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1부 3장 (8)
<2020년 4월 11일 22시, 청화단 구로 아지트.>
"그런 의미에서 빌런연합 회담에 난입하는데 좋은 아이디어를 모집하고자 합니다."
내 말에 덕배가 인상을 찌푸렸다.
"왜요? 의견 구하라면서."
"쳇."
덕배가 당구를 치던 공을 집어들고 지화에게 던졌다. 지화는 제 손에 들린 C급 코어를 들고 기뻐했다.
"흐흐흐. 봤죠? 단장님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라니까요."
"...코어로 당구치는 건 나도 생각 못했는데. 그런데 저를 두고 내기한 거예요? 지금?"
"문제있냐? 이거 어차피 보상으로 준건데."
"문제는 없죠."
당장 천가을만 하더라도 저기서 코어를 잔뜩 감싸안고 누워있다.
"으으으. 이렇게 하면 각성을...."
내 마력으로 감싸인 괴수의 코어는 인천에서처럼 괴수를 꼬이거나 하지 않는 안전한 물건이다. 나는 휴게실 한 가운데에 원형의 탁자를 놓고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다른 이들 또한 저마다 의자를 챙겨와 앉았다.
"그래서 좋은 의견 있으면 말해봐요. 아까 얘기한거 잘 생각해서."
"빌런 연합을 청화단의 산하 조직으로 만들면서 동시에 서울 수복 작전의 히어로들과 대치하는 부하로 쓴다...는거였죠?"
천가을이 어딘가 찜찜한 낯빛으로 일어섰다.
"네. 빌런 연합과 히어로들이 양패구상 할 수 있도록. 그리고 약화된 빌런 연합의 위에 청화단이 서는거죠. 그리고 서울을 점령하는거고."
머릿속에 계획은 있다. 나는 그 계획을 이미 부하들에게 말했었다.
"오늘 있을 회담에서 청화단의 존재를 알리고 연합에 참여해야해요. 그리고 빌런들이 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우도록 유도하고."
"어떻게 할 건데?"
나는 주먹을 들어올렸다.
"협박으로?"
"힘으로 억누르는것은 좋지 않아요. 아무리 빌런들이라고 해도, 결국에는 그들도 사람이에요. 피닉스 씨가 그 모든 이들을 괴인으로 만들지 않으면, 언젠가는 배신하겠죠. 공포는 일시적이니까."
"단기적으로는 좋지. 하지만 네 목표는 서울 남쪽을 모두 점령하는거 아니었나? 나중에는 괴수가 아니라 네가 무서워서 도망칠 걸."
나는 긍정했다. 틀린말은 아니다.
"그럼 회유를 할까요? 우리밑에 들어와 싸우면 코어를 주겠다. 그런식으로?"
"빌런은 용병이나 사냥꾼이 아니다. 네가 코어를 제시하면 칼을 들고 벗겨먹으려 들 녀석들이지.
"저기...."
지화가 손을 들자 나는 말해보라는듯 손을 내밀었다.
"채찍으로 먼저 때리고 당근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단장님의 압도적인 힘을 과시하고, 그들에게 청화단의 산하로 들어왔을때 제시할 수 있는 이점을 알려주는거죠."
"괜찮군. 어이, 넌 빌런들에게 뭘 줄 수 있지?"
나는 지화가 말한 당근을 생각했다.
"일단 괴인이 되었을 때의 불로불사? 아, 불사는 아니네요. 일단 죽기는 하니까."
"히어로들한테 죽임을 당하면 죽는겁니까?"
지화가 살짝 겁을 먹은것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당신들의 코어만 제가 회수하면 되살릴 수 있어요. 제가 죽으면 제가 만든 괴인들도 죽는거죠."
"앞으로 평생을 곁에서 지키겠습니다! 단장!"
지화의 과잉충성에 가까운 모습에 덕배가 혀를 찼다.
"기각이다. 제 목숨 저당잡히는데 뭐가 좋다고 괴인이 되겠어."
"음, 그러면 괴수로부터의 안전은 어떨까요?"
가을이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피닉스씨가 직접 나서서 괴수들을 퇴치하는거죠. 그리고 그 괴수의 부산물을 조직들에게 나눠주거나."
"그건 빌런이라기보다는 히어로 아니냐?"
"꼭 빌런처럼 움직여야하나요? 결국에는 서울을 사람 사는 도시로 재건하려는거지, 빌런들의 천국으로 만들려는게 아니잖아요?"
"점령이란 말을 쓰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런 셈이긴 하죠."
빌런들이 필요악임에도 당장 동원할 전력이 없음에 한탄스럽다. 마음같아서는 괴인들을 양산해 협회와 대치하고 싶은데, 그랬다가는 전 세계의 이목을 끌어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서울에 갑작스레 출몰한 괴물들과 악의 조직. 전 세계 히어로들의 어그로를 끌기에 딱 좋은 도발이다.
"빌런들이 자체적으로 협회의 작전을 방해하면서, 청화단은 동시에 그냥 단순한 악당 조직으로 보이게끔.... 어렵네요. 이런 대본 받았으면 작가를 바로 까버렸을 거에요."
"누가 쉬운 길 놔두고 어려운길만 고집해서 그런거지 뭐."
"...그거 저한테 얘기하는건 아니죠?"
덕배와 가을이 내 시선을 피했다. 지화가 무언가 생각에 잠긴듯 고민에 빠졌다.
"응? 김지화 씨. 뭐 생각나는거 있어요?"
"아뇨. 갑자기 막 난입해서 그 동네 조직들을 제 수하로 부리는 스토리. 딱 그런 영화가 생각났어요."
"어, 저도 그거 왠지 알 것 같은데. 미국 영화 맞죠? 한참 히어로물 사라지기 마지막에 나오던."
가을이 검지를 들어 양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나는 박수를 치며 지화를 칭찬했다.
"그게 여기도 있어요? 우와. 쓸데없이 구현 잘 해놨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덕배는 대화에 끼지 못하고 눈알만 굴리고 있다. 아무래도 모르나보다.
"부하 2호, 나중에 시청할 것을 명령합니다. 악당이라면 누구나 귀감이 될만한 내용이니까 잘 참고하도록 해요."
"배우로써 참 존경하는 분이기는 한데, 그걸 악당이 되는 참고자료로 보면.... 하아. 웃프네요. 그게 악당들의 교과서가 되다니."
"현 상황에서 참고하기에는 딱 좋은 임팩트라고 생각합니다."
그 뒤로 나와 지화, 가을이 플롯을 정했다. 등장부터 대사, 행동, 코디까지. 약 10여분간의 대화가 끝날 때까지 덕배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무능한 녀석.
"좋아요. 컨셉은 그걸로 확정. 흐흐흐. 무슨 마술을 보여주면 되려나? 연필 마술? 소각 마술?"
"...피닉스씨. 또 거기서 사람 하나 죽이려는거 아니죠?"
흠칫. 가을의 지적에 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 어. 첫인상은 강렬한게 좋지 않을까요? 채찍 한 번 크게 휘두르는거죠."
"말단 조직원이 아니라 회담장 있는 사람들 다 몰살할거면서."
가을이 제 명치에 손을 올렸다.
"좋아요. 제가 갈게요. 청화단의 대표인 척. 사람 한 명 안 죽이고 피닉스씨가 원하는대로 상황을 만들어볼게요."
"가을씨 머리라면 믿을만하긴 한데...."
나는 덕배와 지화를 번갈아봤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가을 씨 혼자 보내기에는 불안하네요. 그냥 저 혼자 다녀오죠."
"나는 천가을 말에 찬성. 뭔진 모르겠지만 너보다는 천가을이 더 잘 할 것 같다."
덕배가 반기를 들었다. 나는 지화를 노려봤다.
"김지화 씨?"
"......."
김지화는 어느쪽에도 붙지 못하고 제 의견을 말하지 못했다. 막상 아이디어는 제시했지만 저보다 윗사람들이 의견이 엇갈린것에 갈팡질팡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내정치에서 어느 라인을 잡아야하나 고민하는 것처럼.
내가 지화를 재촉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덕배가 끼어들었다.
"2찬성 1반대 1기권. 끝났군."
"조덕배 씨? 청화단은 민주주의 아니거든요? 창염의 피닉스 이하 독재정권이거든요?"
"피닉스 씨."
가을이 갑자기 내 손을 붙잡았다.
"우리 내기를 하죠."
"무슨 내기요?"
갑자기 귀가 솔깃해진다.
"제가 빌런 연합을 설득해내서 협회와 싸우게 만들면 제 승리. 성공하면 일이 끝나고 바로 부모님께 연락이라도 하게 해줘요. 어차피 신서울로 데려다달라고 해도 안 들어줄 것 같으니까."
"그거야 그렇죠."
"하지만 실패하면 그 때는 저를 피닉스씨 마음대로 해도 좋아요. 빌런들 다 죽여서 청화단 산하에 두게 되더라도 저는 아무 말 안할게요."
"...겨우 연락 한 번에 너무 큰 걸 거는거 아니에요?"
가을이 손을 꾹 붙잡았다. 그것만으로 가을의 의지가 충분히 엿보였다. 나는 가을의 시선을 피했다.
"가을씨가 혹시나 사람들 죽을까봐 걱정하는건 알겠지만, 이거 너무 나만 손해보는 내기인 것 같은데요."
"만약에 실패하면 저, 신서울로 돌아가는거 포기할게요."
"뭐?"
덕배마저 놀랐다. 나는 가을의 손에서 느껴지는 아주 미약한 마력에서 진심을 느꼈다.
"아예 괴인으로 만들어도 좋아요. 신서울에 한 발자국도 들이지 않아도 좋아요. 그러니까 제가 가게 해주세요."
"무슨 자신감으로 그렇게까지 얘기하는 거예요, 도대체?"
가을은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그 미소에서 나는 마스커레이드의 얼굴이 떠올랐다. 항상 자신감과 자존감으로 넘치던 천가을이.
"제 연기력, 제 머리를 믿는거죠. 제가 예전에 조연급 악역도 해 본 사람이에요."
"아침드라마잖아."
덕배가 딴지를 걸었다. 가을이 곧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덕배에게 소리쳤다.
"그 더러운 입 닥쳐! 대바늘로 꿰매 버리기 전에."
"......아니 그걸 굳이 나한테 직접 보여주면서까지 보여줄 필요가 있었냐?"
덕배가 얼척없다는듯이 헛웃음을 짓자 가을이 표정을 풀었다.
"아무튼 문제없어요. 지화씨, 혹시 빌딩 휴게실에 DVD도 있어요? 그 영화 어지간해선 있지 싶은데."
"네, 네! 16층에 있습니다. 파일로 저장되어있으니 바로 보시면 됩니다."
"들었죠? 가기전에 한 번 더 복습하고 갈게요. 제가 이능력은 아직 각성하지 못했더라도."
가을은 크게 심호흡했다.
"연기 하나만큼은 여기서 제가 제일 잘 합니다. 믿으세요. 배우 천가을의 14년 연기인생을."
"...하아, 진짜. 알았어요."
나는 두 손을 들어 항복 표시를 했다.
가을이 성공해도 나에게는 이득, 실패해도 나한테만은 이득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굳이 안 시킬 이유가 없다.
"그런데 안 돼요."
"왜요?!"
가을이 빽 소리를 질렀다. 나는 덕배와 지화를 가리키며 손날로 내 목을 그었다.
"저것들을 가을씨랑 같이 보낼 수 없어요. 비전투계 B급이나 C급 괴인 보내느니 차라리 제가 직접 가고말지."
"저, 그건 조금 곤란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화가 답지않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저한테도 빌런연합에서 참가하라는 사람이 와서 압니다. 직접 한 번 가보기도 했구요. 그 사람들, 이능력을 무슨 조선시대 신분제로 생각하고 있어요. 이능력이 높을수록 더 위의 인간이라는 사고방식이 조선 후기 양반네들보다 심합니다. 이능력자가 아닌 사람은 인간만도 못한 취급을 받죠. 사실상 노예, 특히 여성들은 성적 노리개로...."
가을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그걸 당신이 얘기해요? 등대 당신이?!"
"네? 아, 아뇨! 뭔가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저는 아직 그런적 없습니다! 제가 무슨 힘으로 그런 짓을 하겠어요!"
지화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까지 격하게 부정하자, 가을이 내게 어떻게 됐냐는 눈초리를 보냈다.
"...뭐, 당신이 계기였다는거죠?"
"하. 진짜. 그걸 믿으라고요?"
나는 지화를 향해 물었다. 명령이었다.
"지화씨, 묻는 말에 대답해요."
"네, 네! 뭐든지 물어보십시오!"
"지화씨 지금 나이 몇 살?"
"서른 둘입니다!"
"여자친구 지금까지 몇 명 사귀어봤어요?"
"하, 한 명도 없었습니다."
"섹스 해본적은?"
"......없,습,니다."
나는 이 보라는듯 가을에게 어깨를 으쓱였다. 지화의 흔들리는 악마눈에는 핏발이 잔뜩 서있었다. 가을이 몹시 안타까운 눈으로 지화에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지화씨. 제가 오해해서."
"괜찮, 습니다. 크흡. 저는 야근이랑 결혼, 했기 때문에, 큽."
손까지 부들부들 떨며 숨을 참는 지화가 갑자기 안쓰러워졌다. 나중에 A급 코어라도 보상으로 줘서 속을 달래게 해야겠다.
잠시 뒤.
지화는 어떻게든 진정했다. 그 속이야 뒤집어졌겠지만.
"...그래서 빌런연합에 단장님과 천가을 씨 두 명이 가는거는 저는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천가을 씨도 물론이거니와 단장님도 한 외모 하시니, 분명 그 놈들은 일단 보자마자 무시할겁니다. 백이면 백, 힘으로 제압하려 들겠죠."
"그러면 얘 또 빡쳐서 다 죽이려들테고."
덕배가 나를 가리켰다. 나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면 어떻게 하죠? 싸움 발생하는건 원치 않는데. 피닉스씨, 어떻게 방법 없어요?"
"그 방법을 지금 저한테 찾는게, 하아. ...정말. 방법이 하나 있기는 해요."
나는 베일을 쥐어뜯었다.
진짜 그것만은 하기 싫은데.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내게 기대를 보내는 가을의 시선을 외면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나는 지화에게 덕배를 가리키며 물었다.
"지화 씨. 부하 2호만한 2m 정도 크기의 괴인이 천가을씨 호위로 따라붙으면 어떨 것 같아요? 실력은 S급 정도. ...아니 그 이상?"
"...충분히 위협이 될거라 생각합니다. 아니, 오히려 차고 넘칩니다. 하늘성이 가진 조직은 세력 자체는 크더라도 그 아래 S급 수하는 없습니다."
덕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새로 괴인 하나 만들게? 그 촉수꺼비 잡고 나온 S급 코어?"
"아니요. 있는 자원을 활용해야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을을 노려다봤다. 내 눈초리를 본 가을이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천가을 씨.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진짜 성공할 자신 있어요? 당신 목숨과 미래를 걸만큼, 당신의 연기 실력을 믿어요?"
"...물론이죠."
이미 그 의지는 충분히 엿보았다. 나는 베일을 벗어 덕배에게 던지고 창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 진짜 큰 맘 먹고 가을 씨 믿는거에요."
내 몸의 마력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인간형의 몸에서 푸른 불꽃이 피어오르며 마력으로 바뀌었다.
"이 모습으로 바꾸기 진짜 싫었는데."
창염이 사제복을 불사르고 내 몸을 휘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