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1부 5장 (5)
나와 은재민-은유하가 손을 맞잡았다. 시간이 너무 지났다 싶었는지, 은유하는 은재민의 인형의 입을 빌렸다.
"이걸로 우리 계약은 계속됩니다. 기일까지 약속된 물량을 공급하는 거,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싱긋. 귀공자라는 별명이 어울리는 외형에 맞게 은재민은 신사적이었다. 원래의 성격은 어떨지 모르지만, 최소한 은유하가 조종하는 은재민은 그러했다.
"5월 말일까지 코어 100개. 모두 C급 이상. A급은 최소 10개. 맞죠?"
"예. 시청사의 뱀을 공략한다면 그정도 물량은 충분히 확보할 수 있으시겠죠."
C급으로 100개를 모아도 족히 50억이 넘는 거래다. A급 100개를 모은다면 족히 수천억 단위로 거래가 뻥튀기 될 터.
암시장을 통한 코어 거래 만으로도 수 십 수 백억 단위의 이윤이 발생한다. 추후 서울이 제 기능을 하게된다면, 괴수의 부산물도 처리할 수 있다.
은유하의 유성은 나와의 거래를 통해 서울의 경제를 먹으려 할 것이다. 협상이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하늘성은 서울의 행정을 집어삼킬 것이다.
정경유착. 거기에 청화단은 서울의 뒷배가 되어 막대한 금권력을 손에 넣을 것이다.
은재민이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어색하게 손뼉을 쳤다.
"그러고보니 피닉스님은 자금을 어디 투자 안하십니까? 거의 대부분 현물로 드리기는 했지만, 최소 수 십억은 계좌에 보내드린거로 기억합니다만."
"서울에서 돈 쓸 일이 어디있다고...."
기껏해야 돈 쓰러 가는 일은 인천에 잠깐 마실나갔다 오는 정도다. 서울이 예전의 기능을 되찾으려면 최소 2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도...."
하지만 은유하의 말대로 돈을 이대로 묵혀두기에는 아깝기도 하다. 나는 순순히 은유하가 말을 꺼낸 목적에 따르기로 마음 먹었다.
"이제는 제 재무설계사도 붙여주시게요?"
"가만히 돈이 썩어들어가는 걸 제가 눈뜨고 볼 수 없지 않겠습니까? 하하. 제가 직접 관리해드리겠습니다. 믿고 맏기십시오. 검은돈이 아니라 신서울에서도 쓰실 수 있게 잘 세탁해두겠습니다."
"그럼 유성에 투자할게요."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은재민의 기계 눈에 ₩마크가 스쳐지나간 것은 내 착각일까. 은재민은 바로 스크린을 띄워 여러 종목의 상품을 꺼내들었다. 나는 곧바로 은재민의 손목을 잡고 스크린을 내렸다.
"됐어요. 어차피 투자할 곳은 정해져있으니까."
"...호오? 고객님께서 확신하는 투자처가 있단 말씀이십니까?"
"금전적 이득을 볼 생각 없으니까요."
은재민의 눈꼬리가 미미하게 떨렸다. 돈을 벌 생각이 없다는 말은 곧 은유하에게 숨을 쉴 생각이 없다는 말과 같다.
유일한 취미를 제외하고는, 버는 족족 자금을 재투자에 쏟아붇는 게 은유하다.
"그럼 어디에?"
"은유하 아가씨. 별 보는 거 좋아하죠?"
"...물론입니다."
유성(流星) 그룹의 이름처럼, 그리고 인형술사의 이능력에서 드러나는 이미지인 북두칠성처럼, 은유하는 별에 상당한 연관이 많은 사람이다.
그 관심분야가 별, 천문과학.
"또 어떻게 제 취미도 아시고. 고갱님 슬슬 스토커로 신고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을 하고 있을 거다. 어떻게 내 취미를 알고 있을까. 이걸로 지금 내 환심을 사려고 하는걸까. 도대체 상대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하아.]
소녀의 한숨소리가 은재민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어디에 투자를 하려고 하시는 거에요, 대체? 광학망원경? 렌즈 제작? 그것도 아니면 신서울대학 천문학과 장학금 기탁? 연구비 지원?]
제법 당황했는지 은유하가 은재민의 입이 아니라 직접 소리를 전달해 묻는다. 나는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직접 별보러 가는 거죠. 달까지 가는 우주선 하나 만들어 줄래요?"
[우주선이요?]
나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네. 시간 날 때 달토끼 보러가자고요, 우리."
[우주여행은 돈 엄청 깨지는데. 데이트 한 번 비용 치고는 너무 낭비하는 거 아니에요?]
"사람이 취미 생활이랑 여자 꼬실 때는 돈 아끼면 안 되는거 몰라요?"
은유하의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들린다. 스크린을 보여주고 있었다면, 지금쯤 침대 위에서 배를 잡고 구르는 모습이 보였을 것이다.
[아, 하하. 좋아요. 그렇게 하죠. 대신 고객님 돈 막 쓸겁니다? 저 한다면 하는 사람이에요?]
"얼마든지요. 대신...."
나는 손에 불꽃을 피워 하나의 형상을 만들었다. 은유하는 불꽃이 일렁거리며 구체화된 형상에 감탄했다.
[달.]
"앞으로 최소 5년안에, 한국에서 달에 갈 수 있는 로켓을 만들어야 해요. 이곳 서울에서."
* * *
거래는 끝났다.
은재민과 팬텀의 비서가 회의장으로 돌아오자마자, 특사단은 빠르게 국회의사당을 빠져나왔다.
빌런 연합은 특사단에게 오찬을 제안했지만 장후정이 깔끔하게 거절, 특사단은 곧장 10명의 히어로를 인계받고 여의도를 떠났다.
장후정이 머리를 긁적였다.
"골치 아프군."
특사단이 건진 것은 10명의 히어로와 아직 날인도 되지 않은 임시 합의문 한 장 뿐이었다.
빌런 연합의 협박아닌 협박에 따라 최대한 양보하며 회담을 마쳤지만, 이제 신서울에서 합의의 내용을 두고 갑론을박 할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왔다.
"그래도 히어로들을 무사히 구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집정관은 뒤따라 오는 히어로들을 보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정부에서는 골머리를 썩히겠지만, 일단 협회 입장에서는 크게 나쁠 것 없는 거래였다.
유일하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역시 빌런들에게 서울을 잠시나마 맡겨야 한다는 점.
하지만 빌런들도 으름장을 놓을 뿐이지, 실제로 서울의 난민들을 몰살하거나 할 생각은 없어보였다. 하늘성이나 등대는 땅개나 흑염룡같은 극단적 수준에 비교하면, 대화가 가능한 온건파에 속했다.
장후정은 반문했다.
"집정관께서는 저 무뢰배들이 서울 시민들을 억류하고 있는 걸 그대로 두고 볼 생각이십니까? 저는 당장이라도 이 합의문을 백지화하고 제 2차 서울 수복 작전을 계획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열이 뻗친 장후정의 말에 집정관은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동의했다.
"당연합니다. 협회는 서울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집정관은 말을 아끼려는 듯 뒷말을 흘렸다. 그는 눈치를 보는 것처럼 주변을 슬쩍 살피고는 아주 낮게 속삭였다.
"괴수에 맞서 싸우고 사람을 지키는 자들과 일시적으로 손을 잡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어찌됐든 그들도 대한민국의 국민, 나아가서 인간이니까요."
유영호는 잠시 숨을 삼켰다.
"집정관이 아니라 인간 유영호의 개인적인 의견이니, 그냥 흘려들으십시오."
유영호의 말에 뒤따라오던 히어로들이 흠칫거렸다.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며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했다.
"저기, 집정관님."
C급 히어로, 이기성이 잔뜩 기가죽은 채 집정관을 불렀다. 동시에 그들의 뒤를 따라오던 청화단 조직원 중 우두머리가 헛기침을 했다.
"...크흠."
이기성이 화들짝 놀란다. 뒤에 있던 다른 히어로들이 이기성에게 눈치를 준다. 집정관은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왜 그래? 이기성 요원. 어디 안 좋아? 저 놈들이 뭐 고문하고 그런 거 아니지? 신서울 돌아가면 검사부터 하자."
청화단 조직원들을 노려보는 집정관의 눈이 심상찮다. 이기성은 이리저리 눈치를 보다가 손사래를 쳤다.
"아, 아뇨! 아닙니다. 그냥 이제 신서울로 돌아간다 싶어서...."
산비탈을 타고 올라가면 조금만 더 올라가면 관악산의 정상. 차원문 발생지를 넘어가면 감시하듯 따라오는 청화단 조직원들도 여의도로 돌아가는 경계다.
바로 저 너머, 특사단을 호위하러 온 이들이 그들의 무사귀환을 기다리고 있다.
"뭐야. 아직 실감이 안 나냐?"
이기성의 행동은 몹시 어색했지만, 집정관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이기성의 어깨를 두드렸다.
"난 또. 하긴, 죽을 뻔 했다가 살아남았으니 감회가 남다를 법 하지. 근데 너 이제 큰일났다? 네 여친 너 죽었다고 장관한테 괴수 쓰레기 던졌어. 너 이제 빼도박도 못하게 생겼다. 신서울 돌아가면 바로 식장부터 구해야 해. 근데 나한테 주례 서달라고 하지 마라."
"......예."
축 가라앉은 이기성의 어깨에 집정관은 흠칫 의아했다. 괴수들에게 납치당하고 빌런들이 구해준 이후의 상태라고 하기에는 뭔가 이상했다.
꼭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데 말하지 못하는 것 같은, 그런 상태. 집정관의 표정이 굳었다.
"너 혹시-"
"아! 도착했습니다! 여기! 여기입니다!"
장후정이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저 멀리서 대기하고 있던 히어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풍백, 운사, 우사. 삼사를 비롯해 서울 수복 작전에 참가했던 히어로들. 그들은 이기성을 비롯해 살아돌아온 10명의 히어로들을 위해 다시 서울 땅을 밟았다.
"......!"
그리고 그들 중에는 B팀, 강남으로 들어가있던 소나무 부대의 히어로들도 있었다. 이기성의 표정이 곧바로 굳었다. 뒤에 있던 히어로가 이기성에게 속삭였다.
"......야, 긴장 풀어. 들키면 우리 다 좆 돼. 들은 거 잊었냐?"
"...아니."
이기성은 부리나케 달려오는 운사를 보며 애써 미소지었다.
전신에 붕대를 칭칭 두르고 있었지만, 그의 팀을 이끌었던 팀장은 살아서 돌아온 이기성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 부족함으로 여러분을 사지에 빠뜨렸습니다!"
"어디 그게 자네 뿐이겠는가. 우리 노인네들이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거지."
히어로들이 자책한다. 이기성은 재빨리 활기찬 미소를 지으며 분위기를 띄웠다.
"아닙니다! 제가 약해서 그랬던 걸요. 그래도 여러 선배님들께서 애써 주신 덕분에 이렇게 살아돌아왔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괜찮습니다!"
이기성이 제 가슴팍을 두드렸다. 운사는 고개를 들었지만, 얼굴에는 그들에 대한 죄책감과 수심이 가득했다.
그에 집정관이 나서 운사를 질타했다.
"좋은 날이다, 운사 박라온. 한 명도 죽지 않고 살아돌아왔어. 지금이야 괜찮지만, 안양에 들어가면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을 거야. ...싫어도 웃어. 그게 히어로가 할 일이다."
"...예, 집정관."
운사가 애써 입꼬리를 비틀어올렸다. 그 모습이 하도 기괴해 히어로들이 왁자지껄 떠들어댔다.
"하하, 하, 하."
이기성 또한 애써 웃음을 지었다. 슬쩍 주변을 살피니, 소나무 부대 히어로들이 은근히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하, 하. ...하아."
이기성은 몸을 뒤척였다. 제 안주머니에 품은 작은 것을 다른 이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그래. 이건 다 정의를 위한 거야."
♩♪♬
이기성의 외투 안 주머니. 빼꼼 고개를 내민 푸른 카나리아가 동의한다는 듯 지저귀었다.
그 날 오후. 선의철은 대국민담화를 통해 행방불명된 히어로 10명의 무사 귀환을 알렸다.
* * *
"오, 잘 보이네요."
나는 히어로 이기성의 품에 안겨놓은 미니피닉스를 통해, 서울로 향하는 히어로 일행들의 면면을 살필 수 있었다.
발신기, 추적기, 기타 등등의 물건은 당연히 수색을 통해 들키게 되겠지만, 자연 상태의 마력이나 다름없는 초소형 미니 피닉스는 전혀 들킬 리 없다.
'딱 10마리 선별해서 만든 거니까 들킬 리 없지.'
"들키면 계획 다시 짜는 거고요."
나는 미니 피닉스와의 연결을 해제하며 침대에 몸을 뉘였다.
"아무쪼록 성공해야할텐데요."
내가 기존에 알고 있는 선의철과 소나무 부대의 대장이 5년 전에도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가정하에 이루어진 작전이었다. 동시에 서울의 진상을 알게된 히어로들에 대한 신뢰를 걸고 세운 작전이다.
"배신하면 펑! 이 되는 거죠."
이기성. 그리고 기타 인원을 포함한 총 10명.
나는 헬하운드들을 운용하면서 잠재력이 높은 유망주들만 골라서 납치를 했고, 그들의 몸에 이승형처럼 미니 피닉스라는 폭탄을 심었다.
정의감 넘치는 이들이었던 만큼, 소나무 부대의 진실을 알게되었으니 알아서 잘 처신하리라.
만약 그렇지 않고 선의철이나 청송에 붙어먹게 된다면-
'히어로들에게 엄청 실망할 것 같은데.'
"그러니까 제발 실망시키지 말기를 바라요, 히어로 여러분."
나는 63빌딩의 꼭대기에서 서울을 내려다보며 태양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제가 계속 지켜보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