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1부 5장 (12)
은유하는 절대 자신의 성에서 나오지 않는다.
개차반 이미지를 굳히기 위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은재민이나 블랙마켓 회장 같은 인형들의 조종에 집중하기 위해 일부러 본인의 활동을 최소화하는 목적이다.
셀프 자택연금.
은유하가 모습을 드러내는 건 본인의 생일날 있는 사교계 파티뿐이다. 원작에서도 은유하는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믿을만한 사람만 제집에 초대해 본체를 보여준다.
그를 어린 시절부터 키워준 유모와 집사. 지금은 인천에 파견 나와 있지만 원래 본사 출신인 백상우. 그리고 은유하의 정체를 파악하고 친해진 석하랑.
일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은유하가 직접 내 앞에 나타난 것에,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긴 왜 왔어요?"
"어떻게 오긴요. 당연히 고객님께서 호출하셨잖아요?"
은유하가 스마트워치를 두드렸다. 물론 내가 은유하를 부르기는 했다. 하지만 그 의미는 본체가 아니라,
"은재민이든 회장이든 다른 인형 보내면 되잖아요? 정부나 협회에도 넣어둔 인형 있지 싶은데."
"물론 있기야 하죠. 그런데 제가 고객님이랑 계약에 대해 조금 다시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아서."
은유하가 스크린을 띄웠다. 파괴된 대전 연구 단지가 눈에 들어왔다.
"...아, 대전이네요? 요 며칠 시끄러웠죠?"
"알만한 분이 왜 이러실까? 고객님이 저질렀죠?"
역시. 어쭙잖은 변명은 통하지도 않는다. PMC로 넣어준 히어로 10명과 강소연의 존재 때문에, 이미 은유하는 정답을 유추해냈을 것이다. 나는 음료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마시면서 이야기해도 돼요?"
"물론이죠."
나는 그대로 딸기 요거트 스무디를 골랐다. 은유하가 고른 것은 아메리카노. 평범한 것과는 달리 조금 색이 진해 보였다. 나는 빨대로 안을 휘저으며 은유하의 질문에 답했다.
"네. 광검이랑 한 번 치고받고 싸웠어요."
"역시."
은유하가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고 인상을 찌푸렸다. 무언가를 계산하려 들 때, 은유하는 왼쪽 눈썹을 미세하게 들어 올린다.
절대 방해하면 안 될 순간. 나는 은유하가 답을 내리고 먼저 입을 열 때까지, 유유히 기다렸다.
탁. 커피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은유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대로 계약을 계속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너무 리스크가 커요."
"왜죠?"
이유는 알지만, 일부러 은유하의 입으로 듣고 싶었다. 은유하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말했다.
"광검이 무너지면 대한민국이 무너져요. 유성은 이 나라의 그룹이기에 가치가 있는 거지, 세계 전체로 두고 보면 흔하디흔한 재벌에 불과해요. 아무리 고객님이 코어를 많이 벌어다 주신다고 해도, 한국 전체를 박살 내는 데는 협조할 수 없습니다. 아직 유성은 한국이라는 울타리가 필요하니까."
"역시 그게 문제군요."
유성이라는 그룹이 존재하기에 은유하는 자산을 쌓아나갈 수 있다. 개인의 이능력도 자본이 많이 들어가는 능력인 만큼, 그 자본의 뿌리인 한국이 붕괴되면 은유하를 비롯한 유성 전체가 사라진다.
안보의 공백. 광검이 사라지고 난 자리를 지켜줄 만한 누군가가 필요했다.
"광검의 공백을 우리 청화단이 메꿀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신가요?"
"임진왜란에 수많은 의병장이 있었지만, 충무공이 계셨기에 나라를 지킬 수 있었죠. 그리고 그쪽은 의병도 아니고 화적떼잖아요? 불가능. 안 돼요. 내세울 수 있는 정통 히어로가 필요해요. 빌런이 아니라."
나는 딱히 부정하지 못했다. 그만큼 광검의 위상은 현재의 한국에서 상당히 높았다. 은유하가 말을 이었다.
"지금의 국제정세도 그래요. 일본은 껀수만 잡히면 곧장 이 땅을 집어삼킬 기회를 노리고 있고, 중국은 아예 백두산에 전진기지를 차렸죠. 러시아는 평양 사태 이후로 극동을 포기했고요."
"즉, 광검이 무너지면 그들이 전쟁을 일으킬 거다?"
은유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굳어가는 표정이 내 본심을 파악하는 것 같았다.
"고객님. 설마 전쟁을 원하시는 건 아니죠? 광검이 사라지면 중일전쟁 시작이에요. 승자가 한반도를 독식하는 정복 전쟁."
"막으면 되잖아요?"
내 태연한 대답에 은유하가 컵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고객님 조직의 전력이, 원탁보다 더 강하다는 말씀?"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나를 가리켰다.
"일단 제가 다 죽일 수 있어요. 광검도, 운장도, 질풍객(疾風客)도."
"자신감이 넘치시네요. 좋아요. 대전에서 보여준 위용이 있으니까, 백 보 양보해서 그들을 다 죽일 수 있다고 칩시다."
은유하가 입술을 깨문다.
"중국과 일본, 양국이 협력한다면? 원탁 둘이 각기 다른 전장에 달려들면 어쩌시려구요? 한 명과 싸워서 상처를 입고, 다른 한 명과 싸워서 패배하면?"
"지지 않고, 다칠 일도 없어요."
"고객님."
은유하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지금 인생 일대의 내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성공하면 동아시아 전체의 금권을 주무르는 대부호, 실패하면 멸망한 나라의 몰락한 재벌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조금 신중하게 거래에 임해주시겠어요? 제가...."
은유하가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고객님을 믿고 저의, 유성의 모든 것을 걸 근거를 보여주세요. 아니면 고객님과의 거래는 오늘부로 끝입니다."
"과연. 그래서 직접 온 거군요."
광검이라는 거인을 역사속에 묻고, 중국과 일본 두 나라를 상대로 굳건히 일어설 수 있다면 이 나라는 동아시아의 맹주가 될 것이다. 그건 한중일 세 나라 모두가 공통으로 생각하는 이상(理想)이다.
"역시 꿈이 '세계 정복'인 여자는 스케일이 다르네요."
"...사람이 살면서 꿈은 크게 가져야 하는 법이잖아요? 저는 단지 세계를 제 발밑에 놓고, 제 입맛대로 경영하고 싶을 뿐이에요. 겸사겸사 돈도 좀 벌고."
"새삼스럽지만 한 번 물어봐도 돼요? 자신 있나요?"
은유하가 웃으며 제 가슴에 손을 올렸다.
"고객님. 제 꿈이 허황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요."
"왜죠?"
역으로 물어온다. 내가 자신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다고, 은유하는 확신에 차 있다. 나는 은유하가 바라고 있는 말을 그대로 읊었다.
"그럴 능력이 되니까, 당연히 그런 꿈도 꾸는 거 아니겠어요?"
"......고객님."
은유하의 목소리가 떨린다.
"혹시 평행 차원 같은 곳에서 오신 건 아니죠? 그곳에서 저랑 사랑하는 사이였다거나. 그거 저 결혼할 사람한테만 이야기하려고 한 건데. 이쪽 세계로 넘어오면서 막 성별 바뀌고 그런 건?"
"......세상에 그런 게 어딨어요?"
은유하의 눈에 의심스러운 눈초리가 가득하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은유하를 진정시켰다.
"이걸로 다섯 번째입니다. 정답은 아니에요. 그저 저도 당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둬요. 제 꿈은 말이에요."
은유하가 내 목소리에 집중한다.
"이 세계를 멸망시킬 신을 죽이고, 이 지구를 지키는 것 하나밖에 없어요. 겸사겸사 저도 살아남고."
"......당연히 그럴 능력은 되시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뜬금없는 말이지만, 은유하는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진실을 도출해 낼 것이다. 은유하가 커피로 목을 축였다.
"...그래도 아직은 근거가 부족해요. 최소한 손 패는 보고 콜을 해야 하는데, 제가 가진 패 중에 저는 에이스 한 장만 보고 전 재산을 걸어야 하잖아요."
"최소 세 장까지는 열어봐야 풀하우스인지 스트레이트 플러시인지 안다?"
"당연하죠. 전 재산 걸었다가 A원페어면 거덜 나게 생겼는데."
고민된다. 패를 어디까지 공개해야 할까.
괴인으로 만들어버리면 마음이야 편하겠지만, 앞으로 은유하는 인간으로서 대외 활동을 해야 한다. 만약 내가 강제로 괴인을 만들게 될 경우, 은유하는 반발심에 명령을 내려도 그 특유의 잔머리로 내 뒤통수를 칠 사람이다.
제갈량이 될 수도 있고 사마의가 될 수도 있는 여자.
어쩔 수 없다. 광검을 죽이고 그 공백을 수습할 방법에 관해 이야기하는 수밖에.
똑똑한 사람이니까 나보다도 더 좋은 방안을 제안할지도 모른다.
만약에 이용하려고 들면?
'죽여야지.'
"잘 들어요. 제 계획은요...."
은유하가 마시던 커피도 내려놓고 경청하기 시작했다.
* * *
"아, 진짜 돌아버리겠네."
석하랑은 하얀 머리를 쥐어뜯으며 골목 밖에서 전전긍긍했다. 고작 서울의 평범한 골목일 뿐인데, 왠지 들어가기가 꺼려진다.
"언니가 그런 취향이었다고?"
이해는 간다. 은유하는 인생의 절반 가까이 남자 행세를 하며 살아왔다. 그게 한두 명이 아니라, 무려 일곱 명이나 되는 이의 인생을 대신 살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어쩌면 성적 정체성이 흔들리거나, 아니면 양성애자로 바뀐 게 아닐까. 은재민은 상당히 많은 여성과 썸이 있었으니, 그중에 진짜가 있었을지 모른다.
석하랑은 등골이 서늘했다.
"그러면 혹시 나도...?"
석하랑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머릿속에 떠오른 가정을 부정했다. 다행히 아직 은유하의 마수는 제게 미치지 않았다.
"......어우, 진짜 소름."
고아원에서 석하랑을 발견한 광검이 후견인을 자처한 이래, 석하랑에게 호감을 표하는 이들은 많았지만, 그 누구도 석하랑과 이어지지 못했다.
석하랑 본인의 성에도 안 차는 게 있었지만, 그럴 때다 싶으면 항상 광검이 빛처럼 나타나 건수를 차단했다.
여중, 여고. 사실상 히어로 활동에 전념하며 최소 출석 일수만 채웠다. 만약 서울에 있던 여대들이 살아있었다면, 광검은 무조건 석하랑을 여대에 보냈을 것이다.
석하랑의 옆에는 대부분 광검이 있었다.
"나 아직 연애도 한 번 못해봤는데."
꽃미남도 아니고 꽃미녀라니. 그럴 수는 없다.
"그래. 나오면 바로 거절하는 거야."
석하랑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벌써 한 시간.
밀약이 있다며 밖에서 호위해달라고 했지만 차마 그 안쪽까지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고, 은유하 본인도 원치 않았다. 다만 무슨 일이 생기면 곧장 신호를 주기로 했다.
삑. 문자가 도착했다. 대화가 끝났다는 은유하의 알림.
"후우, 후."
석하랑은 속으로 되뇌었다. 상대는 이능력의 과도한 사용으로 성적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사람. 비록 석하랑은 그 사랑을 받아주기는 어려웠지만, 힘내라는 말 정도는 해줄 수 있다.
저벅, 저벅.
골목 귀퉁이에서 은유하가 모습을 드러냈다. 밖에서는 철혈과도 같은 의지와 망나니 같은 이미지를 고수하던 은유하가, 지금은 왠지 크게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언니야?"
슬픔, 동정, 애도. 은유하에게서 흐르는 마력의 잔재에는 석하랑에 대한 심심한 위로가 담겨있었다.
번쩍. 석하랑은 태양 빛에 눈살을 찌푸렸다. 은유하는 그림자 속에 물드는 것처럼 햇볕으로 나오지 못했다. 구두 굽이 그림자 경계에 멈췄다.
"하랑아. 미안해."
"...언니야가 뭐가 미안한데?"
"나, 진짜 최선을 다했어."
"뭔 소리고. 퍼뜩 돌아가자. 벌써 사람들 난리다."
은유하는 햇빛 아래에서 피식 웃고 있는 석하랑에게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석하랑은 은유하의 손을 잡아당기며 짓궂은 얼굴로 말했다.
"여기만 사랑이 있겠나? 신서울에도 언니야 사랑해 줄 사람 분명 있을기다. 내 연애 박사 아이가. 마 부산 오면 언니야 찬 사람보다 훨씬 예쁜 사람 소개 시켜 줄게."
"이게 지금 무슨 개뼈다귀 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
"...언니 지금 차인 거 아니었어?"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돌아가자. 피곤해."
은유하는 소매를 뿌리치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은유하의 눈에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이 그렁그렁 걸려있었다.
석하랑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얼굴로 미소지었다.
"차인 거 맞네."
* * *
"...그게 진짜예요?"
은유하는 부정 했다. 유성의 정보력으로도, 협회와 정부에 심어놓은 정보원들도 얻을 수 없었던 기밀.
눈앞에서 세간이 뒤집힐 충격적인 진실을 늘어놓은 상대는 유유히 빨대로 요거트를 들이킨다.
눈을 감고 요거트의 맛을 즐기는 표정이 꼭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것처럼 개운했다.
"믿든 안 믿든, 그거야 아가씨 자유에요. 하지만...."
피닉스의 손이 불꽃에 휩싸였다. 곧 팔은 검은 갑주와 푸른 불꽃으로 변했다.
"광검을 죽이고 난 뒤에 얻을 수많은 이점, 이해는 가죠?"
".......예."
수도 없이 저울질했다. 이능력 덕분에 개발된 7명분의 사고 회로는 다각도에서 두 경우를 비교했다. 광검을 죽이고 피닉스와 야합을 하는 경우. 이대로 피닉스와 거래를 끊고 광검에게 손을 벌리는 경우.
결론은, 광검을 죽여야만 했다. 은유하 본인을 위해서도, 유성의 존속과 대한민국을 위해서도, 나아가 세계 평화를 위해서도.
그것이 은유하에게는 이득이라고, 은유하는 판단했다. 은유하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좋아요. 대신 제 의견 참고해주시는 거죠?"
"아뇨? 그대로 따를 건데요? 푸흐흐. 저 그냥 죽이는 것만 생각했는데, 역시 상담하길 잘했네요. 역시 아이디어 뱅크."
"...대신 '그거'는 저한테 주시는 겁니다? 선물이 아니라, 컨설팅료로 받는 거예요?"
"네. 마음껏 쓰세요."
방향은 정해졌다. 이제 나머지는 은유하가 그룹을 움직여 암중에서 활약하기만 하면 될 일이다.
결행일은, 5월 9일 토요일.
"그런데 한 가지 이해가 안 가는 게 있어요."
"뭔데요?"
은유하가 막 음료를 집으려던 피닉스에게 물었다.
"광검을 죽이는 날, 왜 하랑이가 못 일어나게 재우라는 거예요? 하랑이가 싸우는데 방해될까 봐?"
피닉스는 입을 닫았다. 은유하는 타들어 가는 목에 남아있는 커피를 모두 입에 털어 넣었다.
"설화공주...."
피닉스가 입을 열었다.
"석하랑, 광검 딸이에요."
주륵. 은유하의 입술에서 커피가 폭포 흐르듯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