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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63화 (63/1,497)

〈 63화 〉1부 4장 (20)

여의도.

불꽃이 출렁인다. 지화는 벌벌 떨면서도 능력을 해제하지 못했다.

"히, 히익!"

결계는 분명 적의 진입을 철저히 막고 있다. 철표를 위시한 소나무 부대는 결계 밖에서 열심히 결계를 두드리지만, 의장실 문 뿐만 아니라 벽과 천장-그리고 바닥 까지 창염의 결계가 펼쳐져 있었다.

"대장! 이거 분명 있는 거겠지?!"

"백 퍼!"

철표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결계를 두드린다. 강철의 주먹이 불꽃을 휘저으며 녹아흘러내리지만, 철표는 마약에라도 취한 듯 희열에 가득한 얼굴로 결계를 계속해서 때렸다.

"찾기만 하면 바로 출소라고, 시바!"

무엇을 찾는다는 건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짐작 가는 게 있다.

큐브.

피닉스가 본회의장의 괴수를 죽이고 발견했다는 정체불명의 마도구. 괴수를 만들어내고 부활시키는 그 물건을 찾으러 온 것이리라.

'여긴 없다고!'

미쳤다고 피닉스가 그런 물건을 이곳에 두고 갔겠는가. 당장이라도 밖에다 대고 '그런 거 여기 없다' 소리치고 싶지만, 그래 봐야 적들을 더 자극하는 결과가 나올 것이다.

그때. 지화의 눈에 구세주가 들어왔다.

"아!"

복도 멀리서 괴인의 모습을 한 피닉스가 의장실로 걸어온다. 이미 본회의장을 들렀다 온 듯 가을의 시체를 끌어안고 있다.

지화, 등대 괴인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천가을의 시체였던 것은 저와 같은 괴인이 되었다고.

"누구냐!"

철표가 뒤에서 나타난 피닉스와 천가을을 보며 광소했다. 결계와 똑같은 색으로 온몸이 타오르는 자. 분명히 이 결계와 관련이 있거나, 결계를 친 장본인일 것이다.

"물건을 내놔!!"

철표가 달려든다. 부하들도 눈이 뒤집혀 피닉스에게 달려든다.

파슥.

피닉스는 가을을 안아 든 오른손을 살짝 주먹 쥐었다가 펼쳤다.

퍼엉.

달려들던 소나무 부대 이능력자들의 얼굴이 폭발했다.

안면이 푸르게 타오르며 이능력자들은 복도에 고꾸라졌다.

저벅, 저벅.

순식간에 얼굴이 불타버린 시체를 여러 구 만들어버린 피닉스가 유유히 결계 안으로 들어왔다. 지화는 능력을 해제하고 재빨리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왜 천가을을 결계 밖으로 나가도록 내버려 뒀지?]

머릿속에 파고든 의사에는 분명한 노기(怒氣)가 서려 있었다. 지화는 괜히 장황한 설명을 하다가 상대를 더 열 받게 하느니, 결론부터 이야기하기로 했다.

"천가을님이 이능력자로 각성하시고, 저를 공격한 다음 결계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뭐?]

천가을을 소파에 앉혀놓은 피닉스의 몸이 불탔다. 괴인형에서 인간형으로의 전환. 피닉스는 지화의 말을 곱씹었다.

"천가을이 이능력자로 각성했다고요? 마스커레이드.... 아, 그래서."

피닉스가 가을의 머리에 달린 가면을 손으로 쓸었다.

상대의 외형과 이능을 복사하는 마스커레이드의 이능은 '가면'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실현된다. 괴인화하며 그 형태가 변질하기는 했지만, 인간의 괴인화가 아닌 이능력자의 괴인화라면 아귀가 맞아떨어졌다.

마스커레이드의 이능이 촉수꺼비를 덮었다. 가면은 촉수꺼비의 마력을 모두 먹어치웠고, 촉수꺼비는 마지막 제 존재의 증명으로 가을에게 아홉 가닥의 꼬리 같은 촉수를 남겼다.

"가면 괴인...? 촉수 괴인...? 어느 쪽이든 나쁠 건 없으니까."

피닉스가 자문자답하며 결론을 내린듯한 모습에, 지화는 제 책임을 조금이라도 덜고자 조금 전까지 있었던 상황을 빠르게 요약했다.

"그, 동작에서 히어로들이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소나무 부대 같았는데 가을 씨는 그걸 막아야 한다고 했었고, 제가 그걸 막다가 실랑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각성했어요?"

"예."

"세상에. 타이밍이 뭐 그래?"

피닉스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피닉스의 일어서라는 손짓에 지화는 쭈뼛쭈뼛 몸을 일으켰다.

"지화 씨 그래도 B급이잖아요? 근데 방금 각성한 이능력자한테 진 거예요?"

"......각성의 여파로 나가떨어졌습니다. 초기 각성이 A급이었습니다."

"와우."

피닉스가 놀랐다.

"각성해도 C급 정도일 줄 알았는데."

원작보다 훨씬 이르게 각성했는데 각성 한계의 최고치에 가깝게 최초 각성을 했을 줄이야. 매일같이 코어를 가지고 놀며 가까이하다가 결국에는 안고 자기까지 하더니, 그 노력의 결과가 빛을 발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결국 천가을은 지화를 제치고 결계를 벗어났다. 지화의 전투 능력으로는 A급 이능력자를 막을 수 없었다.

"역시 다 천가을 잘못이네요. 으휴."

명령을 내렸던 만큼 지화는 열심히 가을을 막았을 것이다. 지화가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저, 피닉스님."

"왜요?"

"현재 전황에 대해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명령하신 대로 제가 지휘를 이어받다 보니 상황이 아무래도 조금...."

"어, 진짜로 했어요?"

피닉스의 말에 지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명령을 전달했길래?"

"각 팀마다 파발 전하듯 명령을 전달했습니다. 구로 인근의 팀원 중 한 명을 다른 외곽 팀으로 보내는 식으로...."

"좋아요. 어디 한 번 보죠."

지화가 다시 이능력을 사용해 전장의 지도를 밝힌다. 피닉스는 빠르게 서울 전역을 훑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설화공주는 화염구 못 막고 있고, 강남은 패배. 헬하운드들 싹다 죽었네요. 구로는 애들 진작에 다 튀었고. 동작은.... 어, 전투 중이네요?"

"예?"

"아아. 잠시 마이크."

피닉스가 스마트워치를 두드려 스크린을 띄웠다. 화상이 연결된 상대는 아키택트와 하늘성. 강남에서 지하로 탈출한 둘은 현재 동작에서 한창 전투 중이었다.

아키택트가 응답했다.

- 연락 안 되다가 또 갑자기 뭐야!

"미안해요. 그런데 제가 바쁠 때 연락한 거 아니에요?"

- 알면 좀 어떻게 해주던가!

"푸흐흐. 당연히 어떻게 해 주려고 연락했죠. 어떻게 해주면 좋겠어요?"

- 여기 히어로인데 미친 연놈들이 있어! 어떻게든 해 봐!

어쩌면 좋아?!

하늘성이 마구잡이로 날뛰는 히어로와 주먹을 주고받았다. 이미 몇몇 히어로들은 둘에게 제압당해 재갈이 물려 있었는데, 전신에 타박상이 가득했다. 코어웨폰으로 히어로들을 제압해 구속하고 있는 이들은 모두 구로와 강남에서 올라온 청화단의 조직원들이었다.

피닉스는 지화를 바라봤다. 무언가 찔리는 구석이 있는 것처럼 지화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가, 가시기 전에 저보고 명령하라고 하셔서.... 아키택트에게 연락해서 동작의 살인귀들을 막으려다 보니.... 가을 씨 문제도 있고 아키택트와의 거래도 있고-"

"잘했어요.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해줬으면 좋겠네요, 김지화 씨."

"가, 감사합니다. 크흡."

지화의 악마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전장의 지도가 순간 흐려지자 지화가 황급히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피닉스는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렸다.

"근데 걔들 뭐예요?"

- 몰라! 동작 난민들 이놈들한테만 거의 100명 죽었다!

아키택트의 성난 고함에 피닉스가 혀를 찼다.

아무리 지하의 왕이라고 하더라도, 아키택트를 믿지 못하거나 불안함에 지하를 빠져나온 이들도 존재했을 것이다. 나온 의도는 다르지만 가을이 결계를 나왔던 것처럼, 그들도 자신의 행동에 대한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다.

조용히 숨어있었다면 살아남았을 테니까.

피닉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키택트? 우리 거래는...."

- 알아! 이 쪽에서 잘못한 거지. 다리를 박살 내서라도 못 나가게 막았아여 했는데. ...됐어! 나 안 믿고 토굴에서 도망친 지들 책임이지. 대신 하나 부탁 좀 해도 되냐?

아키택트의 눈에 분노가 일렁거렸다.

- 저 히어로 새끼들, 딱 죽기 직전까지만 패버리게 해주라. 암만 그래도 몇 년은 같이 땅 파면서 살던 사람들인데, 괴수 새끼들도 아니고 같은 사람한테-것도 히어로 새끼들에게 억울하게 죽었으니 넋이라도 달래줘야 않겠냐.

"목."

피닉스가 목을 가리켰다.

"목에 소나무 문장 있는 애들 있죠? 확인 좀 해봐요. 있어요?"

- 문장? 소나무?

아키택트는 제압된 이들의 목을 하나하나 까뒤집으며 확인했다. 전의를 상실한 그들에게는 모두 소나무 부대의 증명이기도 한 소나무 문장이 있었다.

- 이것들 싹 다 있는데?

카아앙!!

하늘성이 붉은 머리 사내를 짓눌러 제압했다. 그 또한 목에 소나무 문장이 있었다.

- 사, 살려줘!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고!

- 라고 한다.

하늘성이 근육질의 몸으로 씩씩거렸다. 전투의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듯 금방이라도 붉은 머리 사내를 밟아 죽일 기세였다.

"좋아요. 이쪽도 마침 선물 보낼 거 있었는데 잘됐네요. 아키택트!"

피닉스가 손으로 제 목을 그었다.

"썰어서 죽이든 때려죽이든 괜찮아요. 그놈들은. 목만. 목만 잘라서 고이 모아둬요. 자를 때 꼭 문장이 있는 부분이 머리에 붙어있어야 해요. 알겠죠?"

- ...Pardon?

아키택트가 당황했다. 피닉스는 의자 손잡이를 두드리다가 다시 설명을 이었다.

"그러니까 죽여도 된다고요. Kill them All. OK?"

- 아니, 언제는 히어로 죽이지 말라더니?

붉은 머리 남자, 적송의 구속을 마친 하늘성이 이능력을 해제하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 썩어도 준치라고 이것들, 정부 소속 히어로다. 뒷감당할 수 있겠어?

피닉스는 귀찮다는 듯 쇄골을 두드렸다.

"그거야 일반 히어로들 얘기잖아요. 소나무 부대 걔들, 놓아줘 봐야 다시 사람 죽이고 다닐 쓰레기들이에요. 그러니까 원하는 대로 어디 안 보이는 곳 가서 처리해요. 알겠죠?"

- 크큭! 알겠습니다, 보스!

아키택트가 능청스레 한쪽 무릎을 꿇으며 인사했다. 하늘성도 중절모를 제 가슴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그의 뒤에는 그를 따라 도망쳐 살아남은 부하들이 있었다.

- 지금까지는 고맙다. 어쨌든, 히어로들에게서 도망치게 해줬으니. 하지만 이제 어쩔 거냐? 아직 S급 둘이 쌩쌩한데.

"뭔 소리예요? 둘 다 지금 박살 내고 오는 길인데."

피닉스가 퉁명스럽게 이죽였다. 멀뚱거리며 의아해하는 하늘성에게 피닉스는 기사 하나를 전송했다.

[속보] 화권 이승형 각혈, 구로서 후송

"됐죠?"

- 또 무슨 수를.... 아니, 됐다. 헬하운드처럼 또 기상천외한 방법을 썼을 테니. 그럼 설화공주는?

"설화공주요? 푸흐흐. 지금쯤...."

피닉스가 입맛을 다시며 웃었다.

"열심히 폭탄 굴러가는 거 막고 있을걸요?"

* * *

거대한 불꽃이 굴러간다.

화마룡이 산길을 부수고 내려가듯, 푸른 화염의 구체는 멈출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점점 속도를 높였다.

"이익!"

하랑은 이를 악물고 마력을 쥐어짜 냈다. 화염구의 경로에 두꺼운 얼음벽을 세웠다. 벽의 두께는 거진 3 미터. 얼음의 성벽은 그 어떤 공성도 불허할 것처럼 견고했다.

순간, 하랑의 머리에 조금 전 들은 목소리가 떠올랐다.

화려하지만, 실속이 없다.

와장창!

화염구는 얼음벽을 그대로 때려 부수고 내리막길을 계속 굴렀다. 하랑의 나비 날개가 다시 펄럭이며 화염구를 뒤쫓았다.

"본부! 응답해요! 당장!"

마력 반응이 불안정하지만, 간신히 본부와 연락이 닿았다. 연결된 스크린에는 신진광이 아닌, 협회에서 파견된 오퍼레이터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요?!"

- 다, 다 대피했습니다!

이미 그들 또한 화염구의 파괴력을 눈치챘다. 신진광은 그대로 본부의 인원들에게 대피를 명령했고, 사람들은 부리나케 종합운동장을 벗어났다.

하랑과 연락이 닿은 오퍼레이터는 대피하지 않았다. 자의로.

"뭐해요! 당장 피해요!"

하랑이 다그치지만 남자는 고개를 단호히 가로저었다.

- 그럴 수는 없습니다! 새롭게 나타난 이능력자의 마력 패턴, 그리고 이번 전투의 데이터! 아직 본부로 전송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남자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 혹시 살아있는 히어로들이 이곳으로 연락을 하면 누군가는 받아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야 이 빙시야! 글타고 대피를 안 하면 우야라고!"

하랑이 빽 소리를 질렀다. 남자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 설화공주님이!

그는 결연한 얼굴로 소리쳤다.

- 설화공주님께서, 막아주십시오!

왈칵. 하랑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상대는 말로 해서 알아들을 기세가 아니다. 그렇다면 저 멍청한 이를 구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하랑이, 막아야 했다.

화염구의 경로에 다시 얼음벽 십 수 개가 세워졌다.

와장창창!

하지만 화염구는 얼음벽들을 하나둘 깨부수며 여전히 멈출 줄 몰랐다. 얼음벽의 한기에 조금은 화기를 잃어 크기가 줄어들었지만, 그 마력 전체를 깎아내기에는 하랑의 마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정체불명의 화염술사와 대결하면서 너무 많은 마력을 허비했다. 제힘으로 화염구를 막을 수 없음에 하랑은 분통을 터뜨렸다.

"아아악!!"

열이 오른다. 짜증이 난다. 고작 커다란 불덩어리를 막지 못하는 자신에게 너무나도 화가 난다.

콰과과광!

어느덧 화염구가 수목원을 돌파했다. 지금까지 굴러가는 속도를 봐선 지휘본부에 닿기까지 불과 수십 초.

그때. 오퍼레이터가 소리쳤다.

- 설화공주님!

오퍼레이터는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는 설화공주에게 엄지를 치켜올렸다.

- 데이터 보존 완료! 전송까지, 성공입니다!

제 임무를 완수해냈다는 그 웃음은 헤프기까지 보였다. 하지만 하랑은 확신했다. 오퍼레이터의 이능력 수준으로는 남은 시간 안에 화염구의 폭발 반경에서 벗어날 수 없다.

피가 들끓는다. 무력감에 치가 떨린다.

순간, 조금 전의 전투에서 화염술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미지 안에 마력의 정수를.

"!!"

하랑의 뇌리에 거대한 이미지가 스쳤다.

심해 속에서 얼음의 날개를 펼치는 거대한 나비.

파스스.

얼음으로 된 나비 날개가 눈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하랑은 그대로 마력을 등 뒤로 분사해 화염구를 앞질렀다.

끼이이익---!

얼음길로 미끄러지던 하랑이 마찰을 일으켜 멈춰 섰다.

- 설화공주님?! 위험합니다!

하랑이 착지한 곳은 화염구가 굴러가는 경로. 산길이 끝나고 화마룡이 건물을 부수며 내려왔던 아스팔트 도로의 시작점.

설화공주는 그 화염구와 정면으로 마주섰다.

고오오오오!

하랑의 머리칼이 흩날린다. 동시에 등 뒤로 막대한 눈보라가 휘몰아치며 거인의 형상을 갖추었다.

몸통과 두 팔. 하반신은커녕 머리조차 없는 서리 거인이 몸을 낮추며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화염구를 막는데 다른 신체 부위는 필요 없었다.

화염구가 거인의 손에 들어왔다.

끼기기긱!!

서리 거인이 밀려난다. 화염구는 서리 거인의 손을 박살 내고 손목마저 부수면서도 회전을 멈추지 않았다.

"푸흣!"

마력이 역류했다. 하랑은 순간적으로 피가 섞인 기침을 토해냈다.

그러나 그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서리 거인에게로 보내는 마력의 흐름을 놓지 않았다.

- 소, 속도가 느려지고 있어요!

오퍼레이터의 보고는 이미 들리지 않았다. 하랑은 그저 남은 마력을 모두 쥐어짜내 거인의 형태를 유지했다.

광검은 말했다. 그 어떤 순간이라도 실력의 3할은 숨기고 있으라고. 하지만 하랑은 그 가르침에 처음으로 반기를 들었다. 전력을 낸다. 한 번도 고갈되지 않았던 마력 탱크를 전부 비워버리듯 마력을 뽑아낸다.

화염술사는 말했다. 화려하지만 실속은 없다고. 하랑은 그 지적을 반쯤 수용했다. 화려한 이미지를 당장 고칠 수 없다면, 그 화려함 속에 내실을 갖추면 될 일이다.

"내는!"

서리 거인의 팔뚝이 사라졌다.

"내 앞에서 사람 죽는 거!"

서리 거인이 아예 드러눕듯 어깨를 내려 화염구를 몸으로 막았다.

우우웅!

하랑의 하얀 동공이 투명해졌다.

"절대로, 못 본다!!!!"

푸스스!

서리 거인의 몸이 무너진다. 동시에 하랑이 두 팔을 앞으로 뻗었다.

하랑의 두 손 앞에 거대한 나비의 날개가 펼쳐졌다.

화염구 전체를 감싸안는 얼음의 날개. 그 두께는 비록 종이처럼 얇았지만, 촘촘히 엮인 얼음 결정들은 성벽처럼 굳건했다.

조금 전까지의 얼음들과는 분명 달랐다.

콰앙!

화염구가 얼음 날개를 때렸다. 하지만 날개는 부서지지 않고 원형을 유지하며 화염구를 갉아먹었다.

푸스스스.

화염구가 떨렸다. 이미 불안정해질 대로 불안정해진 화염구의 최외곽에 금이 생겼고,

콰--------앙!!

성대하게 폭발했다. 거대한 마력 폭발이 하랑을 날개 째로 짓눌렸다.

까가가강!!

날개에서 인분이 날리듯 눈가루가 떨어진다. 금방이라도 유리가 산산조각이 나듯 부서질 것 같이 위태로웠지만, 하랑은 끝까지 의식을 붙들어 매고 방패에 마력을 때려 넣었다.

"아 아 아 아 악! !"

마지막 한 방울까지 비틀어 짜낸 마력이 날개로 흘러간다. 폭발의 여파를 뒤집힌 우산처럼 받아내던 날개의 위쪽이 기울여, 화염이 하늘로 치솟는다.

고오오오오!

폭발하는 불기둥은 하늘로 승천하듯 용솟음 쳤다.

"하하, 하."

하랑은 겨우 안심하며 그대로 쓰러졌다. 동시에 얼음의 나비 날개가 눈꽃처럼 사그라들었다.

콰----------------------

안양 일대를 날려버릴 뻔한 화염구는 그렇게 공중에서 폭발했다. 하랑은 시야를 푸르게 뒤덮는 불빛에 웃으며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몸은 걸레짝이 되었지만, 당장은 막아냈다는 것에 만족했다.

하랑의 의식이 깜깜해졌다.

* * *

"망했군."

선의철은 TV 속 푸른 불기둥을 보며 씁쓸히 웃었다.

주인공이 돼야 했을 이승형은 각혈, 조연으로 붙여둔 석하랑은 패배. 그리고 지휘본부는 궤멸했다.

"하지만 그딴 것 보다...."

여의도에 투입되었던 소나무 부대 히어로들이 모두 죽었다. 장소는 확정할 수 없지만 그들의 마지막 신호는 여의도, 국회의사당이었다.

"큐브. 역시 국회의사당에 있었어."

선의철은 왼쪽 눈의 상처를 검지로 쓸었다.

애초에 이번 작전의 성공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저 여의도에 숨어든 그 괴수가 어디에 있는지, 그것을 확실히 파악하는 것으로 작전은 성공했다. 불에 탄 국회의사당에 아직 그 괴수가 큐브를 가지고 숨어있다.

모두가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묻겠지만, 결국 선의철은 큐브의 소재를 확정했다. 남은 것은 그 누구도 모르게 그것을 찾으러 가는 일.

"내 승리다."

잠시 뒤, 선의철은 대국민 성명을 발표했다.

서울 수복 작전은 실패.

성급했던 이번 작전의 실패를 초석으로 삼아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 고개 숙이며 국민들에게 다짐했다.

그 누구도, 선의철의 눈꼬리가 살짝 휘어져 있던 것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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