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1부 4장 (21)
<오후 4시 55분, 안양 지휘본부.>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신진광이 탁자를 내리치며 소리쳤다. 하지만 곧 제 실수를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각하!"
- 됐네. 자네 심정도 이해해. 갑자기 내가 작전 실패를 선언했으니 당황스럽겠지. 현장 지휘자인 자네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대통령 혼자 결정을 내린 일방적인 선언이었다. 선의철 대통령은 현장의 지휘관인 신진광과 일말의 상의도 없이 작전의 실패를 말했다. 물론 신진광은 대통령에게 그런 상황에 대해 주고받을 위치가 아니었다. 하지만 신진광은 작전의 실패와 종료를 언론 보도를 통해 전달받았다.
선의철이 안경을 치켜들었다.
- 그러나 이보시게. 우리는 너무 많은 히어로를 잃었어. 그렇지 않나?
신진광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A급 히어로 둘, B급 히어로 여섯, 과 C급 히어로 열넷. 무려 22명이나 되는 히어로들이 목숨을 잃거나 MIA, 전투 중 행방불명 처리가 되었다. 확실히 사망한 12명을 제외하면, 나머지 행방불명 10명은 사실상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상처를 입거나 당장 휴식이 필요한 히어로의 수는 부지기수. 그중에는 전력의 핵심인 두 S급 이능력자, 화권과 설화공주도 있었다.
선의철이 침통한 심정으로 말을 이었다.
- 나는 이 이상 히어로들을 잃을 수 없네. 내 아집 때문에 말일세.
"각하! 말씀을 거두어 주십시오. 제 능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 아닐세. 자네는 충분히 역할을 해줬어. 히어로를 믿지 못하고 지휘 본부를 버리는 지휘관. 대한민국의 명예에 똥칠을 해버렸지. 내가 틀렸나?
"......."
신진광은 대답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설화공주는 적 빌런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신진광의 온갖 추함을 여실히 드러냈다. 부하들을 버리고 먼저 도망가는 지휘관. 책임을 져야 할 이가 먼저 저 살자고 도망친 행동에 많은 이들의 질타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 자네의 행동도 이해하네. 두려웠겠지. 하지만 자네는 그러면 안 되었어. 사람들을 모두 대피시키고 그 자리에서 죽었어야 했네. 그게 지휘관으로서 가진 책임감 아닌가.
"면목이, 없습니다."
신진광은 고개를 떨구었다.
- 그래. 이제 어쩔 텐가? 본인이 작전 실패를 발표한 시각 이후로 벌써 여론이 난리야. 무능한 지휘관이 지휘본부를 버리고 도망치는 바람에, 애꿎은 히어로들만 개고생했다고.
"모든 책임을 다 지겠습니다."
- 책임? 크크크.
선의철이 낮게 웃었다.
- 그건 자네가 그럴만한 사회적 위치에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일세. 괴수대책부 장관 자리가 그리 무거운 자리는 아니지 않나?
선의철이 차를 한잔 홀짝이며 입을 축였다.
- 그래도 마지막 임무를 수행할 기회를 주겠네.
"......!"
무슨 의미인지 신진광은 퍼뜩 알아차렸다. 제 목을 날리겠다는 의미였다.
- 모든 오욕, 자네가 떠안고 가게. 남해 어디 섬에 들어가서 살면 자네 얼굴 알아보는 이도 없을 거야. 내 자네 가족들에게는 섭섭치 않게 사례하지.
".....알겠습니다."
- 그럼 가시게.
딸칵. 선의철의 전화가 끊겼다. 신진광은 배신감에 치를 떨며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쾅!
철로 된 책상과 맞부딪힌 손바닥이 저렸지만, 그보다 마음이 더 아렸다.
"젠장, 젠장!"
초등학생이 지휘해도 승리할 것이라 모두가 장담한 작전이었다. 그런데 신진광은 아무런 힘도 못 쓰고 패전의 책임자가 되었다.
차라리 신진광이 모든 능력을 다해 지휘하였음에도 분패(憤敗)했다면 '졌지만 잘 싸웠다', '우리는 서울을 되찾을 가능성을 봤다'며 동정의 여론을 샀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모든 국민이 알고 있다. 신진광의 무리한 지휘와 그로 인한 히어로들과의 갈등. 이미 히어로 팬덤은 신진광을 무기징역을 넘어 사형수만도 못한 취급을 했다.
정체불명의 적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큼 일언반구도 없었다.
"......후우."
신진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옆에 있던 소나무 부대 히어로가 멸시하는 눈빛으로 그에게 문을 가리켰다.
끼이익.
문이 열린다. 임시로 만든 브리핑실에 대기하던 기자들이 미어캣처럼 고개를 들었다.
저벅. 저벅.
신진광은 회견대 앞으로 걸어갔다. 불과 10걸음도 되지 않는 그 짧은 걸음 동안, 신진광은 오감이 교차했다.
그가 명령하기 무섭게 부리나케 도망가던 기자들. 그들은 이미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에 기세가 등등했는지, 신진광을 물어뜯을 준비를 마쳤다.
터벅.
지친 신진광의 걸음이 회견대 앞에 멈췄다. 무언가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연 순간, 포토 플래시와 함께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장관님! 이번 작전의 실패 요인에 대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화권이 지병이 있었음을 파악하고 계셨습니까?! 이승형 히어로가 쓰러진 구체적인 이유는 뭔가요?!"
"사망한 히어로의 유족분들께는 어떤 말씀을 하실 겁니까?!"
온갖 질문을 가장한 질타가 쏟아진다. 기자들 또한 이번 작전의 흐름이 상당히 괴상하게 전개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데스크와 정부의 입김에 따라 신진광을 몰아세웠다.
마녀사냥. 이곳 회견장은 패장 신진광을 위한 화형대였다. 신진광은 제 다리에 푸른 불꽃이 튀어 오르는 듯한 환상에 눈을 껌뻑였다.
"저기, 그...."
신진광이 무언가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경호원으로 나온 히어로에게 눈치를 줬지만, 그는 그 눈짓을 무시하며 신진광을 외면했다.
아무런 제지가 없자, 기자들이 더욱 거칠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질문 중에서 유독 신진광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는 말이 귀에 박혔다.
"설화공주 석하랑이 성공적으로 적의 공격을 막아냈음에도 불구하고 지휘본부를 버리고 도망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울컥했다. 부대에 있었을 때 처럼 화를 버럭 내며 욕을 뱉을 뻔했다. 너희들도 함께 도망가지 않았느냐고. 하지만 저 뒤에 자리 잡은 카메라들은 신진광의 표정 하나하나를 생중계로 전국에 뿌리고 있었다.
신진광은 그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남은 역할은 앵무새처럼 답하는 꼭두각시밖에 남지 않았다.
"저 신진광은."
기자들이 잠잠해졌다.
"책임을 통감하고, 괴수대책부 장관의 자리에서 사임을-"
퍽.
어디선가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무언가가 날아가 신진광의 머리를 때렸다. 바닥에 툭 하고 떨어진 그것은 썩어 문드러지기 시작한 괴수의 사체였다.
퍽. 다시 괴수의 사체가 신진광에게 날아들었다. 신진광은 피하지 않고 그대로 가슴팍에 박히는 괴수의 사체를 받았다.
기자석 뒤에서 한 여인이 울분을 토하고 있었다. 기자가 터뜨린 플래시 빛에 여인의 약지에 걸린 약혼반지가 반짝였다.
"이 개새끼야! 네 병신같은 지휘 때문에 기성 씨가 죽었어! 그래놓고 고작 사임?!"
"끌어내!"
히어로들이 여인을 붙잡고 브리핑실에서 나갔다. 기자들은 그 여인이 강남에 투입되었던 히어로임을 상기했다.
"제가."
기자들의 고개가 신진광에게 돌아갔다.
"전적으로, 책임을 지겠습니다."
신진광은 그저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 * *
<오후 5시 30분, 여의도 C호텔 객실.>
"......아."
가을은 눈을 떴다. 몸을 포근히 감싸는 매트리스에 계속 눕고 싶었지만, 골반의 그 기묘한 감촉에 정신이 들 수밖에 없었다.
"아, 이, 진짜."
속으로는 온갖 쌍욕이 튀어나왔지만, 가을은 겨우 삼켰다. 피로 물들었던 옷은 누군가 벗겨둔 것인지, 가을의 몸에는 보송보송한 가운이 걸쳐져 있다.
문제는 그 가운의 뒷부분이 촉수가 있는 지점부터 길게 찢어져 있다는 것. 촉수로 뒤를 가리지 않으면 곧장 하반신의 뒤태가 고스란히 노출되는 모양새였다.
"이게 야겜도 아니고...."
가을이 촉수 한 가닥을 들어 올렸다. 차라리 여우 꼬리처럼 끝이 가늘다면 모를까, 촉수는 고양이의 꼬리처럼 양 끝부분을 제외하고 두께가 균일했다.
"손으로 잡히나?"
가을은 촉수를 감싸 쥐었다. 한 손으로는 엄지와 중지가 닿지 않을 정도의 둘레. 가을은 질색하며 촉수를 놓았다.
"그래도...."
가을은 정신을 촉수에 집중했다. 아홉 개의 촉수는 모두 가을의 의지대로 움직였다.
빠짝 서기도 하고, 물결처럼 흐느적거리기도 하고, 걸레를 짜듯 비틀리기도 했다. 가을은 조심스레 촉수로 벽에 진열된 와인잔의 목을 휘감았다.
촉수는 마치 인간의 손처럼 와인잔을 들어 올렸다. 뒤집어봐도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이걸 기뻐해야 하는 건지 슬퍼해야 하는 건지."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라면 운명에 순응하기로 하자. 가을은 두 손으로 뺨을 때려 정신을 차렸다.
"그래. 이건 꼬리야. 촉수꺼비처럼 등에 안 난 게 어디야."
가을은 거울 앞에 섰다. 촉수가 가장 존재감이 커서 그렇지, 다른 부분도 인간이었을 때와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피부는 희다 못해 창백했다. 붉은 기 하나 없이 온몸의 혈관에서 피가 빠져나갔으니, 혈색이란 게 존재할 리 없었다. 거기에 머리카락, 눈썹, 동공. 그 모든 부위가 은회색으로 변했다. 가을은 머리에 걸린 가면을 촉수로 떼어내 얼굴 위에 덮었다.
콧잔등 위를 가리는 아이 마스크. 가장무도회가 끝나고 무대에 남은 유령에게 남겨진 마지막 흔적.
가을은 가면 위에 손을 올리고 상념에 잠겼다.
쿵쿵쿵.
문밖에서 거친 노크 소리가 울렸다. 가을은 촉수를 가운 안쪽으로 밀어 넣고 옷매무새를 정돈해 문을 열었다.
"벨 누르는 거 예의인 것 몰라요?"
"호텔 와본 적이 있어야...크흠!"
덕배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가운 사이로 드러난 가을의 가슴이 제 존재감을 유감없이 뽐내고 있었다.
"......."
가을이 두 팔을 교차하며 앞을 가렸다. 촉수로 찢어진 가운의 뒤를 양쪽에서 잡아당기는 통에 앞을 미처 정돈하지 못했다. 가을은 샐쭉한 눈으로 덕배를 노려보다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여긴 어디고?
갑자기 웬 호텔?"
"피닉스가 기절한 너를 여기에 재웠다. 가운은 걔가 입혔고, 나는 갈아입으라는 옷을 전달해주러 왔다."
덕배가 손에 들린 옷을 건넸다. 이능력자로 각성하고 S급 괴수의 코어로 괴인이 된 가을은 옷에서 흐르는 마력을 한눈에 알아봤다.
"이 옷, 마력으로 짠 거네요?"
마력의 실이 아주 촘촘하게 엮여있다. 실에 마력을 묻힌 것이 아니라, 아예 마력이 머리카락보다 가늘게 한 땀 한 땀 엮여 옷이 되었다.
가을은 덕배에게서 옷을 받아들었다. 물론 손은 가슴을 가리고 있었기에, 슬쩍 튀어나온 촉수 두 가닥이 옷을 받아들었다.
"이런 건 또 어디서 구했대요?"
"...직접 만들던데."
가을의 뒤에서 튀어나온 꼬리를 본 덕배의 표정이 심상찮았다.
경악, 공포, 역겨움. 그중에서도 가장 뚜렷이 보이는 감정은 동정심, 안타까움이었다.
새액!
촉수 한 가닥이 채찍처럼 덕배의 눈앞을 스쳤다. 덕배는 불의의 일격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
"다음은 없어요. 조심해요."
가을이 경고하고는 뒤돌아 방 안으로 들어갔다. 덕배는 어안이 벙벙해져 헛웃음을 지었다.
"이젠 저거까지 나보다 강하다고?"
가을이 옷을 갈아입고 나오기까지 30분. 덕배는 아무 말 없이 굳게 닫힌 문과 눈 씨름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