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73화 (73/1,497)

〈 73화 〉1부 5장 (6)

국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대한민국 20대 대통령, 선의철입니다.

지난 4월 13일. 저는 이 자리에 국민 여러분께 사과를 드리러 나왔습니다. 예. 서울 수복 작전의 실패. 제 성급한 판단으로 수많은 히어로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전임 괴수대책부 장관 신진광은 책임을 다하지 못해 송구하다며,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했습니다.

다시 한번 이 자리를 빌어 유가족 여러분께 심심한 사과를 드립니다.

허나, 오늘.

5월의 첫날을 맞이하여 국민 여러분께 한 가지 좋은 소식을 드릴 수 있게 되어, 무척이나 감개무량합니다.

지난 20일, 정부는 각고의 노력 끝에 행방불명된 10명의 히어로들이 아직 서울에 살아있다는 첩보를 입수했습니다. 구로에서 괴수들에게 납치당해 적의 둥지로 끌려간 이들은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각오로, 가까스로 괴수 둥지를 탈출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서울 지하에 사는 이들을 발견하였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서울에는 아직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한두 명의 의인이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무려 6만 명이나 되는 우리 대한의 자랑스러운 국민들이 서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서울의 시민 여러분들의 도움 덕분에, 정부는 히어로들과 간신히 연락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금일 새벽 04시. 정부는 긴급 TF를 구성해 히어로들을 구하기 위한 특공대를 투입하였습니다.

풍백, 운사, 우사를 위사한 삼사를 주축으로 파견된 이 구출 부대는 대책부 차관 장후정, 그리고 집정관 유영호의 주도하에 안양에 다시 자리를 잡았고, 관악산을 넘어 동작에서 히어로들과 접선하여 무사히 서울을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습니다.

국민 여러분. 서울의 시민들에게 찬사를 보내주십시오. 그리고 이제 그들이 무사히 서울을 빠져나와, 우리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게 기도하여 주십시오.

국민 여러분! 서울은 아직 살아있습니다! 결코 버려진 땅이 아니라, 간악한 괴수와 빌런들에게 잠시 빼앗긴 땅입니다! 오늘도 서울의 6만 시민들은 그 땅을 되찾기 위해 칼과 창을 들고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위대한 대한민국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서울의 6만 시민들이 절망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것처럼, 소나무같이 푸른 절개로 우리는 대한민국을 빛낼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는 자랑스러운 대한의 아들딸입니다! 우리가 다시 대한의 영광을 되찾는 그 날까지, 서울과 경기 그 모든 땅을 되찾을 때까지, 우리의 굳건한 의지는 꺾이지 않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 * *

<5월 1일 오후 8시, 여의도 청화단 본거지.>

벽에 걸어둔 대형 스크린에서 선의철의 대국민 브리핑이 이어진다. 라운지에 앉아있던 이들 모두가 발표의 내용에 대해 노심초사하다가, 결과가 나오자 한숨을 돌렸다.

"당장에 급한 불은 껐네요. 다행입니다."

"다음 주에 신서울에서 또 사람들이 올라오겠지만."

히어로 10명의 생존. 그리고 동작 지하의 6만 난민들에 대한 주민 등록.

물론 발표 내용은 선의철의 입맛에 맞게 크게 왜곡되었다.

괴수들에게 납치당했던 히어로들은 힘을 모아 괴수 둥지를 탈출하고, 지하 난민들과 합류하여 그들의 도움을 받아 서울을 탈출했다. 그 과정에서 류천성과 제임스는 괴수들의 위협에서 난민들을 이끈 지도자가 되었다.

류천성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비꼬았다.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겠나? 히어로들이 시민들을 학살하고, 빌런들이 시민들을 구했다고."

"...신서울에 있을 때는 아무것도 몰랐어. 정말."

가을의 말에 라운지에 있던 이들의 이목이 쏠렸다. 라운지에 있는 모두가 신서울 외곽에 있던 자들이다.

그에 비해 가을은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신서울에 주소를 두고 살았던 신서울의 주민이었다. 가을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농담으로나 그런 얘기를 했지. 정부 비판하거나 하는 불순분자들은 소나무 부대가 잡아간다고. 근데 진짜로 그런 놈들이었잖아. 안 그래?"

가을의 시선이 뒤에 서 있는 유이신에게 향했다. 유이신은 등에 걸고 있던 화이트보드를 꺼내 매직으로 글을 썼다.

- 네트워크상의 우스갯소리, 대부분 사실입니다.

"그게 말이 돼? 어떻게 가능해?"

지화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리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끔찍한 일을 실제로 자행할 수 있다는 말인가.

유이신이 뭔가 길게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눈치를 보이자, 가을은 덕배에게 눈치를 보냈다. 덕배는 제 스마트워치를 건네 앱을 실행시켰다.

타닥, 타닥. 목 없는 괴인이 빠르게 타자를 치고, 곧 그 내용은 기계음으로 전달되었다.

[신서울 내의 모든 네트워크는 정부의 검열을 거칩니다. 거기서 반정부세력이나 반동분자를 색출한 뒤, 소나무 부대를 투입합니다. 그들은 신서울에서 퇴출당하는 처분을 당하거나, 새로운 소나무 부대의 대원이 되죠.]

"세상에. 빅브라더야?"

제임스가 콧방귀를 뀌었다. 류천성이 씁쓸한 얼굴로 덧붙였다.

"가능하게 만들었지. 국회와 사법부와 거래를 하고,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제 편으로 만들었어. 마침 평양 사태도 터졌겠다, 신서울에 자신의 왕국을 세운 거지."

"독재자네요."

지화의 말에 류천성이 피식 웃었다.

"지금 전 세계에 독재 아닌 나라가 어디 있나? 당장 옆의 중국과 일본을 보게. 나라 전체가 오른쪽으로 기울었어. 중국은 사방으로 영토를 확장하려 하고 있고, 일본은 언제라도 이 나라를 치려고 안달이 나 있지. 그나마 협회가 그 사이에서 중재를 서서 전쟁이 나지 않는 거야."

"......."

덕배는 팔짱을 낀 채 다리를 떨었다. 과거 피닉스가 지나가면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언젠가 그런 얘기를 하더군."

뜸들이는 덕배의 말에 모두의 이목이 쏠렸다.

피닉스와 가장 심적으로 가까운 이는 천가을일지 몰라도, 피닉스가 품고 있는 원대한-그 누구도 모르는 계획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조덕배였다. 덕배가 뒷목을 긁적였다.

"청화단의 전력은 한 나라와 전쟁을 벌일 만큼 성장해야 한다고."

"미친 거 아닙니까?"

지화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입을 합 막았다. 저도 모르게 내뱉은 본심에 모두가 시선을 돌렸다. 유일하게 덕배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 년 머릿속을 어떻게 이해하겠냐. 아, 내 거 아무것도 안 넣었지?"

"시럽 듬뿍 담아왔네요. 지화 씨는 아이스티죠?"

"아, 감사합니다. 단장니ㅁ...."

덕배의 손에 흙탕물 같은 아메리카노가 들렸다. 막 제 아이스티를 집으려던 지화의 움직임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정적. 모두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가운데, 덕배가 벌컥벌컥 커피를 들이켜는 소리와 테이블 위에 음료가 탁 올려지는 소리만이 라운지에 울렸다.

"뭐해요? 어서 챙겨요."

피닉스가 제 스무디를 들어 올리며 빨대를 훅 꽂았다. 지화는 두 손을 물레방아 돌리듯 움직이며 변명했다.

"그, 단장님. 그러니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됐어요. 전후 사정 다 자르고 자기 상사 나쁜 놈으로 만든 조 모 씨의 아들 모 덕배 씨 잘못이지."

피닉스가 덕배의 정수리를 두드렸다. 탕, 탕. 맑고 청명한 소리가 울렸다.

"그래. 내 잘못이니까 왜 다른 나라랑 전쟁하려고 드는지 알려주면 안 되냐?"

쪼르르. 음료가 빨대를 타고 올라가는 소리가 울렸다. 모두의 이목이 피닉스의 입으로 집중됐다.

"아무튼 오늘 합의는 성공적이었어요. 이걸로 당분간 서울 수복 작전 같은 거로 신서울이랑 골머리 썩힐 일은 없겠네요."

"말 돌리네?"

가을은 한가득 짜증이 나 있었다. 피닉스가 나타난 이후부터 그는 냉기를 풀풀 날리며 피닉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피닉스가 컵 하나를 들어 가을에게 건넸다.

"단 거 마실래요?"

"사람을 뭐로 보고...."

달콤한 메이플 시럽과 캐러멜의 향이 코를 간질인다. 가을은 뒷말을 흘리며 제 손에 쥐어진 캬라멜 마키아토를 노려보다가 빨대에 입술을 댔다. 피닉스는 가을의 옆에 앉아 테이블을 두드려 이목을 집중시켰다.

"일단 마시면서 들어요. 전쟁에 대한 가능성은 어디까지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거니까 그렇게 신경 쓸 필요는 없어요."

단언하는 피닉스의 말에 모두가 한시름을 놓았다. 피닉스는 만족한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당장에 닥친 상황만 해결하죠. 일단 각자 맡은 역할을 점검하고, 임무를 재확인합니다."

피닉스는 손가락을 튕겼다. 아직 집어 가지 않은 음료들이 제 주인을 찾아갔다. 목 없는 유이신의 것은 없었다.

피닉스의 손가락이 지화를 향했다.

"먼저 등대, 지화 씨는 지금처럼 외곽을 감시해줘요. 땅개 같은 놈들이 다시는 서울에 발을 들이질 못하게. 조직원들의 지휘 권한은 등대에게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덕배 씨랑 팬텀은 요격부대입니다. 덕배 씨가 동쪽, 팬텀이 서쪽. 등대와 연계해서 지하로 들어오는 괴수들이나 빌런들을 격퇴해줘요. 정체를 최대한 숨기되, 혹시나 들킬 것 같으면 헬하운드를 투입합니다."

"알겠다."

"응."

"하늘성은 지금처럼 주민들 다독여주세요. 귀찮겠지만 민원들 좀 잘 들어주시고, 불필요한 것들은 하늘성 선에서 커트해주세요. 우리가 날로 서울시장 자리를 따내기야 했지만, 나중가면 분명 정부에서도 숟가락을 얹으려 들 거에요."

"그때 재보궐선거하면 나보고 진짜로 시장이 돼라? 알겠다. 선거라면 자신 있지."

"좋아요. 난민 중에 괜찮겠다 싶은 사람 있으면 바로 인재로 뽑아도 좋아요. 구색이라도 맞춰 뒀다가, 쓸만한 사람이 있으면 따로 명단 만들어 둬요. 나중에 정부랑 협상해서 특채 같은 형식으로 만들면 될 테니."

"알겠다."

피닉스가 음료를 들이켜 목을 축였다. 피닉스의 시선이 닿은 제임스가 캔맥주의 뚜껑을 열어젖혔다.

"나는 계속 그대로 동작 복구하면 되냐?"

"네. 5월 14일까지. 밖에서 봤을 때 대충 구색만 맞춰주면 돼요. 일단 이걸로 각자 맡은 역할 배분은 끝."

등대 김지화가 경계.

팬텀 천가을과 조덕배는 순찰 및 전투.

하늘성 류천성은 행정.

아키택트 제임스 리는 재건.

그 모든 일이 잘 돌아갈 수 있게 피닉스는 보급을 맡았다.

일부러 38선을 넘어가 괴수를 사냥해 코어를 긁어모으고, 블랙마켓을 통해 은유하와 거래를 하여 자금을 확보하며, 그 거래대금으로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물품을 받았다.

오늘 새벽에도 성남에서 대량의 식료품을 옮기던 대형 트레일러들이 실종됐다. 그 물건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도둑질을 한 장본인과 물건을 도둑맞은 주인만이 알고 있다.

피닉스가 남은 음료를 다 마시고, 제임스에게 특별히 주문했다.

"아 참. 동작에 집 다시 지을 때, 너무 힘줘서 재건하지 마요. 너무 밑천 다 드러내면 신서울에서 당신 납치하려 들 테니까."

"그건 무슨 말이야, 도대체?"

덕배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었다. 아키택트 또한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았다. 피닉스가 손가락을 튕겨 컵을 불태웠다.

"정부에서도 아키택트의 존재와 능력에 대해 알고 있을 거예요. 이미 빌런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도 되어있을 테고, 특사단이 여의도까지 보고 갔으니 모를 리 없겠죠. 마력만 넘쳐난다면 여기까지 할 수 있는 이능력자구나, 하고 말이에요."

류천성이 수염을 쓸며 웃었다. 특사단과의 회담 장소를 고른 사람은 피닉스였다.

"일부러 여의도에 회담장을 잡았군. 과시하려고 말이야."

"네. 그럼 선의철은 생각하겠죠. 빌런 연합이 어떻게까지 여의도를 복구할 수 있었나. 왜 하필 빌런 연합은 다른 곳도 아닌 '국회의사당'을 회담장으로 잡았나. 도대체 어디서 이 정도의 마력을 끌어모을 수 있었나. 자신이 가진 이런저런 정보를 조합해보면...."

"큐브."

가을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의철 대통령에게 암시하는 거네. 빌런 연합이 큐브를 가지고 있다고."

이미 피닉스는 큐브라는 존재에 대해 간부들에게 설명했다.

"겉으로는 대범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열불이 나 있을 거예요. 소나무 부대원들이 다 죽어버렸으니 확인도 못 하지, 살아남은 히어로들은 소나무 부대의 진실을 알아버렸지. 지금도 어떻게든 여의도 상황 어떤지 알아보려고 안달이 났을걸요?"

"만약 이미 알고 있다면?"

덕배의 지적에 피닉스가 고개를 돌렸다. 피닉스는 한껏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유이신! 서울 수복 작전 때, 소나무 부대가 선의철에게 정보를 알릴 방법이 있었나요?"

가을이 뒤에 서 있던 유이신이 빠르게 가상키보드를 두드렸다.

[각 팀의 팀장만이 직접 연락 가능했습니다. 여의도에 투입된 A팀 팀장, 철표 박성태도 천가을 님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고 난 뒤로는 따로 연락을 다시 취하지 않았습니다.]

"뭐?"

가을이 순간적으로 컵을 으스러뜨렸다. 종이컵이 터지며 안에 있던 커피가 손을 타고 흘렀지만, 가을의 등에서 튀어나온 촉수 두 개가 재빨리 컵을 감쌌다.

꿀렁, 꿀렁. 촉수가 가을의 손에 쥐어진 커피를 종이컵째로 집어삼켰다. 우물거리듯 움직이던 촉수 끝은 음료만 삼키고 종이컵은 바닥에 퉤 뱉어냈다. 피닉스가 곧바로 그걸 소각했다.

"선의철이 나 죽이라고 지시했다고? 진짜로?"

[A팀은 '물건'을 찾으라는 밀명을 받았습니다. 선의철은 국회의사당에 있으리라 예상해서, 목격자는 전부 죽이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아마 천가을님도 마찬가지라 생각했을 겁니다.]

"이 개...."

천가을이 욕지기를 내뱉으려다 주먹으로 입을 막았다. 유이신이 재빨리 타자를 두드렸다.

[그 물건이라는 게 신께서 말씀하신 큐브, 맞습니까?]

"맞아요. 우리가 전부 모아서 파괴해야 할 신물(神物). 여의도에 있던 하나를 우리가 쓰고 파괴했으니, 이제 대한민국에는 딱 하나가 남았어요."

피닉스가 지도에 손을 올렸다. 모든 이들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맙소사. 그게 저기 있다고?"

피닉스의 손가락은 대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네. 대전. 신서울의 바로 옆이죠."

모두가 침묵에 빠졌다. 대전이라는 도시는 곧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대한민국의 과학기술이 집약되어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하나.

"의원 시절 선의철의 지역구였지. 즉...."

"또 하나의 큐브는, 선의철이 대전에 모셔뒀다는 거군요?"

피닉스가 고개를 끄덕이려다, 애매하게 웃었다.

"선의철의 소유나 다름없기는 하지만, 선의철은 본인이 큐브를 가졌는지는 모를 거예요."

"예?"

지화가 멍청하게 되물었다. 가을은 혀를 차며 설명을 재촉했다.

"또 혼자서만 알지 말고 우리도 알아듣게 이야기해줄래?"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피닉스는 잠시 손가락으로 목에 걸어둔 베일의 끝을 비비 꼬다 손뼉을 쳤다.

"대전에 만들어진 코어연구소. 거기에서 누가 연구하고 있을 거예요. 선의철 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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