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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81화 (81/1,497)

〈 81화 〉1부 5장 (14)

<5월 7일 오후 11시 50분, 신서울 정부 청사.>

쾅!

책상이 거세게 흔들린다. 흑단목 책상을 내리친 주먹은 불이 날 것처럼 붉었다.

"아직도 소식이 없단 말인가?!"

선의철은 한껏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왼쪽 눈의 상처가 씰룩이며 화를 내는 게 꼭 마주 앉은 이를 잡아먹을 것 같았다.

졸지에 야밤에 불려와 억울하게 분노를 덤터기 쓰게 된 비서실장은 울상을 지었다.

"백방으로 찾고 있습니다만 워낙 대전의 피해가 커서...."

"집정관이 폐인이 되었네! 자네도 그들의 관계를 알고 있지 않나!"

협회의 비능력자 직원인 강소연의 행방불명. 마지막 목적지가 대전의 연구단지였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이 합리적인 의심을 했다.

강소연 팀장, 혹시 전투의 여파에 휘말려 어떻게 된 건 아닐까. 두 S급 이능력자의 전투에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채, 육신을 남기지도 못하고 그대로 소멸해버린게 아닐까.

"광검은?! 싸우다가 휘말린 사람이 있었으면 눈치챘을 거 아냐!"

"오, 오늘 드디어 답을 받았습니다. 전투 중에 사람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고...."

"그럼 누구랑 싸운 건지 말해줘야지!!"

다시 선의철이 버럭 화를 냈다. 도저히 진정될 기미 없이 노기가 하늘을 찔렀다.

"찾게! 무슨 일을 써서라도 찾게! 아직도 대전에서 삽질하고 있는 집정관은 강제로 쉬게 하고, 시신이라도 찾아. 알겠나!"

"예, 예!"

비서실장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선의철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허브티를 들이켰다.

"시발!"

욕지기와 함께 찻잔이 벽에 부딪혀 박살 났다. 그럼에도 선의철은 화가 가라앉지 않는 것인지, 두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고개를 뒤로 꺾었다.

'청송...이 년이.'

선의철은 알고 있었다. 청송이 누구인지. 무슨 목적으로 저를 도와 일했는지.

하지만 선의철은 그런 풋내기 같은 자에게 쉽게 당할 정도로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선의철은 적당히 청송을 어루만지고 이용하면서 권력을 얻어냈다.

문제는 지금 그 청송이 아무런 연락도 없이 잠적했다는 것.

사망은 아닐 것이다. 아직 소나무 부대는 정상적으로 정신에 제약이 걸려있으니까.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두 개.

청송이 선의철을 배신하고 도망쳤거나, 누군가에게 잡혀버렸거나. 대한민국에서 정부와 협회에 척을 질만 한 배짱을 가진 집단은 하나뿐이다.

"...그 히어로들, 유성으로 들어갔다고 했지?"

"아, 예! 오늘 오전에 유성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했습니다. 일선에서 물러난 히어로들의 도움을 받아 차세대 슈트 개발에 착수한다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 기업 주제에 사병을 거느리겠다는 거 아닌가. 비서실장, 내일 아침에 은재민을 부르게. 이건 선전포고야.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비서실장이 우물쭈물하다가 대답했다.

"은재민 회장은 어제자 비행기로 미국으로 출국했습니다. 은재윤 유성테크 사장도, 은재환 유성생명 사장도요. 남은 유성의 핏줄은 서울에 갔던 유성의-"

"그 개망나니?"

비서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폐허가 된 서울을 직접 구경하러 가고 싶다며, 철없이 정부에 할당된 1명의 자리를 꿰찬 철부지. 은재민이 직접 고개까지 숙이며 선의철에게 부탁했었다. 유성의 대표는 은유하로 보냈으면 좋겠다면서.

"...젠장. 인질로 가치도 없군. 불러서 무슨 소용이 있겠나."

대통령을 상대로 면전에서 비꼬며 날뛰던 망아지 같은 아이다. 유성의 비호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소나무 부대가 쥐도 새도 모르게 납치해 조리돌림을 했을 것이다.

"아냐. 그래도 부르게. 유성가 남자들이 감싸도 도니, 그런 제스쳐만 취해도 반응이 올 거야."

"...그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비서실장이 스크린을 띄웠다. 스크린에는 다정하게 찍은 금발과 백발의 소녀들이 웃고 있었다.

[YU-HA★] #하랑이랑_서울데이트 #나_홀로_한국 #성공적 #3박4일 #서울본사_복구해야징 #요거트_스무디_신메뉴개발중^^7

"...아무래도 설화공주와 꽤 오래 붙어있을 것 같습니다."

"둘이 이렇게 친했나?"

"은재민 회장과 설화공주가 스캔들이 잦기는 했습니다. 지난 서울 수복 작전...준비 회의 중에도 둘이서 따로 휴게실에 있는 걸 본 사람도 있고요."

"예비 시누이라는 건가. 끄응. 어떻게 손을 쓰지도 못하겠군."

삑. 그 순간, 비서실장의 스마트워치에 긴급 전보가 들어왔다. 선의철은 책상 어귀에 있던 물병을 들어 벌컥 들이켰다.

"무슨 일인가?"

"...각하, 관악에서."

비서실장이 굳은 얼굴로 스크린을 돌렸다.

"......뭐?"

관악산 정상. 그곳에는 푸른 불꽃으로 된 숫자가 나타났다.

- 23 : 59.

어느덧 시계는 5월 8일을 1분 넘긴 시각이었다.

* * *

"...과연."

광검은 캔맥주를 홀짝이며 스크린을 노려봤다. 드론을 통해 중계되는 영상에는 타이머처럼 돌아가는 푸른 불꽃이 타고 있었다.

카운트다운. 광검은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부르고 있다. 다크 레기온의 간부, 창염이.

"......."

광검은 제 손을 쥐었다가 다시 폈다. 수전증에 걸린 것처럼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마력 때문에 알코올에 전혀 취하지 않지만, 이번만큼은 술에 취한 것 마냥 전신이 떨렸다.

"......업보, 인가."

광검은 맥주캔을 내려놓았다. 삑. 동시에 스마트워치에 알람이 울렸다.

[석하랑] : 쌤! 하랑입니다. 밤에 또 술 드시는 건 아니죠? 술만 드시지 말고 여자도 좀 만나고 다니세요! 히어로 언니들이 쌤 좋다고 난리인데 왜 자꾸 모른 척하시나요. 아, 이 말 하려고 한 게 아닌데.

"......."

광검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석하랑이 보낸 문자를 읽었다. 곧 다음 문자가 도착했다.

[석하랑] : 자정부터 별다른 말은 아니고요, 그냥 이 말 하고 싶어서 문자 드려요. 쌤 덕분에 저 유명해지고 막 그래서 쌤한테 정말 고맙습니다. 특별한 날은 아니지만 그냥 문자 드렸어요! ^-^

"......."

광검은 새 맥주캔을 따려고 들어 올렸다 곧바로 내려놓았다.

[석하랑] : 사랑합니다♥ 나중에 보시면 꼭 용돈 주세요 ♥♥

"......이게."

광검은 피식 웃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지금의 제 표정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

광검은 답장하지 않았다.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어둔 철검을 꺼냈다.

"......살아돌아와서, 모든 진실을 밝히겠다."

창염이 석하랑에게 딴짓을 하기 전에, 창염을 죽인다.

그것이 제게 남은 마지막 천명이라도, 광검은 되뇌였다.

그리고 하루가 흘렀다.

* * *

<5월 8일 오후 11시 55분, 해운대 D섬.>

파도가 절벽에 부딪혀 넘실거린다.

고요한 바닷바람이 부는 소리 속에,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저벅, 저벅.

검은 정장, 바지를 입은 푸른 소녀는 품에 한 다발의 국화꽃을 안고 산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순백의 국화로만 이루어진 그 꽃다발은 무덤에 바치는 헌화 같기도 했고, 신부에게 주어지는 부케 같기도 했다.

동산 같은 산길의 한 가운데, 무덤이 있다. 관조차 없이 묘비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무덤. 이름도 없이 그저 '~2000.10.13.'이라는 사망일만이 적혀있다.

피닉스는 무릎을 꿇고 묘비에 꽃을 놓았다. 그리고는 곧 일어나 두 손을 모아 합장하며 허리를 숙였다.

"......."

남자는 그 옆에 서서 묵묵히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마찬가지로 검은 정장에 검은 넥타이. 단정하게 정돈한 머리칼과 수염은 원숙한 나이에도 제법 잘 어울렸다.

기도를 마친 피닉스가 산책로를 따라 내려갔다. 남자 또한 그 뒤를 따랐다.

인적이 드문 밤의 공원. 피닉스는 벤치를 가리켰다. 남자, 광검은 그 뒤를 따라 벤치에 앉았다.

"자요."

"......."

피닉스가 주머니에서 캔음료를 건넸다. 광검은 묵묵히 그 음료를 받았다. 갓 편의점에서 사 온 듯한 차가움이 느껴지는 콜라. 피닉스의 손에는 똑같은 것이 하나 더 들려있었다.

정적. 서로 간에 하고 싶은 말은 많다. 파도 소리와 함께 탄산이 터지는 소리만이 공원에 울렸다.

먼저 입을 연 쪽은 피닉스였다.

"미안해요."

"뭐가?"

"그쪽, 제가 죽이게 돼서."

광검이 헛웃음을 지었다. 탄산이 목을 타고 흐르며 갈증이 가라앉았다.

"이미 내가 죽는 건 기정사실인가?"

"당연하죠. 당신은 여러모로 아웃이에요. 다크 레기온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이 세계의 운명적으로나. ...뭐, 그래도."

피닉스가 캔을 옆으로 밀었다. 마시던 도중의 건배 제의였지만, 광검은 캔을 부딪쳤다.

깡.

"따님한테 마지막 인사 안 남겨도 돼요? 막 죽기 직전에 전화 한 통만. 그런 거 얘기해도 저 안 들어줄 거예요."

"그럴 일 없다. 너야말로 괜찮겠나? 나는 너를 체포할 생각으로 온 게 아니다."

광검은 제 허리에 걸린 철검을 가리켰다. 월광에 비교하면 둔탁하고 밋밋하기 그지없는 모양. 하지만 그 검이야말로 광검과 모든 전장을 함께 누벼온 영혼의 파트너다.

"나는 너를 죽이러 왔다."

"그런가요."

피닉스는 남은 콜라를 전부 입에 털어 넣었다.

"마지막으로 하나 물어봐도 되죠?"

"하나만."

"루살카는."

광검의 표정이 한순간, 굳었다.

"루살카는 마지막에, 편안하게 갔나요?"

"......아아. 웃으면서 떠났다."

"그래요...?"

피닉스는 끅끅 웃어댔다. 웃음을 참으려고 하지만 절로 웃음이 나오는듯한 모습에, 광검은 절로 기분이 불편해졌다.

"다행이네요. 여러모로 걱정 많이 했는데."

"...그렇게 여유로워할 때가 아닐 텐데?"

"왜요?"

"그야 네가 오기 1시간 전부터...."

광검의 눈이 번쩍인다. 섬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던 빛의 우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렇게, 궁극기를 펼쳐놨으니까."

"...여기서 싸우자고요?"

피닉스가 루살카의 묘비를 가리켰다. 광검은 처음으로 웃으며, 제 심장을 가리켰다.

"묘비는 상징 같은 거다. 진짜는 내 가슴에 묻었으니."

"우와, 멋있는 척. 근데 장인어른이 하시니까 좀 멋있긴 하네요. 역시 중장년 최고 미남."

"......뭐?"

"푸흐흐. 적을 앞에 두고 당황하는 꼴이란."

광검이 처음으로 혼란을 보였다. 피닉스는 손사래를 치며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의미 없는 소리 해봤어요. 그렇잖아요? 어차피 그쪽이 이렇게 대화하려는 것도, 궁극기 완성될 때까지 시간 끄는 거니까."

"......알면서 왜 일부러 여기에 들어왔지?"

피닉스가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이미 섬에는 빛의 검들이 촘촘히 짜여 탈출구를 막고 있다.

외부와의 모든 것을, 마력까지 차단하는 빛의 장막. 결계가 완성된다면 분령(分靈)인 미니피닉스를 통한 공간 전이도 불가능해진다.

"그야."

피닉스가 자세를 잡았다. 두 주먹을 들어 올리고, 무릎을 굽혀 몸의 중심을 낮춘다.

부웅-!

광검이 검을 뽑아 들었다. 철검의 검신에 금색의 빛이 서린다.

"궁극기 발동되면, 당신도 여기서 도망치지 못하니까. 그렇죠? 광견(狂犬)."

"그 이명을 다시 듣게 될 줄은 몰랐는데."

섬을 둘러싼 빛의 장막에 틈이 사라진다. 이제 이 섬은 외부와 단절된, 별개의 세상이 되었다.

"그렇잖아요? 의지가 꺾이지 않으면 죽어도 부활하는 기술이라니.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광검이 검을 들어 자세를 취했다.

"그러니까, 궁극기인 거지."

"이래서 힘숨찐들이란."

원탁마저도 오르지 못한, 세계 최초로 친화율 96의 벽을 넘긴 자. 만약 그 힘을 세계에 공개했다면 최초로 SS급이라는 위업을 달성했을 은거기인.

오직 석하랑 루트에서만 적으로 만나게 되는, 광속성 친화율 99라는 희대의 개캐. 만약 광검을 동료로 영입할 수 있었다면 원작 게임은 진 광검무쌍이 되었을 것이다.

"평소에는 힘을 숨기고 있다가 중요할 때만 터뜨리다니. 사람들 보기 부끄럽지 않아요? 기만하는 거."

피닉스의 양손에 푸른 불꽃이 타올랐다. 창염은 곧 건틀릿의 형상을 갖추었다.

"이쪽도, 마찬가지지만!"

파도가 절벽에 부딪혔다. 하늘로 솟구쳐 다시 수면으로 떨어진다.

째깍. 공원의 가로등에 걸린 시침이 움직였다. 시침과 분침, 초침이 모두 하나로 겹쳐진 자정.

그 순간, 둘이 동시에 발을 박차고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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