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1부 4장 (19)
안양.
신진광은 초조해졌다. 속속들이 들어오는 전황 보고는 그를 더욱 가슴 졸이게 했다.
구로.
함정에 빠졌던 히어로들의 패퇴.
괴수에게 납치당하고 아직 연락 없는 몇몇 히어로들.
운사 박라온, 마력 탈진으로 기절.
화권 이승형, 갑작스러운 각혈로 의식불명.
거기에 별동대로 떨어져 나간 소나무 부대와는 연락이 두절 됐다.
심지어.
"......! <로빈> 유이신 신호 두절! ...사망입니다!"
"뭐, 라고?!"
최초의 히어로 사망 소식. 히어로들이 하나둘 납치당하는 순간부터 각오는 했지만, 소나무 부대 소속의 B급 히어로가 갑자기 죽었다는 것에 신진광은 큰 충격을 받았다.
하필이면 대통령의 직속 부하나 다름없는 이가 죽다니. 신진광은 불안감에 빠져 다그쳤다.
"어디서?! 죽기 전의 영상은?!"
"모르겠습니다! 이미 한참 전부터 연락을 끊었습니다! 구로에서 탈출한 이후부터 데이터가 전송되고 있지 않습니다!"
쾅!
신진광은 탁자를 거세게 내리쳤다.
"젠장!"
소나무 부대가 별동대로 움직이기 시작한 이후부터, 신진광은 그들에 대해 어떤 명령도 내리지 못했다.
대통령의 비밀 임무 수행이라는 이유. 무슨 임무인지 선의철에게 알리기는커녕, 기밀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본부와의 연락도 일방적으로 끊어버렸다.
'건방진 범죄자 출신들이...!'
소나무 부대 대원들은 신진광을 꿔다놓은 보릿자루보다 못한 취급을 했다. 아니, 소나무 부대뿐만 아니라 이미 작전 중간부터 모든 히어로들이 신진광의 명령을 무시했다.
전파가 잘 닿지 않는 척 통신을 끊어버리거나, 제 생각과 다르다며 명령에 정면으로 반박했다. 군에서는 상상도 못 할 명령 불복종의 향연에 신진광은 정신이 아뜩해졌다.
'이게 무슨 지휘관이냐! 어릿광대지!'
이승형이라는 주인공을 만들기 위한 허울뿐인 자리.
신진광은 앉아서 지휘봉만 움직이면 된다는 말에 흔쾌히 작전의 책임자 자리를 수용했고, 괴수대책부의 장관이 되었다.
한직에서 벗어나 장관의 자리에 오르고 중앙 정계에 데뷔해 보낼 명예로운 나날을 기약하며.
그리고 모두가 그의 승전-작전의 성공을 확신하고 있었다. 청문회에서도 보여준 그의 능력 부족에 대해서도 '화권이 가는데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하는 농담이 오갈 정도로.
"으아아악!!"
그러나 악몽과도 같은 저 푸른 불꽃은 신진광의 장밋빛 미래를 비웃듯이 태워버렸다.
헬하운드를 좀비처럼 부리며 히어로들을 습격하더니, 유령처럼 관악산 정상에서 설화공주를 기습했다. 구로, 강남, 관악산 세 방향에서 히어로들은 그 푸른 불꽃 위에서 농락당했다.
이대로 가면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신진광은 강남으로 눈을 돌렸다.
강남.
히어로들이 헬하운드 좀비들의 포위망을 돌파하고 마무리 작업에 이르렀다. 연로한 히어로들의 얼굴은 그사이에 몇 년 더 늙은 것처럼 피로가 가득했다.
가장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나마 성과를 낸 그룹. 그 누구도 희생되지 않았고, A급으로 분류되어 현상금만 20억에 달하는 빌런 선무당과 그 일당을 체포했다.
좌익은 무너졌지만, 우익은 아직 쓸만했다.
이제 문제는 그 중앙, 관악산 정상에서 정체불명의 이능력자와 전투를 벌이는 S급 히어로. 설화공주.
"전력 분석 시뮬레이터는! 어떻게 됐나?!"
"분석 중입니다! 앞으로 10초!"
얼음과 불이 노래하듯 서로 맞부딪힌다. 푸른 불꽃의 매가 거인의 목을 물어뜯고, 서리 거인은 크게 몸을 움직여 매를 쫓는다.
지직, 지직.
마력이 부딪히는 여파로 대기가 불안정해져 중계 영상도 선명치 않다. 하지만 히어로들의 전투에 대해 까막눈인 신진광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열세. 설화공주는 적 빌런에게 농락당하고 있다. S급 히어로가 고작 손 하나에 모든 공격이 틀어막히고 있었다.
삐빅.
"시뮬레이션 완료! 예상 승률 조회 중...!"
스크린에 결과가 나타났다.
"판정 불가...!"
잠시 숨을 멈췄던 오퍼레이터가 신진광의 눈치를 받고 재빨리 오류의 원인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를 찾아냈다.
"해당 마력 패턴 없음! 적의 마력 패턴이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어있지 않습니다!"
"뭐라고?!"
오퍼레이터들이 침묵했다. 마력 패턴이 등록되어있지 않다는 것은 단 한 가지의 경우를 의미했다.
미등록자.
신진광은 열이 뻗쳐서 지휘봉으로 가장 가까이 있는 오퍼레이터의 의자 등받이를 내리쳤다.
"다시 검색해! 그럴 리가 없잖아!"
"장관님...!"
"미등록자 S급이라니! 있을 수 없어!"
오퍼레이터는 본인조차 믿기 힘든 진실을 겨우 입 밖으로 토해냈다.
"...상대는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는 신규 이능력자입니다!"
신진광 또한 말문이 막혔다.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튀어나온 빌런은 그 마력도 마력이거니와, 이전까지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 없는 존재였다.
히어로마다 고유의 마력 패턴이 있어 다른 누군가가 변장하는 것도 불가능한데, 갑자기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능력자가 튀어나와 설화공주를 상대로 농락하듯 우세를 점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스크린 속의 설화공주는 분명히 1:1 대결에서 압도적으로 지고 있었다.
서리 거인이 크게 주먹을 내지르지만, 화염의 매는 그 주먹을 그대로 뚫고 거인의 몸을 다 녹여버렸다.
적은 느긋했고, 설화공주는 초조했다.
"패턴! 패턴 저장해! 그거라도 건져야 한다!"
신진광의 외침에 오퍼레이터들이 분주히 손을 움직였다.
이제까지 서울에서 힘을 숨기다 나타난 S급(추정) 빌런. 저자를 변명거리로 내세워야 했다.
정체불명의 적에게 비록 초전은 패배했지만, 그 적에 대한 정보는 얻을 수 있었다고. 이미 작전은 거의 실패로 돌아가 모가지가 분명했으나 최소한 명예라도 건사해야 했다.
오퍼레이터들이 급히 마력 패턴을 분석한다. 안 그래도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절댓값이 부족한 화염술사 이능력자라, 고유한 마력의 패턴에 대해 분석하는데 시간이 더 걸릴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필요했다. 신진광이 다시 소리쳤다.
"설화공주에게 연락을 넣어! 시간을 끌라고! 마력 패턴을 얻을 때까지 싸우라고 해!"
"예!"
설화공주와 적 빌런의 대치가 잠시 소강상태에 빠져들었다. 신진광의 다그침에 오퍼레이터는 수도 없이 설화공주를 호출했다.
'어디서 온 누구란 말인가...!'
이미 밖에있는 기자들은 온갖 속보를 써내려고 화상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한국에 갑자기 나타난 S급 빌런의 정체에 대한 추측은 기본이고, 심지어 조심스럽게 설화공주의 패배를 예상하는 이들도 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기자들도 다 쫓아냈어야 했는데. 괜히 승전에 대한 설레발을 쳐버렸다.
삑. 그때, 어딘가 심기를 거스르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자, 장관님!"
"이번엔 뭔데?!"
오퍼레이터가 눈을 잠시 깜빡이다가 스크린의 상황을 그대로 전달했다.
"반응 소실! 적이 사라졌습니다!"
오퍼레이터의 말대로, 관악산 정상에서 S급 추정 빌런의 반응이 사라졌다. 동시에 설화공주의 마력 반응이 심각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삑.
설화공주에게서 연락이 왔다.
- 조심하세요! 적의 기술이 본부를 향해 굴러갑니다!
"무슨 이상한 소리를...."
뭐가 굴러가? 신진광이 의아해하던 찰나, 스크린에 능선의 영상이 비쳤다.
고고고고!
어지간한 전차만큼 거대한 화염구.
푸른 불꽃을 일렁이며 굴러오는 그것은 화마룡이 날뛰었던 그 경로를 그대로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신진광은 생각했다.
그냥 단순히 굴러오는 것이라면 어딘가 다른 경로로 샐 가능성도 있겠지만, 화마룡은 마지막에 이승형을 뒤쫓아 안양 종합운동장에 들어왔었다.
즉, 저 화염구는 구르고 굴러 지휘본부에 도달할 것이다.
와장창창!
설화공주가 경로에 얼음벽을 만들어 속도를 줄여보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화염구는 제 갈 길을 방해하지 말라는 듯 얼음벽들을 부수고 더욱더 빠르게 회전했다.
"폭발 시 피해 예상 중! ...! 종합운동장 전체를 날리고도 그 여파가 남습니다!"
오퍼레이터들이 비명을 질렀다. 이미 적은 지휘본부를 향해 공격을 감행했다.
설화공주는 여전히 화염구를 막으려 안간힘을 쓰지만, 화염구를 막아내지 못하고 있다.
구로의 A 팀은 아직도 지휘본부로 복귀하지 못했고, 강남의 B팀은 강남에서 헬하운드 좀비들을 마무리하고 있다.
사실상, 저 화염구를 막을 전력은 없었다.
신진광이 지휘봉을 꺾었다.
"퇴각! 모두 본부를 버리고 도망친다! 움직여!"
갑작스러운 명령에 오퍼레이터들이 당황하는 사이, 신진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휘실을 빠져나가 남쪽으로 달렸다.
"으, 으아아악!!"
지휘관이 먼저 꽁무니를 빼는 행태에 다른 이들도 모두 도망치기 시작했다. 오퍼레이터, D급 히어로, 의무부대, 기자, 협회 관계자 등 너나 할 것 없이 신진광을 따라 부리나케 달렸다.
모두가 떠나려는 지휘실. 한 오퍼레이터가 책상에 앉아 키보드를 빠르게 두드렸다.
"뭐해요, 선배?!"
막 도망치려던 후배가 그를 보고 깜짝 놀란다. 선배 오퍼레이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작업에 집중하며 대답했다.
"이대로 도망치면 이번 전장의 모든 자료가 훼손되어버려. 저 빌런이나 신규 A급, 둘의 마력 패턴을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도 못 하고 이대로 도망칠 수 없어."
"그러다 죽는다고요!"
선배는 후배를 향해 턱으로 스크린을 가리켰다.
- 제 발 멈 추 라 고 ! ! !
그곳에는 발악하듯 얼음벽을 세워나가며 화염구를 막으려는 히어로가 있었다.
"아직 히어로가 포기를 안 했는데, 우리가 먼저 도망쳐서야 되겠냐."
남자는 그대로 다시 시선을 스크린으로 돌렸다. 후배는 눈물을 머금고 뒤돌아서고는,
"미안해요!"
지휘실을 나가버렸다.
남자는 씁쓸하게 웃으며 더욱더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 * *
강남.
많은 히어로들이 다치고 마력이 고갈되었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은 히어로들로 팀이 구성되어서 그런지, 다들 수 시간 동안 계속된 연전(連戰)은 신체에 큰 피로를 남겼다.
푸욱.
우사가 마지막 남은 헬하운드 좀비의 몸에 지팡이를 꽂았다. 지팡이 끝에서 방출된 마력이 폭발하며 헬하운드 좀비의 육체를 파괴했다.
"영감님, 반응 더 있어요?"
"...없다. 그게 끝이다."
풍백은 풍성한 흰 수염을 쓸어내렸다. 찢어진 이마에서 흘러내린 붉은 피가 수염을 붉게 물들였다. 풍백은 바람을 작게 일으켜 수염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다들 괜찮소?"
히어로들이 저마다 무기를 들며 답했다. A급인 풍백조차도 상처를 입을 정도의 난전이었었던 만큼, 다른 히어로들의 상태도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과연 더 이상 전투를 할 수 있을까. 우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강남은커녕 아직 여의도에도 진입하지 못했다.
"안 되겠습니다. 지휘본부에 일시 후퇴를 요청해야겠습니다."
"강남에서 쉬는 게 아니고?"
다른 히어로의 말에 우사는 씁쓸히 웃었다.
"빌런들이 도망갔지 않습니까. 혹시 쉬다가 빌런들이 이상한 곳에서 튀어나와 공격할 수 있습니다. 납치당할 수 있어요."
"조심해야지, 끌끌. 괴수들한테 납치당해서야 원."
"영감님."
우사가 낮게 풍백을 제지했다. 하지만 풍백의 말은 비꼬는 의미보다 동료를 잃었다는 슬픔과, 그 결과로 책임감과 죄책감을 가질 그들의 공동 제자에 대한 안타까움이 컸다. 우사 또한 그걸 잘 알기에 더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우사가 목을 가다듬고 스마트워치를 두드렸다.
"...여기는 우사. 본부, 응답하라."
지직, 지직.
"응?"
본부와의 연락이 닿지 않는다. 우사가 스마트워치를 툭툭 노크하듯 두드리며 다시 본부를 호출했다.
"우사가 급히 신진광 지휘관님을 찾습니다. 본부, 응답하라."
"아무래도 아직 마력이 불안정한 모양이야."
풍백 또한 먹통이 된 스마트워치에 혀를 찼다. 좋든 싫든 그들은 현 상황에 대해 보고하고 지휘관의 명령을 따라야 했다.
우사가 계속 스마트워치와 씨름을 하는 사이, 풍백이 저벅저벅 걸어가 체포된 여자의 앞에 섰다. 산발의 여자는 침을 흘리며 웃고 있었다.
"자네, 선무당이라 했던가?"
"그래! 으히히! 이제 서울은 불바다가 될 거다! 모두가 죽고 원혼이 떠돌며 괴수가 될 생지옥이 펼쳐질게야! 티히! 히히히! 다 죽어버려라! 지옥불반도 망해라! 꺄하하하!"
선무당은 두 눈에 핏발이 서서 저주를 퍼부었다. 히어로들은 저 귀신 들린 여자가 그들의 최고 성과라는 것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A급 빌런, 흑염룡은 입가에 피를 머금은 채 쓰러져 있었다.
"자결을 하다니. 망할 놈."
풍백이 흑염룡을 보며 혀를 찼다. 단신으로 풍백과 우사의 합동기를 박살 낸 괴물 같은 전력의 화염 술사. 소나무 부대에 잡혀가기 전에 협회에서 먼저 관리에 들어가면 큰 인재로 성장할 법했다.
"개같이 굴러도 이승이 저승보다 나은 법이거늘...."
그러나 그는 이제 불귀의 객이 되었다. 어느새 정신을 차렸던 흑염룡은 전황이 히어로들에게 유리해지자, 그는 신께 용서를 구한다고 말하고는 혀를 깨물어 자진했다. 풍백은 원통한 듯 부릅뜬 흑염룡의 눈꺼풀을 닫아주었다.
결국 B팀이 얻은 성과라고는 선무당 1명과 휘하 부하들 수십 명뿐. 서울 전체를 수복하겠다고 야심 차게 나선 것 치고는 조금 초라한 성적이었다.
삐빅.
드디어 본부와 연락이 닿았다. 우사는 스크린을 띄우며 목을 가다듬었다.
"여기는 우사. 본부 응답...?"
- 젠장! 지휘관이 도망치면 어쩌냐라고?! 개소리 집어쳐! 당장 살아야 할 것 아냐!
신진광이 달리고 있다. 격하게 흔들리는 화상에 비친 배경은 그가 지휘본부를 벗어났음을 짐작케 했다.
"어떻게 된 일-"
- 우사? 우사든 누구든 당장 가서 저 불덩어리 막아!
신진광이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그의 뒤로는 헐레벌떡 달리고 있는 수많은 이들이 있었다. 사실상 지휘본부에 남아있던 대부분의 인원. 우사가 당황하는 사이, 새로운 화상이 스크린 옆에 떠올랐다.
"이건 또 뭐야?"
스크린 속에는 푸른 화염 덩어리가 능선을 타고 빠르게 안양의 지휘본부로 굴러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