인계되어 객실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은유하는 기쁜 마음으로 광검과 대화를 이어나갔다. 온갖 비전의 제시를 통해 광검과 석하랑에게 장밋빛 미래를 그려다주었고, 광검은 웃으며 거절했다.
"이제 내가 바라는 걸 찾았나?"
"...예, 찾았습니다."
"마지막 기회일세. 이번 기회를 놓치면 자네와 내 계약은 이걸로 끝이야. 나는 다시 그 놈팽이 죽이러 갈 거고, 그러면 자연히 나는 다시 죽어버리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하겠나?"
"물론입니다."
은유하가 허리춤에 끼고 온 결재판을 건넸다. 광검은 결재판을 받아들며 물었다.
"정답이라고 자신하는가?"
광검을 대장으로 하는 비밀 PMC <기사단>의 계약 조건으로 광검은 은유하가, 유성이 제안하는 모든 것을 거부했다.
금전, 명예, 이성. 은유하의 유성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제시했지만 광검은 만족할 수 없는 계약조건이라며 거부했고, 은유하에게 내기를 걸었다.
만약 일주일이 지나도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지도 못하면 나는 여기를 떠나겠다.
은유하입장에서는 여러 의미로 거래를 꼭 성사시켜야 했다.
그리고 오늘까지, 은유하는 9전 9패를 겪었다. 이제 남은 기회는 단 한 번이었다.
"제가 판단하기에 광검 어르신께서 이걸 바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 그럼 어디 한 번 보세."
광검이 결재판을 열었다. 곧 그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이건 무슨 의미지?"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은유하는 종이의 위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웃었다.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
결재판 속에는 남편 은유하, 아내 석하랑이라고 적힌 혼인신고서가 들어있었다. 은유하는 광검의 시선을 담담히 받아내며 말을 이었다.
양식의 모든 빈칸이 빠짐없이 적힌 혼인 신고서에는 오로지 석하랑의 사인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하랑이가 꼭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기 전까지, 제가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지금 동성혼을 하겠다는겐가?"
은유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게는 <인형술사>의 이능력이 있습니다. 광검 어르신께서 아시던 세간의 스캔들을 이용하는 겁니다. 제 오빠인 은재민과 대외적으로 혼인 신고를 하여 하랑이를 품절시키겠습니다."
"이미 남편이 있는 아이에게 진정한 사랑이 찾아 올 것이라 생각하는가?"
"대한민국 최고 그룹, 재계 1위의 회장 아내를 상대로 사랑을 쟁취하려는 패기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선에서 하랑이를 넘겨 줄 수 없습니다!"
"...아, 그래?"
광검은 떨떠름한 얼굴로 혼인신고서를 꺼내 반으로 접었다. 은유하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절망이 스쳤다.
"내가 아무래도 자네를 너무 신경쓰게 만든 모양일세."
"......네?"
광검은 혼인신고서를 접어 제 주머니 안에 넣고는 은유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냥 우리 하랑이, 옆에서 잘 도와주시게. 지음으로서."
"...그게 어르신께서 바라시는 겁니까?"
태생부터 재벌이었고, 인생의 모든 것은 서로가 이익을 논하는 거래로 이루어진다고 신봉하던 은유하의 세계에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광검은 무얼 당연한 걸 묻느냐는 얼굴로 되물었다.
"아비가 딸 잘 되기만을 바라지 거기서 이제 내가 더 바랄 게 무어 있겠는가?"
광검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은유하는 혼이 나간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에 하나만 부탁하지. 내 딸, 그 망할 놈의 마수에서 꼭 지켜주시게."
"네, 그건 당연합니다."
은유하가 광검과 잡은 손에 힘을 꾹 주며 강한 의지를 보였다.
"피닉스 고객님이 하랑이와 아이를 낳는다거나 그런 미래는 제가 전재산을 걸고 막겠습니다."
은유하의 두눈은 별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괴인 허윤환. 은유하의 수하가 되었다.
* * *
<신서울, 히어로 협회 본부.>
집정관이 부활했다.
강소연 팀장을 잃고 폐인처럼 식음을 전폐하던 그가, 강소연 팀장이 복귀하자마자 물먹은 스펀지마냥 다시 살아났다.
강소연은 유영호에게 진실 아닌 진실을 알렸다.
정부에서 10인의 히어로들을 소나무 부대로 만들려고 그들을 납치했고, 히어로들은 유성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탈출했다. 그 과정에서 도우미로 나섰던 자신이 붙잡혀 모진 고문을 받았지만, 다행히 이렇게 탈출했다고 유영호를 속였다.
...사실관계가 많이 비틀려있기는 했지만, 어찌됐든 강소연은 유영호의 곁으로 돌아왔다. 집정관은 제 모든 힘을 다해 강소연의 복귀를 숨겼다.
"집정관님, 저 잠깐 자리를 비울게요."
"응? 얼마나? 어디가는데?"
문제가 하나 생겼다면 집정관의 소연에 대한 집착이 조금 생겼다는 것. 소연은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했다.
"손을 좀 씻으러 갈까 합니다."
"손? 그거야 그냥...."
집정관이 말을 이으려다 소연이 배를 부여잡는 행동이 고개를 돌렸다. 소연은 양해를 구하고 황급히 자리를 빠져나와 개인실로 움직였다.
"이게, 썩을."
아랫배가 큥큥 울린다. 배꼽 아래가 타들어가는듯이 울린다.
"하아, 하아."
소연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화장실 칸 안으로 들어왔다. 재빨리 치마와 스타킹을 내린 소연의 하복부에는 하트 모양을 닮은 청색의 문장이 찍혀있었다.
"으흐, 흐으으...."
야릇한 감정을 애써 집어삼키며, 소연은 스마트워치를 켜서 네트워크에 접속했다. 소연을 호출한 여인은 얼굴에 가면을 쓴 채 기다리고 있었다.
소연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갑자기, 무슨 , 일이야!"
[그냥 불러봤는데? 왜, 발정했어? 후후. 재밌네.]
적나라한 상대, 팬텀의 말에 소연이 화장실 벽을 쿵 쳤다. 다행히 옆칸에는 아무도 없었다.
"장난으로, 이런 짓을...!"
[살아있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 너도 목없이 서울 한복판 돌아다니고 싶어?]
팬텀의 협박에 소연은 입을 다물었다. 팬텀은 제 손에 들린 붓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아무튼 잘 해. 네 문신사의 이능, 나한테도 있다는 거 잊지 말고. 알겠어?]
팬텀은 그 말을 끝으로 스크린을 내렸다. 정말로 그냥 불러본 것에 소연은 어이가 없어 하면서도, 점점 뜨거워지는 감각에 화장실을 나와 곧장 침대에 몸을 눕혔다.
"아흐, 하아. 하앙."
손가락이 문신을 스치며 욕구를 충족시킨다. 소연은 분함과 수치심에 베겟잎을 깨물며 감각에 몸을 맡겼다.
"하으아아, 집정관님, 하아아앙!"
질척거리는 소리와 냄새가 소연의 방을 가득 채웠다.
결국 소연이 집정관의 곁으로 복귀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30분. 집정관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소연의 스타킹은 나가기 전의 것과 다른 색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