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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57화 (57/1,497)

〈 57화 〉1부 4장 (14)

"...!"

첫 인사는 가볍게. 피닉스는 마력을 모아 만든 화염구를 시간차로 쏘아보냈다. 석하랑은 곧장 얼음의 벽을 펼쳐 화염구의 경로를 틀어막았다.

콰앙! 콰아앙!

화염구가 폭발하며 얼음의 방패를 부쉈다. 파괴된 얼음 방패의 조각이 흩날리지만, 그 뒤에 숨어있는 석하랑에게는 아무런 데미지도 없었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지!"

석하랑이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1초 남짓한 짧은 시간에 허공에 수놓아진 얼음창이 쇠뇌처럼 피닉스를 덮쳤다. 피닉스는 자리에서 피하지 않고 손가락을 까닥였다.

펄럭-

피닉스의 등뒤로 반투명한 푸른 깃털이 펼쳐졌다. 석하랑은 그 깃털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이게! 마력 많다고 자랑해?!"

피닉스는 날개를 앞으로 접어 방패로 세웠다. 얼음창들이 날개의 보호막을 찔렀다.

파바박!

얼음창은 푸른 깃털을 반쯤 뚫고 돌파력을 잃었다. 블꽃의 날개는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얼음창이 꽂혔고. 피닉스는 날개를 태워버리는 것으로 얼음창을 전부 부숴버렸다.

"제법 하는데?"

[.......]

피닉스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석하랑은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태연함을 가장했다.

눈앞의 상대는 분명한 강자. 석하랑의 경지보다 훨씬 위의 세계에 있는 자였다.

"누구야? 원탁이지? 그러니까 정체를 숨기는 거지?"

세계 최고의 강자들. 그들 중 누군가가 외형을 바꾸는 이능력의 도움을 받아 저런 모습을 취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목적이라면 역시 한국에 대한 견제.'

새로운 S급의 등장과 화마룡을 일격에 물리치는 위업은 원탁들도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치? 내 말이 맞지?"

[......바보 같은 추리군.]

독수리 투구 속에서 불길이 흔들렸다. 석하랑은 그게 꼭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아 기분이 언짢아졌다.

"뭐야? 말할 수 있잖아? 왜 말을 안 해?"

[내가 누군지 알고 싶나?]

피닉스가 두 팔을 펼쳤다. 동시에 등 뒤로 공작이 깃털을 뽐내 듯, 거대한 불꽃의 날개가 피닉스의 등뒤로 펼쳐졌다.

"......흥!"

하랑도 두 손을 좌우로 뻗으며 마력을 방출했다. 대기 중의 수분이 하랑의 마력에 반응해 얼어붙었다.

"피에리스!"

하랑의 선언과 함께 얼음 덩어리들이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흰빛과 함께 얼음들이 한기를 뿜어내는 나비처럼 변했다.

수십, 수백. 하랑의 등 뒤에 날갯짓하는 얼음 나비들은 눈가루를 뿌리며 지시를 기다렸다.

"네가 누구든지 확실한 게 하나 있지!"

하랑이 오른손을 들었다. 손에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듯한 얼음의 지휘봉이 쥐어져 있었다.

"히어로의 앞길을 가로막는 자! 악당이라면 내게 체포되고 히어로라면 나를 도와라!"

[빙접(氷蝶) 피에리스. 설화공주를 대표하는 기술이지. 빙결 계의 이능을 극한까지 다뤄 세계 그 누구도 따라 하지 못하는 고유의 기술.]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피닉스의 검은 갑주 속 푸른 불꽃이 관절 사이에서 분출되었다. 주변에 화염을 흩뿌린 피닉스가 손을 들어 석하랑을 도발했다.

[화려하지만 알맹이가 없지. 안 그런가?]

"이게!!"

석하랑은 손을 거칠게 내렸다. 신호를 받은 얼음 나비들이 눈가루를 뿌리며 피닉스에게 날아들었다.

[속도도 느려, 파괴력도 낮아. 나비가 닿은 곳을 얼려버리는 기술이지. 피하면 그만이야.]

피닉스는 날개를 움직이며 유유히 나비 사이로 빠져나갔다. 인어가 바닷속에서 헤엄치듯, 얼음 나비들을 피해 다니는 피닉스를 향해 하랑은 직접 나비를 조종했다.

"말이 많아!"

나비는 빠르게 피닉스의 뒤를 쫓았다. 관성을 무시한 수직 궤도를 그리며 얼음 나비들은 피닉스의 경로를 가로막았다.

쩌적, 쩌저적!

흰 연기와 함께 얼어붙는 소리가 들렸다. 석하랑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나비들을 사방에 재배치했다.

[닿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지.]

피닉스 주변, 아주 작은 불꽃이 얼음 나비를 틀어막아 결정이 되어 굳었다. 석하랑은 아무런 피해도 없이 공격을 막아낸 피닉스를 보며 이를 갈았다.

처음 접촉한 대상을 얼어붙게 만드는 얼음 나비, 피에리스. 피닉스는 주변에 아주 작은 불씨를 퍼트리는 것만으로 석하랑의 시그니쳐 기술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이게 진짜...!"

석하랑이 왼손으로 손날을 세워 수평으로 그었다.

파사삭!

피닉스를 360도 전방위에서 에워싸던 얼음 나비들이 피닉스를 향해 돌진했다. 수백 마리 얼음 나비들이 교차로 달려드는 공격에는 빈틈이 없었다.

[또 하나. 소모되는 마력은 많지만, 나비마다 들어가는 마력은 아주 적지. 그래서.]

피닉스가 두 손을 합장하듯 모았다. 피닉스를 중심으로 거대한 푸른 화염이 사방으로 솟구쳤다.

콰앙!!

"꺄악!"

폭발의 여파로 얼음길에서 발을 헛디딘 석하랑이 그대로 땅으로 떨어졌다.

"으윽!"

손으로 재빨리 얼음길을 만들어보려 하지만 이미 몸은 지상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결국 석하랑은 가까워지는 땅에 전신에 마력을 둘러 충격을 완화하려 했다.

덥썩.

"...?"

제 몸이 땅에 떨어지지 않자, 석하랑은 의아함에 고개를 들었다.

[위험하게. 쯧.]

"......?!?!"

어느새 이곳까지 날아온 건지, 피닉스는 석하랑을 공주님 마냥 안아 들고 있었다.

[강력한 폭발력을 가진 적을 상대하면 쉽게 부서지지, 지금처럼. 반성해라.]

피닉스는 석하랑을 멀리 집어던졌다. 석하랑은 재빨리 낙법을 취하고 땅에 두 발을 딛고 섰다.

"니, 니 미친나!"

석하랑의 얼굴이 홍시처럼 벌겋게 익었다.

제 이능력이 통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분노.

시그니쳐 스킬이나 다름없는 기술이 맥없이 파훼 당하고 약점을 지적당하는 능욕.

적에게 한 번 구해졌다는 굴욕감.

그리고 외간 남자에게 거리낌 없이 안겼다는 수치심.

온갖 감정이 뒤섞인 석하랑은 저도 모르게 막말을 했다가 입을 헙 하고 닫았다.

[......쿡.]

웃었다. 분명히 웃었다. 석하랑은 분노가 턱 밑까지 차올랐다가 겨우 화를 삭이고 교양있게 말했다.

"이봐요! 싸움이 장난이에요?"

[이능력 제대로 못 써서 교정해준 거다. 뼈에 새겨들어라. 석하랑 학생.]

"와, 내 진짜 빡돌게 만드네. 어디서 훈장질이야!"

석하랑이 빽 소리를 지르며 얼음창을 쏘았다. 피닉스는 슬쩍 고개를 꺾어 얼음창을 피했다.

[정직해. 급소를 노리는 공격이면 한 발이 아니라 여러 개를 쏴야지.]

"와. 아재 진짜 사람 열 받게 하네. 아재가 내 스승이라도 돼나? 왜 남의 기술 가지고 훈수질이야?!"

[......알지. 잘 알지.]

피닉스가 낮게 웃었다. 왼손을 등 뒤로 돌리고 오른손을 들어 이리 오라는 듯 까딱거리는 모습에 석하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럼 어디 칠 수 있으면 쳐봐라. 반쪽짜리 빙결술사는 한 손으로도 상대 가능하니.]

"닌 오늘 내 손에 뒤졌다!"

석하랑이 허공에 수십의 얼음창을 만들어냈다. 피닉스는 제 자리에 서서 오른손에 푸른 불꽃을 피워올렸다.

"뒤져라아아!"

[쯧.]

얼음과 불꽃이 관악산 능선에서 화려하게 부딪혔다.

***

가을은 초조함에 손톱을 물어뜯었다.

"괜찮을까요?"

피닉스는 괴인이 되어 S급을 상대하러 갔다. 본인은 괜찮다고 말했지만, 아직 피닉스의 힘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가을은 잘 알지 못했다. S급 괴수 촉수꺼비를 죽였다고해도 너무 쉽게 죽였기에, 오히려 더 실감이 나지 않았다.

"괜찮으실 겁니다."

지화가 잠시 손을 내렸다. 눈이 아픈지 몇차례 눈을 껌뻑거렸다.

"서울에서 그 분을 이길 자는 없습니다. 마음 놓으십시오."

"어떻게 확신해요?"

지화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능력자들은 상대 마력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저희들 용어로 '견적을 낸다'고 표현하는데, 피닉스 님은 제가 감히 견적을 낼 수가 없어요."

지화가 두 팔을 양 옆으로 펼쳤다.

"이능력자가 두 손이 닿는 거리를 감지 가능한 마력량이라도 생각한다면, 그 분은 정말 망망대해 같은 마력을 지니신 분입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도...."

지화가 다시 한 쪽 눈을 손으로 가렸다. 악마눈은 미니 피닉스의 도움을 받아 관악산 정상의 모습을 중계했다.

파스슥!

하늘에 거대한 얼음꽃이 피었다. 눈의 결정을 이어붙인 듯한 장미꽃.

꽃잎 위에 있던 백발의 여인이 손을 움직였다. 동시에 얼음꽃이 땅을 향해 떨어졌다.

"설화공주 석하랑!"

가을이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설화공주는 제 이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상대에게 얼음꽃을 내던졌다. 피닉스에게.

오오오--!

운석처럼 떨어지는 얼음꽃. 그 아래에는 왼손을 뒷짐진 피닉스가 오른손을 뻗고 있었다.

"안 피하고 뭐하는 거야!"

제 몸집보다 수 십 배는 더 큰 얼음꽃이 떨어져도 피닉스는 걸음을 떼지 않았다. 오히려 피닉스는 피하지 않겠다는 듯 오른손을 들어 얼음꽃을 향해 펼쳤다.

우우웅!

피닉스의 손바닥에 뭉친 푸른 마력이 얼음꽃을 향해 쏘아졌다. 대포처럼 쏘아진 마력의 구체는 아주 천천히 얼음꽃을 향해 날아갔다.

톡.

얼음꽃이 마력의 풍선에 닿는 순간, 얼음꽃 외벽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얼음꽃의 1/4가 폭발하며 관악산 정상에서 파편을 날렀다.

파바밧!

파편은 가시처럼 땅에 꽂혔다. 피닉스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파편을 그대로 몸으로 받아냈다.

"꺅!"

가을은 그것이 마치 자살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피닉스에게 날아간 얼음 파편은 피닉스에게 그 어떤 상처도 주지 못했다.

파사삭. 갑주에 부딪힌 파편은 흠집조차 내지 못했고, 관절을 찌른 파편은 불꽃에 물방울이 되어 땅에 떨어졌다.

얼음꽃 위의 설화공주가 붉어진 얼굴로 무언가 소리친다. 피닉스는 그저 손을 한 번 더 까닥거리는 것으로 응대했다.

"...뭐라는 거야?"

영상은 나오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가을은 지화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기요, 지화씨. 이거 소리는 어떻게 안 되나요?"

"......."

지화는 말문을 잃은 채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옆에는 그의 이능력을 통해 디지털 자료로 변환된 시각 정보가 스크린에 띄워졌다.

온통 붉은 색. 끈적한 선홍색 액체에 가을은 절로 기분이 나빠졌다.

"이거 뭐...?!"

지화의 시야가 크게 돌아갔다. 스크린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게 뭐에요?!"

또다시 피가 튀었다. 괴수가 아닌 인간의 피.

망자의 넋을 기려야 할 현충원의 입구에서 학살이 벌어지고 있었다.

* * *

"아악!"

초로의 노인이 단말마와 함께 피를 토했다. 헤진 옷의 노인은 가슴에 피를 흘리며 계단에 쓰러졌다.

푹!

남자는 마치 명령을 부여받은 로봇처럼 계단에서 올라오는 난민들을 총으로 쏘았다. 사람을 향해.

탕! 탕!

마탄이 하나 발사될 때 마다 사람이 하나 죽는다. 계단 아래 대합실의 난민들이 우물쭈물했다. 이미 승강장 안 쪽에서도 미친 살인마가 날뛰고 있었다.

"하하하! 이걸로 30일!"

여자는 도망치는 남자의 뒷목에 단검을 던졌다. 마력까지 실린 푸른 칼날에 남자는 도망치던 그대로 절명했다.

여자의 목에는 소나무 문신이 그려져 있었다.

"......이건 아니야."

적송이 두 주먹을 불끈쥐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코를 찌르는 혈향에는 난민들의 절규와 고통이 담겨있는듯 했다.

"아하하, 적송. 능력만 A급이지 완전 겁쟁이네? 처음이라고 했지? 그래서야 안 돼~ 복역일수 줄이려면!"

여자는 단검을 빼들어 난민들 무리에 뛰어들었다. 여자의 경지는 C급임에도 일반인들을 상대로는 대처 불가능한 살인귀였다.

푹, 푹푹!

"이렇게 열심히 죽여야한다고. 잊지마?"

"민간인이잖아!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적송이 분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여자는 벙쪄있다가 깔깔 웃으며 스마트워치를 두드렸다.

"키히히. 무슨 소리야. 민간인이라니."

적송의 스크린에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가 떠올랐다. 서울에 잠복한 간첩을 제거하라.

"우리는 지금 적국의 '간첩'을 처리하고 있는거라고?"

"미친 소리 하지마!!"

적송은 소리쳤지만 아무런 방해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목에 박힌 소나무 문장.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복역 일수는 늘어나고, 반항하는 걸로 판단되면 즉시 사형에 처해진다.

"이 사람들이 무슨 간첩이야?!"

"사회 생활 안 해봤구나, 너. 상사가 돌려말해도 밑에서 알아서 잘 들어 먹어야 돼. 알겠어? 죽기 싫으면 간첩들 죽여. 원망할 거면 선의철을 원망해."

여자는 제 단검의 날에 흐르는 끈적한 피를 핥았다. 적송은 두 눈을 감아버렸다.

철표가 말한 베테랑.

그들은 살인과 학살의 전문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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