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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66화 (66/1,497)

〈 66화 〉1부 4장 (23)

살면서 언제 또 이런 최고급 호텔의 펜트하우스에 와 볼 일이 있을까.

나는 한강이 훤히 보이는 창문 앞에 서서 절경을 만끽했다.

석양이 지는 시각. 아키택트를 갈아 넣은 덕분에 호텔은 금방 복구되었다. 일부러 개성까지 가서 A급 괴수들만 골라 코어를 긁어온 보람이 있었다.

"역시 막은 보람이 있네요."

서울 수복 작전. 원작에서도 수차례 진행됐고, 결국에는 모두 실패로 돌아간 계획.

그리고 나는 그 작전의 이면에 있는 추악한 진실을 목도했다.

소나무 부대를 이용한 학살.

가을이 날뛰었고 지화가 틀어막은 덕분에 200여 명의 사상자 만나고 끝났지만, 아마 그대로 뒀다면 동작 지하의 수 만 명이 지하 속에서 그대로 사망했을 것이다.

원작에서는 아마 그들 모두가 불귀의 객이 되었거나, 원통함에 괴수가 되었을 것이다.

"서울 주민들 살리는 건 생각도 안 했었는데."

예상을 못 했다기보다는 아예 계획에 없었다.

지금의 계획은 빌런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었고, 서울 주민들은 죽든 말든 자기들 알아서 살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신서울로 도망치면 더 좋고.

이능력도 못 쓰는 일반인.

지하에 숨어든 난민들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그나마 그중에 몇몇 재능이 있는 이들만 골라내서 사용하면 되는 것을.

"근데 그러기에는 이미...."

천가을. 변해버린 그의 눈치를 보느라 착한 척을 했더니, 결과가 이렇게 되어버렸다.

졸지에 수 만 명의 목숨을 떠안게 된 책임감이 어깨를 짓누른다.

구로의 난민들을 청화단의 조직원으로 만드는 것도 힘들었는데, 벌써 그 수 만 명을 관리해야 할 생각에 머리가 아프다.

쥐도 새도 모르게 지진을 일으켜 다 묻어버릴까요?

'...내가 모택평도 아니고.'

나는 침대로 다가가 그대로 몸을 던졌다. 대자로 쭉 뻗은 몸이 이불 속으로 그대로 빨려 들어갔다.

"으아."

이런 결과를 원한 게 아니다. 그저 뒷세계의 흑막처럼 자리를 잡고, 코어를 찾으러 다니다, 원작 시점에 주인공을 뒤에서 도울 조력자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 원대한 계획은 모두 망해버렸다.

"너무 분위기 타버렸다...."

어쩌다 보니. 그냥 신나서 날뛰다 보니 이렇게 됐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 아니, 이 생각 예전에도 한 번 한 것 같은데.

"......하는 짓 하나하나가 다 멍청했네요."

결과는 얼핏 좋아 보인다.

천가을은 결국 S급 이능력자가 되었다.

서울의 빌런들은 좋든 싫든 청화단에 복속되거나 비호 아래에 들어왔다.

서울 수복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고, 한국의 협회와 선의철은 조금이나마 타격을 입었다.

그리고 그에 따른 여파와 그에 대한 대책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복잡했다.

앞으로 수차례 지속할 제 N 차 서울 수복 작전에 대한 방비. 히어로들을 피해 도망친 강서 땅개 같은 겁쟁이들에 대한 대처. 동작 지하 외에도 어딘가 있을 서울 난민들. 그들을 먹여 살릴 식량과 구호품. 외곽 지역에서 흘러들어오는 괴수들. 서울에 기웃거릴 사냥꾼들. 한강 북쪽에 자리 잡은 대형 괴수들과 시청사의 뱀. 납치해 인질로 잡은 몇몇 히어로들. 한 번 패배를 겪은 설화공주. 작전 실패에 따른 광검의 움직임. 한국에 있는 정령. 헬하운드 부대를 운용하며 드러난 화속성 괴수들의 비정상적 물량에 대한 추측. 큐브를 찾으러 올 선의철의 별동대. 천가을을 되살리고 재가되어 소멸한 큐브.

"아아악!"

침대 위에서 온 몸을 퍼덕였다. 왜 내가 이런 일들을 하나둘 따지면서 움직여야 한단 말인가.

"다 때려치우고 싶다...."

원작에서는 그저 주어진 전장 안에서 최선을 다하면 됐는데, 지금은 고려해야 할 변수가 너무 많다. 슬슬 나 혼자서 감당이 버겁다 싶을 정도로.

쿵쿵쿵!

"어?"

문이 격하게 두드려진다. 나는 마력을 튕겨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또각, 또각.

귓가에 익숙한 발소리가 들렸다. 예상대로 이 방에 들어온 사람은 천가을이었다.

"입었네요?"

가을은 고운 드레스를 입고 있다. 결혼식장의 신부를 연상케 하는 연하늘빛 드레스. 제작사는 천가을의 스킨 주제로 '가장무도회의 주인공'을 꺼내 들었다.

오페라의 유령 속 여주인공 크리스틴과 라울의 결혼을 축하하는 결혼식. 천가을은 그 결혼식의 주역이었다.

가을이 씩씩거리며 침대 머리맡에 다가왔다.

"사이즈."

"네?"

"사이즈가 어떻게 이렇게 딱 맞냐고."

가을의 얼굴은 회색빛으로 더욱 창백해져 있다. 심장의 코어에서 흘러나온 마력의 박동이 더욱더 빨라졌다.

마력이 혈액이라고 고려한다면, 가을은 지금 상당히 흥분해있다.

나는 머릿속에서 가을이 단번에 이해할 정답을 꺼냈다.

"그야 가을 씨 전용의 맞춤제작이니까?"

애초에 이 드레스의 주인은 천가을이다.

피닉스의 사제복이 피닉스에게 딱 맞는 것처럼.

다만, 천가을의 육체가 마스커레이드보다 훨씬 젊기에 약간의 조정은 필요했다. 가을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그, 그러면 직접 만지고 사이즈 재고 그랬단 거야?!"

"......예전에 마력 감응했잖아요? 그때 다 검사했는데."

친화율 검사. 몸 전체에 마력의 파장을 쏘아 보내는 만큼 자연히 신체의 치수도 파악하게 된다.

"그때보다 살짝 찌셨더라고요. 위에서부터 84-"

휙.

내 눈앞에 회백색의 거대한 기둥이 나타났다. 드레스 사이에서 튀어나온 그것에 나는 입을 닫았다.

"입 다물어."

"네."

나는 순순히 협박에 응했다. 안 그러면 저 흐물거리는 것들이 이 몸을 능욕할 것만 같았다.

"후우. 좋아."

가을은 살포시 침대의 머리맡에 앉았다. 나도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았다.

"이제 어쩔 거야? 제법 화려하게 저질렀잖아."

"그러게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사실 하나 더 저지를 계획이지만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가을은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너 진짜 대책 없다...."

가을이 한숨을 내쉰다. 나도 무언가 변명할 거리가 없었다.

삐빅.

스마트워치에 알람이 울렸다. 지화가 보낸 문자였다.

'포장이 됐나?'

나는 문자를 열었다. 문자에는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자료가 담겨 있었다.

"뭐에요? 흐음...."

가을이 내 옆으로 다가와 스크린을 확인했다.

"협회는 서울에 나타난 화염술사 이능력자에 대해 기존의 등급으로 분류하기 어렵다고 판단. 기준이 개정되기 전까지 대상을 A급 이상의 위험인물로 분류...."

"망했네요."

한국 자체 분류였지만, 협회에서 지정한 만큼 사실상 전 세계로 뿌려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행히 괴인형의 모습이고 영상이나 사진의 화질이 좋지 않아 푸른 불꽃만이 확인 가능했지만, 이미 그것만으로 내 특징은 전부 다 드러나 있었다.

가을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거 진짜 위험한 거 아니야?"

"최강 B급 요괴 전설이 이렇게 막을 내리고...."

"장난치지 말고."

"......뭐, 언젠가 드러날 게 처음부터 드러났다고 생각하죠."

설화공주가 온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각오한 일이다. 나름 숨긴다고 최대한 숨긴 건데, 운 나쁘게도 괴인형의 마력 패턴이 분석 당한 모양이다.

"좋아요. 어차피 인생이 계획대로 흘러가는 게 아니잖아요? 이왕 저지르는 거, 더 화려하게 터뜨리기로 하죠."

"그냥 사고치고 나중에 될 대로 뒷수습하겠다는 거지?"

찔린다. 팩트라고 수용하기에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가을이 한심한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너 지금 이 상태로 감당할 수 있겠어?"

"......어떻게든?"

파밧. 가을의 드레스 뒤에서 촉수가 튀어나왔다. 재빨리 몸을 뒤로 빼려고 했지만, 촉수는 그보다 더 빨리 내 손목을 붙잡았다.

"장난하는 거 아니야. S급 둘, 거기에 광검. 최악의 경우에는 정부에서 해외에 지원을 요청할 수 있어. 그때도 지금처럼 주먹구구식으로 해결하려고 할 거야?"

가을의 눈에 회색빛이 일렁거렸다.

"장기적인 틀을 짜둬야 할 것 아니야. 하다못해 수험생도 자기가 수능시험 보기 전까지 어떻게 공부할지 연간 계획을 세워. 나도 드라마 촬영 들어가면 전체 시놉에 맞춰서 연기를 어떻게 할지 생각을 해둔다고. 내가 지금 네 생각을 맞춰볼까?"

가을의 두 손이 내 볼을 붙잡았다. 시선이 맞았다.

"일단 터뜨리고 나면 어떻게든 되겠지. 그다음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자. 만약에 그때 가서도 또 다른 일이 터지면, 그걸 막는 데 집중하자. 틀려?"

"......그렇긴 하죠. 하지만 그래서 지금까지 큰 문제는 없었잖아요?"

내 반론에 가을이 내 볼을 손가락으로 잡고 앞뒤로 흔들었다.

"얘가 아직도. 물어보자. 만약에 원탁이 너를 세계 공적으로 지정하고 토벌하려고 들면 어쩔 거야? 12명 전부가 동시에 너를 죽이려고 달려들면."

"......죽을 각오로 싸우면 동귀어진?"

정령으로 각성한 이상, 본체를 꺼내 싸우면 12명 모두 물귀신처럼 저승으로 끌고 갈 수 있다. 대신 그 전투의 여파로 지구가 박살 나서 문제지.

가을은 그런 내 대답이 기가 막히는 건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하아. 잘 들어. 네게 지금 필요한 건 말이야."

가을은 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너를 도와줄 사람이야. 네 엉망진창인 계획을 그대로 따라갈 병정이 아니라, 같은 테이블 위에서 계획을 주고받아 줄 똑똑한 사람들."

"가을 씨랑 덕배 씨, 지화 씨가 있잖아요? 하늘성도 있고."

가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는 안 돼. 우리만으로는 부족해. 지금도 그렇잖아?"

가을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도 내가 이렇게 얘기해도, 너 지금 네 머릿속의 고민 나한테 안 털어놓잖아. 그나마 덕배한테는 조금씩 이야기하는 것 같아도 알맹이는 빼고 말하고."

"가을 씨. 그건-"

가을은 나를 끌어안았다. 드레스 너머로 서늘한 한기가 전해졌다.

"아마 나한테도 평생 털어놓지 않을 거야. 너는. 평생 그렇게 혼자 끙끙 앓고 살 거야? 그러니까...."

가을은 내 등을 토닥였다.

"언젠가 네 옆에서 너와 함께 있어 줄 사람이 나타날 거야. 그러니까 그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내가 옆에서 있어 줄게."

"가을 씨."

"...이미 신서울로 돌아가기는 글렀잖아? 이럴 운명인 거야."

가을의 드레스 위로 촉수가 넘실거렸다.

"사람 죽이는 것도 그냥 눈감아야 할 일도 있을 테고, 내 손으로 직접 사람을 죽여야 할 때도 있겠지. 그래도 할게. 물론 처음은 조금 힘들겠지만 언젠가 익숙해지겠지. 덕배나 지화가 그런 것처럼-"

"배우는요."

가을은 촉수를 움직여 머리의 가면을 떼어냈다. 가면이 가을의 얼굴에 씌워졌다.

"이미 네 결계를 나오면서부터 인간, 배우 천가을은 죽었어. 지금 여기 있는건 네 옆에서 평생을 지킬 괴인, 유령이야."

"...촉수가 아니고요?"

콩. 가을의 촉수가 내 정수리를 때렸다.

"장난칠 기운 있으면 당장이라도 어떻게 할지 고민을-"

"가을아."

나는 천가을을 안았다. 가을의 몸이 움찔거렸다.

"우리 그냥 이대로 도망쳐버릴까?"

모든 책임을 방폐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저 시간만 죽이며 인적이 없는 곳에 숨어 사는 삶.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보지 않고. 그냥 조용히 어디 산에 틀어박혀 사는 거야. 끝이 다가올 때까지."

최초로 정신을 차렸을 때, 마그마 속에서 영원히 잠겨버릴까 고민도 했었다.

처음 인천에 떨어지고 오늘까지의 시간이 과연 얼마나 지났을까. 수많은 사건이 있었지만, 고작 시간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다.

앞으로 이렇게 5년. 멸망의 날까지 5년을 보내야 한다.

버틸 수 있을까.

그때 까지 나는 나로 있을 수 있을까.

"나 하나쯤 도망쳐도, 누군가 세상을 구해주지 않을까?"

창문에 비친 나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퍽!

가을의 촉수가 내 정수리를 내려쳤다.

"정신 차려.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해?"

가을이 다시 촉수로 내 머리를 내려쳤다. 꼭 혼나는 것 같았다.

"...솔직히 나도 혹했지만, 그러면 안 되잖아. 안 그래?"

가을이 살짝 떨어지며 다시 내 볼을 잡았다.

"그건 네 '본심'이 아니잖아. 그치?"

읽혔다. 가을에게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둔 내 본심을 읽혀버리고 말았다.

"힘들어도 참아. 그러다가 혹시나 지치면 나한테 얘기해. 지금처럼 언제든...."

가을이 내 머리를 끌어안았다.

토닥토닥.

"내가 옆에 있어 줄 테니까."

울며 보채는 아이를 달래듯, 가을은 그렇게 나를 토닥였다.

해가 산 너머로 떨어지고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는다.

삐빅.

스마트워치가 울렸다. 덕배였다.

- 선물 포장 완료됐다. ...뭐야, 너희 그런 사이였냐? 좋은 시간 방해해서 미안하다. 전쟁통에 출산율 올라간다더니. 쯧.

덕배가 질렸다는 듯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었다. 가을과 나는 살포시 몸을 떨어뜨렸다.

"...죽일까요?"

"그러자."

옷매무새를 정돈한 나와 가을은 1층으로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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