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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40화 (40/1,497)

〈 40화 〉1부 3장 (8)

<4월 11일 23시 55분, 강남 S병원 주차장.>

"하아암."

남자는 길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서울 전역에 펼쳐진 빌런들이 모이는 회동에도 남자는 아무 긴장감이 없었다.

"야. 넌 지금 잠이 오냐?"

"그러면 이 시간에 잠 안오고 뭐하겠냐. 나는 아침형 인간이라고."

남자는 쏟아지는 졸음을 참으며 시계를 확인했다. 자정으로부터 5분 전. 이제 곧 회의가 시작될거고, 그러면 최소 3~4시는 되어야 끝날 것이다.

"올 사람은 다 왔지?"

"어. 강서 땅개까지 왔으면 끝났지. 구로 등대야 워낙 쫄보니까 자기 성에서 안 나올테고."

"영등포는? 그 쪽 아무도 안 왔잖아."

"몰라. 며철전부터 갑자기 연락 안 되더라. 괴수한테 잡아먹혔나보지."

남자가 죽은 이들을 조롱하며 벽에 기댔다. 야간 경계를 서는거나 다름없지만, 이곳을 습격할 미친놈은 없다.

또각.

또각.

또각.

근방에서 들릴 리 없는 여자구두굽 소리. 그 소리는 분명히 어둠 속에서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야. 나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철컥. 동료의 질문에 남자는 칼집에서 칼을 꺼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저벅, 저벅.

하이힐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둔탁한 발걸음 소리. 남자는 재빨리 손전등을 들어 어둠속을 비췄다.

"여자?"

아래에서 위로 훑은 손전등 빛은 분명 여자의 실루엣이었다.

검은 하이힐, 밝은 청바지. 골반까지 올라온 청바지 안으로 들어안 검은 티셔츠. 그리고 그 위에 걸친 고급스러운 청백의 로브.

여자는 로브와 비슷한 색의 베일을 콧잔등에 걸치듯 둘러 얼굴 아래를 가리고 있었다.

"누구냐! 여긴 왜 왔어."

"...왜 오긴, 회담때문에 왔지."

여자는 베일 사이로 말했다. 남자는 그 목소리가 어디서 들어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자신에게 겨눠진 검을 가리켰다.

"언제까지 겨눌 생각이지?"

"죄송합니다만 어디서 오셨습니까? 누구 대신 온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못 들었습니다만."

"구로."

남자와 동료가 피식 웃었다. 서울 전역에서 구로는 최고 겁쟁이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오죽하면 구로에서 오지 않는다는 소식에 하늘성도 포기했겠는가.

상대의 배경을 알게된 남자는 곧바로 태도가 경박해졌다.

"이봐. 등대가 보냈어? 미안하지만 여긴 등대 자리는 없어."

"등대 아닌데?"

여자가 말을 마치자 푸른 불꽃이 피어올랐다. 어둠속에서 주변을 훤히 밝히는 불꽃에 남자가 총구를 들어올렸다.

탕!

소음기가 달린 권총에서 불이 뿜어졌다. 초연을 뿜으며 밤공기를 가르는 마탄은 여인의 이마를 향해 정확히 날아갔다.

깡!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마탄은 모습을 감췄다. 그제서야 남자는 푸른 불꽃과 함께 타오르는 거대한 인형을 확인했다.

Krrrrr.....

남자의 키를 훌쩍 넘기는 2m 가량의 거인.

전신을 칠흑의 갑옷으로 감싼 와중에 관절 사이로 타오르는 푸른 불꽃. 어깨라인을 빙 둘러싼 청백의 깃털. 목 위에는 독수리의 형상을 한 투구가 걸려있고, 그 사이로 타오르는 눈동자는 남자를 금방이라도 잡아먹으려는 듯 번뜩였다.

"그만."

여자의 명령에 괴인은 손을 거뒀다. 바닥으로 내려 펼친 괴인의 손에서 구겨진 마탄이 떨어졌다.

꿀꺽.

남자의 침삼키는 소리가 주차장을 가득 채웠다. 여자는 그에 남자를 비웃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비켜. 난 너희들 보스한테 용건이 있으니."

여자의 박력에 남자와 그 동료가 우물쭈물하자, 여자는 그대로 하이힐 소리를 내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 뒤를 따르는 괴인은 슬쩍 남자를 노려보고 고개를 돌렸다.

"...저거 뭐야?"

투구 속에는 푸른 불꽃만 있을뿐, 사람의 머리가 없었다. 남자는 그대로 기절했다.

* * *

[이게 그렇게 놀랄만한 얼굴인가?]

괴인이 잔뜩 빈정거렸다. 가을은 속으로 웃으며 딴지를 걸었다.

"처음 보는 사람은 다 놀라죠. 덕배 씨도, 지화 씨도, 저도 엄청 놀랐는걸요. 그게 당신 이능력이에요?"

[아니. 괴인화라는거다. 평상시에는 그저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있을뿐.]

"그럼 그게 그 쪽 본모습인가봐요?"

가을의 말에 독수리 모양 투구가 좌우로 움직였다.

[본모습은 따로 있다. 굳이 그 모습은 꺼내고 싶지 않아.]

"말투까지 완전히 달라지네요."

[인간형일 때는 그 외형에 맞춰 행동될 뿐이다. 괴인으로 형태를 바꾼 지금에까지 굳이 그 말투를 유지할 필요가 없지. 그리고 이 모습으로 그렇게 말하면 안 어울린다.]

"...이거 마력을 통한 의사전달? 그런거죠? 소리가 없어서 잘은 판단하기 어려운데."

가을이 고개를 돌려 괴인, 피닉스와 눈을 마주했다.

독수리의 부리 아래에서 타오르는 푸른 불꽃은 분명히 '가을을 직시하고 있었다', 고 가을은 느꼈다.

"꼭 말투가 남자같아요. 평소에도 이렇게 얘기하는건 어때요?"

[...이건 내가 제어할 수 있는게 아니다. 형태에 따라 달라지는거다.]

"...흥. 알았어요."

가을이 복도를 앞에 두고 멈춰섰다. 복도의 끝에는 범죄 조직의 우두머리들이 모인 식당이 있었다.

"......은근히 긴장되네요."

[지금이라도 포기해도 된다. 내가 인간형으로 바꿔서 들어가면 되니.]

"긴장이 되는거지, 하기 싫다는게 아니거든요? 그냥."

가을의 두 손이 떨렸다. 방금 전 남자가 저를 향해 총을 쏜 순간, 가을은 명백히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피닉스의 검은 건틀릿이 가을의 손을 꾹 잡았다.

[겁먹지 마라.]

금속같은 질감의 장갑 사이로 흘러나온 푸른 불꽃이 가을의 손을 따스히 감쌌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네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다.]

피닉스의 투구 속 불꽃이 흔들렸다. 그것이 꼭 웃는 모습같아 가을은 저도 모르게 홀린듯 입을 열었다.

[내가 옆에서 너를 지켜주겠다. 명심해. 네 옆에 내가 있음을.]

그 말을 끝으로 피닉스의 모습이 사라졌다. 인간의 시야에는 보이지 않는 투명화의 마법. 가을은 제 손을 꽉 쥐는 따뜻한 감촉에 고개를 푹 숙였다.

[왜 그러지? 열이 조금 오른 것 같다만.]

"......."

가을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 * *

<4월 12일 00시, 강남 S병원 식당.>

"다들 모였나?"

중절모의 중년 남자가 식당안에 앉은 좌중을 슥 둘러보며 말했다.

저마다 탁자에 앉은 이들은 손을 들거나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을 했다. 남자는 빈 자리에 옆에 앉아있던 빌런에게 물었다.

"구로랑 영등포 놈들은?"

"구로는 연락하지 않았고, 영등포는 연락두절입니다."

중년 남자, 하늘성이 담배를 재떨이에 짓이겼다.

"겁쟁이들. 도망쳤군."

하늘성이 중절모 아래 눈을 빛냈다. 준S급이 내뿜는 기세에 각 지역에서 모여든 조직의 대표들이 숨을 삼켰다.

A급이 몇 명 있기는 했지만 하늘성만큼 S급에 가장 근접한 남자는 없었다. 그것이 하늘성이 이 연합의 사실상 대표 역할을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이래서 쫄보들을 받지 말자고 한 것을...."

"현명한거지. S급 둘이나 온다고 난리치는데 안 도망가고 버티는게 이상한 거 아니요?"

식탁 끝에 앉아있던 남자가 하늘성을 비꼬았다. 유일하게 이 연합에서 하늘성에게 반기를 자꾸 드는 사내는 강서구를 통합한 조직의 우두머리, <땅개>였다.

"닥쳐라, 똥개."

땅개는 검지를 들어 좌우로 흔들었다. 강남과 강서라는 거대한 세력을 동서로 가진 그들은 언제나 의견이 갈린채 티격태격 싸웠다.

사실상 연합은 둘의 계파로 갈라져있었다.

"현실을 보자는 거야. 서울 수복 작전? 말은 좋지. 실상은 빌런들 잡아다 체포하려고 오는거 아니겠어?"

땅개의 지적에 다른 우두머리들이 침음성을 흘렸다. 그의 말대로 신서울의 히어로들은 단순히 괴수를 퇴치하는 선에서 작전을 끝내지 않을 것이다.

"히어로놈들에게 체포되어 그놈들 발밑에 들어가면 어찌 될까? 반은 신서울 지하감옥에서 평생을 썩을테고, 반은 정부의 사냥개가 되어 목에 소나무나 차겠지. 큭큭."

땅개는 제 목을 가리켰다. 그의 목은 피부를 벗겨낸 듯한 자리에는 소나무 모양의 흉터가 남아있었다. 하늘성이 마력을 끌어올리며 땅개를 압박했다.

"그래서 꼬리를 말고 도망칠건가? 싸움조차 해보지 않고?"

"싸우면 지는데 당연히 도망쳐야지. 난 이렇게 모일 게 아니라 당장 짐싸고 도망쳐야한다고 보는데."

땅개 또한 마력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명에 하늘과 땅이라는 차이가 들어간 만큼 둘의 생각은 극과 극을 달렸다.

"서울은 나라에서 버린 땅이다. 우리가 그 땅의 주인이 되었는데 그걸 왜 다시 빼았겨야 한단 말이냐. 다리를 폭파시키고 도망간 신서울 놈들이 그간 서울을 위해 해준게 무어 있다고!"

"해준 건 없지. 하지만 땅이든 돈이든 지킬 힘이 없으면 목숨값이라도 건사해야지. 고작 변방 범죄조직들이 나라 상대로 덤비는거 절대 안 되지. 하늘성 당신은 연식 있으니까 알 거 아니야, 범죄와의 전쟁. 안 그런가?"

땅개가 좌중을 훑었다. 이미 다른 조직의 우두머리들은 슬슬 흔들리고 있었다.

"그만해라. 오늘 모인건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야. 어떻게 하면 싸울 수 있을까, 그걸 고민하기 위해 모인 회담이다."

"킥. 강남 땅부자인 하늘성 선생은 포기 못하시겠지. 빌런 연합? 말만 번지르르하지 사실상 동네 조폭들 무리 아닌가. 우리가 연합해서 싸우면 히어로들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땅개가 식탁을 두드렸다.

"정신차려. 있는거 다 처분하고 해외로 튀는 게 답이야. 이미 성남이랑 인천에서는 우리들 현상금 걸고 수배령을 내렸다고. 어떻게든 돈 모아서 중국이나 러시아로 튀어야지. 그래야 살 수 있어, 이제는."

"그러는 자네는 여기 왜 남아있는가?"

땅개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미 나는 다 처분하고 왔지. 너희들 골때리는 모습 한 번 보고 튀려고. 강서는 이제 무주공산이다. 클클."

땅개는 제 조끼 안을 가리키며 비릿하게 웃었다. 제 재산 지키기를 부모님 모시기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땅개가 손을 털고 도망칠 준비를 모두 마쳤다는 것에 조직 우두머리들이 제대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하늘성이 분위기를 전환시키려던 찰나, 문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그거 잘 됐네."

또각. 또각.

식당 입구에서 들려오는 하이힐 소리. 식당에 모인 빌런들의 눈이 저절로 돌아갔다.

"안 그래도 강서 점령하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갑작스레 식당에 들어온 여성의 등장에 빌런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들어온거야?!"

"그야 당연히 정문으로 걸어왔지. 그래서 당신이 강서의 주인이었다고?"

여인은 베일로 얼굴의 반을 가리면서도 눈빛으로 땅개를 흘겼다. 그 시선에는 비웃음과 조롱이 섞여있었다.

"미리 인사해도 될까? 그 쪽 땅 이제 우리거라고."

"이 미친...!"

땅개가 테이블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파사삭!

동시에 바닥을 뚫고 튀어나온 돌가시가 여인에게 쇄도했다.

"이런...!"

하늘성이 놀라 마력을 움직이려던 찰나, 돌가시의 앞에 거대한 마력이 움직였다.

쿠웅!

막대한 마력의 흐름과 함께 돌가시들이 폭발해 흩어졌다. 막 뒤의 돌가시를 타고 따라가던 땅개는 그대로 온 몸에 폭발의 여파를 뒤집어쓰고 바닥을 굴렀다.

"크아아악!"

전신에 바늘같은 암석들이 박힌 땅개를 구두굽으로 밀어낸 여인이 슬쩍 자리를 확인했다.

"명패에 자리? 본격적이네, 정말."

영등포, 구로, 강서. 테이블에 놓인 구역 중 영등포와 강서의 의자를 옆으로 치워버린 여인은 당당히 구로에 앉았다.

동요하는 빌런들에 손을 들어 제지한 하늘성이 물었다.

"등대는 어디있지?"

"열심히 구로에서 유리창을 닦고 있지. 이제 구로는 '우리' 거야."

"혹시 영등포도 네놈들 짓인가?"

"어머. 똑똑한데? 역시 Y대 교수님인가?"

하늘성이 침음성을 흘렸다. 상대는 이미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 여기 모인 그 누구도 하늘성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어디서 온 누구냐?"

"밖에 있던 애들도 그렇게 묻던데 부하인가봐. 모처럼 만난김에 소개할게."

여인이 일어서 가슴에 살포시 손을 얹고 고개를 숙였다.

"구로 일대를 점령한 빌런 조직, <청화단>의 <마스커레이드>. 서울 수복 작전에 앞서 빌런 여러분과 상의할게 있어서 왔어."

하늘성은 눈앞의 여자를 보며 제가 느낀 마력의 흐름을 의심했다.

무능력자. 하지만 그 뒤에서 느껴지는 소름돋는 귀기는 자신의 경지로 파악하기 힘든 무언가가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을 느끼는 이들은 이 연합 안에서도 A급에 이른 극히 일부. B급의 우두머리들은 갑자기 나타나 주인 행세를 하는 여인이 아니꼬왔다.

"흥! 어디서 구르다 온 년인지 모르지만 새로 왔으면 신고식을 해야지!"

민소매티의 남자가 주먹을 맞부딪히며 마스커레이드에게 달려들었다.

여인은 아무 미동도 없이 무표정으로 남자의 주먹을 응시했다.

"...!"

하늘성은 보았다. 여인의 뒤에 밀착해있던 거한의 괴물을. 여인을 보호하기 위해 찰나의 순간 존재를 드러낸 그 괴물은 남자의 주먹을 잡고 창문으로 날려버렸다.

와장창!

수 미터를 날아가 건물 밖으로 던져진 남자를 보며 우두머리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여, 염동능력자?!"

아니다. 하늘성은 확신했다. 다시 모습을 숨긴 저 여인 뒤의 괴물은 여러 조직원 중에사도 특히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

"괴이한...인간?"

학자로서의 본능이 저 존재를 정의하려고 튀어나왔다. 마치 괴수와도 같은 흉폭함을 사진 인간. 괴물같은 마력을 가진 인간.

그것을 두고 '괴인'이라고 칭하지 않으면 또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탕!

여인이 탁자를 손바닥으로 내리치며 좌중의 주목을 끌었다.

"그러면 슬슬 이야기를 시작하자. 서울을 지킬 방법에 대해."

베일 아래 가려진 천가을의 미소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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