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1부 4장 (12)
"젠장!"
템페스트 레이디가 바람을 모아 전방으로 날렸다. 강한 절삭력을 띈 칼바람이 헬하운드 무리에게 쏘아졌다.
캬아앙!
헬하운드들은 좌우로 흩어지며 칼바람을 피했다. 미처 피하지 못한 헬하운드 하나가 칼바람에 다리가 잘려 쓰러졌다.
화르륵.
헬하운드의 몸에서 불꽃이 터져 나와 다리가 되었다. 고꾸라진 헬하운드는 입에서 불을 뿜으며 히어로에게 달려들었다.
"으아악!"
거대한 방패를 든 히어로가 방패째로 헬하운드를 밀쳤다. 육중한 거구의 밀치기에 헬하운드가 바닥을 굴렀다.
"갑니다...!"
히어로들 사이로 탐식운이 바닥을 훑으며 헬하운드를 덮쳤다. 탐식운은 푸른 불꽃을 피해 헬하운드의 육신을 뜯어먹었다.
키이익....
육신을 잃은 헬하운드는 그대로 쓰러졌다. 푸른 불꽃으로 된 왼 쪽 앞발은 육신이 전부 뜯어먹힌 순간 불씨가 되어 하늘로 피어올랐다.
부활한 헬하운드의 완전한 죽음. 그것은 남아있는 육신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으로 가능했다.
스으윽.
헬하운드의 육신을 먹어치운 탐식운이 운사의 손으로 돌아왔다. 창을 회수하기에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흐읍?!"
운사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다. 마력을 흡수하기가 무섭게 몸 안쪽에서 불이 난 듯 들끓었다.
"팀장님?!"
템페스트 레이디가 다급히 다가와 운사를 부축했다. 찢어진 전투슈트위로 덮어진 템페스트 레이디의 코트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아흐, 하아."
운사는 붉어진 얼굴로 달뜬 숨을 토해냈다. 얼굴은 홍당무처럼 붉어지고 이마는 가마솥처럼 뜨겁게 달궈졌다.
감기? 그럴 리가 없다. 마력의 가호를 받는 히어로들은 잔병치레를 거치지 않는다.
생각할 수 있는 현상은 마력 과포화. 코어 추출물을 과도하게 흡수하여, 수용 가능한 정도보다 더 많은 마력이 몸에 축적되는 현상.
"운사! 빨리 마력을 써요! 탐식운 다 끌어내요!"
운사는 템페스트 레이디의 손을 붙잡았다. 손에서 그칠 줄 모르고 피어오르는 탐식운에 템페스트 레이디는 그 막대한 양의 구름에 자신의 마력을 실어 히어로들을 에워쌌다.
탐식운을 얼음 벽돌처럼 쌓아 만든 구름의 이글루. 밖에서는 헬하운드들이 한껏 경계하며 거리를 벌렸다.
"후우, 후우, 후우."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운사의 호흡이 가라앉았다. 본능적으로 마력을 방출해낸 덕분에 마력 과포화 현상은 사라졌다.
"...이제 몇 마리 남았습니까?"
흔들리던 운사의 동공이 뚜렷해졌다. 탐식운의 보호 아래에 있던 히어로들 모두가 고개를 떨구었다.
눈으로 보이는 개체 수만 대략 50. 운사는 이미 수많은 헬하운드를 먹어치우고 마력 과포화 현상에 빠졌다.
"헬하운드 몇 마리가 A급 마력을 가지고 있다니.... 이상하잖아요!"
히어로 하나가 울먹이며 소리쳤다. 유일한 희망은 운사였지만 운사 한 명에게 맡기기에는 짐이 너무 과했다.
대략 다섯 마리를 먹어치울 때마다 운사는 마력 과포화로 힘들어했다. 잘못하면 마력의 폭주, 이른바 주화입마 상태에 들어갈 수 있음에도 운사는 탐식운으로 헬하운드들을 먹어치우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제가, 할 수 있습니다."
운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그대로 주저앉았다. 엉덩방아를 찧듯 덕배의 등에 쓰러진 운사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으으."
현기증이 인다. 몸이 수차례 과열되었다 열이 떨어지며 신체에 한계가 왔다. 안 그래도 화염거인을 상대로 1:1을 맡아 쓰러뜨렸으니, 최소 10분가량은 휴식이 필요했다.
하지만 괴수들은 그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키아악!!
탐식운이 크게 출렁였다. 밖에서 헬하운드 하나가 몸을 박치기한 것 같았다.
"팀장! 절대 탐식운 되돌리지 마요! 놔두면 알아서 죽을 거예요!"
"아닙니다.... 저 괴수들은 지금...."
운사의 눈이 깔고앉은 덕배를 스쳤다. 어딘가 정순한 느낌마저 들던 푸른 불꽃. 그 본질이 같은 성질을 띠고 있다면 헬하운드들의 박치기는 절대 자살행위가 아니다.
키이익!
키아악!
헬하운드들이 탐식운에 몸을 던지며 잡아먹혔다. 하지만 운사는 섣불리 탐식운을 회수하지 못했다.
헬하운드가 몸을 던진 곳의 탐식운이 움푹 패여 있었다. 마치 솜사탕에 불을 붙여 그 부분만 다 타버린것처럼.
"저 놈들, 설마?!"
템페스트 레이디가 놀라 소리쳤다. 헬하운드들은 제 몸의 푸른 불꽃으로 탐식운을 꺼뜨리고 있었다.
"이 자를, 살려서 협회로 데려갈 이유가 하나 더 생겼습니다."
운사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괴수를 되살리는 이능력. 분명 괴수를 조종하는 힘도 있을겁니다. 지휘자는 괴수가 아닙니다. 사람, 빌런입니다."
"서울에 그런 빌런이 있다는 얘기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어요!"
"이미 지금 있는 모든 일이 처음 겪는 일들뿐입니다. 실전은 매뉴얼대로 되지 않습니다."
운사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오락가락하는 정신 속에서 펼친 탐식운 덕분에 마력은 바닥을 보였다.
운사가 슬쩍 손을 앞으로 들자, 템페스트 레이디가 앞을 가로막았다.
"안 돼요!"
"...해야합니다. 제가 아니면 안 됩니다."
망설이는 동안에도 탐식운은 깎여나가고 있다. 서서히 주변을 에워싸는 푸른 화염이 구름 사이로 언뜻 스쳤다.
"양선우 요원. 만약 제가 쓰러지면 당신이 이 팀의 팀장입니다. 알겠습니까?"
"팀장님!"
한강 이북은커녕 여의도도 넘어가지 못했지만 운사는 슬슬 한계까지 몰렸다. 아주 잠시간 휴식을 할 수 있다면 모를까, 육체는 이미 녹초가 되어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지만 운사는 두 다리로 굳건히 섰다. 덕배의 양어깨를 밝고 선 운사의 얼굴은 비장하기까지 했다.
"제가 탐식운을 흡수하는 순간, 진을 해제하고 요격에 들어갑니다. 상대는 B급과 A급의 경계에 있는 괴수. 남아있는 육신을 집중적으로 노리시길 바랍니다."
키아아악!
어느덧 탐식운의 두께가 극히 얇아졌다. 운사는 숨을 크게 들이마쉬며 두 손을 하늘 높이 뻗었다.
"회수합니다!!"
얇게 펼쳐진 탐식운이 운사의 양손에 빨려 들어갔다. 이미 많은 부분이 푸른 불꽃에 깎여나갔음에도 흡수되는 마력은 넘치다 못해 터질 것 처럼 운사의 온몸으로 분출됐다.
픽.
운사의 눈이 스르르 감기며 그대로 덕배의 위에 쓰러졌다. 육체의 한계를 초월해 버티던 정신력도 십 수 마리 헬하운드의 마력을 버티지 못하고 머리가 익어버렸다.
"큭! 운사를 지켜! 진을 유지해!"
히어로들은 템페스트 레이디의 지시 하에 원으로 뭉쳤다. 운사는 산개하여 요격하기를 지시했지만, 히어로들은 운사를 지키기 위해 몸을 붙였다.
캬아아악!
자연히, 헬하운드들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었다. 히어로들은 도로를 박차고 사방에서 뛰어오르는 헬하운드들을 보며 두 눈을 부릅떴다.
순간. 거대한 백색의 불꽃이 헬하운드들을 휩쓸었다.
고오오오오----!!
뛰어오른 헬하운드들의 육체가 순식간에 불타오르며 재가되었다. 육신을 잃은 푸른 불꽃은 백염(白炎)에 섞여 허공으로 흩어졌다.
템페스트 레이디는 화염이 쏘아진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그곳에는 태양을 등지고 땅으로 낙하하는 남자가 있었다.
쿠웅!
남자의 주먹에는 흰 불꽃이 머금어져 있었다. 히어로들은 그 모습에서 TV나 자료 영상으로나 봤던 한국 히어로계의 전설의 실루엣을 연상했다.
"!"
반가운 연호에 호응하듯, 화권-이승형이 주먹을 도로에 내리꽂았다.
구구구구!
지축을 울리는 거대한 충격파가 헬하운드들을 덮쳤다.
땅에서 화산이 폭발하듯 솟구치는 백염의 불기둥. 히어로들을 포위하던 수십의 헬하운드가 흰 불꽃에 삼켜져 불타버렸다.
인외. 천외천. 그 무엇으로 그 위업을 표현할 수 있을까.
"괜찮으십니까?!"
승형은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가뿐한 몸놀림으로 히어로들에게 다가왔다. 아직도 기절해 온몸에서 마력과 열을 방출하고 있는 운사와 승형을 번갈아 본 템페스트 레이디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신진광 이 개...."
지금까지 우리의 개고생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템페스트 레이디가 억울함에 눈물이 핑 돌았다. 승형은 태연한 얼굴로 히어로들을 훑었다.
"다른 히어로들은요?"
"...아!"
"C급 한 분이 납치당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소나무 부대는 별동대로 움직였어요. 저희는 함정에 빠져 몇 명이 실종됐고요."
승형이 마력을 갈무리했다. 심장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그에게 무한한 활력을 부여했다. 아직 충분히 달릴 수 있다.
"여기는 화권! 본부 응답해주세요!"
- 또 왜! ...어? 크흠! 무슨 일인가, 이승형 요원!
신진광이 화를 삭이고 근엄한 목소리로 답했다. 감당할 수 없는 책임과 자신의 능력 부족이라는 이중고에 미쳐버릴 것 같은 와중에도 이승형에 대해서는 확실히 조심하고 있었다.
"실종된 히어로들의 마력 패턴에 대한 열람을 요구합니다!"
- 기다려라!
"안 됩니다!"
템페스트 레이디가 딴지를 걸었다.
"히어로들의 마력 패턴은 최소 협회 팀장급 이상의 승인이 없으면 공개할 수 없는 기밀입니다! 아무리 화권이라도 그런 기밀을 마구잡이로-"
"제가."
승형은 상큼한 미소로 마법의 문장을 읊었다.
"혹시나 문제가 생길 경우, 제가 전적으로 책임지겠습니다."
"...그렇게까지 사람을 구해야겠어요?"
승형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더이상 사람을 지키지 못하는 건 싫습니다. 지휘관님!"
- ...나는 정말로 모르네! 자네가 책임진다고 했어!!
어떤 방식으로 책임질지 그 누구도 몰랐지만, 신진광은 이미 승형의 말에 말려버렸다. 납치당한 히어로들을 되찾는다는 좋은 변명거리도 있으니, 나중에 청문회에서 문책을 당해도 여론의 동정을 살 좋은 핑곗거리가 될 것이다.
"감사합니다, 지휘관님!"
승형은 환희에 차 연신 고개를 숙였다. 템페스트 레이디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사람을 지켜야 한다는 편집증 같은 증세의 이유를 깨달았다.
천가을. 그에게 있어 유일하게 지키지 못한 사람.
"...화권님. 죄송합니다만 A팀을 이끌어주시겠습니까? 저는 이들을 안양에 후송하고 곧바로 합류하겠습니다."
템페스트 레이디는 바닥에 쓰러진 운사와 덕배, 그리고 운사가 잡은 소년을 가리켰다.
"운사님이 기절까지...? 그만큼 강력한 적이었나요?"
"예의 화염거인이었습니다."
"거인...윽?!"
승형이 가슴을 쥐어뜯었다. 무한히 타오르던 심장의 불꽃이 갑자기 승형을 태워버릴 것처럼 마력을 역회전시켰다.
"커억!"
승형이 바닥에 엎어지며 붉은 피를 토했다. 갑작스러운 S급의 각혈에 히어로들이 경악에 빠졌다.
"무슨?!"
"나도 몰라!"
템페스트 레이디는 당황하는 히어로들을 보며 겨우 냉정함을 되찾았다. 야속하게도 본부에서는 히어로들의 마력 패턴을 읽어 정밀 스캔을 시작하고 있었다.
- 화권님! 다행히 모두 살아있습니다! 앞으로 3분이면 장소를 특정할 것 같습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화권이 지금 쓰러졌다고요!!"
템페스트 레이디의 보고에 지휘본부가 정적에 빠졌다. 스크린에는 피를 토하며 쓰러진 승형이 비쳤다.
- ......템페스트 레이디, 팀을 이끌고 안양까지 철수해라.
"예?"
차분하기까지 한 신진광의 명령에 템페스트 레이디가 반문했다. 신진광이 다시 열을 내며 지휘봉을 두드렸다.
- 구로에 있는 히어로들, 다 살려서 돌아오란 말이야! 지금 당장!
"하지만 작전은-"
- 작전이고 나발이고 다 죽으면 무슨 소용이야?! 작전 변경이다! A팀의 생존자는 당장 구로에서 탈출해 안양 본부로 돌아오라! 이상!
"아, 알겠습니다!"
템페스트 레이디는 운사를 등에 업었다. 갑옷의 히어로가 승형을 받쳐 들었다. 승형의 입에는 붉은 핏줄가 흐르고 있었다.
전조도 없는 각혈. 혹시 남들에게 말 못할 지병이 있다거나 시한부는 아닐까 온갖 생각이 들었다.
"...일단 살아서!"
템페스트 레이디의 지휘하에 히어로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쿵!
바닥이 크게 울렸다. 의식을 잃은 척 누워있던 덕배가 전광석화처럼 몸을 일으켜 소년을 낚아챘다.
"큭! 화염거인이?!"
운사가 기절한 이후로 수갑을 다시 채워야 한다는 걸 잊었다. 헬하운드를 앞두고 생사가 오락가락하던 와중이라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화염거인은 건물 사이를 뛰어오르며 사라졌다. 템페스트 레이디는 이를 악물며 그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눈에 새겼다.
"후퇴, 후퇴한다!"
구로 방면으로 나선 A팀의 히어로들이 눈물을 머금고 기수를 돌렸다.
♩♪♬♪
화염거인이 튀어나왔던 건물의 옥상 난간. 푸른 카나리아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