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1부 4장 (22)
<오후 6시. 여의도 C호텔 라운지.>
- 서울 수복 작전은 실패하였습니다. 국민 여러분께 송구스럽습니다.
"손절 빠르네요. 2차전 준비하고 있었는데."
피닉스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영상 속 선의철은 고개를 숙인 채 들어 올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화는 슬그머니 손을 내리며 능력을 해제했다. 피닉스가 슬쩍 눈치를 줬다.
"아직 안 끝났어요. 저러고 나서는 '다 적을 기만하기 위한 술책이었습니다'라면서 야습을 걸 수 있다고요."
"죄송합니다...."
지화가 다시 손을 눈에 붙였다.
붉게 충혈된 악마 눈에는 피로가 한가득하였다.
다시 지화의 이능이 발동했다. 테이블 위에 서울 전역의 지도가 나타났다.
"과연. 이 정도까지 성장할 수 있나."
하늘성이 턱수염을 쓸며 감탄했다. 그가 알던 등대의 경지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이래서야 언제까지 등대라고 불러줄 수 없겠어."
"굳이 새 별명을 붙여줄 이유도 없지만요."
지도가 흔들렸다. 등대는 피눈물을 삼켰다. 피닉스가 머쓱한 듯 베일을 만지작거렸다.
"S급으로 올라가면 새 이명 붙여줄게요. 멋들어진 걸로."
"등대가 진화해봤자 뭐 다를 게 있나?"
아키택트의 딴죽에 피닉스는 등대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당연하죠. 김지화 씨 S급 되면 바로 이명 붙여줄 거예요. 그러니 분발하십시오. 그때 까지 부하 3호의 이명은 등대 고정입니다. 땅 땅 땅."
판사가 법봉을 때리듯 지화의 이명을 못 박은 피닉스는 전장으로 눈을 돌렸다. 이미 한강 남쪽은 인적이 끊긴 폐허처럼 고요했다.
싸우기 무서웠던 빌런들은 도망쳤고, 끝까지 싸운 이들은 여의도로 들어왔다. 도심을 쏘다니던 배회 괴수들은 히어로들에게 퇴치당하거나 지화가 지휘하는 말단 조직원들에게 사냥당했다.
무주공산.
청화단이 터를 잡은 여의도, 그리고 난민들이 모여든 동작 지하를 제외하면 서울은 말 그대로 '빈 도시'가 되었다.
"히어로들은 수원까지 후퇴했죠. 대통령은 1차 작전의 실패를 선언했어요. 아마 히어로들이 회복될 때까지 이 정도의 대대적인 공격은 없을 거예요."
"간간이 오는 놈들이 있겠어. 사냥꾼들도 있을 거고. 이제 어찌할 거냐?"
하늘성의 물음에 피닉스는 작은 스크린을 옮겼다. 그곳에는 뉴스에서 패배 원인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패널이 있었다.
- 그러니까 도 교수님 말씀은 서울 수복이 너무 성급했다. 그거 군요.
- 그렇습니다! 차원문 발생 이후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너무 안일하게 작전을 결행했습니다. 제가 이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최소한 서울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확인했어야 했어요.
영상 속 교수는 자료를 띄웠다. 그곳에는 육신의 절반이 푸르게 불타는 괴수가 있었다.
- 세계 어디에도 이런 헬하운드는 없어요. 가칭 헬하운드 좀비들을 지휘하는 상위종이 있다거나 하는 가설은 차치하고, 이걸 보세요.
화면 속 자료들이 변했다.
구로에서 운사의 탐식운 속에서도 형체를 잃지 않는 화염 거인.
강남에서 풍백, 우사의 합동기를 공중 발차기로 파괴한 흑염의 룡.
관악산 정상에서 설화공주와 대치 중인 창염의 불사조.
- 저는 이들의 등장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전 세계 화염술사가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폐허가 된 서울에서?
도 교수가 손에 든 종이를 두드렸다.
- 차원문에서 나온 악마종도 최초로 나온 화마룡이었어요. 이쯤 되면 누구나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불! 화염! 저는 이게 절대 우연이 아니라고 봅니다. 제가 예전에 쓴 논문 중에 '마력의 7 속성 설', 그 중 지금까지 극소수에 불과했던 화속성이 드디어 한국에서 터졌다....
- 도 교수님, 여기서 개인 학설을 주장하시면....
삑. 영상이 꺼졌다. 피닉스는 하늘성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생각해요? 하늘성 교수님?"
하늘성이 눈썹을 찌푸렸다.
"이 상황에서 굳이 내게 저걸 보여주는 이유가 궁금한데."
"청화단의 일원으로서 이야기하자는 거에요.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하늘성이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실내에서도 벗지 않은 중절모를 고쳐 쓰는 그의 행색은 어딘가 심적으로 불편해 보였다.
피닉스는 금방 그 이유는 눈치챘다.
"과연. 아직도 청화단에 들어오기를 꺼리는 건가요?"
"...그래."
하늘성이 자세를 고쳤다.
"강남에서 체포당할 뻔한 걸 도와줘서 고맙기는 하다. 아직 소개받지 않은 사령술사가 있는 건지는 몰라도, 헬하운드들을 부활시켜 전력으로 활용한 것은 감탄스러웠지. 설화공주를 압도하는 모습은 경악스럽기까지 했다. 허나...."
하늘성이 겨우 말을 이었다. 명백히 언급하기 꺼리는 기색이었다.
"광검과 선의철. 너는 지금 대한민국에서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될 두 명을 모두 적으로 돌려버렸어. 감당할 수 있나?"
"감당할 수 있으니 하는 거죠. 하늘성 자는 사이에 광검 목이라도 따올까요?"
"...저기."
지화가 조심스레 대화에 끼어들었다. 격화되려던 피닉스와 하늘성의 언쟁의 불씨가 사그라들었다.
"광검은 그렇다 쳐도, 당장 대통령이 수작을 걸어올 것 같습니다. 피닉스 님께서 히어로 중 일부를 살해하셨으니, 정부도 가만있지는 않을 겁니다."
지화의 말에 하늘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무조건 입을 막으러 전력을 투입할 것이다. 막말로 우리는 민간인 학살의 증인 아니냐? 소나무 부대의 실체를 까발리지 못하도록 살인멸구 하러 올 작자야. 그자는."
"입을 막는다라...."
피닉스가 베일을 꼬다가 의자에서 착 일어났다.
"그럼 이쪽에서 입을 막아버리기로 하죠. 아키택트!"
묵묵히 대화를 듣고 있던 아키택트가 손을 들었다. 그는 대답할 기력도 없었다.
"대리석으로 상자 하나만 만들어주세요. 넉넉하게 100L 정도 되도록."
아키택트가 손을 내리는 것으로 대답했다. 피닉스의 시선이 지화에게 닿았다.
"등대. 아까 명령했던 건 다 해 뒀나요?"
"예. 말씀하신 것도 찾았고, 그 외에 다른 것들도 하나도 남김없이 모으긴 했는데...."
등대가 질색했다. 하늘성도 그다지 마음이 편치는 않아 보였다.
짝. 피닉스가 손뼉을 쳤다.
"좋아요. 그럼 등대는 그걸 모두 여기에 들고 와요. 아키택트가 선물함을 만들면 거기에 다 집어넣고. 마무리랑 자물쇠 채우는 건 제가 할 테니."
"선물함...?"
하늘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피닉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여는 사람을 놀라게 할, 서프라이즈 프레젠트?"
<오후 6시 30분, 여의도 C 호텔 라운지>
아키택트가 분주하게 움직인다. 옆에는 그가 언제 쓰러져도 다시 일으켜 줄 청화단의 조직원들이 대기하고 있다.
"잠깐, 잠깐만 쉬자."
아키택트가 손을 들었다. 정교하게 짜 맞추어진 대리석 상자는 이제 상자를 덮을 뚜껑만 남았다.
"이게 필요하신 겁니까?"
조직원 한 명이 박카O 유리병을 하나 건넸다. 내용물은 박O스도 아니지만, 그 안에 든 물건은 시판되는 자양강장제 그 이상의 효과를 냈다.
아키택트는 그 물건을 보며 질색했다. 오늘까지 마신 저 병 개수만 따져도 상자를 다 채울 수준이었다.
"잠깐만. 나는 인간이야. 사람이라고. 아무리 블랙 기업이라고 해도 최소한 쉴 시간은 보장해야...."
"그분께서는 인간의 육체를 그 어떤 순간에도 최고의 컨디션으로 끌어올리는 포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효과를 보시고 있지 않습니까?"
괴수의 핵을 그대로 갈아 넣어 만든 음료. 특별한 공정 없이도 코어가 100% 들어간 체력회복제는 몸의 피로뿐만 아니라 심신의 활력도 불어넣어 주는 마법의 아이템이었다.
다만, 그 아이템을 얼마나 마셨는지 까먹을 정도로 아키택트는 쉬지 않고 마셔댔다.
- 코어만 무한히 공급해주면, 분명 죽어라 일할 거라고 했죠?
아키택트의 머릿속에 음흉한 미소의 보스가 떠올랐다. 사내 복지를 주장하는 그는 아키택트에게 말 그대로 '무한'한 마력을 공급하며 아키택트를 굴리고 또 굴렸다.
예산이 부족하면 공사판이 중단되어 쉬기라도 하는데, 예산은 화수분처럼 멈출 줄 모르고 쏟아졌다.
결국 남은 것은 휴식 없이 갈아 넣어지는 공돌이뿐.
"인간적으로 담배 타임은 줘야 하는 거 아니냐? 나 이 호텔 다시 복구한다고 심적으로 아주 힘들었다고."
아키택트가 투정을 부렸다.
지난 몇 년 동안 마포대교를 중심으로 벌어진 히어로들과 괴수들의 대치로 인해, 여의도는 대부분이 폐허가 되었다. 그나마 대형 건물들만이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었다.
- 여의도 중심에 본거지를 차리죠!
국회의사당에서 본거지를 옮기려던 청화단은 아키택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폐허가 된 호텔을 지하부터 꼭대기까지 복구해달라고.
<건축>. 마력만 있다면 설계부터 완공, 심지어는 복원까지 가능한 희대의 이능력.
아키택트는 호텔의 상태를 보고 견적을 냈다. 최소 A급 코어 10개는 있어야 한다고.
"그런데 어떻게 30분 만에 20개를 긁어모으는 건데!!"
소파에 누운 아키택트가 생선처럼 퍼덕였다. 굵은 수염이 턱을 뒤덮은 개량 한복 남자의 앙탈에 조직원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뭐? 잠깐 개성에 마실 갔다 와? 으아아악!!"
선의철이 작전 실패를 공표하자마자 곧바로 피닉스는 아키택트에게 호텔 복원을 의뢰했다.
정말로 그는 코어를 가져왔고, 아키택트는 영혼을 갈아 넣어 호텔의 원형을 복구해냈다. 쓸데없는 장인정신이 또 유감없이 발현됐다.
심신의 안정이 필요했다.
죽어가는 아키택트에게 조직원이 마법의 문구를 읊었다.
"그분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뭐!"
"선물함만 다 만들면 퇴근해도 좋-"
"으랏차!"
아키택트가 상자로 달려들었다.
조직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전기를 들었다.
"여기는 G12. 포장이 곧 완료될 것 같다."
- 여기는 G3. 선물 가져왔습, 우욱.
무전 너머에서 구토를 참으려는 소리가 들렸다. G12의 팀장은 제가 아키택트 관리 임무를 맡은 것에 크나큰 안도를 했다.
- 후으. 선물 모두 가져왔습니다. 안으로 들일까요?
"아니. 밖에서 포장한다. 선물함이 다 만들어지면 밖으로 옮기겠다."
- 옙, 우웨엑!
G12는 무전기를 껐다. 아키택트가 작업을 마칠 때까지는 잠시 시간이 걸릴 터.
또각, 또각.
로비 쪽에서 구두 굽 소리가 울렸다. G12는 들릴 리 없는 소리에 품속의 프라모델 권총을 만지작거리며 로비로 향했다.
"......와."
나선형 계단으로 여신이 내려왔다. 어깨를 훤히 드러낸 청백의 드레스. 머리에 장식처럼 달고 있는 가면이 그 정체를 짐작게 했다.
"팀장님. 왜 그러십니까?"
팀원 한 명이 슬쩍 다가와 로비를 확인했다. 그 또한 숨이 턱 막혔다.
영화제 속 레드카펫을 걷는 여배우가 떠올랐다. 아니, 당연히 상대는 여배우였다. 하지만 은회색의 눈과 생기 없는 피부는 어딘가 퇴폐미가 느껴졌다.
또각, 또각.
발목까지 가리는 드레스 사이로 흰 구두가 대리석 바닥을 눌렀다. 로비 전체에 구두 굽 소리만이 울리며, 여인은 라운지에 들어섰다.
"피닉스, 지금 어디 있어?"
반쯤 감긴 눈초리가 심상찮다. G12의 팀장은 그들의 대장에게서 들은 단장의 마지막 행적을 떠올렸다.
"하늘성님과 회의를 끝내고 펜트하우스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래?"
가을이 라운지를 쭉 훑고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딸칵 딸칵.
당연히 엘리베이터는 아직 작동하지 않았다.
"......."
성큼성큼 계단으로 걸어가는 발걸음에는 무언가 분노가 서려 있었다. 라운지에는 아키택트가 상자를 뚝딱거리는 소리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