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1부 5장 (4)
"하늘성이 적당히 협박하고 있겠지만, 결론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건 그거에요. 서울에서 일어날 일에 대해 신서울에서 간섭하지 마라! 우린 우리가 알아서 살아남겠다!"
[그에 따른 정치적 부담은 신서울이 지겠죠. 국제 사회의 비난도.]
6만의 시민들이 괴수들 틈바구니에서 공포에 떨고 있는데 정부는 무엇을 하느냐. 당연히 비난을 받을 것이다.
그럼에도 선의철은 국제 사회의 원조를 거부할 것이다. 그는 병적으로 대한민국의 자주성을 주장하는 국수주의자다.
"그래서 우리는 서울이 스스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증명할 거예요."
[무슨 수로?]
나는 서울의 지도를 띄웠다. 한강을 기점으로 세워진 인류와 괴수의 경계. 청화단은 그 경계가 되는 여의도에 괴인들의 땅을 세울 것이다.
대외적으로는 서울 주민들과 빌런 연합의 합작하에 이루어진 자발적 서울 탈환으로 알려질 터.
"서울 수복 작전. 우리가 계속하는 거죠."
나는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광화문 남쪽, 서울의 행정적 중심이자 서울 최흉이자 대한민국 최악의 S급 괴수-이무기가 잠들어있는 뱀굴.
서울시청.
"5월 15일. 2주 뒤에 시청사의 뱀을 죽이고 서울을 탈환하겠습니다. 신서울의 도움 없이."
[...서울이 진정한 의미로 서울특별시가 되겠네요.]
역시 머리가 좋다. 나는 스크린을 내렸다. 은유하는 웃음을 멈추고 표정을 굳혔다.
[그런데 이런 거, 저 같은 장사치한테 이야기해도 돼요? 이런 핵심 정보라면 대통령한테 팔아버릴 수도 있어요?]
"그럼 우리는 적이 되는 거죠. 제 주 거래처는 유성이 아니라 다른 그룹이 되는 거고."
[제법 깜찍한 협박을 하시네요. 근데 고객님 같은 진상은 실제로 그럴 것 같아서 진짜로 무섭네요. 인생에 아군과 적, 둘밖에 없어요?]
"은유하 아가씨. 당신도 마찬가지잖아?"
[...무슨 말씀이실까?]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나에게 이득을 가져올 자. 나에게 손해를 가져올 자. 돈이 된다면 악당과도 손을 잡고, 손해를 가져온다면 히어로도 손절하는 자본의 망자. 어때요? 선의철의 신서울과 비교해서 우리 청화단의 서울은 당신에게 이득인가요? 아니면 손해인가요?"
[...후후. 정말 재밌네요. 당신은.]
스크린 속 은유하가 손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흩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한 번도 짓지 않은 해맑은 웃음이 스쳤다.
[제가 미쳤다고 사랑하는 고객님과의 거래를 끊겠어요? 숨만 쉬어도 코어가 수십 개씩 굴러들어오는데.]
"그래서 제가 당신과 거래한다니까요."
은유하.
메인 히로인이면서 천가을과는 다른 방향으로 악성향을 보이는 특이한 인간이다. 주로 금전적인 의미에서.
"좋아요. 시청사의 뱀 공략하면, 그 선물로 코어는 당신한테 팔게요."
[고객님. 저랑 결혼할래요? 저 사랑에 빠진 것 같아요. 고객님이 벌어다 주시는 돈이랑.]
...주인공에게 접근해 동료가 된 이유도 주인공의 금전적 가치만 보고 다가간 여자. 개인 루트가 아니면 그 누구에게도-심지어 주인공에게조차 사랑을 주지 않는 철벽의 히로인이자,
[고객님. 진짜로 얼마면 돼요? 저 고객님 사버리고 싶은데. 진심으로. 저 예전부터 PMC 만드는 게 소원이었거든요? 인감만 들고 와요. 계약서에 계약금 칸만 비워둘게요.]
그 누구보다 큰 이익을 입에 부어다 주면 절대 배신할 리 없는 현시점 최고의 동료. 나는 은유하에게 신뢰를 듬뿍 담아 답했다.
"품절이라니까."
* * *
"...좋습니다.."
장후정은 이를 악물었다. 애써 괜찮은 척 해보려 하지만, 테이블 아래에 쥐어진 주먹은 허벅지 위에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됐네. 수고하셨소, 대책부 차관."
하늘성은 몹시 만족한 얼굴로 중절모를 고쳐썼다. 협상을 이끈 두 대표 사이의 표정에서 드러나듯, 어느쪽이 더 성공적인 협상이었지에 대해서는 굳이 묻지 않아도 충분했다.
정부측의 압도적 패배. 인질로 삼은 6만명의 효과는 대단했다. 같이 따라온 협회의 대표인 집정관조차 은근슬쩍 히어로들과 사람들을 보호하는 쪽으로 빌런들을 거들 정도로.
하늘성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특사단을 향해 말했다.
"히어로 10명에 대해서는 지금 바로 인계하도록 하지. 관악까지 호위하겠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장후정이 고개를 숙였다. 테이블 위에는 특사단에서 준비한 종이에 협상의 내용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대한민국 정부 대표 장후정 괴수대책부 장관과 빌런 연합 대표 하늘성 류천성 사이의 합의서.
가져온 종이에 수기로 적었음에도 제법 내용이 길었다. 등대는 제 스마트워치에 정리한 내용을 간단히 읊었다.
"먼저 히어로들에 대한 인계.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히어로 10명을 특사단에 인계하고, 관악까지 빌런 연합에서 호위합니다."
괴수들로부터 구한 히어로들은 세신을 마치고 호텔 각 방에 배치되어 있다. 그것이 감금인지 보호인지는 그들만이 알테지만.
"다음으로 서울 시민들에 대한 문제. 일주일 뒤인 5월 8일, 정부에서 인원을 파견하여 서울 시민들에 대한 주민등록을 다시 합니다. 인원은 30명 제한. 정부 측 15명과 협회 측 15명."
이미 서울의 주민들 대부분이 사망처리가 되어 있었다. 정부와 빌런, 양측 모두가 주민등록이 말소된 6만의 인구가 무분별하게 날뛰는 것에 대해서는 난색을 표했다.
"대신 서울 시민들의 자의에 따라서 주민 등록을 실시합니다. 개인의사를 존중하되, 그에 따른 법적 책임은 빌런 연합에서 고지하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법적 책임이란...."
"대한민국 국민임을 포기한다는 거지."
팬텀이 씁쓸하게 호응했다.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정도는 다르겠지만, 최소한 여기서의 대한민국은 오직 '신서울'을 의미했다. 등대가 잠시 숨을 고르고 설명을 이어나갔다.
"단, 정부는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등록 거부자의 생존을 유가족에게 알릴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선의철의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불신이 있는 이들을 위해, 빌런 연합은 주민 등록을 의무가 아닌 선택의 문제로 할 것을 종용했다.
물론 그 이면에는 빌런들이 등록하지 않겠다는 의도가 숨어있었지만, 장후정은 마지막 합의 내용 때문에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집정관은 그 이면을 어느정도 알기에, 굳이 항변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정부는 5월 31일까지 서울특별시의 행정을 책임질 시장 대행으로...."
등대의 시선이 하늘성에게 돌아갔다. 하늘성은 중절모를 벗으며 눈썹을 으쓱였다.
"하늘성, 류천성을 임명한다. 류천성의 주민 등록 복구와 함께 류천성에게 걸린 모든 전과는 말소되며, 류천성이 행하는 모든행정에 대해서는 정부에서 일말의 간섭도 하지 않는다."
쾅!
장후정은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하고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서울시장은 선출직입니다! 투표로 뽑아야하는 자리라고요!"
등대가 합의문을 가리키며 꼬집었다.
"차관님. 이미 합의된 사항입니다. 이제와서 그렇게 화를 내시면 합의를 엎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다시 회담을 시작할까요? 이 와중에도 서울의 6만 시민들은 고통받고 있습니다만."
등대가 고개를 기울이며 비꼬자 하늘성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진정하게. 후후. 나야 상관없네. 다만 후정이 자네, 지방선거의 규칙을 잊은 건 아니겠지? 서울시장을 누가 뽑는다고 생각하나?"
"서울의 주민이 뽑죠."
팬텀이 말을 덧붙였다. 집정관은 탄식했다.
나름 강남에서 이름을 날리며 빌런 연합으로서 서울에 끝까지 남아있던 하늘성과 신서울에서 입후보를 통해 올려보낸 아무개.
당연히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자신들을 버리고 떠난 신서울의 후보보다는 함께 서울에서 동고동락한 하늘성에게 더 마음이 가는 법이다.
더군다나 서울 수복 작전의 이면을 직접 겪게된 기존 서울 주민들이 누구에게 표를 뽑을지는 명약관화.
결국 장후정은 눈물을 머금고 하늘성에게 시장 대행 자리를 내어줄 수 밖에 없었다.
괜히 선거를 치르면 선의철 정부의 입지만 약화될 것이다. 차라리 대범하게 하늘성에게 임시로 시장직을 내어주고, 추후를 노리자. 그것이 장후정이 받아들인 마지노선이었다.
"서울을 1년이나 악당들의 손에 맡기게 되다니...."
"나라에서 사람들을 지키지 못하는데, 나라도 지켜야 되지 않겠나? 껄껄. 어차피 1년 시한부 대행이야. 서울이 안정되면 시장 자리를 두고 재보궐 선거를 하겠지. 그리고 잊지마시게. 내가 대행을 하는 동안 이곳에서 활동하는 빌런들에 대해서는...."
하늘성이 양쪽을 번갈아보며 웃었다.
"내 언제든지 열과 성을 다해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어 두겠네. 어찌 범죄자들이 서울 한복판에 활개치고 다니는걸 눈뜨고 볼 수 있다는 말인가?"
"체포할 수 있다면, 말이죠."
장후정이 주먹을 꽉 쥐며 분노했다. 무언가 악에 받친 소리를 지르기 전에, 집정관이 차분히 되물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을거라 생각하십니까?"
집정관의 반론에 팬텀이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적어도 신서울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를 걸? 이쪽은 가릴 눈이랑 손이라도 있지, 그쪽은 눈이랑 귀를 아예 뽑아버렸잖아.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하게."
"...말을 조심하게."
장후정이 분노했지만 팬텀은 어깨를 으쓱였다.
"알았어. 언제 또 소나무 부대가 튀어나올지 모르니까. 약자는 조용히 있어야지. 안 그래?"
"......."
집정관이 침묵하자 장후정이 다급히 책상에 주먹을 내리치며 악을 질렀다.
"아무튼! 빨리 히어로들이 어디 있는지 알려주시오! 국민들께서 한시라도 빨리 히어로들의 생환을 기다리고 있으니!"
"후후. 보채지 말게. 이보게, 등대 군. 준비해주겠나?"
"알겠습니다, 하늘성."
등대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장을 나갔다. 한 명이 사라지자, 집정관은 숨을 돌리며 빈 자리를 훑었다.
"그나저나 유성의 회장님은 아직도 오지 않는군요."
시간적으로 약 한 시간 즈음 지났을까. 원래 회의에 자리를 비우는 시간이 많은 남자지만, 오늘따라 유독 그 시간이 길었다.
장후정은 인상을 찡그리며 하늘성을 노려봤다.
"설마 당신들...."
장후정은 은재민에게 화장실을 안내한 비서를 떠올렸다. 푸른 머리칼을 포니테일로 묶은 작은 체구의 여인. 신서울에서도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그리고 한 시간 가까이 화장실에서 돌아오지 않는 그룹 회장.
회장, 비서, 화장실.
남자 회장과 여비서. 단 둘이서 보내는 한 시간.
"......으음."
하늘성이 잠시 침음성을 흘리며 무언가 고민에 빠졌다가, 퍼뜩 놀라 손을 저었다.
"아니,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절대로 없네! 암! 그렇고 말고! 그런 일이 있으면 내 당장 그 합의문 찢고 새로-"
"그런, 일이, 뭐야?"
팬텀이 이를 갈며 으르렁거렸다. 하늘성이 식은땀을 흘리며 시선을 피했다. 집정관의 표정이 핼쓱해졌다.
".....설마 미인계?"
"나 간다."
팬텀이 제 얼굴의 마스크를 슥 쓸었다. 동시에 팬텀이 있던 자리의 바닥이 훅 꺼지더니, 팬텀은 그 아래로 사라졌다.
"뭣?!"
이능력을 사용하며 사라지는 팬텀에 장후정이 화들짝 놀랐다. 팬텀이 꺼진 자리에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바닥 타일이 쭉 이어지고 있었다.
집정관이 작게 속삭였다.
"...이능력으로 사라진겁니다. 그리 놀라지 마십시오."
"노, 놀라지 않았습니다!"
벌렁거리는 콧잔등에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냥 뭔가, 저 팬텀이라는 빌런이 몹시 화가 난 것 같아서."
"화라기 보다는...."
집정관은 날카로운 눈으로 팬텀이 사라진 자리를 노려봤다. 그가 지금까지 봐온 수많은 이능력자들과의 겸험과 대조해자면, 분명 팬텀이 마지막에 보여준 감정은....
"질ㅌ-"
"그 이상 말하지 마시게. 집정관."
하늘성이 말을 끊었다. 그도 표정이 그다지 편하지는 않아보였다.
"때로는 모르는 게 나을 수도 있는 법이야."
세 남자는 침묵에 빠졌다. 똑똑똑.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준비가 다 됐습니다."
등대였다. 하늘성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장후정에게 걸어왔다. 장후정 또한 빛처럼 일어나 하늘성이 건넨 손을 맞잡았다.
회담의 끝은 악수. 사진찍는 이도 없는 회담은 그렇게 조용히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