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70화 (70/1,497)

〈 70화 〉1부 5장 (3)

은유하.

대한민국 재계 최고의 기업인 유성의 막내누구나 다 부러워할 법한 배경과 외모로 모든 걸 다 가진 여자 같지만, 인성만은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제 배경만 믿고 날뛰는 천둥벌거숭이. 돈다발로 사람 때리기 좋아하는 사이코패스. 제 오빠들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버려졌을 악녀. 괴수에게 잡아먹혔으면 하는 유명인 부동의 1위.

그 모든 이미지를 단 한마디로 정의하고자 고민한 결과, 사람들은 은유하를 비유할 가장 적절한 단어를 찾아냈다.

유성의 개망나니.

그게 은유하가 대외적으로 알려진 이미지다.

물론, 본인이 일부러 만든 이미지다.

"대한민국 누가 알고 있을까요? 그 망나니가 사실은 유성의 주인이고, 각 그룹의 사장들은 다 은유하가 조종하는 인형인걸."

[그러니까요. 저랑 제 심복, 그리고 광검 어르신과 석하랑 고 계집애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사실인데. 우리 호갱님은 어떻게 아셨을까?]

스크린 너머, 웃고 있는 은유하의 얼굴에는 여유가 넘친다. 하지만 그 속내는 시커멓게 타들어 가고 있을 것이다.

"그러게요. 제가 어떻게 알고 있을까요? 그러면 여기서 퀴즈! 은유하 찬스로 딱 기회 일곱 번까지 드릴 테니까, 한 번 맞춰봐요. 제가 어떻게 당신을 알고 있을지."

[일곱 번? 지금 저 놀려요?]

"당연하죠. 푸흐흐."

7. 은유하의 상징 숫자.

공식 사이트에 소개된 16인의 히로인은 저마다 소개된 순서에 따라 번호가 붙여졌다. 은유하는 그중 7번째.

오마케 넘버 7.

남들에게는 비밀로 한 <인형술사>의 이능력은 기계 인형을 실제 사람처럼 조종하며, 딱 일곱 명의 인형만 움직일 수 있다.

은재민은 그 중 하나로, 은유하가 대외적으로 움직이는 유성 그룹의 얼굴마담이다.

내가 일부러 일곱 번의 기회를 준 것은 은유하의 이능력을 내가 알고 있다는 은유였다.

한참 고민하던 은유하가 드디어 입술을 뗐다.

[......언제 저랑 만난 적 있어요? 인천 컨테이너에서 말고.]

"땡. 1. 은유하 아가씨 본체랑 한 번도 만난 적 없습니다. 아, 하나 틀릴 때마다 이렇게 힌트 줄 거에요."

[고맙습니다. 근데 그러면 내 이능력의 정체를 눈치챌 일이 없는데. 광검 어르신이나 석하랑처럼 S급이라 알아차리더라도, 제가 은유하인 것까지는 모를 테고.]

"푸흐흐."

은유하는 이래서 좋다. 그룹 전체를 움직이고 일곱 명의 인간을 멀티태스킹 할 정도로 은유하는 머리가 좋다. 그야말로 천재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너무 머리가 좋아서 때로 삽질을 할 때도 있지만, 원작 히로인 중에서도 지능에서는 투톱이었다.

내가 굳이 설명하지 않고 살짝 정보를 흘려도, 그걸로 정답에 가까운 진실을 유추해 낼 것이다.

은유하가 손뼉을 쳤다.

[그러면 어디 첩보 기관에서 일하나요? 솔직히 미국이나 러시아 정도면 저에 대한 정보를 파악했을 텐데.]

"2. 걔들 그럴 만큼 실력 없으니까 안심해요. 당신 인형들, '어지간한' S급 아니면 눈치채기 어려우니까."

그걸 눈치챈 설화공주랑 광검이 이상한 거다.

[어, 그러면 회귀자? 전생자?]

"네?"

어이가 없었다. 잘 나가다가 갑자기 회귀자나 전생자 언급은 왜 하는 걸까.

"왜 갑자기 주제가 판타지로 넘어가는 거죠? 근거가 없으면 절대로 억측을 하지 않는 사람이."

내 대답에 은유하가 입을 가리며 쿡쿡 웃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은유하의 함정에 빠져들었음을 직감했다.

[역시. 제 능력뿐만 아니라 제 성격마저 아시는군요. 힌트 고마워요. 푸흐흐.]

까득. 자연히 이가 갈렸다. 일부러 억측을 던져 내게서 정보를 캐냄과 동시에, 나를 놀리려고 피닉스의 웃음소리를 따라 한다.

"끄응."

생각해보니 이 녀석 개인 루트를 탔을 때, 얼마나 이런 식으로 당했는지 셀 수 없을 정도다. 너무 오랜만이라 당황해서 약점을 보이고 말았다.

절대 내가 멍청한 게 아니다. 저 영악한 꼬맹이가 심하게 똑똑한 것이다.

"3, 4. 이제 힌트 안 줄 거에요. 맞았는지, 틀렸는지만 알려줄 겁니다?"

은유하가 손을 흔들며 웃었다. 아, 또 당했다.

[됐어요. 앞으로 만난 일이 많을텐데 서로 차차 알아가기로 하죠. 지금은 우리의 거래에 관해 이야기하기도 바빠요.]

"......."

이 년이.

[왜요? 계속하고 싶어요? 그럼 제집으로 와요. 어딘지 알 거 아니에요?]

"...제 반응에 따라서 집도 아는지 모르는지 확인하려는 거, 누가 모를 줄 알아요?"

[안 낚이네요. 후훗.]

은유하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근데 그거 알아요? 모르는 사람이면 보통 '모르는데 어떻게 가냐'고 따지지, 그렇게 한 타임 쉬고 딴소리하지 않아요. 우리 고객님이 이중 삼중으로 함정 파면서 이야기하실 분은 아닌 것 같고.]

"...언제 한 번 지붕 부수고 침대에 떨어지는 사람 있으면, 전 줄 알아요."

은유하가 쿡쿡 웃는다.

[부정 안 하시네요. 좋아요. 그렇게 톡 까놓고 이야기하는 고객님의 쿨한 점. 저 엄청 사랑한답니다.]

"미안하지만 이미 제 사랑은 다른 곳에 있어서, 그 사랑 받아 줄 수가 없네요. 다른 거래처 알아봐요."

[저런. 돈으로 살 수 없는 사랑이라는 건가요? 안타깝네요. S급 이능력자 용병으로 구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대신 우리 엄청 찐하게 거래하잖아요? 어디 가서 물어봐요. 이렇게까지 A급 코어 잘 벌어다 주는 거래처 있는지."

은유하나 나나 둘 다 웃었다. 컨테이너에서 이야기했을 때 느낀 건데, 이제서야 확신이 든다.

이 여자. 피닉스랑 정말 잘 맞는다.

"그러면 슬슬."

[거래 얘기로 돌아갈까요?]

화제를 돌리는 시점까지 완벽하다. 나는 스마트워치를 두드려 스크린을 띄웠다. 은유하의 눈이 빠르게 스크린 속 목록을 훑었다.

서울 수복 작전 이후로 2주간 벌어들인 코어. 그 모든 수량이 정리된 리스트였다. 은유하는 목록을 쭉 훑더니 의아한 듯 눈이 동그래졌다.

[이번에는 물량이 적네요? 작전 전이 더 많았던 것 같은데. 작전 이후로 괴수들 씨가 마른 건가요?]

"그건 아니에요. 이쪽에서도 좀 쓸 일이 있어서요."

[쓸 일?]

나는 화장실 벽을 노크하듯 두드렸다.

"이거 다 괴수들 코어로 쌓아 올린 거에요. 내부 인테리어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

은유하가 잠시 침묵했다. 엄청 머리를 굴리고 있을 것이다. 예상해보자면....

"네. 코어로 건물을 복원할 수 있어요. 예. 그런 능력의 이능력자가 있죠. 그럼 무슨 건물을 복구할까? 지금 주로 주거 시설들 복구하고 있어요. 서울에 진짜로 남아 있던 난민들. 그 사람들이 살아갈 주거 공간을 확보하느라 지금 코어가 남아돌지 않는답니다."

[.......]

은유하의 얼굴이 제대로 찡그려졌다. 앗싸. 제대로 한 방 먹였다.

[그러면-]

"네. 그래서 추후 거래에서 보내줬으면 하는 게 대량의 식량이랑 구호품이에요. 6만 명은 족히 먹여 살릴 양이 필요하죠. 그쵸! 정부와 협회 눈에 안 띄게 거래를 할 수는 없어요. 그래서 이번에 정부 측이랑 협상하는 주요 과제가 그거죠."

[공인.]

은유하가 내 말을 잘랐다. 나는 인자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은유하가 먼저 운을 뗐다.

[도시 전설 같은 서울 난민들의 존재를 정부가, 신서울이 인정하게 하려는 거군요. 하지만 그러려면 그만큼 반대급부가 있어야 할 텐데, 코어는 저랑 전량을 거래해야 하니까 아닐 테고. 그러면 역시....]

은유하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서울 6만 명의 목숨을 판 돈 삼아서 정부를 협박하려는 거군요!]

"...반쯤은 정답? 푸흐흐."

아무리 은유하라도 큐브의 존재는 모른다. 그렇기에 '괴수를 조종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일말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선의철이 보낸 특사단의 사고는 거기에 머물러 있다.

빌런 연합이 보호하고 있는 히어로 10명과 난민 6만 명. 그리고 그들을 사방에서 에워싸고 있는 화염 속성의 괴수들.

그렇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는 잠시 의적이 되기로 했다.

* * *

"...동작 지하에 6만명이 살아있었다? 그걸 지금 믿으란 말씀입니까?"

장후정의 손이 떨린다. 신서울에서 금기와도 같은 도시 전설이 상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아직 서울에는 사람들이 살고, 그들은 괴수를 피해 지하로 숨어들었다.'

수십 명 단위의 빌런들이 건물을 무단점거하고 도적 떼처럼 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신서울 주민 대부분은 서울에서 탈출한 실향민이었고, 그들의 가족, 친구, 연인 중 대부분은 서울에 남았다가 연락이 두절되었다.

즉, 동작 지하의 6만 명 중에는 그들이 가슴에 묻어두었던 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늘성이 느긋한 얼굴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래. 원래는 더 많았지. 다행히 식수의 문제는 없었어. 한강이 바로 옆에 있었으니까. 문제는 음식물인데...."

하늘성이 등대에게 시선을 던졌다. 등대는 선글라스를 고치며 말을 받았다.

"괴수들의 눈을 피해 온갖 식량 창고를 털었죠. 식자재마트, 백화점, 심지어 구멍가게 편의점도. 뭐...결국에는 유통기한이 지난 것들이 대부분이었고, 그것도 모자라서 괴수들까지 손대기도 했죠."

등대가 서글프게 웃었다. 당장 구로만 하더라도 서바이벌 체험장이나 다름없었다. 괴수의 시체를 인간의 식량으로 사용할 수 없었다면, 분명 사람이 죽고 나면 그다음 날은 정체불명의 고기가 밥그릇에 올랐을 것이다.

"아키택트, 제임스 리는 무려 6만의 난민을 살렸습니다. 지금까지는 지하에 숨어있었지만, 차원문과 같은 위험 속에서 더는 서울에 있을 수 없다고 판단했죠."

팬텀이 입을 열었다.

"우리 빌런 연합은 그들을 보호하기로 했습니다. 이미 서울이 어떤 상태인지는 여러분이 더 잘 알잖아요? 구로와 강남 일대에 날뛰는 화염계 괴수들 말이에요."

"...화산 터졌다, 라고 부르지. 우리는."

유영호가 볼을 긁적였다. 비정상적으로 생겨난 화염계의 괴수들. 개중에는 작은 카나리아같이 괴수 같지 않은 것들도 있었지만, 모두 공통점이 있었다.

코어가 없는 괴수들.

구로와 강남 일대를 점령한 괴수들은 하나같이 강하고 사나웠지만, 정작 그렇게 열심히 잡고 나서는 아무런 보상도 토해내지 않고 불꽃에 휩싸였다.

그래서 협회에서는 새롭게 그 괴수들을 정의했다. 마력에 의해 움직이는 괴수-마수(魔獸).

"네. 그 정체불명의 괴수는 강남과 구로에서 아직도 먹잇감을 찾고 있죠. 저희는 그래서 이 여의도와 동작을 최후의 보루로 삼기로 했습니다. 다만."

등대가 테이블 위에 펼쳐진 지도를 가리켰다. 동작과 안양을 길게 이어가는 루트.

"괴수들은 구로와 강남을 벗어나지 않기에, 이렇게 그사이를 오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곳으로 오셨던 길처럼."

"관악산."

특사단은 안양에서부터 이곳 여의도까지 등산로를 선택했다. 화마룡이 만들고 설화공주가 다져놓은 그 비탈길을.

하늘성이 손가락으로 지도를 죽 그었다.

"화마룡의 잔재가 아직 남아있는 게지. 자네들도 직접 느끼지 않았나? 안양에서 이곳까지 쭉 올라오면서, 위험한 괴수를 만난 적이 있던가?"

"...관악쪽 D급은 몇몇 있었습니다."

장후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알겠습니다. 나라의 녹을 먹는 자로서 당연히 서울 6만 시민들을 지켜야죠. 하지만 지금 당장은 현실적으로 그들을 전부 대피시킬 만큼 전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네들에게 말하는 걸세. 그저 6만 명의 시민들이 아직 서울에 있다. 그것만 알아달라고. 나머지는 우리들이 알아서 살아남겠다고."

"...지금 서울에 왕국을 세우겠다는 말씀입니까?"

"푸하하!"

하늘성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솥뚜껑같의 큰 손이 테이블을 탕탕 울렸다.

"왕국이라니! 우리가 지금 조선 시대로 돌아가자는 건가? 이 사람아, 아무리 이곳에서 원시인처럼 살았어도 우리는 21세기 현대인이야. 대통령 선의철 아래에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그렇지 않나?"

"그건 그렇습니다."

"그렇지. 다만 말일세."

하늘성의 시선이 집정관에게 돌아갔다.

"현실적으로 협회와 정부에서 이곳 서울의 시민들까지 구하기 힘드니, 당분간 우리가 이곳을 지키겠다는 말일세. 서울 주민들이 무사히 서울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자경단 역할을 하겠다 이 말이야."

"......."

유영호가 이를 악물었다. 비록 자신이 지휘하지는 않았지만, 협회의 히어로들이 너무나도 쉽게 서울의 괴수와 빌런들에게 농락당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빌런들이 방해만 하지 않았으면, 서울은 지금쯤 다시 대한민국의 땅이 되었을 것이다. 그게 현재 신서울에서 모이는 중론.

"화염 거인과 그 S급만 아니었어도...."

유영호가 입술을 깨물며 으르렁거리자, 하늘성은 두 팔을 벌리며 고개를 위로 올렸다.

"그들은 우리도 모르는 자들일세. 그런 자들이 있었다면 진작에 강남에서 히어로들을 때려잡았겠지. 안 그런가? 뭐하러 그런 힘을 놔두고 우리가 체포당하느냐 이 말이야."

그게 문제였다. 만약 같은 연합의 소속이었다면, 화염 거인과 S급 괴인은 왜 굳이 구로와 관악에서 단독으로 움직였을까.

"정녕 모르는 자들이란 말입니까? 그걸 우리보고 믿으라고요?"

"믿든 안 믿든 그건 그쪽 자유야. 우리도 알고 싶은데? 그자들 정체가."

빌런들과 특사단의 시선이 부딪힌다. 하늘성이 팔을 테이블에 올리며 상체를 기울였다.

"그 자들에 대해 가장 궁금한 건 우리야. 히어로들 공격한 거 봐서는 같은 빌런 아닌가? 손을 잡으면 최소한 히어로들에게 체포당할 일은 없지. 안 그런가? 그리고-"

"서울 시민 6만 명도 지킬 수 있지요. ...물론 그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만. 후후."

말은 번지르르 하지만 빌런들은 히어로들처럼, 선의와 사명으로 타인을 구하는 자들이 아니다.

장후정이 탁자를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 서울 시민 6만의 목숨을 두고 겁박하는 겁니까?"

"우리가 거둔 목숨일세. 그러니."

하늘성이 사납게 웃었다.

"우리가 다시 버린다 한들 무슨 문제겠나. 자네 말대로 우리는 악당, 빌런 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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