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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83화 (83/1,497)

〈 83화 〉1부 5장 (16)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S급의 히어로가 고작 약에 쉽게 취할 리가 없다.

하지만 은유하에 대한 석하랑의 신뢰는 하늘을 찌른다. 그런 은유하가 나와 손을 잡은 것처럼 꾸미니, 광검은 냉정함을 잃고 판단을 그르쳤다.

의심암귀. 결국 광검은 심장에 봉인해두었던 루살카의 힘을 꺼냈다.

사아아-!

파도가 용솟음친다. 동해 바다는 광검의 의지에 따라 거대한 높이로 솟아올라 내게 쏟아졌다.

나는 내 전신을 불꽃의 구체로 감쌌다. 푸른 보호막은 바닷물 속으로 끌려들어 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광검이 바닷속으로 뛰어든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그는 정령의 힘을 빌려 바닷속에서도 자유자재로, 지상에서보다 더 빠르게 움직인다.

깡, 까앙, 까-앙!

광검의 철검이 보호막을 두드린다. 조금만 깨져도 곧 바닷물이 새어 들어와 나를 익사시키려 들 터.

[곤란하군.]

필드가 싸우기에 곤란하다면, 필드를 파괴해버리면 그만이다.

[모조리 증발시켜주지!]

등에 날개를 펼친다. 보호막을 벗어난 날개가 바다 한가운데에서도 그 열기를 잃지 않고 푸르게 타오른다.

치이이이익------

수면 아래에서 거대한 증기가 들끓는다. 열기로 기화된 해수는 수증기가 되어 대기로 흩어진다.

■■■■!!

광검이 괴성을 지르며 검을 휘두른다. 오른손에는 광속성을 먹은 철검을, 왼손에는 수속성 마력으로 구체화한 해수(海水)의 검을 들고 빠르게 날개를 가른다.

푸른 섬광이 먼저 번쩍이고, 그 뒤를 금빛 섬광이 따라 움직인다.

'날개가 무겁다.'

잘리기 전에 날개를 움직이려 했지만, 바닷물이 사방에서 짓눌러서 그런지 날개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서걱. 오른쪽 날개가 잘렸다. 다행히 내 본체에서 떨어진 깃털도 창염의 성질을 가지고 있기에 쉽게 꺼지지 않는다.

그러나 상대 또한 정령의 힘을 가지고 있다.

푸쉬이이--

바닷물이 다시 들끓는다. 하지만 이전과는 달리 아주 미약하게 기화했다.

남은 깃털들은 일렁거리는 파도 속에 휘말려 그대로 찢겨나갔다.

'마기의 영향으로 미친 것 같지만, 어떻게 싸우는지는 알고 있어.'

날개를 베었던 방법도 그랬다. 광검이 알고 있는지, 아니면 루살카가 가진 힘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건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광검은 수속성 마력이 내게 데미지를 입힐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정령의 힘을 꺼낸 순간부터, 그는 철저히 수속성 마력으로 나를 괴롭히고 있다.

빠직!

보호막이 깨졌다. 구체의 사이로 바닷물이 차오른다.

[이래서야 원.]

안그래도 전투 센스가 발군인 양반인데, 전혀 다른 속성인데도 마력을 다루는 솜씨가 대단하다.

콰아아! 보호막이 깨졌다. 동시에 바닷물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화염구를 만들어내 폭발시키면 어떨까 싶었지만, 이래서야 만들기도 전에 파도에 휘말릴 것이다.

그러면 내가 폭탄이 되자. 나는 마력을 체외로 방출했다.

□□□□□□□!!

갑주 안에서 불꽃이 폭발하며 해수가 밀려났다. 아주 한순간이지만 해수가 밀려나 공간이 생겼다.

그리고 그 정면에서, 광검이 검을 내려쳤다.

■■■!!

기합과 함께 금빛의 검을 횡으로 베어온다. 건틀릿을 올려 검날을 막는다. 아주 미약하게나마 건틀릿이 베였다.

하지만 이쪽은 간보기에 불과하다. 진짜는 왼손의 해수검.

광검은 이미 검을 내려 베기 전에 왼손을 제 어깨 위에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내가 건틀릿으로 검을 막은 사이, 내 배를 향해 해수검을 빠르게 휘둘렀다.

서걱!

베였다. 해수검은 내 복부의 갑주를 반 이상 갈라버렸다.

이 세계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받은 치명상. 갈라진 갑주 사이로 대량의 마력이 빠져나갔다.

[......흠.]

"캬아악!"

광검이 야수와도 같이 입을 벌리며 웃는다. 그의 눈동자는 마치 태극처럼 금색과 탁한 청색이 회오리치지만, 눈가에 서서히 보라색 마기가 흘러나온다.

[광검도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하고 폭주하는건가.]

마력이 저마다 속성을 가지고 그 특유의 색을 가진다면, 저 보라색 마기는 변질되고 오염된 테라의 마기다.

평범한 인간의 정신으로는 저 장기를 받아들이는 즉시 미쳐버리고 자살할 것이다. 광검은 비록 그 마기의 영향으로 폭주하고 있지만, 행동의 근원은 변하지 않는다.

창염을 죽이고 석하랑을 구한다. 그것이 광검의 몸을 움직이는 원동력일 것이다.

[죽어줄 생각은 없지만.]

밀려났던 파도가 다시 공간을 채운다. 광검은 내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계속 검을 휘두른다.

철검은 막는다. 건틀릿이 긁혀나가지만, 문제가 없다.

해수검은 피한다. 수속성 마력은 창염마저 잘라내기에, 무조건 피해야 했다.

괴인형으로도 화권의 박투술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하지만 광검과 공방을 주고받는 현상만 유지할 뿐, 점점 공간을 잠식해오는 해수에게서 도망치지는 못하고 있다.

■■■■■■!

그에 광검이 승리를 확신한 듯이 웃는다. 이제는 금색의 빛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보라색 장기(瘴氣)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이때를, 이 순간을 기다렸다.

광검이 철검을 사선으로 긋는다. 초전의 공방처럼 건틀릿으로 칼날을 잡는다.

광검이 해수검을 역수로 찔러온다. '찌른다'는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광검은 지금 폭주하고 있다.

나는 왼손을 올려 해수검의 끝을 잡았다.

키기긱!

■■■■?!

원래라면 해수검은 내 손을 관통해 핵을 찔렀을 것이다. 하지만 해수검은 내 손에 잡혀 옴짝달싹을 못 하고 있다.

광검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친다. 조금 전까지는 분명 공격이 통했는데, 왜 갑자기 통하지 않게 된 걸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공격을 막고 피하며 바닷물을 증발시켰을 뿐이다. 아직 결계안에는 바닷물이 충분히 남아있다.

[네가 변한 거다, 광검.]

광검의 눈동자는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쉐도우처럼 이계신의 종복이 되어버린 이들에게 나타나는 특징.

감염.

아마도 지금 광검의 마력 패턴을 분석하면 그 결과가 괴수로 나올 것이다.

[다크 레기온의 간부들은 원래는 파괴를 일삼는 괴물들이 아니다.]

내 말에 광검의 눈에 의아함이 스쳤다. 나는 그 순간 광검에게 달려들어 오른손으로 광검의 멱살을 쥐었다.

■■?!

광검이 놀라 해수검으로 나를 찌르려 한다. 하지만 해수검은 여전히 내 손에 꽉 잡혀있다.

[정령의 힘을, 고작 루살카의 잔재로 이길 수 있을 것 같나?]

해수가 용솟음치며 밧줄처럼 내 다리를 잡으려 한다. 그러나 그 속도는 몹시 느리다.

[물고기 상대하는 데 바다에서 싸울 이유는 없지.]

날개를 펼쳤다. 그대로 직진하며 해수를 뚫는다.

광검은 어떻게든 철검으로 멱살을 쥔 오른손을 자르려 하지만, 검은 갑주는 이제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광검이 내 목으로 철검을 꽂으려던 순간, 파도 속을 빠져나왔다. 물의 결계를 뚫고 나온 이상, 광검은 그저 낚싯배 위에 올라온 한 마리 청새치에 불과하다.

■■■■!

광검이 발광하며 파도를 끌어올린다. 발악이지만 그에 당해줄 이유가 없다.

[바다에서는 실컷 놀았으니 땅에 가서 좀 싸울까?]

날개의 마력을 폭발시켰다. 등 뒤의 날갯죽지에서 뿜어진 마력은 가스가 폭발하듯 내 몸을 전방으로 밀어냈다.

당연히 내게 들린 광검도 함께 밀려났다. 날개의 폭발은 쏟아지는 파도를 그대로 부섰고, 그 틈을 타 육지로 날아온 나는 광검을 땅에 메다꽂았다.

■■■■■■!

광검이 땅에 처박혀 흙먼지를 일으킨다. 공교롭게도 광검이 흙바닥을 구르며 부순 산길에는 루살카의 무덤이 있었다.

■■...?

광검의 눈이 흔들린다. 나는 그대로 땅에 착지해 마력을 전신에 둘렀다. 베어진 상처가 아물고 갑주의 흠집이 복구됐다.

[뭘 그리 놀라나. 애초에 이곳에 결계를 친 순간부터 예정된 과정인 것을.]

광검은 허망한 얼굴로 부서진 묘비의 파편을 들어 올렸다.

광검의 눈에 금색의 빛이 잠깐이나마 감돌았다.

그 순간.

[쳇.]

광검이 철검을 제 심장에 박았다. 광검은 진보라색 피를 입에서 뿜어내며 그대로 고꾸라졌다. 나는 하늘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직 결계가 살아있다. 광검의 몸에서 금색의 빛이 번쩍였다.

"하아, 하아, 하아!"

부활한 광검이 격하게 숨을 헐떡인다. 부활의 메커니즘은 다시 살아난다기보다는, 결계를 친 순간으로 육체를 되돌리는 시간 회귀에 가깝다.

즉 루살카의 힘은 다시 봉인된 거나 마찬가지다.

[귀찮게 하는군, 정말. 어이, 다시 꺼내라.]

"그게, 무슨 소리야!"

광검이 철검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흔들리는 광검의 얼굴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무슨 소리긴. 루살카의 힘을 다시 꺼내라는 소리지.]

"그 전에! 간부들이 괴물이 아니라는 거!!"

광검의 금빛 눈에 순간적으로 감정이 스쳤다. 절망? 후회? 경악?

[호오.]

나는 잠시 몸을 인간형으로 바꿨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그쪽의 힘이 갑자기 통하지 않은 것? 아니면 간부들의 실체? 뭐 다 연결되는 이야기기는 한데...."

"빨리 말해!"

광검이 조바심을 낸다. 이 순간에도 석하랑을 걱정하는 걸 봐서는 영락없는 아버지다.

"보통 이런 장면에서는 과거 회상으로 이어지기는 하는데 말이죠."

나는 손 위에 불꽃을 피웠다. 푸른 불꽃은 나비와 같은 모습을 갖추며 내 검지에 내려앉았다.

"나는 그쪽을 죽이려고 여기 온 거지, 이야기나 떠들러 온 게 아니거든요?"

"당장 말해!"

"뭐 말하면 이거 풀어 주나? 푸흐흐."

광검이 입술을 깨문다. 눈에 다시 푸른 수속성 마력이 스며들며 루살카의 힘을 일깨운다.

"으아아아!"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광검이 해수검을 휘두른다.

금방 눈에 보라색 장기가 차오르며 폭주하기 시작한다.

[평정을 잃었어.]

철검은 내 손을 틀어막고, 해수검이 팔뚝을 잘랐다. 나는 그대로 다리를 들어 올려 광검을 차 날렸다.

우지끈! 광검이 나무에 부딪혀 그대로 흙바닥을 굴렀다. 조급함과 초조함에 벌써 눈동자는 보라색으로 변해있다.

[그런데 이거는 이야기 해주지.]

과거의 이야기는 굳이 할 필요 없다. 잘린 팔은 금방 다시 복구되었다. 광검은 나를 죽일 수 없다.

[루살카는 죽기 직전, 네게 제 몸에 남은 모든 힘을 코어에 담아 넘겨줬지. 그런데 말이야.]

땅바닥에서 불기둥이 솟구쳤다. 광검은 불에 타 죽었고, 곧 부활했다. 맨정신으로 돌아온 그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다.

[루살카의 이명은 설야(雪夜). 수속성이 근간이지만 사용하는 기술은 '얼음'.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적은 없나?]

"...아니야, 그럴 리 없다. 내가 20년을 넘게 지켜봤어!"

[항상 가까이서 봐왔기에 보이지 않는 것도 있지.]

광검이 부정한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지만 그가 한사코 부정해왔던 가정. 나는 그것에 쐐기를 박아줬다.

[석하랑이 너와 루살카의 딸이니 당연히 루살카의 힘을 이어받았을 거란 생각은 해봤을 텐데?]

광검의 눈이 다시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나는 손을 들어 올려 불길을 피웠다.

[소용없다. 피닉스를 죽일 자는 이 세계에 오직 한 명 뿐이니.]

그리고 그건 광검이 아니다. 내 불길이 다시 광검을 태웠다.

* * *

푸른 하늘의 데스디나스-원작에서 간부들은 왜 하필 주인공이 있는 한국을 습격했는가?

1999년. 전 세계에 열린 일곱 개의 최초의 차원문.

그건 성주가 모든 정령의 세뇌를 끝마치고 동시에 그들을 지구로 보낸 침공의 서막이었다.

1999년 12월 25일부터 1999년 12월 31일.

간부들은 약 일주일간 세계를 부수고 잠들었다.

인간이 우주로 넘어가면 산소 고갈에 허덕이듯, 간부들도 마력 고갈로 저마다 몸을 숨겨 마력 회복에 들어갔다. 지구의 희박한 마력에 간부들은 어쩔 수 없이 회복이 끝날 때까지 잠에 빠졌다.

그렇게 약 2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 간부들은 하나둘 눈을 떠, 저마다 잠들어 있던 곳에서 세계 정복을 시작했다.

비록 협력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레 서로는 각자의 침략 행위를 보며 그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런데 한 곳이 빈다. 전 세계에 단 여섯 명의 간부만이 활동하며, 나머지 한 명의 간부가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 간부의 반응은 극동의 한반도, 대한민국에 있었다. 간부들의 시선이 하나둘 한국으로 돌아갔다.

- 이 몸께서 잠꾸러기 언니를 깨워주러 가주마!

펜릴이 인천에 상륙하자마자 주인공에게 격퇴당했다.

- 흐, 흥! 절대로 동생들의 복수를 하러 가는 게 아니에요!

그 뒤를 이어 아지다하카가 제주도에서 주인공에게 퇴치당했다.

그렇게 줄줄이 사탕처럼 간부들은 주인공에게 퇴치되고, 다섯 번째 정령인 개천광마저 격퇴당하고 모두가 휴식을 즐기던 그 순간.

광검이 죽고, 여섯 번째 간부가 깨어났다.

정확히는 일선에 물러서 있던 광검의 죽음으로, 광검의 심장에 봉인되어있던 <설야의 루살카>가 해방된 것이다. 테라의 장기를 가득 머금은 그 힘은 자연히 갈라진 제 반쪽을 찾아 그 몸에 깃들었다.

설화공주, 석하랑에게.

주인공은 장기의 영향으로 폭주하는 석하랑을 제지하면서, 동시에 석하랑이 폭주한 원인과 숨겨진 가정사를 밝혀낸다.

석하랑은 광검의 딸이고, 그 어머니는 이미 죽고 소멸한 설야의 루살카였다. 원래 세계를 부쉈어야 할 악의 조직 간부 루살카는 잠이 아니라 광검과 사랑에 빠졌고, 사랑을 나눈 끝에 기적적으로 아이를 가지게 된다.

인간으로 태어나 다크 레기온 간부의 힘을 이어받은 자.

그게 주인공 일행이 밝혀낸 석하랑의 실체.

이 모든 진실을 적당히 각색하여 밝혔을 때, 은유하는 거세게 반론했다.

- 그럼 왜 지금 광검을 굳이 죽이면서까지 석하랑을 정령으로 각성시켜야 하나요?

다른 방법을 찾아볼 생각도 않고!

그래서 대답했다.

언젠가, 광검은 자살할 거라고.

다른 간부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그 영향으로 20년 넘게 봉인해왔던 루살카의 힘이 활개를 치기 시작한다. 그는 루살카의 힘에 잠식되어 미치기 직전, 제 심장에 철검을 박아넣고 죽었다.

단지 자기 죽음으로 루살카의 힘이 사라지지 않고, 그 잔재가 석하랑에게 영향을 미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어차피 광검은 죽는다.

그렇다면 석하랑이 다크 레기온의 간부로 폭주하는 게 아니라, 온전한 정령으로 각성할 수 있도록 미리 손을 써야 했다.

제작진은 폭주가 심화되어 제때 손을 쓰지 못할 경우, 석하랑을 죽여야만 하도록 악랄한 장치를 해두었다.

석하랑을 살리면 정령으로서의 석하랑이 아군으로 들어온다. 석하랑이 죽게 되면 아군 동료가 그 정령의 힘을 이어받는다.

결국 이지선다의 선택밖에 남지 않았다.

지금 당장 광검을 죽여 석하랑을 살릴 것이냐.

아니면 시간을 들여 광검을 설득하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해제할 방법을 찾을 것이냐.

나와 은유하는 격론 끝에, 광검을 죽이고 석하랑을 살리는 노선으로 길을 정했다.

둘 중 한 명만 살릴 수 있다면, 은유하에게는 석하랑을 살리는 방향이 그에게 '이득'이었다.

그래서 나는 광검을 죽이기로 했다.

그게 내가 석하랑을 정령으로 각성시킬 최단 루트라고 내린 최선의 판단이었다.

* * *

"......그런가?"

광검이 대자로 누워 웃는다. 나는 그의 옆에 털썩 주저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거죠."

이미 결계밖에서는 태양이 떠오르고 있다.

장장 6시간에 걸친 길고 긴 전투.

광검은 루살카의 힘을 사용해 폭주하고, 나는 그를 죽여 루살카의 힘을 없앴다. 그리고 부활해 정신을 각성할 때마다, 그는 내게 진실을 요구해왔다.

108번? 109번? 중간부터 세는 걸 포기했다. 광검은 최소 그 수 배의 죽음을 통해, 내가 모든 진실을 뱉어내도록 만들었다. 마지막에 와서는 짜증이 나서 그냥 눕혀놓고 다 이야기했다.

"아주 징글징글하게도 싸웠군."

"그러니까 계속 얘기했잖아요. 당신 저 못 죽인다고."

우리 둘은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되도록 싸웠다.

그러나 난 한 번도 그에게 죽음을 허용한 적 없고, 그는 단 한 번도 내게 상처를 입히지 못했다.

광검이 화제를 돌렸다.

"그러니까 내가 죽어야만 하랑이, 내 딸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거지?"

"그런 셈이죠. 뭐, 때에 따라서는 폭주한 석하랑을 제압하고 심장을 끄집어내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만. 됐다.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아도 돼."

하늘의 결계가 흔들린다. 그것은 곧 광검의 의지가 꺾이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쨍그랑.

광검이 내게 제 철검을 내밀었다. 이미 이가 다 빠지고 날이 반쯤 사라졌지만, 그 끝은 아직 예기를 잃지 않았다. 광검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입가에 붉은 선혈이 흘렀다.

"증오스러웠다. 내게서 루살카를 빼앗아 간 그 아이가. 사랑스러우면서도, 너무나도 보기 싫었어. 하지만 차마 내 손으로 죽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고아원에 버렸어요?"

광검이 눈을 감았다. 그것은 곧 무언의 긍정이었다.

"허, 그런 양반이 12년이나 지나서 왜 갑자기 찾아갔대?"

"...시간."

광검이 뜸을 들이며 말을 이었다. 수십 년을 삭인 울분을 토해내듯, 광검은 울듯 웃으며 심정을 밝혔다.

"시간이 지나니까, 그 증오도 사그라들더구나. 루살카가 죽도록 그리웠고, 12년이나 지나서야 나는 그 아이를 비로소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허이구."

나는 몸을 일으켜 광검이 던진 철검을 집어 들었다. 푸른 불꽃이 타오르며 부러진 검날을 형성했다.

"아침 먹으러 가야 하니까 이제 끝냅시다. 집에 무서운 귀신이 하나 있어서."

"처제는 참 낭만이 없구만."

"미친 개소리는 됐고."

나는 검을 역수로 쥐었다. 광검은 제 심장에 놓인 검끝에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약속해주겠나? 하랑이에게 내가 사랑한다고, 미안하다고 전해주겠나?"

"이거 봐. 마지막에 꼭 이럴 것 같았다니까. 내가 전화통화 같은 거 안 시켜준다고 했죠?"

"야박하시구먼. 하하."

광검이 모든것을 내려놓은 얼굴로 웃는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검을 치켜올렸다.

"좋아요. 전해주죠. 대신 그쪽도 루살카에게 안부 전해줘요."

"얼마든지."

푹.

나는 광검의 심장에 칼을 박아넣었다. 루살카의 힘이 깃든 심장은 내 창염과 맞닿아 비명을 지르며 폭주한다.

광검의 눈에 보라색 기운이 넘실거린다. 하지만 광검은 두 주먹을 꾹 쥐며 어떻게든 제정신을 차리려 안간힘을 썼다.

"꼭...미안...하다고...전해주게...."

광검의 눈에서 빛이 꺼졌다. 루살카의 잔재는 그것으로 모두 불에 타 사라졌다.

우우웅----

광검의 결계가 태양빛 속으로 흩날린다. 결계가 사라지며 파괴된 섬의 흔적이 고스란히 노출된다.

푹. 나는 광검의 심장에서 칼을 빼내어 그 옆에 박았다.

"어, 저거 뭐야?!"

"꺄악! 공원이 갑자기?!"

인근을 지나던 사람들이 하나둘 공원의 참상을 발견했다. 이미 시각은 거의 7시.

나는 광검의 두 눈꺼풀을 내려주고 그대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5월 9일 아침 7시 13분.

광검 허윤환이 부산 해운대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의 옆에는 전투의 여파로 부서진 작은 묘비석이 놓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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