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1부 3장 (10)
<2020년 4월 12일 새벽 5시, 정부청사 대통령 집무실.>
끼이이익.
사람 한 명 없었어야 할 집무실 문이 열렸다. 원래라면 새벽 시간에 집무실의 문이 열리면 경비가 울렸어야 했음에도 경비는 울리지 않았다. 이미 안에 있는 사람은 일을 시작하고 있었으므로.
"왔군."
집무실 안의 남자, 선의철은 남자에게 자리를 권했다. 정장 차림의 중년 남자는 어물쩡 거리다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남자의 몸에는 술냄새가 짙게 풍겼다.
"무슨 일로 사람을 오라가라 하는거요."
남자의 말투는 퉁명스럽기 그지 없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대하는 태도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남자는 선의철에 대한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선의철은 그런 적의를 묵묵히 받아내며 남자에게 차를 내밀었다.
"마시게. 유성에서 만든 마력 허브티일세. 피로회복에는 딱이라더군."
"안 피곤하니까 얼른 본론부터."
"자네야 S급 이능력자이니 쌩쌩 날아다니겠지만, 나같은 무능력자는 하루에 두 시간 자고 일하려면 이게 필수야. 내가 이거 마시고 난 뒤로 커피도 끊었어."
"그러니까 본론부터."
남자의 눈에 금빛이 서렸다. 대놓고 마력까지 끌어올리며 짜증을 내는 남자의 태도에 선의철은 담담히 차를 내려놓았다.
"서울, 가지마시게."
"싫소이다."
꿈틀. 선의철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목줄이 묶여 마당을 벗어나지 못하던 광견이 제 목을 끊어버릴 기세로 주인에게 달려들었다.
"자네, 그것이 무슨 말인지 알고 있는건가? 내 명령을 거부한다는게?"
"알고있소. 하지만 그럼에도 가야하오."
"...좋아. 자네가 이렇게까지 나오는데는 이유가 있겠지."
선의철은 차를 한 잔 들이켰다. 허브티 속에 정제된 마력이 몸의 활력을 일으켰다.
"어디 한 번 설명해보시게. 신서울 오백만 주민들의 안전을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서울에 올라가야하겠다는 이유를."
"고작 나 하나 빠진다고 위험해질 신서울이 아니지 않소?"
"고작 자네 한 명에 목을 메고 살고있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몇이나 되는지 아는가?"
남자는 이를 갈았다.
"평양 전선에서 다쳐서 이제는 전력도 내지 못하는 반병신 히어로일 뿐이오. 그런데 왜 나를 옥죄지 못해 안달인 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네는 이 나라 최고의 히어로지. 요즘 아이들 말로, '폼은 일시적이지만 클라스는 영원하다'...던가? 그리고 말일세."
선의철이 잡아먹을듯이 웃었다. 여의도의 잠룡 시절부터 그의 날카로운 인상은 뱀을 연상케했다.
"애초에 폼도 하락한게 아니라 숨기고 있는거잖나. 원탁에 들어가고도 능히 남을만큼의 마력과 힘을."
"......그것은 비밀에 부치기로 하고 거래를 했던거로 기억하는데."
광검의 마력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금방이라도 찌를듯한 마력의 칼날에 선의철은 순간적으로 손이 떨릴 정도였다.
"나를 죽여도 소용없네. 자네가 가지고 있던 그 비밀. 내가 죽으면 곧 전 세계에 퍼지게 될테니. 피보는게 자네 한 명일 것 같은가? 광검이 실은 평양에서...흐흐."
"설마 누구에게 말한건 아니겠지."
"그럴리가. 단지 내가 죽으면 블랙마켓에 그 정보가 다 퍼져나갈 뿐이네. 내가 자네와 한 약속을 어기기야 하겠는가. 원탁 히어로 보유국이라는 타이틀을 포기하면서까지 자네에게 목줄을 채웠는데."
"...이제 이승형이 있으니 나를 그냥 놔두시오. 그쪽이 지금까지 잘 해왔던것처럼 이승형을 영웅으로 만들면 되는거 아닌가?"
광검의 말에 선의철이 고개를 저었다.
"이승형은 아직 안 돼. 자네만큼의 경험도 없고, 자네만큼의 업적도 없어. 이승형이라는 존재가 광검, 허윤환이라는 이름을 대체할 수 있다고 보는가?"
"그래서 그 업적으로 서울 수복 작전을 꺼내든거요? 화마룡을 죽였다는 위업만으로 부족해서?"
"이보게, 윤환이."
선의철이 안경을 벗었다. 왼 쪽 눈 아래의 칼자국이 씰룩 거렸다.
"악마종이니 뭐니 하는 것들 아무리 잡아봐야 그건 국민들의 마음에 와닿지 않아.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야 그 공포를 모르는 법이거든. 하지만 서울은 다르지. 이미 우리 국민들의 유전자에는 나라를 빼앗긴 것에 대한 슬픔과 분노가 각인되어 있다네. 그게 이번에는 수도가 되었을 뿐이지."
"그럴 목적이라면 이승형만 보내면 될 일 아니오. 굳이 설화공주까지 서울로 부른 연유가 무엇이오?"
"크하하하하!"
선의철이 답지않게 크게 웃었다. 무릎까지 치며 내뱉는 광소가 집무실 전체를 울렸다.
"천하의 광검도 역시 사람이구만! 그래, 그게 마음에 걸리는 게지? 설화공주를 서울에 보내기에는 너무 걱정이 되는거야!"
"......부정은 하지 않겠소. 그쪽도 알 거 아니오? 딸가진 애비 마음이 어떤지."
"설화공주가 자네 딸은 아니지. 내가 자네의 그 극성에 의심돼서 몰래 유전자검사까지 알아봤을 정도니까. 제자 아끼기를 무슨 친딸처럼 그러는군. 참 부모가 누군지 몰라도 부러워, 설화공주 님은."
"......."
광검은 목이타는지 차를 들이켰다. 선의철의 말대로 코어에서 추출된 마력이 담긴 허브는 신체의 활력을 북돋았다.
선의철도 한 모금 들이켜 목을 축였다.
"자네가 오해할까봐 그러는데 내 분명히 말하지. 설화공주를 부른건 정부가 아니야."
"......뭐요?"
광검의 눈썹이 크게 일그러졌다.
"그게 무슨 말이오? 정부에서 부르지 않았으면 왜 그 아이가 부산에서 이곳까지 올라온단 말이오."
"역시. 내 그럴줄 알았지. 자네 직접 설화공주와 얘기했지? 그러면 스승에게까지 거짓말을 할 정도로 의지가 강했던거군. 큭큭."
사나워지는 광검의 기세에 선의철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서울 수복 작전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전부터 이미 여러 통로를 통해 루머를 뿌렸지. 사실 설화공주는 내 플랜에 없었어. 이번 서울 수복 작전은 전적으로 이승형이 주인공이 되어야하는 무대이니까. 그런데...."
선의철이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것이 꼭 먹이를 노리는 뱀의 그것과 같았다.
"본인이 먼저 요청하더군. 이번 서울 수복 작전에 참가하게 해달라고. 오죽하면 자네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할 정도로 말일세."
"석하랑 이 것이...!"
광검은 스승을 속인 석하랑이 괘씸하였지만, 동시에 제자가 자신의 경지와 비슷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에 놀랐다.
스승을 상대로 제 감정의 노출까지 숨길 정도로 석하랑은 이미 엄청난 경지에 올라갔다.
"최근에 급성장을 한 건지, 아니면 깨달음을 얻어 더 높은 경지에 다다른 건지 나는 모르지. 하지만 본인이 적극적으로 과거의 트라우마를 청산하겠다고 나서는데 내 어찌 막을 수 있겠나? 나는 그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에게 최대한 많은 응원을 해줬을 뿐이야. 잘만 하면 시청사의 그 교활한 뱀도 치워버릴 수 있고."
"......알겠소. 그럼 이렇게 합시다."
광검이 차를 전부 들이키고 잔을 탁 내려놓았다.
"설화공주를 빼시오. 대신 내가 가리다."
"안 돼. 절대로 안 될 말이지. 자네는 내 말을 듣지 못했나? 이 작전은 이승형을 위한-"
"그도 안 된다면 나도 같이 가리다. S급 셋 다."
과격하기까지한 그 말에 잔을 들려던 선의철의 손이 굳었다. 그는 광검에게서 초조함이라는 감정을 느낀것에 의아해했다.
"무엇이 그리도 두려운가? 시청사의 괴물이 S급 이상이 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그 말로만 듣던 SS급의 괴물이?"
"그 놈은 별 것 아니오. 화권과 설화공주 두 명이면 능히 그 괴물을 이길수 있을테니. 하지만...."
광검은 말을 삼켰다. 무언가 설명하려던 것이 있음에도 차마 말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생전 처음 보이는 광검의 불안한 모습에 선의철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하하. 광검도 자식들 물가에 내놓으려니 걱정돼서 그러는구만. 자네 결혼해서 애라도 낳았으면 큰일날뻔했어. 흐흐."
"......."
선의철은 허브티를 마지막 한 방울 까지 다 들이켰다.
"걱정말게. 이승형은 내 조카라서 그러는게 아니라, 진짜로 강한 의지와 능력을 가진 녀석이야. 설화공주야 자네가 더 오랜 시간을 봐왔으니 두 말할 것도 없고. 그 둘이 이제 쌍두마차가 되어 신세대를 이끌어야하네."
히어로의 세대 교체는 생각보다 빠르다. 워낙 히어로로 각성하는 사람이 적은것도 있지만, 높은 경지에 이르기 전에 대부분 괴수와의 전투에서 다쳐 은퇴를 하기 일쑤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자네와 풍백, 우사, 운사에게 나랏일을 맡기겠는가? 이미 중국은 운장을 중심으로 세대교체가 일어나기 시작했어. 우리도 그에 발맞춰서 움직여야지. 신세대. 얼마나 멋진 말인가?"
"...알겠소. 그러니 보내주시구려."
"......언제부터 광검이 주인에게 이렇게까지 질척거리면서 이빨을 드러냈었지?"
선의철의 눈꼬리가 미미하게 떨렸다.
"자네와 S급 둘이 덤벼야 간신히 이길 괴수라도 있다는건가? 내가 모르는 사이에 평양의 괴수가 서울까지 내려오기라도 한건가? 이해할 수 없군. 왜 이리 고집을 부리는겐가. 내가 내 플랜을 꺾으면서까지 자네를 서울로 보낼 이유를 대보시게. 나를 제외하고도 신서울 오백만 인구가 모두 납득할 수 있는 이유."
"...그건 말할 수 없소."
선의철이 손을 휘휘 저으며 축객령을 내렸다.
"그렇다면 그건 절대로 불가하네. 자네는 신서울에 있어야해. 도대체 무엇이 그대를 그렇게까지 두렵게 한단 말인가?"
광검은 두 눈을 감았다. 서울에서 계속 느껴지는 희미한 기운. 그것은 이미 그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죽음의 기척이었다.
모든걸 털어놓을까. 하지만 광검은 눈앞의 선의철을 믿을 수 없었다. 그건 유영호에게도 아직 말하지 못한 비밀이다. 광검은 조용히 문을 나서다 문 앞에서 선의철에게 말했다.
"알겠소. 하지만 이것 하나는 약조해주시구려."
"또 뭔가?"
"혹시나 이승형과 석하랑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경우, 곧바로 나를 서울로 보내주겠다고."
선의철은 잔을 들어 확 던지려다가 겨우 내려놓았다. 숨을 고르며 진정한 선의철은 화를 삼키며 말을 토해냈다.
"안 돼."
* * *
<2020년 4월 12일 새벽 5시, 구로 청화단 아지트.>
"선의철은 광검을 절대 서울로 올려보내지 못해요. 신서울의 안전도 안전이거니와, 광검이 이 큐브의 출처를 아는순간 곧바로 신서울로 달려가서 선의철 모가지를 날릴테니까."
나는 탁자위의 큐브를 가리켰다. 큐브는 내 마력에 의해 캡슐처럼 봉인되어,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게 되었다.
"광검과 선의철은 서로의 약점을 하나씩 쥐고 있지만 당장은 선의철이 더 강한 목줄을 쥐고 있죠. 그래서 이번에 서울로 올라오는 히어로 중 S급은 화권, 설화공주 두 명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큐브가 위험한 물건인건 알겠는데, 광검이 왜 선의철 죽이려든다는거냐? 신서울 위험해져도 이게 그렇게 중요한거면, 나같으면 S급 셋 다 올려보낼텐데."
덕배가 캡슐을 들며 물었다. 이 방에는 덕배와 나, 단 둘 뿐이다.
"촉수꺼비 기억해요? 선의철 얼굴에 칼침놓고 큐브 빼았아 도망쳤다는 그 국회의원."
"어."
"광검 불알친구에요. 거의 의형제 수준."
"...광검이랑 그 촉수꺼비가 의형제라고?"
나는 킥킥 웃으며 긍정했다.
"같은 곳에서 자랐어도 사회에 나와서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만나는 사람이 다른거죠. 당신도 알잖아요? 사람이 환경에 따라 어디까지 다르게 될 수 있는지. 마치 천가을이 마스커레이드가 아닌것처럼."
생지옥이 되었을 구로는 천가을이 잠시 숨죽이고 쉴 수 있는 안식처가 되었다. 덕배가 캡슐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결국에 내기는 어떻게 됐냐? 천가을 오자마자 그냥 바로 방으로 들어가더구만."
"원하는대로 하게 해줬어요. 그렇게 겁먹어놓고도 범죄자 소굴 들어갔다 나온게 대견하기도 하고, 그 발연기 펼치면서도 제 의사 그대로 전달해주기도 하고. 뭣보다...옛날 생각 나게 해줘서 고맙기도 했고."
"무슨 소리야 그건?"
"그런게 있어요."
마력 수치가 똑같듯, 천가을은 천가을이었다.
"천가을 씨 설령 실패했어도 딱히 내기의 댓가 같은건 받을 생각 없었어요. 애초에 사흘 뒤면 신서울로 데려다주고 끝나는데."
"...신서울에 데려다주면 위험이 사라지나?"
나는 내 베일을 가리키며 웃었다.
"전별품으로 이거 줄려구요. 이게 또 S급 밑의 공격은 전부다 칼같이 방어해내거든요?"
"그냥 천가을 옆에 붙어서 살지 그러냐?"
"나중에는 그럴 건데요?"
"......?"
덕배가 의아해하는 모습은 언제봐도 유쾌하다. 나는 천가을이 잠에서 깨어날때까지, 신나게 서울에서의 일이 끝난 뒤의 일들을 말했다.
* * *
"응? 아빠. 그래. 미안해. 이제야 연락해서."
"슬슬 새벽인데 괜찮아? 엄마는 일 안가도 돼? 뭐? ...그러지마. 나 이제 곧 돌아갈 수 있어. 돌아가면 바로 촬영들어갈거야."
"응. 여기 나 구해주신 분이 사흘 뒤면 서울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대. 차원문 발생 때문에 괴수가 길을 막아서 좀 돌아가야 한다나봐. 사흘만 참아줘."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괜히 나 찾으려고 애쓰지 말고 나 돌아가면 된장이나 끓여줘. 엄마 된장찌개 안 먹은지 너무 오래돼서 벌써 밥 못먹겠더라."
"장례식? 보험? ...사망신고가 벌써 됐다고? 이승형씨가 상주를 왜 해?"
"뭐? 진짜? 와, 걔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 불여시네. 언니 언니 하면서 나 좋다고 할 때는 언제고 오디션 뜨니까 칼같이 자기 프로필 넣었다는거야? 대박이다, 진짜."
"응, 그래. 조심할게. 응? 아냐, 여자분이야. 나 구해준 사람. 이능력자인데...강하고...멋있고...조금 성격은 이상하긴 하지만."
"...엄마, 딸 그런 쪽 아니거든? 뭐? 요즘 세상에 그런게 어딨어? 아빠는 어느 쪽이든 괜찮다고? 그게 하나뿐인 딸한테 할 소리야? ...으휴, 말을 말자."
"그래. 이제 전화 더 못할 것 같아. 이것도 간신히 구한거라.... 응. 꼭 살아서 보자."
"미안해. 이제 진짜로 끊어야할 것 같아. 응. 몸조심할게."
"사랑해."
삐, 삐, 삐.
- 지금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확인하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