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1부 5장 (8)
대전 연구 단지.
신서울 바로 옆에 위치한 연구단지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코어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는 곳이다.
연구 결과만 두고 보면 한국의 수준은 전 세계에서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하지만 우수한 인재가 있다 싶으면 타국에서 곧장 빼가곤 했다.
외국에서는 막대한 자금력으로 유망주들을 사들였고, 결국 한국에는 실력이 모자라거나 금전 이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자들만이 남았다.
국가를 위해. 사랑하는 사람이 한국에 있어서. 외국어를 못해서. 정부의 높은 권력에 있고 싶어서.
'그들 중에는 선의철과 손을 잡은 이들도 있지.'
애국심이나 현실적 조건과는 달리, 권력과의 유착을 선택한 이들.
그들은 선의철의 입맛에 맞는 연구 결과들을 만들어냈고, 그 결과는 자연히 선의철의 지지율로 바뀌었다.
'동시에 소나무 부대를 제작하는 장소.'
나는 잠재운 히어로들을 데리고 떠나가는 이들의 뒤를 밟았다. 광검이 눈치채지 못하게 마력을 최대한 억누르고 차를 뒤쫓았다.
인간의 모습이기는 해도 그 근간은 괴수. 신체 능력은 초인에 가깝다. 야밤에 몰래 달리는 차 정도는 쉽게 추격할 수 있다.
어느덧 차는 연구단지에 진입했다.
'역시.'
차가 빠르게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간다. 지상의 연구 단지는 위성 사진으로 보면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 지하에는 십 수 층으로 이루어진 온갖 연구동이 있을 것이다.
'연구 단지 지하 던전.'
이야기 중반. 대전 연구 단지에서 큐브를 연구하던 과학자가 그 위험성을 깨닫고 탈출을 시도한다.
마침 주인공 일행이 이 과학자를 보호하고 소나무 부대와 전투를 벌이게 되면서 큐브의 존재와 선의철의 이면을 모두가 알게 된다.
즉, 대전 연구 단지는 원작에서 최초로 큐브의 존재가 밝혀지는 던전이다.
'큐브 가지고 도망친 과학자가 메인 히로인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알 바 아니고.'
원작 진입 시점인 2025년에 성인이 된다. 그러니까 5년 전인 지금은 중학생에 불과할 테니, 대학 연구 단지에서는 볼 일이 없다. 애초에 이 시점에는 한국에 없다.
"설마 천가을처럼 갑자기 튀어나오지는 않겠죠?"
'아니, 지금은 여기에 집중하자'
나는 뺨을 치며 마음을 바로잡았다. 지금은 큐브가 있을 위치를 찾는 게 더 중요하다. 나는 건물의 그림자 속에 숨어 지나가는 연구원의 이목을 피했다.
'문제는 지하로 잠입하는 건데.'
원작에서도 주인공 일행은 정면 싸움을 지양한다. 사실상 정부와 협회에 반기를 드는 행동이니까.
온갖 경비 로봇들과 감시 카메라를 피해 소수 정예가 큐브를 찾으러 가고, 밖에서 주인공은 소나무 부대와 전투를 벌이며 시간을 끈다.
'그래서 나는 큐브가 어디 있는지는 몰라.'
건물은 안다. 바로 앞마당에서 전투를 벌였으니까.
그러나 건물 내부는 모른다. 큐브 탈환을 하러 갔던 세 명만이 그 길을 알고, 모든 일이 끝난 뒤에는 지하 전체가 무너졌다.
'다행히 개구멍은 알지.'
덜컹. 맨홀 뚜껑이 열렸다. 악취가 코를 찔렀다.
"윽."
온갖 화학 약품이 뒤섞여 흐르는 지하수로. 평범한 사람이라면 가까이 가는 것만으로 약품 냄새에 취해 기절할 것이다.
'박라온한테 되게 미안해지네.'
원작 게임에서 나는 항상 운사, 박라온에게 이 지하 통로를 공략할 것을 지시했다. 가장 반발이 적었고, 깎인 호감도는 금방 복구할 수 있었으니까.
'대신 이제 그럴 일은 없겠지.'
내가 직접 하게 됐으니.
"토할 것 같다...."
그 누구도 지나가지 않는 야심한 시각. 나는 맨홀 안으로 뛰어들었다.
"우웨에엑!"
시작부터, 구토를 하며.
* * *
덜컹.
스트레처카의 바퀴가 튀었다. 흰 가운을 입은 연구원이 당황해 소리를 질렀다.
"조심해!"
"죄송합니다, 선배님!"
다른 연구원이 죽을죄를 지은 마냥 연신 고개를 숙였다. 선배 연구원은 흰 천 사이로 드러난 팔을 재빨리 안으로 밀어 넣었다.
"교수님 연구재료 조금이라도 상하면 빡치는 거 몰라?"
"죄송합니다. 어제 잠을 못 자서...."
후배 연구원의 눈은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듯 핏줄이 잔뜩 서 있었다. 선배 연구원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선배 연구원은 잠시 스트레처카를 멈추고, 피곤한 두 눈을 껌뻑였다.
"너 몇 시간 잤냐?"
"두 시간이요."
"많이 잤네. 나 때는 말이야, 한 시간 자면 많이 잔 거였어."
선배의 말에 후배 연구원은 얼굴이 핼쑥해졌다. 속된 말로 꼰대같은 발언이 아니라, 정말로 예전에는 잠도 자지 못하고 연구원들이 굴림을 당했다고 전해 들었다.
그나마 나아진 게 이 정도. 후배 연구원이 고개를 떨구었다.
"도 교수님 랩에 들어가고 싶어지네요, 정말."
"그건 인정."
도선재. 풍채는 후덕하지만, 그만큼의 학식과 인품을 가진 히어로학과 교수. 개인 학설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필터링 없이 뱉는 정부에 대한 비판만 아니었으면, 대한민국 최고의 석학이라 불렸을 희대의 인재.
"그쪽 대학원생들, 지금 집에서 쉬고 있겠죠?"
"그놈들은 대학원생이 아니야. 세상 어느 대학원생이 자기 편한 시간에 랩 와서 연구하고 논문 쓰냐?"
연구원들에게 그의 연구실은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선배는 연구실의 앞에서 푸념을 내뱉었다.
"진짜 하루만 푹 자고 싶다."
"강 교수님이 들으셨다가는 영원히 재워주실걸요?"
"그치? ...킁, 야. 근데 너 약품 냄새 안 지웠냐? 왜 이렇게 시큼한 냄새가 심해."
선배의 지적에 후배는 황급히 가운에 코를 대고 킁킁댔다. 섬유탈취제의 진한 향만이 코를 찔렀을 뿐, 특별히 약품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 후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럼 나란 얘기냐?"
선배가 인상을 쓰자 후배는 울상을 지었다.
"향수를 뿌리든 옷을 갈아입든 당장 지우고 와!"
선배가 호통을 치며 후배를 나무라는 사이, 천장 환기구에서 그림자가 슬쩍 스쳐 지나갔다.
"냄새 토할 것 같네, 정말."
환기구가 덜컹거렸다.
* * *
'식겁했네.'
중간마다 닫힌 개폐구가 있어서 열고 들어왔더니, 거길 통해서 공기가 안쪽으로 들어왔나 보다.
'마력 안 쓰니까 더럽게 불편하고.'
피닉스의 체구가 평균보다 약간 작은 편이라 환풍구에 끼거나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허리를 숙이고 몇 시간을 기어가는 게 몹시 짜증이 난다.
"그냥 싹 다 태워버리는 건 어떨까요...?"
'...안 될 말이지. 그럼 왜 굳이 지금까지 개고생을 한 건데.'
신서울에서 이곳 연구원까지 직선거리로 15km가량 된다. 광검이 전력으로 달려오면 1분도 안 되는 시간 안에 도착할 것이다.
큐브의 정확한 소재를 찾는다면 모를까, 아직 큐브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다.
다만, 누가 큐브를 숨기고 있는지 짐작 가는 사람은 있다.
'<문신사(文身士)>.'
타인의 몸에 타투를 새겨 심신에 제약을 거는 S급 빌런. 선의철의 심복으로 소나무 부대의 생산을 맡은 연구자. 절대로 정체를 드러내지 않던 은밀 행동의 귀재.
'분명히 이 연구소 어딘가에 그의 작업실이 있을 거야.'
연구소에 침투했던 히어로들은 결국 큐브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 장소는 문장사가 소나무 부대를 만들던 작업실.
건물 곳곳을 누비던 중간부터 연구원들을 쫓아온 결과, 나는 드디어 문제의 작업실을 발견했다.
"야, 강 교수님 언제 오신다니?"
"그냥 두고 가시라고 하셨는데요?"
"그럼 가자. 작업 들어가시면 안 부를 테니, 그때 잠깐 눈이라도 붙이자."
연구원들은 이기성의 굳은 몸을 두고 황급히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먼지를 후 불고 눈을 환기구 가까이에 대었다.
'여기 맞네.'
천장의 환기구 틈으로 보이는 연구실이 기억과 크게 다르지 않다.
퇴폐 마사지 업소 같은 야시시한 분위기를 풍기는 문신사의 연구실.
이기성은 스트레처카에 그대로 시신처럼 실려있다. 문신사가 돌아오면 곧 소나무 낙인이 찍힐 것이다.
'그러면 사전 작업을 시작해야지.'
연구실 안으로 슬쩍 마력을 흘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다. 나는 아주 섬세하게 마력을 끌어모았다.
콜드브루로 커피를 우려내듯, 광검이 내 마력을 눈치채지 못하게 아주 긴 시간 동안 마력을 뽑아냈다.
화륵. 미니피닉스가 환기구 통로에 나타났다. 안그래도 작은 크기가 더 작아졌다.
♩♬
미니피닉스는 환기구를 통해 연구실 안으로 들어갔다. 난잡하기 그지없는 잡동사니 사이로 미니피닉스가 몸을 숨겼다.
함정은 파 두었으니, 이제 문신사가 모습을 드러내기만 기다리면 된다.
'곧 오겠지. 조금만 참자.'
...
'강태공이다. 나는 시간을 낚는 강태공이 되는 거야.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잖아?'
...
'서울은 괜찮으려나? 지화는 영 못 미덥고. 천가을은 요즘 되게 날카로운 것 같던데.'
...
'그냥 여기 다 때려 부수고 광검 부를까.'
그렇게 기다리기를 수 시간.
끼익.
드디어, 입질이 들어왔다.
부글부글. 틈 사이로 비친 침대 옆에서 그림자가 들끓었다. 나는 황급히 숨을 참고 아래로 눈을 돌렸다.
"......."
문신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미니피닉스를 매개체로 공간 전이를 하는 것처럼, 그림자 속을 오다니는 이능력으로 연구실에 돌아왔다.
'아주 제 것처럼 쓰고 다니네.'
그것은 본디 문신사의 이능력이 아니다. 천가을이 타인의 이능력을 복사하듯, 본디 문신사는 제 문신을 박아넣은 이의 이능을 빼앗는 괴랄한 이능의 보유자다.
심신의 제약, 세뇌, 언행 제약, 변장, 그림자 이동.
그 모든 이능력이 다 소나무 부대를 만들면서 훔쳐낸 이능력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선의철을 도왔으니 쌓인 이능의 개수만 기백에 이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처리해야죠?"
내 몸이 불타오른다. 의식이 옮겨지기 직전, 환기구를 거세게 발로 찼다.
텅!
천장의 환기구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문신사의 고개가 천장으로 돌아간다.
"...!"
문신사가 화들짝 놀라 그림자 속으로 다시 도망치려 하지만, 이미 미니피닉스가 그의 그림자를 향해 날아들었다.
화륵. 공간 전이를 통해 미니피닉스에게로 의식을 넘겼다. 내 의지에 따라 먼저 실체화된 손이 문신사의 목을 쥐었다.
"커헉!"
문신사가 목이 졸려져 기침을 토했다. 마력이 흔들려 끓어오르던 그림자가 잠잠해지고, 나는 그대로 문신사를 바닥에서 끄집어올렸다.
"!!"
문신사가 황급히 손을 움직여 내 손목을 잡았다. 손에 장착된 특수 장갑에서 잉크가 흘러나온다.
"어딜?"
나는 방긋 웃으며 그를 그대로 수직으로 들어 올리고는, 바닥에 내리꽂았다.
쿠웅!
초크슬램. 배려 없이 뒤통수부터 떨어지는 충격에 문신사의 손이 경련했다. 나는 남아있던 오른손을 들어 바닥에 누운 문신사에게 살짝 흔들었다.
"안녕?"
동시에, 문신사의 목을 쥔 내 손에서 마력이 크게 요동쳤다.
쾅! 문신사의 체내에 있던 마력이 흔들렸다. 나는 엄지를 문신사의 목에 박아넣고, 피가 흐르는 혈관으로 마력을 집어넣었다.
"아아아악!!!"
문신사가 고통에 비명을 지른다. 창염을 담은 마력이 문신사의 전신을 활개 치며 문신사의 마력을 태워버렸다.
까득, 까드득!
문신사의 골격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신체 변형의 이능력으로 제 모습까지 바꿔치기할 정도로 문신사는 용의주도했다.
하지만 그 모습을 유지할 마력이 다 타버렸기에, 본모습이 드러났다. 나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여인에게 다시 손을 흔들었다.
"반가워요, 부관 아줌마?"
집정관의 부관.
강소연.
* * *
흐릿한 의식 속에서 이기성은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서울 수복 작전. 헬하운드에게 목덜미가 물려 끌려가던 그 날. 제 목숨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헬하운드는 정체불명의 사람들 앞에 이기성을 내려놓았다.
이기성은 벌벌 떨리는 다리를 애써 바로 세우며 헬하운드와 맞섰다.
- 피하십시오! 제가 시간을 지키는 사이에...
- 뭐래.
회색 후드의 남자가 헬하운드에게 무언가를 던졌다. 헬하운드는 순한 강아지처럼 남자가 던진 공을 쫓아 헉헉거리며 사라졌다.
괴수가 인간에게 재롱을 피운다? 불가능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기성은 살아남았고, 자신을 살려준 빌런 조직-청화단에게서 서울 수복 작전의 이면을 전해 들었다.
큐브. 빌런 연합. 청화단. 선의철. 소나무 부대.
그리고 자신을 청화단의 주인, 단장이라고 소개한 소녀는 미래를 예지하듯 단언했다.
- 이대로 신서울로 돌아가잖아요? 그러면 곧장 목에 소나무 낙인이 찍힐 거예요. 서울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아무것도 언급하지 못하게.
당연히 히어로들은 반발했다. 국가가, 정부가, 선의철이 그럴 리 없다고 강변했다. 소녀 단장은 이기성에게 제안을 하나 했다.
- 그럼 보험 하나 드시죠?
빌런 측에서도 기껏 인질로 잡은 히어로들이 소나무 부대로 다시 서울에 오는 것을 원치 않았다.
피닉스는 제일 처음 인질로 잡았던 이기성에게 대표로 작은 새를 건네주었다. 그 새를 곁에 두고 있다면 혹시 소나무 부대가 되는데 끌려간다고 하더라도, 제정신을 차릴 수 있게 도움이 될 것이라며.
당연히 믿지 않았다. 집정관을 만나자마자 바로 그 사실을 알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부측 인사는 지속적으로 그들을 방해했고, 히어로들은 관악 정상에서부터 소나무 부대의 환영을 받았다.
결국 신서울의 호텔방에 갇히고 주사를 맞아 이렇게 됐다. 이기성은 꿈쩍도 하지 않는 제 몸에 한탄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말 들을 걸."
"그쵸?"
"...?"
입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화륵.
이기성은 몸 안에서 막힌 혈이 탁 풀리는 듯한 착각에 자연스레 벌떡 일어났다. 눈앞에는 서울에서 봤던 청화단의 단장이 있었다.
"우왁?!"
이기성이 놀라 다시 주저앉았다.
어안이 벙벙해진 기성은 손가락으로 단장을 가리켰다가, 그가 제압하고 있는 여인을 보고 깜짝 놀랐다.
"강소연 팀장님?"
"읍, 읍읍!"
복면이 벗겨져 입에 재갈이 물린 여인은 히어로 협회의 대외홍보팀장이자, 집정관의 부관으로 잘 알려진 여인.
강소연 팀장.
나는 강소연의 등에 발을 올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협회가 우리나라에 보낸 스파이라는 거죠."
재갈이 물린 강소연이 표독스럽게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