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1부 5장 (1)
2020년 5월 1일.
서울 수복 작전의 실패 이후 약 3주가 흐른 시기. 대한민국은 알게 모르게 큰 변화를 겪었다.
작전 실패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괴수대책부 장관의 자살, 정부 차원에서의 국제 지원 요청과 거절, 화권을 비롯한 부상 히어로들의 회복과 그 전력 공백에 대한 대응.
'이거 뭔가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하는 이들이 하나둘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가운데, 신서울은 여전히 예전과 다를 것 없이 평화로운 나날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와 반대로 서울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광검이라는 영웅의 아래 평화와 안전에 익숙해져있는 신서울과 달리, 서울은 청화단에 의해 여의도와 동작을 중심으로 도시가 복구되고 있었다.
다시 서울로 돌아가서 살아도 되는 거 아닌가?
많은 이들이 서울행의 견적을 내는 가운데, 서울에서 추방당하는 이들도 있었다.
빌런.
신서울의 히어로들에 맞서 싸우기를 포기하고, 청화단이 승리하자 어영부영 제자리로 돌아오려 하는 자들.
그들은 서울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
콰앙!
엄청난 폭발과 함께 흙으로 된 벽이 폭발한다. 전신을 흙으로 덮고 있던 사내가 화들짝 놀라 몸을 굴렀다.
탕, 타탕!
마탄이 벽을 뚫어 사내를 덮쳤다. 사내는 황급히 흙을 몸에 둘러 피부를 보호했지만, 그보다 마탄이 빠르게 사내의 팔뚝을 스쳤다.
"크아아악!"
사내가 비명을 질렀다. 마탄은 흙의 보호막을 뚫고 사내의 팔뚝에 박혔다.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았지만, 사내는 자존심에 심각한 금이 갔다.
"이 무지렁이들이!!"
사내, 강서의 <땅개>는 손바닥으로 땅을 내리쳤다. 공원의 흙이 파도처럼 출렁인다.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진흙이 3m가량 하늘로 치솟아 청화단의 단원들을 덮쳤다.
- G7. 위협 사격 개시. 상대의 기술은....
무전기 너머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땅개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기억을 더듬고 소리쳤다.
"등대 이 개새끼가!"
- [팬텀]이 막습니다.
단원들 속에서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앞으로 뛰었다. 팬텀이라 불린 여인은 파도처럼 밀려오는 흙을 향해 발을 굴렀다.
쿵!
지축이 요동친다.
마력이 실린 발 구름에 땅개의 흙 파도가 너무나도 쉽게 허물어졌다. 땅개는 상대가 누구인지 눈치채고 뒤로 물러섰다.
"유령?!"
"......."
팬텀은 아무 말 없이 스마트워치를 두드렸다. 목소리를 내기 싫은 눈치였다. 곧 등대의 연락이 돌아왔다.
- 강서의 <땅개>. A급입니다. 단장님 말씀으로는....
지직. 등대의 무전이 잠시 끊어졌다가 이어졌다.
- 등용 대상자는 아닙니다. 죽여도 무방합니다.
"......그래?"
팬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땅개는 그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 같았다. 지직. 등대의 무선이 돌아왔다.
- 그다지 좋은 능력은 아닙니다. 지속성은 이미 두 명이나 있으니까요.
"그러면 됐어. 필요 없네."
팬텀이 몸을 돌렸다. 땅개는 기억 속에서 여인의 목소리를 들었던 순간을 끄집어냈다.
"너! 그 미친 년?!"
까득. 팬텀이 이를 갈았다. 이 무례한 땅개라는 인간을 언제 만났던가? 팬텀, 가을은 기억을 곱씹다가 3주 전의 일을 떠올렸다.
서울 수복 작전이 있기 전, 강남에서 있었던 빌런 연합의 회의. 가을이 피닉스를 뒤에 대동하고 참가한 회의에서 땅개는 유독 투덜거리다가 가을을 공격하기까지 했다.
콘크리트로 검을 휘두르던 그 남자. 가을은 대놓고 인상을 찡그렸다. 가면에 가려 보이지 않겠지만.
"하. 무슨 염치로 여기까지 기어들어 온 거야? 분명 그때 말했을 텐데? 싸우지 않고 도망간 자는...."
가을이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서울에 들어올 수 없을 거라고."
"개소리 마라!"
땅개가 괴성을 지르며 손으로 땅을 내려쳤다. 흙은 마력을 머금은 창이 되어 금방이라도 쏘아질 것 같았다.
"말이 안 통하면...."
가을은 롱코트의 뒤를 살짝 들어 올렸다. 코트 안쪽에서 회백색의 무언가가 움찔거렸다. 정면에서 그것을 마주 본 땅개가 알 수 없는 혐오감으로 인해 멈칫했다.
"맞아야지?"
가을이 손을 들어 올렸다.
이능력을 사용하려던 순간, 가을의 옆으로 바람의 화살이 날아가 땅개의 어깨에 박혔다.
"으아악!"
땅개가 고통스러워하며 바람의 화살을 빼냈다. 구멍 난 어깨에서 피가 분수처럼 치솟았다. 땅개는 분한 얼굴로 정면에 흙의 벽을 세웠다. 바람의 화살이 다시 날아가며 흙벽을 두드렸다.
파스슥! 흙벽이 무너졌다. 땅개는 이미 모습을 감췄다. 등대의 무전이 전해졌다.
- 땅굴을 팠습니다. 도망쳤습니다.
"알겠어. 고마워. 그보다...."
가을이 가면을 벗어 머리에 걸었다.
들끓던 마력이 가라앉으며 눈동자가 생기를 잃었다. 죽었다 부활한 괴인이어서 그런지 시체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눈앞의 상대보다는 훨씬 살아있는 사람 같았다.
푸른 불꽃무늬가 들어간 검은 라이더 슈트. 라텍스와 같은 재질로 몸매를 훤히 드러낸 상대는 명실상부한 여성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목 위로 헬멧을 쓰고 있고, 그 헬멧 속에는 푸른 불꽃이 머리처럼 타오르고 있다는 것. 라이더 슈트의 여성이 활을 등에 메자, 가을이 투정을 부렸다.
"과보호야. 이 정도는 눈 감고도 막을 수 있거든?"
[신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천가을님을 보호하라고.]
헬멧 속 불꽃이 일렁거렸다. 소리는 없지만, 마력을 통해 여성의 의사가 가을에게 전달됐다. 가을은 떨떠름한 얼굴로 옷을 정돈했다. 심장이 쿡쿡 아파졌다.
"...그러니까 그걸 왜 나를 죽였던 너한테 맡긴 건데?"
[저는 그저 신의 말씀을 따를 뿐입니다.]
목을 잃은 소나무 부대의 히어로들.
피닉스는 목이 잘린 시체에 코어를 박고 괴인으로 만들었다.
간부 취급은커녕 걸레처럼 쓰다가 버려질 노예 전투병들 취급을 했고, 그중 가장 온전한 형태로 남은 괴인을 가을에게 호위로 붙였다.
하필이면 그게 가을을 죽였던 히어로 <로빈>, 유이신이었다.
[신께서는 제게 제2의 삶을 주셨습니다. 비록 제 자유와 머리를 앗아가셨지만, 인간 시절의 삶보다 더 뜻깊은 삶을 살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비록 저희 '푸른 깃털' 중에 아직 신의 은총을 부정하는 자들도 있으나....]
"그 이름! 왜 하필이면 그런 요상한 이름인 건데?!"
[대장께서 정하신 거라 저는 반론할 수 없습니다. 괜찮다고 생각합니다만.]
가을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 조직의 조직원들은 하나같이 네이밍 센스가 아예 구리거나 아예 감수성이 폭발하는 양극단밖에 없다. 청화단에서 가장 얌전한 이명이 제 <팬텀>일 정도로.
특히 저 노예 전투원 부대인 '푸른 깃털'의 대장은 그중에서도 그 방면으로 독보적인 존재다. 오죽하면 피닉스조차도 살짝 꺼릴 정도로.
"하아. 아무튼 이 정도는 내가 할 수 있어. 알겠어? 다음에 필요하면 부를게."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걸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천가을님을 지키지 못할 경우, 저는 또 죽습니다. 폐기당하겠죠.]
유이신은 제 목숨으로 협박을 했다. 근 3주간 곁에서 지켜본 천가을은 괴인이 되어서도 본성이 변하지 않았다.
"어휴. 알겠어. 조심할게. ...등대? 이쪽은 더 없는 것 같은데? 복귀해도 돼?"
- 예. 없습니다. 그런데 왜 가을 씨 저한테 말을 놓으시....
"뭐. 불만 있어?"
- 아닙니다....
조금, 성격이 과격해진 것 같기도 하지만.
* * *
"끄, 끝났다!"
아키택트가 바닥에 벌러덩 누웠다. 그의 앞에는 번듯하게 복원된 20층짜리 아파트가 우뚝 솟아있었다.
"하아, 하아."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한 채에 15억은 됐을 나름 고급 아파트였다. 그는 완전히 붕괴한 한 동을 제외하고, 토대가 남아있는 아파트들을 원형 그대로 복구해냈다. 무려 13동이나.
3주. 무려 3주 동안 아키택트는 잠시도 쉬지 않고 건물들을 복구해냈다.
청화단의 주요 거점으로 삼을 여의도의 몇몇 건물을 제외하고 그가 중점적으로 복구한 건물은 수많은 주택과 아파트였고, 자연히 그 안에 들어갈 주민들은 동작 지하에 숨어있던 난민들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아키택트."
G12의 팀장이 아키택트에게 포션을 건넸다.
아키택트와 적절히 밀당을 하며 그를 다루는 방법을 안 뒤로, 지화는 그의 팀을 아키택트 전담으로 붙였다.
"어이쿠야! 다리 삐었다!"
예상대로 아키택트가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아이고, 허리야! 나 죽는다!"
"누차 말씀드렸지만 포션은 신체 능력도 다 회복시키는 만능약입니다. 자. 많이 쉬셨죠?"
G12는 아키택트에게 지도를 건넸다. 무너진 부동산에서 건져온 동작구의 행정구역이 그려진 지도는 약 30% 정도가 붉게 칠해져 있었다.
동작에서 아키택트가 복구한 지역이었다. 일부 공원과 국립묘지가 있는 곳을 제외하면, 아키택트가 아직 다시 세워야 할 건물들이 넘쳐났다.
"아, 진짜! 인간적으로 좀 쉬자! 여의도 싹 다 복구했잖아!"
아키택트는 2주 동안 심신을 갈아 넣으며 여의도 일대의 모든 건물을 복구했다. 몸이 지쳤다 싶으면 입에 포션이 쑤셔지고, 잠깐 눈을 붙였다 싶으면 포션 주사기가 엉덩이를 찔렀다.
나중에는 어디서 구해왔는지, 링거대를 끌고 와 팔뚝에 주사를 꽂더라. 당연히 링거 안에는 포션이 들어있었다.
그로 인해 아키택트는 24시간 내내 신체가 식사도 필요 없고 수면도 필요 없는 풀 컨디션 상태였다.
인간의 몸으로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까지 간 순간, 그는 이미 여의도 섬안의 모든 건물을 복구해냈다.
무한히 쏟아지는 코어의 파도를 넘어 아키택트는 폐허가 된 여의도를 다시 인류 문명 속으로 되돌려놓았다. 깨끗하게 복원된 국회의사당 앞에서 아키택트가 콧대를 높이며 자랑하던 순간, 악마가 속삭였다.
- 동작 지하에 있는 사람들 여의도에 다 수용 못 할 것 같은데, 그럼 동작도 슬슬 작업 시작해야겠죠?
울었다.
아키택트는 그날 처음으로 남들 앞에서 대성통곡을 하며 꺼이꺼이 울었다.
그래서 따지고 들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는지 몰라도, 보스의 멱살까지 잡고 흔들며 쉬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그랬더니 그러더라.
"한 번만 더 토를 달면 괴인으로 만들어 버린다고 했지. 괴인은 식사와 수면이 필수가 아니라면서. 그 인성 터진 괴물 같은 년. 자기는 잠자고 먹을 거 다 먹으면서 말이야."
"그건...."
"너 사회생활 아직 안 해봤지? 악덕 기업이라는 게 그래. 항상 리더가 모범을 보여야 한다, 솔선수범해야 한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온갖 말로 신규들을 현혹하지만 정작 회장이나 사장은 절대 그러지 않지. 그런 게 뭐라고 하는지 알아? 한국말로 꼰대, 꼰대였던가?"
G12는 진실을 말해야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슬슬 구시렁구시렁 거리며 은근슬쩍 쉬려고 하는 아키택트의 행동에 잔혹한 진실을 읊었다.
"등대님 말씀으로는 피닉스 님, 오늘까지 10분도 안 자고 계속 깨어있으시답니다."
아키택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 * *
화륵.
피닉스의 몸에 푸른 불꽃이 붙었다. 이걸로 벌써 324번째. 점점 그 빈도가 빨라지고 있다.
"...괜찮냐?"
덕배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피닉스에게 종이를 건넸다. 피닉스는 멍한 눈으로 종이를 받아 위에서부터 죽 훑기 시작했다.
"여의도 주택가에 먼저 입주를 바란다? 안 돼요. 이 사람들 지금 청화단 들어오겠다고 한 것도 아니잖아. 기각. 반려."
피닉스는 종이를 구겨 하늘로 던졌다. 경쾌한 손가락 튕기는 소리와 함께 종이는 재가 되어 사라졌다.
"또 봅시다. '인분이랑 쓰레기들이 너무 악취가 심해요. 어떻게든 해주세요?' ...지금까지 지하에서 잘 참고 살다가 이제와서?"
피닉스가 스마트워치를 두드렸다. 시각은 벌써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동작 쪽으로 갈 때 들리도록 할게요. 기록해둬요. 불꽃으로 소각하면 냄새 안 나게 소멸시킬 수 있으니. 또 봅시다. 대학교를 복원해주세요? 이거 딱히 급한 건 아니죠? 아키택트한테 보내요. 알아서 처리하라고 하게."
"괜찮냐고."
피닉스는 몸을 좌우로 흔들며 다음 종이를 읽었다. 제대로 된 종이도 아닌, 초등학생용 일기장에 적힌 주민들의 건의사항이었다.
"네. 들려서 마력만 써주면 되니까요. 아, 지하에 지금 처리할 것 3개 더 있죠? 아침에 가면 한 번에 몰아서 처리해야겠네요. 적어둬요."
"아니, 너 괜찮냐고?"
피닉스는 눈을 껌뻑였다. 화륵. 다시 푸른 불꽃이 전신을 휘감았다. 이걸로 325번째.
"너 그날 천가을이랑 하룻밤 잔 이후로 한숨도 안 잤잖아."
"어머. 손만 잡고 잘려고 했거든요? 그거 말아먹은 거 부하 2호였잖아요."
"...그랬긴 하지."
그날, 덕배는 처음으로 괴인으로서 죽고 부활했다.
죄명은 넌씨눈. 가해자는 천가을. 공범 피닉스.
"그러고 보니 가을 씨, 그날 이후로 모두한테 말 편하게 하더라고요."
피닉스가 종이들을 탁자에 내려놓고 팔을 쭉 뻗었다. 덕배는 제 등 뒤에 숨겨둔 공책들을 안 보이게 슬쩍 숨겼다.
"저로서는 더 익숙하긴 한데, 뭔가 아쉽네요."
"그 미래의 천가을 얘기냐?"
피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을 튕기자 덕배가 등 뒤에 숨긴 공책이 피닉스의 손으로 날아왔다.
"그렇죠. 마스커레이드는 안하무인의 빌런이었으니까. 팬텀도 이제 빌런이기는 하지만, 성향이 엄연히 다른 사람이죠."
천가을이 자신의 이명을 <팬텀>으로 자칭하면서, <마스커레이드>는 미래의 천가을을 지칭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같은 도적 떼라고 하더라도 황건적이랑 활빈당이랑 다른 것처럼요."
"도적이랑 의적의 차이를 말하고 싶은 거냐?"
피닉스가 떨떠름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본의 아니게 팬텀 덕분에 의적질하게 생겼네요."
"그럼 뭐 동작의 난민들 6만 명 싹 다 수탈하려고 했냐?"
"아뇨. 그냥 지하에 묻어버리려고 했었어요. 이런 귀찮은 일 있을까봐."
덕배는 한 귀로 흘려버렸다.
"어, 어쨌든 6만 명 중에 청화단으로 들어온 사람도 꽤 되지 않냐. 그중에 여의도에 들어온 사람들은 나름 열심히 일하던데."
"우리가 월급 주는 것도 아닌데, 자진해서 그렇게까지 열심히 할 리가 없죠. 인간은 반대급부가 없으면 결코 그렇게까지 일을 열심히 하려고 들지 않아요."
피닉스가 공책을 한 장 한 장 뜯었다.
"지화처럼 권력욕이 있는 경우도 있고, 아키택트처럼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경우도 있죠. 청화단에 들어온 대부분은 살아남으려고 고개를 숙인 거예요. 봐요. 당장도 조금 살만해졌다 싶으니까 온갖 욕망이 튀어나오잖아요?"
피닉스가 종이들을 집고 흔들었다.
그 대부분이 수년간의 토굴 생활을 탈출하고, 과거 현대 문명 사회의 생활로 돌아가고파 하는 사람들의 욕구가 담긴 민원이었다.
"오해할까 봐 말하는데, 이게 나쁘다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무슨 원시 시대 사람도 아니고 21세기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당연히 누리고 살아야 할 건 누려야죠. 덕배 씨도 그렇잖아요? 스마트폰 쓰면서 살다가 데이터만 끊겨도 불안해지는 게 사람 심리인데, 이 사람들은 몇 년이나 석기 시대 체험하고 왔잖아요."
"그래서 그걸 다 들어줄 거냐?"
"가능한 한 해줘야죠? 어쩌겠어요? 이미 이렇게 돼버렸는데. 길 가다가 거둬들였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죠."
"서울 난민들이 무슨 길고양이냐?"
피닉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딱히 부정은 하지 않았다.
"길고양이. 푸흐흐. 틀린 말은 아니네요. 집 만들어 주랴, 먹이 구해주랴. 아 참. 밀키웨이 통해서 들어온 식자재는 어떻게 됐어요?"
"성남으로 올라오는 트레일러에 다 실어주기로 했다. 어디까지나 우리가 습격해서 훔쳐 가는 형태로."
"트레일러값도 물어줘야겠네요."
피닉스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손에 들린 불필요한 종이들을 불로 태워버린 피닉스는 창가로 걸어가 스트레칭을 했다.
화륵.
다시 창염이 피닉스를 태웠다. 326번째.
아키택트에게 포션을 들이부어 심신의 컨디션을 강제로 최상의 상태로 만들듯, 피닉스 본인 또한 전신의 마력을 강제로 돌리며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했다.
4월 14일부터 5월 1일까지 약 18일. 피닉스는 한숨도 자지 않았다.
"걱정마요. 지금 되게 문명 하는 기분이 나서 아직은 할만 하니까."
"또 무슨 소리야?"
"잘 들어요, 부하 2호. 괴인이라는 건 애초에 식사와 수면이 필요한 존재가 아니에요. 어디까지나 인간 시절의 습관이 남아있어서 그걸 충족하고자 하는 정신적 만족감-"
"슬슬 말 길어지는 거 봐서는 제정신이군."
덕배가 말을 끊으며 스마트워치를 가리켰다. 알람이 도착해있었다.
"확인해라. 나는 이거 나머지 처리하고 오지."
"예."
덕배가 떠났다. 피닉스는 도착한 문자를 확인했다.
[밀키웨이] : 말씀하신 물건은 새벽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이번에도 좋은 품질의 코어 기대할게요^^ 참고로 오늘 신서울에서 깜짝 놀랄 손님 한 명 갈 것 같으니까,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고 계세요! 사랑하는 우리 호갱님♡
"이게 미치셨나."
피닉스가 곧바로 키보드를 열어 답장하려다 피식 웃으며 스크린을 닫았다.
"좋아요. 오면 보도록 하죠. 본인은 아니겠지만."
피닉스가 등대를 호출했다.
그 날 아침. 신서울에서 특사가 서울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