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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58화 (58/1,497)

〈 58화 〉1부 4장 (15)

"막아야 해요!"

가을이 일어나 소리쳤다.

"지화 씨! 어떻게 연락 안 돼요? 누구든 저걸 막으라고 연락 해요!"

"...단장님과는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마력간의 충돌이 너무 심해요."

피닉스와 설화공주는 더욱 화려하게 공방을 주고 받고 있다. 피닉스가 오른손에서 만든 부나방들이 얼음꽃의 꽃잎에 달려들어 깨부수고 있다.

S급 두 명의 마력이 부딪히는 바람에 통신이 제대로 닿지 않는다

설화공주가 워낙 마력을 펑펑 써대고 피닉스도 그에 맞추어 마력을 쓰다보니, 이미 관악산 정상은 차원문 발생 때보다 마력의 흐름이 더 불안정해졌다. 스마트워치를 통한 연락은 전혀 닿지 않았다.

"그, 그러면 덕배 씨는요? 아까 히어로 분들에게서 도망쳤잖아요?"

- ...이쪽도 마력을 다 썼다.

스크린에 나온 덕배는 이미 바위 피부가 해제되어 초췌한 몰골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의 가슴에 박힌 정령석은 마력이 텅 비어 있었다.

- 애초에 난 C급 수준이다. 나로는 못 막아.

"지화 씨! 청화단 조직원들 동원하면.... 큭!"

가을이 고개를 떨구었다. 청화단에서 전투 가능한 인원은 지극히 한정되어있다. 일반 조직원들도 대부분 D급 이거나 이능력없는 일반인이다.

잠깐은 막을 수 있어도, 곧장 살해당할 것이다.

"...그래도 저들은 아키택트가 지키던 자들이 아닙니다. 상태 봐서는 그냥 역사에 숨어있던 난민들이에요. 아키택트와의 계약은-"

"지금 사람이 죽어가는데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에요?!"

가을이 지화의 멱살을 잡았다. 지화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착각하시면 안 됩니다, 가을 씨. 청화단의 현재 지상 목표는 서울을 점령하러 온 히어로들의 퇴치...."

퍽!

가을의 주먹이 지화의 하관을 때렸다. 지화의 목이 반쯤 돌아갔다.

"제정신이야, 당신?! 사람이 어떻게 저런 걸 두고 가만히 있으려고 해?! 됐어! 나라도 가겠어!"

"아무 힘없는 당신이 무슨 힘으로 가겠다는겁니까?"

가을이 지화의 멱살을 잡고 흔들다 밀쳤다. 지화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힘이 없으면 저걸 그대로 보고만 있어?! 사람들 보고 도망치라고 하든 피닉스에게 연락을 하든 할 수 있는 거라도 해야하잖아!!"

가을이 씩씩거리며 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지화가 튕기듯 몸을 일으켜 입구를 막았다.

"비켜!"

"...저는 괴인입니다. 천가을 씨. 피닉스 님의 명령을 최우선적으로 수행해야할 그 분의 눈. 잊으셨습니까?"

지화의 악마눈 속 동공이 푸르게 불타올랐다.

"피닉스 님께서는 제게 목숨걸고 당신을 지키라 말씀하셨습니다. 결계 밖으로 나가실 수 없습니다."

"비키라고!"

가을이 지화를 어떻게든 밀어 문고리를 잡았다. 겨우 문을 살짝 열었지만 그 앞을 막는 지화의 몸은 석상처럼 꿈쩍도 않았다.

"못 갑니다!"

"비켜요!"

가을이 무릎을 들어 지화의 사타구니를 찍었다. 지화의 악마눈이 순간적으로 흔들렸지만, 곧 평정을 되찾았다.

"저는, 피닉스 님의, 명령을...!"

입술까지 깨물며 문 앞에서 버틴다. 가을은 일단 씩씩거리며 물러섰다 주변을 훑었다. 다행히 반대편에는 창문이 있다.

스슥!

지화가 막 창문을 열고 뛰쳐나가려는 가을의 뒤에 섰다.

"이거 놔!"

지화의 두 손이 가을의 양쪽 팔뚝을 잡았다. 가을은 몸부림을 치며 다리라도 움직였지만, 지화도 이능력자-괴인이었다.

아무리 약한 이능력자도 일반인보다는 신체능력이 훨씬 강했다.

"하아, 하아."

가을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축 늘어졌다. 지화는 여전히 가을의 팔을 잡아 놓아주지 않았다.

"......."

가을의 고개가 푹 떨어졌다. 이렇게 잡혀있는 와중에도 사람들은 죽어 나갈 것이다.

피닉스는 말했다. 힘이 있다면 괴수와 빌런에게 습격당할 일도 없을 거라고.

스크린에는 계속해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과연 저들이 나와 다른게 무엇이 있단 말인가.

서울에 왔음에도 운이 좋아서 괴수들에게서 살아남았고, 확실하지도 않은 제 미래 덕분에 피닉스의 관심을 받아 이렇게 살아있었다.

피닉스는 말했다. 자신이 가을을 지켜줄 힘이 되어주겠다고.

하지만 이 며칠 사이 옆에서 지켜본 피닉스는 '천가을'만을 지켜줄 사람이지, 무고하게 학살당하는 사람들을 그냥 도와줄 자가 아니다. 천가을의 경우처럼 무언가 이유가 있어야만 살려줄 것이다.

그 누구도 저들을 지켜줄 사람이 없었다. 가을은 지금 여기서 자신을 지켜주는 피닉스의 결계가 고맙기도하고 야속하기도 했다.

피닉스는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고 있으라고.

굳이 괴인으로 변한 상태에서 이곳에 들렸다. 그는 그만큼 천가을의 안위에 대해 신경을 쓰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이 결계를 벗어난다면, 그건 피닉스를 크게 배신하는 행위일 것이다.

그럼에도.

'힘이 있다면....'

지키고 싶은 것들이 있다. 배우로서, 딸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여기서 포기하면 영원히 잃어버릴 것만 같은 무언가를, 지키고 싶었다.

천가을은 눈물을 삼키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까 이거-"

- 굳이 가야해?

필름이 붙은 반투명한 유리창에 얼굴이 비쳤다. 유리창 속 가을은 지화가 아닌 쇠사슬에 팔뚝이 묶여있었다.

거적데기조차 없는 나체. 전신에 가득한 상처와 멍. 전신을 구속하는 족쇄와 말뚝.

마치 피닉스가 말했던, 천가을이 겪었을 지도 모르는 미래의 모습.

- 피닉스의 말을 따르고 여기에 숨어. 모든 일이 끝날 때 까지 눈 닫고 귀 닫고 숨는 거야.

유리창 너머에서 속삭이는 가을의 목소리는 달콤했다. 피닉스가 호언장담한 무적의 결계. 이 안에 있는 한 가을은 S 대학에서의 경험처럼 또 죽음의 공포를 느낄 일이 없었다.

최소한 '천가을'은 안전했다.

유리창 너머의 천가을이 비웃는다.

- 이능력도 없는 여자가 뭘 할 수 있겠어? 학살자들 앞에서 연기라도 할 거야? 몸이라도 팔 거야? 무슨 배짱으로 그렇게 나서는 거야? 피닉스가 너를 믿어준다고 해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그만큼 사랑해 줄 것 같아?

그렇지 않다. 굳이 따지자면 가을을 사랑하는 이 보다 싫어하도 증오하는 이들이 더 많을 것이다.

발연기로 먹었던 악플, 연예인으로 감수했어야 했던 오욕, 이승형의 상대역으로 받았던 온갖 시기와 질투.

어쩌면 저기서 살해당하는 이들 중에는 모니터 뒤에 숨어 가을의 비수를 꽂은 이도 있을 지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사람 구하겠다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해!!"

가을이 악을 지르며 소리쳤다. 그야말로 영혼 깊은 곳에서 토해낸 울림.

- ...그래?

유리창 너머의 천가을은 웃고 있었다.

- ...그래.

유리창 속 천가을을 옥죄던 쇠사슬이 끊어졌다. 유리창에 비친 제 눈동자는 회색빛으로 일렁이기 시작했다.

- 그거면 됐지. 안 그래?

창문 너머의 천가을이 두 손을 제 얼굴 앞에 두고 X자로 겹쳤다. 이마부터 쓸어내리듯 두 손이 천천히 내려가고, 그 너머에서 흑백의 가면이 보였다.

- 새로운 무대. 새로운 관객. 새로운 장르(Genre).

가을의 몸에서 회색의 마력이 솟구친다. 지화는 그 엄청난 마력의 흐름에 저도 모르게 물러섰다.

콰앙!

"으악?!"

가을에게서 튀어나온 마력의 흐름에 지화는 문까지 튕겨져나갔다.

쓱.

가을이 손을 들어 얼굴을 쓸었다. 이질적인 감각이 제 얼굴 위를 덮었다.

유리창에 비친 가을은 흑백의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 그럼 컷 들어갈 준비 됐어, 천 배우?

"당연하지."

가을이 손으로 마스크를 내렸다. 두 눈은 회색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난 언제든 준비되어있어."

마스커레이드가, 창문을 뛰쳐나갔다.

* * *

선의철은 집무실에서 홀로 음악을 듣고 있었다.

구 시대의 유물인 LP판을 집무실에 두고 듣는 휴식시간.

소리를 없앤 TV에는 서울 수복 작전에 대해 이야기하는 채널들로 가득했다.

♩♬♪♪

집무실을 채우는 음악소리. 그가 사랑하는 클래식 중에서도 18번으로 좋아하는 슈베르트의 가곡.

마왕.

띠링.

스마트워치에 알람이 울린다. 집중을 방해받은 선의철이 한껏 인상을 찌푸리며 문자를 확인했다.

- 여기는 철표. 의사당 건물에서 사람을 발견. 천가을로 추정됩니다.

"천가을?"

기억을 더듬는다. 이승형이 죽어라 목을 메던 여배우. 장례식까지 치러 이미 죽은 자. 그런 여자가 국회의사당에서 나왔다.

생각은 잠시.

"그럼."

선의철의 이어지는 말은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사살해."

선의철은 느긋한 손놀림으로 허브티가 담긴 잔을 들었다.

***

이능력자는 각성 시, 본능적으로 제힘을 어떻게 사용할지 깨닫게 된다.

인간의 오감을 초월한 '마력'에 대한 감응. 체내에 쌓여있던 마력이 폭발하듯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에 고양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 각성의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광검처럼 최초의 경지가 D급이었다가 S급까지 오른 자가 있다면, 하늘성 같이 처음 경지가 A급으로 각성해 평생을 A급에 머무는 자도 있었다.

천가을은 단지 각성의 여파만으로 김지화를 날려 보냈다. 방심이라고 하기에는 힘든, 지화가 감당할 수 없는 마력의 파장이었다.

본디 최초 각성의 경지가 C급이었어야 할 가을의 각성 한계는, A급을 넘어서 이미 본인이 가진 재능의 끝자락에 닿아있었다.

피닉스.

비록 속성은 다르지만, 세계 그 누구와 비교해도 정순한 마력을 가진 자, 정령.

일반인이었던 가을은 피닉스와 일주일을 함께 보내며, 그 마력의 영향을 무의식적으로 받게 되었다. 단지 근처에서 숨 쉬는 것만으로도 정순한 마력을 뿜어내는 정령의 옆에서, 천가을의 몸에는 피닉스로부터 받은 마력이 쌓이게 되었다.

유일하게 남은 것은 정신의 각성.

자신의 위기 속에서 각성했던 천가을은 타인의 위기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고, 결국 각성했다.

A급 이능력자. 환속성 88% 친화율의 환영술사.

그 마력 패턴은 곧장 서울 전역을 흔들었다.

* * *

"새로운 마력 패턴 반응! 이능력자! ...S급? 아, 아닙니다! A급입니다!"

오퍼레이터가 착각을 바로잡았다. 여의도에서 새롭게 나타난 이능력자의 반응.

최초 각성만으로 마력 스캔에 검출된 신규 이능력자의 마력의 농도는 명실상부한 A급이었다.

"누구야, 대체!"

"데이터베이스와 대조하겠습니다!"

히어로로 등록되어있지 않으니, 남은 것은 빌런이리라. 지금까지 정체를 숨기고 있던 빌런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서울에 숨어있던 난민이 괴수의 습격을 받고 각성이라도 한 걸까.

잠시 뒤.

스크린에 검색 결과가 나왔다. 신진광은 결과를 보고 지휘봉을 꽉 쥐었다.

해당 사항 없음.

"신규 각성자라고?!"

본부가 뒤집혔다. 브리핑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이 술렁거린다.

베테랑 오퍼레이터가 순간 착각할 정도의 A급. 최초 각성으로 S급에 이름을 올린 설화공주 이후로, 대한민국 이능력자 중 초기 각성으로는 최고 경지의 각성자였다.

최우선 확보 대상.

빌런이라는 잘못된 길로 빠지기 전에 협회에서 찾아야 할 유망주.

서울에는 아직 인재가 있다. 그렇다면 지금 현 작전 상황에서 그를 구해야 하는 걸까.

신진광이 고민에 빠졌다.

두 S급 히어로 중 한 명은 전력에서 이탈했고, 다른 한 명은 정체불명의 빌런에게 발이 묶였다. 구로의 히어로들은 패퇴했고, 강남의 히어로들은 헬하운드와 아직도 대치하고 있다.

실적, 없음. 오히려 히어로들이 납치당하는 굴욕만 남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신진광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인근에 있는 사람 누구 있어?!"

"소나무 부대 대원들이 있습니다!"

신진광의 손이 멈췄다. 하필이면 별동대로 제 임무를 수행하러 갔던 소나무 부대가 근처에 있었다.

자신조차 모르는 대통령의 밀명을 수행하러 간 자들.

신진광은 그 밀명이 무엇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에게는 밀명을 수행하는 소나무 부대를 막을 권한도 힘도 없었다.

"......일단 마력 반응 계속 체크해! A팀이 안양에 들어오면 투입 가능한 히어로들을 꾸린다!"

A팀이 제발 빨리 본부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신진광은 초조하게 시간을 보냈다.

제발 소나무 부대가 저 A급 이능력자를 '간첩'으로 규정하는 일이 없기를, 자신의 실적을 위해 간절히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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