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1부 4장 (8)
"...좀 미안한데요."
- 저, 저는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퍽이나."
저런 사람인걸 잊고 있었다. 덕배를 감싼 탐식운이 덕배를 발밑에서부터 게걸스럽게 먹어들어가고 있었다.
덕배가 운사를 움켜쥐어 상처를 입히기 직전, 나는 나도 모르게 명령을 하나 내렸다.
'다치게 하지 마라.'
당연히 화염거인, 덕배는 반발했다. 지금 적을 두고 무슨 소리냐고. 이제 손에 쥐고 마구 내리찍어서 죽이기만 하면 되는 걸 뭘 막아 세우냐고.
하지만 상대는 죽여서도 다치게 해서도 안 될 사람이다.
주인공의 초기 세 히어로 중 한 명. 지휘관에게 배신당해 마력을 잃고 폐인이 되었다가 E급 이능력자부터 다시 재기하려는 메인 히로인.
'그 술꾼이 저렇게 착실한 인간이었다고는 생각도 못 했지만....'
성실, 착실과는 거리가 너무나도 먼 여자였다. 그 바람에 원작 1챕터에서는 동료들과 마찰을 벌여 베드 엔딩을 띄우게 하기도 한 원흉.
천가을이 그러했듯 원작 5년 전이라 그런지 사람이 너무나도 달랐다.
'그래도 근본은 똑같아서 참 그렇네.'
천가을이 천가을이듯, 박라온도 똑같았다.
임무에 있어서만큼은 최선을 다하던 성실함. 설령 옷이 다 찢어져 속옷이 다 드러난다고 해도 한치의 거리낌 없이 적을 물리치는 강인함.
그런 박라온을 두고 덕배는 신이 난 듯 빈정거렸다.
- 야, 저거 몸 하나는 진짜 대박인데. 안 가리네? 저거 치녀냐?
그래서 덕배에게 소리쳤다.
어디서 감히 박라온의 노출된 몸을 보려고 하냐고. 눈 돌리라고.
- 야 이, 싸우는 데 안보고 싸우라고 하면 어떡해 이 미★ Y아!
그런데 그게 하필이면 명령으로 덕배는 인식해버렸다. 그 바람에 덕배는 운사를 시야에서 자꾸만 떨어뜨리려 했고, 결과는 운사를 제대로 빡치게 만들었다.
내 실수였다.
"아아. 미안해요, 부하2호. ...이제 봐도 돼요. 명령 철회합니다."
- 이미 무릎까지 잡아먹히고 있다고! 어쩔거야!!
스크린에 나온 화염거인의 키가 훌쩍 줄어들었다. 탐식운도 양이 그만큼 줄어들기는 했지만, 화염거인은 어떻게든 구름지옥에서 빠져나오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좋아요. 우리 조덕배씨. 이대로 죽일 수는 없죠."
어느덧 탐식운은 덕배의 허리까지 이르렀다. 명치 부근에 자리 잡은 조덕배의 본체에 탐식운이 닿는다면 덕배는 그대로 잡아먹힐 것이다.
"화염거인. 해제하세요. 원래 이능력을 써도 좋습니다. 정령석 마력 다 쓸 때까지 마음대로 싸워요."
- 오오냐!
화염거인의 몸이 번쩍였다.
* * *
"......뭐, 라고?"
화염거인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력을 바닥까지 쥐어짜던 운사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없다. 화염거인은 차원문 사태에서 몸을 숨겼듯 그 모습을 감쪽같이 숨겼다.
"흐읍!"
펼쳐둔 탐식운을 다시 갈무리해 창끝으로 넣었다. 조금이라도 마력을 아껴야 했다.
마력의 최대량이 현저히 낮은 대신 상대의 마력을 탐식운을 통해 갈취하여 회복하는 전투 방식. 그런 의미에서 상대는 운사에게 있어 상당히 난해한 적이었다.
빼았는것 하나 없이 소모되기만 하는 마력. 이미 운사의 마력은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쿠웅.
어디선가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운사는 재빨리 마력을 정돈했다. 남은 마력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쿠웅. 쿠웅.
화염거인이 사라진 곳에서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다. 2.5m는 훌쩍 넘긴 거대한 몸집의 남자. 햇빛에 반짝이는 머리에 운사는 눈을 찡그렸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바위피부 사이로 흘러나오는 푸른 불꽃은 남자의 정체를 직감 케했다.
"그쪽이 본 모습입니까?"
"후우. 그래."
덕배는 주먹을 맞부딪혔다. 모래가 떨어지며 바닥에 흘렀다.
"통성명 필요 없고, 간다."
덕배가 땅을 박차고 달려 운사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 * *
구로에서 운사의 팀이 미로에 빠진 그 시각.
강남에서는 피비린내가 진동하며 헬하운드들이 하나둘 쓰러지고 있었다.
부와아아아앙--!
지축을 울리는 전기톱 소리에 헬하운드가 주춤한다. 하지만 빠르게 돌아가는 전기 톱날은 헬하운드의 발을 통째로 갈랐다.
파밧.
감색 정장에 푸른 피가 튀었다. 헬하운드는 마력이 깃든 전기톱날에 세로로 갈라져 죽었다. 하늘성은 전기톱의 전원을 내리고 열기를 배출했다.
푸쉬----
방금전까지 푸르게 빛나던 전기톱이 그 힘을 다하기라도 한 듯 빛을 잃었다. 모터 안쪽에서 연기가 슬그머니 피어오르며 불이 붙었다.
"싸구려를 주다니, 망할 녀석들."
하늘성은 뛰어오는 헬하운드의 면상에 전기톱 코어웨폰을 집어던졌다.
이미 다른 빌런들도 들고 있던 코어웨폰을 땅에 던지거나 투척무기로 사용하고 있었다.
"하늘성! 우리는 이제 어떡해?!"
"도망치시게! 일단 강동쪽으로 도망가서 숨어!"
코어웨폰을 잃은 비능력자 빌런들은 전력을 상실했다. 이 자리에 있어봐야 헬하운드의 먹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젠장! 좀 좋은 걸로 주지!"
"이거 사기 당한 거 아냐?"
이능력자 무능력자 할 것 없이 헬하운드에게 상처를 입히고 결국에는 죽이게 할 만큼 성능은 좋았지만, 내구도가 너무 낮아 금방 망가졌다.
"무얼 그리 겁을 먹는가!"
결국 빌런들은 최악의 적수와 만나버렸다. 녹색의 바람이 대로를 휩쓸더니 헬하운드의 시체가 인도로 치워지고, 괴수들은 대로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히어로들과 마주했다.
"이거이 반갑구만."
풍백은 스틱을 빙빙 돌리며 웃었다. 대로 맞은편에는 히어로들이 막 전투를 치르고 난 뒤, 마력을 고르고 있었다. 하늘성이 괴수 시체를 가리키며 짜증을 냈다.
"거 앞마당 치우는데 거들거 아니면 얼른 가던 길 가지?"
"괴수들 퇴치하는 게 히어로들 하는 일인데 뭘 그리 빈정거리나. 크하하!"
마찬가지로 괴수들과 전투를 벌이느라 히어로들 또한 상태가 말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풍기는 마력은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크르르르!
빌런과 히어로들에게 둘러싸인 헬하운드 무리는 양쪽으로 발톱을 세웠다.
빌런, 히어로, 괴수. 삼자가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했다. 인류가 괴수를 상대로 손을 잡기에는 히어로와 빌런 사이의 골이 너무나도 깊었다.
"히어로들이 일반 시민들한테 괴수 퇴치를 맡겨도 되는 거냐?"
빌런들의 눈은 눈빛만으로 히어로들을 다 죽일 것같이 흉흉했다. 하늘성이 마력을 일으키자 풍백이 껄껄 웃었다.
"어디서 이상한 장난감을 가지고 왔는 지는 몰라도, 어린아이들 노는데 다 큰 어른들이 방해해서야 쓰겠는가."
"쳐죽일 노인네가!"
부하 빌런이 달려들 기세에 하늘성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좋다. 그럼 방해하지 말고 저 멀리 꺼져라. 강남은 우리 땅이다."
"지금이 무슨 원시시대인 줄 아쇼, 깃발 꽂으면 다 제 땅이게? 땅이 전부 나라 땅이지 어디 개인 소유요? 신서울가서 토지대장 한 번 뒤져볼까?"
우사가 지팡이로 땅을 툭툭 두드렸다.
"본부, 적의 수는 얼마나 됩니까?"
- 빌런 패턴은 대략 200이 넘습니다! A급은 하나, 빌런 하늘성입니다!
다 들으라는 듯 워치의 소리를 높인 덕분에 빌런들이 전부 주춤했다. 아무리 준S급이라 하더라도 A급은 A급. 강남에 모인 빌런들은 대부분이 C급이나 D급이었다.
그에 비해 이쪽은 역전의 맹장인 우사와 풍백을 포함해 A급만 여덟. 전체 히어로 수는 그리 많지 않지만, 전력 자체는 A팀과 엇비슷했다.
"그렇다는군. 어쩔 텐가? 지금이라도 순순히 항복하면 내 감옥에 사식이라도 넣어주지."
"거부하겠다."
"들은 척도 안 하는구만, 끙!"
풍백이 스틱을 꼬나쥐고 몸을 낮췄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만 같은 자세에 빌런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하늘성님! 어떻게 합니까? 진짜로 싸워요?"
"...싸워야지."
하늘성은 본능적으로 히어로들의 목을 살폈다. 목도리, 헬멧, 스카프 등 액세서리를 이용해 광적으로 제 목을 가린 녀석들.
그 목 위의 얼굴은 하나같이 하늘성의 눈에 익은 옛 빌런 출신의 놈들이었다.
"소나무 부대도 있다. 저놈들에게 잡히면 죽거나 반불구로 체포될 거다. 그래도 도망칠 거냐?"
"히익."
대통령의 처형부대. 우는 괴수도 그치게 만든다는 그들의 악명은 이미 다들 잘 알고 있다. 빌런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무기를 들었다.
"저런. 자네들 때문에 더 겁먹었지 않나. 어찌할 건가?"
풍백이 목깃을 세운 남자에게 비꼬았다.
"알게 뭐요. 난 실적 말고는 관심 없소."
"빌런 하나를 체포할 때마다 열흘이었던가? 끌끌. 선의철 그놈이 참 고깝게 목줄을 채워놨어."
"...닥치시오."
히어로들 또한 저마다 마력을 일으키고 무기를 들었다. 순수한 히어로건 소나무 부대의 인간이건 저 앞의 빌런들을 상대하는 마음가짐은 똑같았다.
괴수는 죽이고 빌런은 체포한다.
우사는 워치를 두드려 지휘관을 호출했다.
"여기는 우사. 현재 강남역 사거리에서 빌런들과 대치 중입니다. 지시를."
- 빌런? 그 벌레 놈들이 거기 숨어있다고? 큭, 다 죽여버려!
"...지휘관님. 빌런들도 사람입니다."
- 이 나라를 좀먹는 암세포들이다! 다 도려내야 할 것들이야! 저런 버러지들에게 들어가는 세금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신진광은 계속해서 씩씩거렸다.
"장관님."
왜!
"니미 시발 연금이나 잘 쳐드쇼."
우사는 워치를 손목에서 풀어 바닥에 집어던졌다. 풍백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우사를 팔꿈치로 툭툭 쳤다.
"자네, 그래서 되겠는가? 지휘관한테 밉보여서 나중에 징계라도 받으면 어쩌려고?"
"이참에 저도 영감님이랑 같이 은퇴하지요. A팀 놈들 알아서 잘할 테니까. 은퇴한 다음에 둘이서 저 어디 시골 간 다음 운사 S급 만들어봅시다."
"크하하! 내 사내새끼랑 같이 안 산다!"
우사는 히어로들의 앞에 서서 마력을 끌어모았다.
빌런의 체포에 앞서서 가장 먼저 할 일. 우사의 목소리가 강남대로에 쩡쩡 울려 퍼졌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 * *
- 히어로 동쪽 팀이 강남에서 하늘성 무리와 맞닥뜨렸습니다. 전투를 시작합니다.
- 구로 쪽, 히어로들이 포위망 탈출을 시도합니다. 일점돌파. 이대로라면 헬하운드들의 포위망이 망가집니다.
- 조덕배 님이 운사와 싸우고 있습니다. 육탄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 선무당, 인근에서 아직 움직임이 없습니다. 사태를 관망할 것 같습니다.
- 흑염룡, 대기 중입니다.
무미건조한 지화의 보고가 이어진다. 전장이 워낙에 넓고 싸우는 인원이 많아 보고할 내용도 자연스레 많아진다.
"강남 전황은?"
- 빌런들이 열세입니다. 수는 훨씬 많지만, 질에서 압도적으로 밀립니다.
스크린에는 빌런들과 히어로들이 대로에서 전투, 아니 전쟁을 벌이고 있다.
체계적으로 소규모 팀을 꾸려 대응하는 히어로와 마구잡이로 공격하는 빌런들. 근접으로 붙은 이능력자들이 서로 칼을 맞대는 사이, 후미의 빌런들은 하나둘 도망치기 시작했다.
"역시 제대로 된 지휘체계가 없으면 싸움이 안 되네요."
소규모 국지전은 빌런들이 유리하더라도, 대규모 전투는 히어로들이 훨씬 유리하다.
"어차피 빌런들은 제 목숨만 건사하면 그만이니까요."
'그에 비해 히어로는 집단전의 경험 자체가 많아. 동료애도 끈끈하고.'
하늘성이 터질듯한 근육으로 풍백을 잡아채려 한다. 하지만 풍백은 유유히 그 손아귀를 빠져나가고, 그 사이 우사가 수십 가닥의 물줄기로 하늘성의 단단한 근육을 찔렀다.
카앙-!
물줄기는 철판에 부딪힌 듯 튕겨져나갔다. 몸집만 3m에 이르는 강철 피부의 거인은 어떻게든 풍백을 잡으려 이리저리 몸을 날렸다.
"쯧."
하늘성이 분전하지만 역부족이다. 풍백과 우사가 하늘성의 발을 묶는 사이, 나머지 A급 여섯이 빌런들을 바닥에 때려박는다.
"저래서야 완전히 지겠네요."
강남 최고 전력인 하늘성. 빌런들을 이끌어야 할 우두머리가 하필이면 풍백과 우사에게 잡혀 별다른 지시를 못 하는 바람에, 다른 부하 빌런들은 히어로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
"질이 모자라면 양으로 메워야겠죠?"
나는 살아남은 헬하운드들을 은근슬쩍 뒤로 물렸다. 사거리나 오거리마다 자리잡고있던 헬하운드들이 내 지시에 따라 골목을 달리며 건물 사이로 흩어졌다.
"길은 이걸로 터놨고."
'남은 건 봉인을 풀면 끝.'
다행히 빌런 중에는 내 지휘를 받고자 하는 집단이 하나 있다. 나는 강동 쪽으로 보낸 미니피닉스에 의식을 실었다.
이제 흑염룡을 날뛰게 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