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77화 (77/1,497)

〈 77화 〉1부 5장 (10)

밤하늘에 빛의 검이 지상으로 내려꽂혔다. 그 이상으로 이 광경을 표현할 방법이 있을까.

단지 그 빛의 검이 빌딩 한 채만큼 거대한 크기이고, 그 검을 땅에 꽂은 이가 다른 누구도 아닌 광검-허윤환이라는 것이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이다.

검이 꽂히며 땅에서 울린 거대한 지진. 광검의 검은 지진의 진앙을 향해 떨어졌다.

새벽 5시 30분. 깊은 잠에 빠졌던 이들이 몸을 뒤척이며 마지막 달콤한 꿈을 꾸고 있을 시각.

애애애애앵--------!

귀를 때리는 날카로운 적습 경보가 신서울을 울렸다.

* * *

빛의 검이 지하에서 반짝인다. 검끝은 날카로운 송곳처럼 나를 꿰뚫기 위해 지하를 뚫고 여기까지 닿았다.

그 첨단은 내가 들어 올린 손바닥과 맞닿아있다.

키키기긱!

빛의 검은 여전히 모든 걸 갈아버릴 기세로 나를 짓누르고 있다. 하지만 내 손바닥을 조금도 밀어내지 못하고 있다.

내 손에 생긴 푸른 보호막. 나는 마력을 모두 위로 방사해 빛의 검을 밀어내고 있다.

카가강!

마력과 마력 간의 줄다리기에서는 당연히 마력 많은 쪽이 이긴다. 나는 손에 온 마력을 쏟아부었다.

'시작부터 크게 지르네.'

어차피 저쪽도 기본 스킬에 불과하지만, 그 위상이 일반 히어로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나는 손을 튕겨 정수리 끝에 닿을락 말락 하는 빛의 검 끝을 살짝 들어 올렸다.

약 5cm. 한 뼘도 안 되는 짧은 거리지만, 그 거리면 이 검을 부수기에 충분했다.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 어느 쪽이 부서질 지는 명약관화.

파직, 파지직!

검의 첨단에서 균열이 생기며 검의 형태가 망가진다. 검이 내뿜는 금색의 빛은 자연 세계의 것이 아니라, 광속성을 보유한 마력의 색깔이다.

빛의 검에서 빛 가루가 떨어진다. 검신에서 떨어져나온 마력의 잔향이 지하 여기저기로 흩뿌려졌다.

화륵.

창염이 검의 중심을 타고 빠르게 지상으로 오른다. 도화선에 불붙은 것 마냥, 푸른 불꽃은 마력의 근간 흔들며 검신을 부순다.

순간, 검의 중심에서 파장이 느껴졌다. 검신을 지탱하는 마력의 지지대.

"빙고."

나는 그대로 그걸 비틀었다. 창염이 검신의 중추를 불태웠다.

파스스.

지지대를 잃은 검날이 아주 작은 입자로 분쇄되었다. 뼈대가 박살 나자 응집력을 잃은 광속성 마력이 그대로 대기 중에 흩어졌다.

"예쁘긴 하네요."

나는 스마트워치를 들어 올렸다.

찰칵.

야밤에 반딧불이 날아다니는 것처럼 장관이 그지없다. 세상 그 어떤 불빛 축제도 이보다 아름다울 수 없는, 몽환적인 빛무리 아래에서 나는 날개를 펼쳤다.

천장을 올려다봤다. 빛의 검이 뚫어준 덕분에 차가운 밤공기가 지하까지 내려왔다.

"한 30m는 되려나...?"

이미 빛의 검은 모두 사라졌다. 남은 것은 두 마력이 부딪히며 대기를 흔든 마력의 파장뿐.

지직, 지직.

스마트 워치에서 무언가 알람이 오지만 신호는 닿지 않는다. 그러나 시침은 돌아간다.

5시 33분. 곧 있으면 태양이 고개를 들어 올릴 시간.

날개를 접는다. 무릎을 굽힌다. 빛의 검이 다시 지하로 꽂히기 전에 먼저 상대와 같은 땅 위에 서야 했다.

"후우."

짧은 심호흡. 땀이 나지 않는 몸임에도 손바닥이 간지럽고 목이 바싹 마른다.

지금까지 싸워온 이들 중 두번째로 강한 적.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정령의 심장에 칼을 꽂은 정령살해자.

'그래서, 두려운가?'

"그럴 리 없지요!"

날개를 펼치며 수직으로 날아오른다. 빛무리가 반짝이며 칼날처럼 날을 세우려 하지만, 그보다 더 빠르게 날아올라 지상으로 올라왔다.

그가, 광검이 땅에 검을 꽂고 서 있다.

"......."

평소의 단정한 옷차림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그는 자다가 급하게 대전으로 달려왔을 것이다. 실크로 된 잠옷과 흑백의 삼선 슬리퍼. 밤사이 자란 턱수염이 지저분하게 얽혀있다.

탁. 날개를 접고 땅에 발을 디뎠다.

"......."

".......흐흐."

광검과 시선이 맞닿았다. 그의 눈은 방금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잔뜩 충혈되어 있었다.

나는 그에게 우아한 몸짓으로 인사했다.

"아버님, 좋은 아침입니다."

"아직 해 안 떴다. 누가 네 아버님이야."

목소리에 신경질이 가득하다. 그가 어떻게 침대에서 일어났을지 연상되어, 나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나는 미소를 가득 머금고 두 팔을 벌렸다.

"여기 태양이 있잖아요?"

"......시덥잖은 농담이나 하는 자라고는 들은 적 없는데."

남자가 검집에서 검을 뽑는다. A급 코어 십 수개를 갈아 넣어 벼려낸 장검, 월광(月光). 달빛에 비친 검신에 금빛의 마력이 실린다.

전투 개시. 나는 두 주먹에 불꽃을 휘감으며 불평했다.

"아직 저 제 소개도 안 했는데요?"

"알게 뭐냐. 괴수는 죽이고 빌런은 체포할 뿐. 그리고...."

광검이 자루를 두 손으로 움켜쥐며 달려들었다.

"괴인은, 쳐죽인다!"

"아니 일단 소개부터!!"

"시끄럽다!"

"낭만이 없네, 낭만이!"

주먹과 검날이 부딪혔다.

* * *

새벽. 집정관 유영호가 막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 시각. 그는 침대에 몸을 눕힌 지 고작 10분 만에 다시 몸을 일으켜 상황실로 달려왔다.

"무슨 일이야?!"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지만, 아무도 없다. 상황실을 가장 먼저 들어온 사람은 유영호였다.

"이런 시간에 다들 자고 있다니...!"

제 생체리듬이 남들보다 훨씬 돌아가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 유영호는 구시렁거리며 스크린을 조작했다.

"괴수 경보가 아니라고?"

유영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괴수 경보도 아닌데 이 정도까지 경보가 울릴만한 일이 무엇이 있을까.

삐이이이--

스마트워치에 알람이 울린다. 적습 경보와는 다른 데시벨로 울리는 긴급재난문자. 유영호는 재빨리 그 문자를 확인했다.

[긴급] 05월 02일 05시 30분, 대전시 유성구 동북동쪽 2km 내륙 규모 2.0 지진 발생.

[긴급] 05월 02일 05시 32분, 대전시 유성구 동북동쪽 2km 내륙 규모 3.2 지진 발생.

"...단순 지진이라고?"

그럴 리 없다. 지휘관의 날카로운 감은 현 사태가 자연현상이 아님을 확신하고 있다.

삑. 상황실 모니터에 위성 영상이 잡혔다. 유영호는 재빨리 스크린을 조작해 영상을 확대했다.

대전의 북쪽, 코어 연구소. 그 일대가 전부 마력의 파장으로 뒤덮여있다. 유영호는 손등으로 입을 가렸다.

"맙소사...."

전투의 한 가운데, 광검의 검이 빛나고 있었다. 흙먼지 속에서 광검 특유의 마력 색깔이 번쩍거린다.

광검이 지금 대전에서 싸우고 있다. 유영호는 스마트워치를 다급히 눌렀다.

"강소연! 강소연! 빨리 대답해!"

다급히 부관을 호출하지만 강소연은 연락을 받지 못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연결이 되지 않자, 유영호는 신경질을 내며 스크린을 내렸다.

"젠장, 젠장!"

유영호가 벽에 걸린 아무 마이크나 집어 들고 마력을 흘려 넣었다. 하나둘 옷을 대충이나마 걸친 이들이 상황실에 급히 들어왔다.

"<집정관>이 알린다! 적습! 비상사태 S! 광검 응전 중! 모두 전투가 준비되는 대로 지정 위치로 집결하라!"

* * *

빛이 번쩍인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수도 없이 명멸하는 광검의 검은 상대의 시야를 방해하는 악랄한 수단이다.

화륵. 전방에 불꽃을 뿌렸다. 망토처럼 펼쳐지는 보호막을 앞으로 내던지고 뒤로 크게 점프해 물러난다.

서걱! 보호막이 사선으로 갈라졌다. 광검은 그대로 내게 돌진하며 다시 검을 사선으로 올려 벤다. 내가 뒤로 빠지는 속도보다 광검이 더 빠르다. 피하기에는 늦었다.

그래서 나는 그대로 손에 불꽃을 둘렀다.

방어를 도외시하고.

"?!"

광검이 순간 당황하지만, 검을 휘두르는 손은 그대로 사선으로 치솟는다. 빛의 검이 오른쪽 허벅지부터 왼쪽 복부 위까지 갈랐다.

피하지 않는다. 일부러 피하지 않았다.

파밧. 붉은 피가 튄다. 내가 쉽게 공격을 허용할 것이라 예상치 못한 광검은 그대로 내 피를 뒤집어썼다.

마킹.

이제는 놓치지 않는다. 내 오른손의 화염이 그대로 광검을 향해 쏘아졌다.

번쩍! 다시 광검이 빛무리 속에 몸을 숨긴다. 태양빛이 있다면 나도 똑같은 방법으로 몸을 숨길 수 있지만, 아직 태양이 뜨려면 시간이 남았다.

달빛 속에 숨어버린 광검은 눈으로도 마력으로도 뒤쫓을 수 없다.

"스읍."

그렇다면 냄새로 쫓는다. 내 화염구가 잠시 방황하다가 곧바로 적을 추적해 날아갔다.

혈향을 쫓아간 화염구가 도착한 곳은 가로수 위. 5m 높이의 가지에 올라 몸을 숨겼던 광검에게 화염구가 닿아 폭발한다. 광검은 재빨리 나무에서 뛰어내리며 낙법을 취했다.

콰앙! 수십 년은 자랐을 나무가 폭발과 함께 불타버렸다. 불꽃은 주변에 옮겨붙지 않고 그대로 떨어지며 광검을 덮친다.

"큭!"

광검이 몸을 굴러 비처럼 떨어지는 불꽃을 피했다. 그 잠깐의 순간, 나는 땅을 박차고 달려 광검에게 달려들었다.

여전히 광검은 내 피를 뒤집어쓰고 있다. 나는 두 주먹에 불꽃을 머금고 광검을 향해 먼저 오른 주먹을 내질렀다. 광검이 급히 검을 들어 올린다.

파-앙!

광검이 검면으로 주먹을 맞받았다. 마력과 마력이 부딪히며 주변에 충격파를 일으킨다. 바람이 흩날리며 얼굴이 드러난 광검의 눈은 나와 내 배를 훑고 있었다.

과도한 움직임으로 자상에서 피가 쏟아진다. 이미 몸 군데군데 검날과 빛무리가 스쳐 피가 흐른다.

하지만 나는 아픔을 꾹 참고, 그대로 왼쪽 주먹을 검 아래로 내질렀다.

아래에서 위로 용솟음치듯 올려치는 어퍼컷. 다시 마력이 부딪히며 충격파가 재발했지만, 조금 전의 것과는 분명히 달랐다.

초격의 것이 검면과 주먹의 접촉이라면, 이번 이격(二擊)의 접촉은 검날과 주먹의 접촉이다. 검이 그대로 위로 살짝 떴다.

자연히, 광검의 하단이 비었다.

"크윽?!"

광검이 검을 빼려 하지만 늦다. 제 몸에 죽을 수도 있는 상처를 입히면서까지 공격을 감행하는 대인전은 광검도 경험이 많지 않을 것이다.

흡사 뼈를 주고 살을 취하려는, 제 몸을 돌보지 않는 자살공격.

나는 그대로 왼발로 땅을 딛고 오른발을 뒤로 뻗어,

새액! 수직으로 크게 차올렸다. 광검이 검에서 팔을 최대한 뻗으며 몸을 뒤로 내뺐다. 발끝이 광검의 앞머리를 스쳤다.

공격의 실패. 광검이 검을 회수해 그대로 찌르려 한다. 나는 그대로 발을 내리찍었다.

푹. 광검이 내 왼쪽 어깻죽지를 검으로 찌르고,

쾅! 내 발이 광검의 왼쪽 어깨를 크게 짓눌렀다.

자상과 타박상. 어느 쪽이 더 아프다고 우열을 가리기는 어렵다. 광검은 내 신체에 데미지를 입혔지만, 나는 광검의 몸에 둘러진 호신강기를 깨뜨렸다.

씨익. 나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광검은 스스로가 적을 '찔렀다'는 행위에 잠시 넋을 잃었다. 초 단위로 승패가 갈리는 이런 싸움에서 그런 방심은 곧 패배다.

화륵. 광검의 어깨를 짓누른 오른발의 뒤꿈치에서 불꽃이 피어오른다. 광검이 열기에 퍼뜩 정신을 차려 황급히 물러서려 하지만, 뒤로 물러날 수 없다.

내가 도망치지 못하게 막았다. 내 어깨를 찌른 검날은 이미 내 두 손에 잡혀있다.

푹!

광검은 어떻게든 검을 뽑으려 하고, 나는 어떻게든 검을 회수하지 못하게 막았다. 어깨의 상처에서 마력과 피가 줄줄 새어나가지만, 광검은 원하는 때에 검을 뽑아내지 못했다.

"큭!"

결국 광검이 검자루에서 손을 놓으며 뒤로 크게 물러섰다. 달려도 열 발자국은 될 만큼 거리를 벌렸다. 나는 검날을 잡아 어깨에 박힌 검을 뽑아냈다.

쨍그랑. 제법 긴 검이 아스팔트 바닥을 굴렀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주변을 훑었다.

피바다. 내 전신에서 흘러나온 피가 곳곳에 흩뿌려져 있다. 나는 왼손을 주머니에 쑤시고, 오른손을 들어 올려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경쾌한 소리와 함께 창염이 피어올랐다. 내 몸의 상처와 피에서 타오른 창염에 광검이 흠칫한다.

마력이 타오르며, 상처가 치유된다.

"흐흥."

나는 어깨를 만졌다. 검에 꿰뚫린 구멍은 사라지고, 육신이 그 구멍을 메웠다. 흩뿌려진 피는 모두 마력으로 바뀌어 증발했다.

이곳에 남은 것은 오로지 전투의 흔적뿐. 내 몸의 상처는 모두 복구되었다.

그에 비해 광검이 몸에 두른 보호막은 깨졌다. 다시 몸에 두르면 되겠지만, 그만큼 마력이 소모됐다.

단순 소모전이라면 이쪽이 훨씬 유리하다.

"......."

광검이 자세를 바로잡는다. 지금까지의 공격이 모두 허사가 되어버린 것에 충격이라도 받은 걸까. 아니면 검을 잃었음에도 다시 공격을 준비하려는 걸까.

맨손으로도 광검은 전투가 가능하다. 아니, 검이 없을 때가 더 무섭다.

그러나 어느쪽이든 상관없다. 나는 광검의 검을 집어 들었다.

자루를 양손으로 쥐고 수직으로 세워, 얼굴의 반을 가렸다. 검날에는 내 얼굴 반쪽이 비치고, 반대쪽으로는 광검이 보인다.

"월광검이라니. 당신에게는 너무 과한 이름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뭐하는 짓이지?"

광검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검을 하늘 높이 던졌다.

부웅-!

검이 하늘로 치솟았다가 바닥에 꽂힌다. 그곳은 광검의 바로 앞. 광검의 손이 머뭇거렸다. 나는 손을 앞으로 내밀어 도발했다.

"뭐해요? 안 집어 들고."

"...적에게 여유를 부리다니. 이게 네 패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은 하지 않나?"

광검이 손에 빛을 머금고 자루를 쥔다. 아무런 함정도 없었지만 광검은 굳이 검의 상태를 확인하고 바닥에 꽂힌 검을 뽑아냈다.

나는 옷을 단정히 정돈했다.

아직 갈아입지 않은 비서복은 군데군데 헤져있었다.

"딱히 패인이라고 생각은 안 해요. 아, 모처럼이니까 소개할게요. 저는 개천광(開天光)이라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광검."

"거짓말 마라, 창염. 다크 레기온의 간부 중 일성(一星). 별을 삼키는 불사조. ...내가 모를 거라 생각했나?"

"...으흐흐."

절로 웃음이 난다. 내 소개가 끊긴 것보다, 드디어 광검이 떡밥을 꺼냈다는 것이 기뻤다.

"그걸 어디 사는 누구한테 들었을까?"

"......."

광검이 흠칫하며 입을 닫았다. 물론 나는 그걸 가만히 놔둘 생각이 없다.

"다크 레기온의 간부진에 대해서는 원탁도 모를텐데, 어떻게 광검님은 그걸 알고 있을까요? 아."

나는 일부러 말을 끊었다.

"알려준 사람한테 칼 박아줬었죠? 직접. 심장에."

쿵! 광검이 땅을 박차고 내게 달려들었다. 크게 횡으로 베려는지, 검이 옆으로 넘어가 있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스피드. 이미 피하기에는 늦었다. 하지만 일부러 자상을 냈던 아까처럼 싸워줄 필요도 없다.

무릎을 굽힌다. 팔을 앞으로 모은다. 전신에 흐르는 마력을 더욱 가열차게 펌프질하며 신체 능력을 끌어올린다.

"루살카를 죽인 원수!"

들릴 리 없다. 들을 리도 없다. 하지만 일부러라도 크게 소리 질러주고 싶었다.

"내가, 복수를 하러 왔다!"

그럴 의도나 생각은 전혀 없지만, 광검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는 분명히 평정을 잃었다.

그 짧은 틈. 나는 자세를 잡았다. 마치 복싱을 하듯.

"뭣?!"

광검의 눈이 번쩍였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봤다는 경악감이 여실히 드러났다. 나는 횡으로 휘둘러지는 장검의 날을 향해 오른 주먹을 내질렀다.

일권(一拳). 한 번의 주먹질이 장검의 진로를 가로막는다. 마력의 파동이 주변을 휩쓴다.

다시 이권(二拳). 내지른 주먹을 당겨 다시 뻗는다. 벌처럼 쏘아진 추가타에, 코어가루가 깃든 검날이 크게 흔들린다.

마지막으로 삼권(三拳).

주먹을 당긴다. 이번에는 왼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주먹에 무게중심을 쏟는다.

까앙! 끊어지듯 내지른 세 번의 권격에 검날 속 코어의 잔재가 고열로 끓어오른다. 고운 입자로 날 속에 들어간 코어의 잔재는 이제 마력 전달의 매개가 아닌 초소형 폭약이다.

"칫!"

광검이 재빨리 검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좋은 판단이다.

파사삭! 검이 산산조각이 나며 부서졌다. 주먹 쥔 손에는 아직 창염이 남아 검날의 조각을 녹였다.

툭. 나는 손을 한 번 털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소매 끝에 묻은 빛가루는 맥없이 땅에 떨어졌다. 검을 잃은 광검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린다.

"너, 그건, 화권의...."

"알려줄 이유가 있을까요?"

나는 주먹을 눈높이로 올리며 입꼬리를 끝까지 올렸다.

"궁금하면, 지옥에서 기다리고 있을 루살카에게 물어보던가!"

"네 노오오오옴!!!!"

광검이 분노하며 손을 들어 올렸다. 빛무리가 반짝이며 허공에 수많은 빛의 검들이 생겨났다. 광검의 양손에 빛으로 된 쌍검이 생긴다.

우웅-! 검들이 정렬하며 나를 향해 날아온다. 나는 다시 주먹에 불길을 휘감아, 그대로 땅에 내리꽂았다.

화산이 분출하듯 솟구친 푸른 불기둥이 빛의 검들을 집어삼켰다.

불의 벽이 투검(投劍)을 막는 사이, 나는 몸을 일으켜 다시 자세를 잡았다.

부웅!

불기둥이 X자로 갈라진다. 광검이 금빛의 쌍검을 들고 나를 베려 든다.

이능력자 중에는 드물기까지 한 정통 검사. 광검을 S급으로 올려준 원동력은 반짝이는 금빛이 아니라, 실전에서 갈고닦은 검술이다.

물론 이쪽도, 마찬가지다.

"하-아!"

주먹이 벌처럼 쏘아지며 검의 경로를 막는다. 우검에는 우권을, 좌검에는 좌권을. 두 주먹에는 건틀릿처럼 푸른 불꽃이 손을 보호하고 있다.

광검이 입을 열었다.

"흉내 내지 마라!"

콰앙!

광검이 크게 검을 휘두른다. 몸을 돌리며 베어오는 회전 베기. 상하로 들어오는 검로를 각각 틀어막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래서, 오른손에 마력을 집중한다. 손에서 피어오른 불꽃이 거인의 주먹처럼 커졌다. 광검의 눈 또한 커졌다.

"네 놈!"

내 상체보다 더 큰 주먹이 쌍검을 때렸다. 빛으로 된 쌍검은 바위에 내리친 나뭇가지처럼 바스러졌다.

그리고 그 충격파가 터지며 광검의 전신을 때렸다. 광검이 급히 마력으로 몸을 보호했다.

"큭!"

광검이 튕겨져나가며 땅을 구른다. 나는 손을 털어 남은 마력을 다시 갈무리했다. 광검이 낙법으로 몸을 일으켰다.

광검의 두 눈에는 불신과 의아함이 가득하다.

"너, 어떻게 화권 형님의 기술을...?"

"궁금해요?"

나는 주먹을 내렸다. 태양빛이 슬슬 산 위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쩌나. 남의 여동생 죽인 무뢰배한테는 알려주기 싫은데."

광검의 눈에 짜증과 슬픔이 인다. 나는 슬쩍 시각을 확인하고 마력을 진정시켰다.

"알고 싶으면, 그곳으로 와요."

"...그곳?"

내가 심장을 가리키며 비꼬듯 웃었다.

"거기가 '무덤' 말고 또 어딨겠어요?"

"......너,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냐? 도대체 정체가 뭐야?"

"그러니까 알고 싶으면 거기로 오라니까? 시간은 내가 나중에 알려줄게요. 조만간 일주일 내로."

"...그럴 수는 없다!"

광검의 왼손이 하늘로 뻗는다. 동시에, 거대한 빛의 사슬이 하늘을 뒤덮는다.

"여기서 너를 제압하고, 모든 진실을 듣겠다! 네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또 화권 형님과는 무슨 관계인지!"

광검의 마력이 격하게 타오른다. 나는 주변 땅을 뒤덮는 빛의 사슬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와, 여기서 궁극기를 쓴다고요?"

생각보다 광검이 진심인 모양이다. 빛의 실이 엉키며 넓은 우리를 만드는 결계형 궁극기.

안에 들어온 이상, 탈출하려면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죽거나, 죽이거나. 나는 광검과 대치하듯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미안하지만, 우리의 전장은 여기가 아니에요."

내 몸이 아래에서부터 타올랐다. 광검은 그것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공간 전이?!"

"왜요, 루살카만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봐요?"

순간이동은 악의 조직 간부, 정령으로서 가진 기본 소양이다. 나는 이제 완공을 앞둔 빛의 결계를 쓱 둘러보며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럼 안녕히. 다음에 만날 때는 서로 제대로 준비해서, 전력으로 붙자고요. 죽을 때까지."

광검이 손을 뻗으며 나를 붙잡으려 한다. 하지만 내 의식은 이미 결계를 빠져나와 전장에서 떠났다.

흐려진 시야가 다시 또렷해지며, 나는 실체를 갖추었다.

유리창 너머로 익숙한 광경이 보인다. 폐허나 다름없는 한강 북쪽의 전경이.

"...푸흐흐흐."

나는 다 헤진 비서 옷을 태워버리고 가운으로 갈아입었다. 이미 햇빛은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침대를 따뜻하게 데우고 있다.

풀썩. 나는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오늘로 19일인가요...."

한숨도 자지 않고 일했다. 큐브도 손에 넣었고, 협회의 스파이에 재갈도 물렸고, 광검도 도발했다.

나머지는 이제 그곳에서 광검과의 최후의 일전을 벌이면 끝.

정령이 살해당했던, 광검이 루살카의 심장에 칼을 박아넣었던 바로 그곳.

해운대.

루살카의 무덤 옆에, 광검을 묻을 것이다.

"그러니 그때 까지 좀 자둘까요...."

전신에서 들끓던 마력을 진정시킨다. 심신을 강제로 각성시켰던 19일간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온다.

나는 침대 안에서 따사로운 햇볕을 느끼며 수마에 몸을 맡겼다.

쿵쿵쿵. 누군가 문을 거칠게 두드린다.

"야, 신서울에 큰일 났어! 일어나!"

"...씁."

조덕배다. 죽일까?

아니다. 무시하자. 오늘은 무척 기분이 좋으니까. 나는 마력으로 청각을 차단해 푹신한 침대와 한 몸이 되었다.

덧붙여서 말하자면, 결국 30분도 못 잤다.

문을 부수고 들어온 촉수녀는 촉수로 나를 이불째로 돌돌 말아 라운지로 끌고 갔다.

결국 나는 1시간에 걸친 심문아닌 심문끝에, 밤사이 있었던 모든 일을 실토했다.

억울했다.

나는 정말로 열심히 일했는데, 되려 혼만 잔뜩 났다.

어째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