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1부 4장 (10)
"안 되겠어요. 지휘관. 저를 보내주세요."
잠자코 있던 하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시가 떨어지면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몸에서 한기가 흘렀다.
"안 되네! 자네들은 시청사의 뱀을 쓰러뜨릴 때까지 전력을 아껴야 해!"
"그 전력 아끼려다가 또 C급 히어로 한 명 죽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여기서 더 잘못되면? 그냥 옷 벗는 거로 안 끝날 텐데 감당하실 수 있어요?"
단호한 하랑의 말에 신진광은 고개를 돌렸다.
아직 이기성의 생명 신호는 끊기지 않았다. 신진광이 밍기적거리는 사이, 구로의 미로에 갇힌 몇몇 히어로들이 괴수들에게 납치당했다.
괴수의 둥지에 잡혀간 인간의 말로는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신진광이 주먹으로 뒤의 화이트보드를 치고는 소리쳤다.
"에에이! 석하랑 요원! 히어로들을 믿게! 이 정도로 쉽게 자네들을 보내서야-"
"제가 가겠습니다."
승형이 하랑의 어깨에 손을 올려 그를 앉혔다. 마력까지 실린 그 손길에 하랑이 어이없다는 듯 승형을 올려다봤다.
"지금 아저씨 뭐하는...."
"내가, 간다."
단호한 승형의 말에 하랑도 신진광도 침묵을 지켰다. 단순히 의협심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승형에게서 느껴졌다.
꿀꺽.
신진광이 침 넘기는 소리가 지휘실을 가득 울렸다. S급 히어로라는 것도 있지만 그의 배경, 선의철 대통령이 마음에 걸렸다.
혹시나 저 남자가 제 의견을 묵살했다는 이유로 대통령에게 고자질한다면?
'...이건 절대 빽에 패배한 게 아니다. 적절한 작전을 수용한 지휘관의 넓은 아량이야.'
신진광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뒷일은 나는 책임 못 지네."
"충분합니다."
이승형이 잔상을 남기고 사라졌다.
구로를 향해.
* * *
퍽!
덕배의 주먹이 창대를 후렸다. 운사는 재빨리 창을 쥔 손을 풀었다.
창이 그대로 날아가 옆 건물로 처박혔다. 덕배는 제 무기를 던지는 운사의 행동에 놀라 몸을 뺐다.
"늦었습니다!"
이미 운사의 주먹이 덕배의 배에 꽂혔다. 덕배는 그대로 뒤로 밀려나며 바닥을 굴렀다.
푸스스....
운사의 주먹이 닿은 곳에서 바위 피부가 사라지고 맨살이 그대로 드러났다. 주먹이 바위 피부를 부쉈다기보다는 닿은 부위를 먹어치웠다는 표현이 더 올발랐다.
콰득, 콰드득.
운사의 주먹에서 피어오른 작은 탐식운은 덕배의 바위 피부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푸른 불꽃과는 탈리 탐식운은 바위피부에서 마력을 갈취해 운사의 갈증을 채웠다.
운사는 주먹에 탐식운을 말아쥐고 있었다.
"......화염거인의 이능을 거둔것, 그것이 당신의 패착입니다."
이미 운사는 승리를 예고했다. 덕배의 몸 곳곳의 바위 피부는 운사의 탐식운에 뜯어먹혀 몸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말이 기네. 너도 누구처럼 입으로 떠벌이면서 싸우는 부류냐?"
덕배가 바닥에 침을 뱉었다. 인도에 떨어진 피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운사는 제 몸의 마력을 체크하고 워치를 두드렸다.
스크린에 뜬 간이 지도의 템페스트 레이디가 구로를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며 헬하운드들을 처리해나갔다. 다행히 더이상 납치당하거나 부상을 입는 히어로들은 없었다.
"헬하운드도 전부 퇴치되었습니다. 구로는 곧 제압될 겁니다."
운사가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덕배는 곧장 가드를 올려 운사의 주먹을 막으려 했다.
"젠장!"
운사의 주먹은 덕배가 올린 양팔에 닿지 않았다. 운사의 몸이 미끄러지듯 덕배의 몸 아래로 파고들었다.
"□!!"
덕배가 황급히 몸을 반대편으로 뺐다. 하지만 운사는 이미 덕배의 허벅지와 허리를 손으로 짚었다.
콰득!
탐식운이 덕배를 물어뜯었다. 운사는 탐식운을 짚고 그대로 덕배의 등 뒤로 몸을 돌렸다.
쿵!
수평으로 눕다시피 한 운사가 다리를 쭉 뻗어 덕배의 등을 때렸다. 마력이 실린 공격에 덕배는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등 뒤를 잡은 운사를 낚아채려 했다.
"느립니다."
운사가 다시 발을 들어 덕배의 뒷목을 찍었다. 탐식운이 바위피부를 찢고 전해준 엄청난 격통에 덕배의 고개가 땅으로 떨어졌다.
"크아악!!"
운사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발에서 돋아난 탐식운이 덕배의 등허리에 난 바위피부를 먹어치웠고, 운사는 그대로 덕배의 등에 올라타 등허리를 계속해서 내리찍었다.
쿠웅!!
대로변에 덕배가 대자로 쓰러졌다. 호기롭게 덤벼들어 십 수분의 시간 동안 주먹을 주고받았지만, 덕배는 아주 무난하게 운사에게 제압당했다.
"각성한지 얼마 안 되는 모양이십니다. 힘을 다루는 능력이 너무 부족합니다."
정령석의 힘으로 A급의 마력을 가졌을지언정, 그의 전투력은 C급에 미치지도 못했다. 그에 비해 운사는 수년간 A급으로서 다양한 전투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전투 경험의 차이. 그게 둘의 승패를 갈랐다. 운사는 쓰러진 덕배를 이리저리 살피며 혀를 찼다.
"......수갑 채우는 건 무리일 것 같습니다."
어떻게 등 뒤로 팔을 잡아당기기에는 몸에 돋아난 바위가 걸리적거렸다. 운사는 탐식운을 사지 끝에 보내, 죄인에게 거는 족쇄처럼 채웠다.
"허튼수작을 하면 탐식운이 당신의 손목과 발목을 먹어치울 겁니다."
"큿, 죽여라!"
덕배는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자신을 죽이라는 말을 꺼리낌 없이 꺼냈다. 운사는 그게 궁금했다.
"당신은 빌런 아닙니까? 이렇게 체포당하면 보통은 목숨을 구걸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잔말 말고 죽여!"
덕배의 절규에도 운사는 냉정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살희망자라면 진작에 목숨을 내놓았을 터. 과연. 당신은 무언가를 알고 있는 사람일 겁니다. 가령 이 구로의 함정을 판 본인 아닙니까?"
덕배는 슬슬 짜증이 일었다.
"슬슬 닥치고 죽여! 히어로들이 하는 일이 그거잖아! 빌런 잡아 족치는 거!"
"잡아서 체포하지 죽이지는 않습니다. 기다리십시오. 전 세계 히어로 협회 규약에 의거, 귀하를 현 시각으로 체포합니다. 당신은 변호사를...."
느긋하게 미란다 원칙을 읽는 운사의 태도에 덕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귓가에 주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 개발렸네요, 부하 2호?
'......쳇.'
"...수 있습니다. 당신이 왜 졌는지 이해하십니까?"
아주 스테레오로 지랄들이다. 덕배는 제 귀의 고막을 터뜨리고 싶었다.
- 화염거인 못 쓰게 된 건 제 실수긴 한데, 덕배 씨가 워낙에 쪽도 못 쓰고 발려서 뭐라 제 탓 하기가 더 민망하네요. 이래서야 훈련의 성과가 없잖아요. 반성하십시오.
"어디서 조금 싸움을 배운 것 같지만 아직은 부족합니다. 뒷골목 출신으로 보이는데, 그 안 좋은 습관이 남아있습니다. 협회의 갱생 프로그램을 통해 마음만 고쳐먹으면 당신도 충분히 좋은 히어로가...."
"아오, □□!"
덕배가 머리를 땅에 그대로 받았다. 그 기이한 행동에 운사는 말문이 막혔다. 부스스 떨어진 바위 파편 사이로 피가 흘러나왔다.
"......자해는, 그…. 미안합니다. 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이능력자는 그런 정도로 타격을 입지 않습니다…."
- 저런. 자살 못하는 거 알잖아요? 괜찮아요. 코어만 살아있으면 제가 다시 살릴 수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요.
'마음 같아서는 그냥 영원히 죽고 싶은데.'
-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고. 푸흐흐. 기절한 척은 좋아요. 방심시킬 수 있으니까.
덕배는 의식을 잃은 척 눈을 감았다. 피닉스는 직접 머리에 의사를 전달하더라도, 최소한 또 한 명의 떠벌이는 기절한 빌런에게 말을 거는 기행은 하지 않았다.
운사는 머리를 슬쩍 긁다가 워치를 두드렸다. 여전히 덕배의 등 위에 발을 딛고 서 있었다.
"여기는 운사. 빌런 을 체포했습니다."
- 좋은 전과다, 운사! 역시 내 지휘대로 잘 움직여줬어! 크하하!
신진광이 반색하며 자화자찬했다. 신진광의 지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었지만, 운사는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았다.
"지휘관 님. 죄송합니다만 지금 전체 전황을 파악할 수 있습니까? 1:1로 승부를 보느라 팀원들과 떨어졌습니다."
- 어, 그, 그래.
운사는 본부로부터 넘겨받은 데이터를 확인했다. 이미 본부는 템페스트 레이디를 중심으로 헬하운드 무리를 전부 토벌해냈다.
다행히 히어로들도 무사히 구출해낸 모양이다. 운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다 지도에 찍힌 히어로들의 위치에 의문을 표했다.
"......이들이 왜 여기에 있습니까?"
히어로들의 시그널 아래 작게 표시된 소나무 마크. A팀에 들어왔던 이들은 템페스트 레이디와는 별개의 위치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 네, 네가 신경 쓸 것 없다! 내가 지시한 사항이다! 불만 있나?!
"아뇨, 없습니다."
다만 그 위치가 신경 쓰였다. 소나무 부대가 위치한 곳은 디지털단지의 북쪽, 역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 * *
- 조덕배 님이 제압당했습니다. 헬하운드 전멸.
- 강남에서는 흑염룡이 풍백과 우사의 합동기를 부쉈습니다. 하지만 흑염룡이 마력탈진. 우사에게 곧바로 제압당했습니다.
- 선무당, 항복했습니다. 휘하 빌런들이 도주했습니다.
- 아직 하늘성의 무리는 전의를 잃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풍백과 우사가 전장에 다시 합류하면 열세가 될 것입니다.
- 구로, 강남 모두 히어로들이 우세합니다.
지화의 속사포 같은 보고가 이어졌다. 마지막 즈음에는 살짝 목소리가 떨리는 것이 조금은 걱정되는 듯 했다.
- 피닉스 님, 정말로 아직 기다리실 겁니까?
"말했잖아요? 저는 S급 둘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린다고."
- 그거야 그렇지만....
- 저기요, 피닉스 씨? 이대로 가다간 서울 점령이고 뭐고 다 망하게 생긴 거 아니에요?
지화의 옆에 있던 가을도 걱정스레 말했다. 지화야 그렇다 쳐도 이런 방면으로 전혀 모르는 가을까지 걱정을 하니 조금 신경 쓰였다.
"역시 간부급 전력이 부족하긴 부족하네요."
잠시나마 A급의 힘을 낼 수 있던 덕배는 제압당했다. 흑염룡은 전의를 불태웠지만 체포되었고, 선무당은 스스로 빌런들에게 무릎을 꿇었다.
"슬슬 연락 올 때가 됐는데."
띠링.
양반은 못 되는 사람이다. 나는 워치의 알람을 확인했다.
[하늘성] : 따르겠다. 도와달라.
"참 감질나게 하는 양반이에요. 그쵸?"
- 어쩌실 겁니까? 이미 부하들도 숨어서 더이상 사용 가능한 병력이 없습니다.
"없으면 만들면 되잖아요?"
나는 난간에 누운 그대로 큐브를 꺼내 태양에 비췄다. 흉물스러운 외형이지만 지금은 서울에서 히어로들을 쫓아낼 최고의 수단이다.
'이계신의 것을 사용하는 게 조금 찝찝하기는 하지만.'
지금같이 전력이 열세인 상황에서는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은 모두 활용해야 했다.
'혹시나 성주한테 걸리면 핑계도 댈 수 있고.'
만약 성주가 원작 시작 이전에 잠에서 깨어나 잠시라도 지상을 본다면, 당연히 예정보다 먼저 깨어난 피닉스의 움직임에 이상함을 느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활동은 다크 레기온의 간부 짓으로 속이는 거예요.'
'적어도 세뇌 풀린 거 숨겨야 할 거 아냐.'
피닉스가 성주가 원하는 악의 조직 간부의 일원으로서 모습을 보인다면, 성주는 의심을 거두고 다시 회복에 전념할 것이다.
그래야 했다. 반드시 그래야 했다. 안 그러면 다시 성주에게 세뇌되고 정령생은 곧장 마감이다.
원탁의 도움도 얻을 수 없는 이 상황에서 성주와 마주하는 건 자살행위임과 동시에 힘도 못 쓰고 세뇌당할 것이다. 아예 성주가 잠에서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래도 혹시나 선잠에서 깰 수도 있으니.
'그럼 성주님. 지금 저 높은 곳에서 지켜보고 계신다면 의심을 거둬주라. 제발.'
큐브에서 마력이 솟아났다. 무한에 가까우면서도 어딘가 끈적거리는 그 마력은 내 창염에 닿으며 정화되었다.
"으, 진짜 싫다...."
오염된 구정물 속에 손을 넣고 불순물을 손으로 거르는 느낌이다. 하지만 괜스레 이계신의 영향을 받는 마력을 사용하는 것보다, 이렇게 정화작업을 거치는 게 내가 마력을 이용하기에 훨씬 편했다.
"등대, 잘 들어요. 청화단 모든 조직원에게 '세컨드 페이즈'는 기본입니다."
- 예? 그게 무슨?
"보면 알아요. ...당신의 주인이 얼마나 강대하고 위대한 존재인지, 보고 깨닫도록 하세요."
나는 몸을 일으켜 난간에 섰다. 큐브에서 뽑아내 정화된 마력이 하늘로 치솟아 강남과 구로로 향했다.
우우웅----
마력은 하늘에 불길을 수놓으며 강남과 구로 인근을 맴돌던 미니피닉스들에게 닿았다. 미니피닉스들이 수많은 깃털로 변해 땅에 떨어졌다.
"구로 쪽은 별로 남아있는 게 없지만...."
운사의 탐식운에 잔해조차 남김없이 사라진 헬하운드들이 마음에 걸렸지만, 어차피 그 정도 전력의 공백은 금방 채워질 것이다.
"동물 사체를 그냥 방치하면 파리 꼬이고 더러워질 테니까, 당연히 누가 처리를 해야겠죠?"
팟.
불사조의 깃털이 헬하운드들의 시체에 닿았다.
"자, 부활할 시간입니다."
번쩍.
헬하운드들의 죽은 눈에 푸른 불꽃이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