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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38화 (38/1,497)

〈 38화 〉1부 3장 (7)

<오후 9시, 신서울 히어로 협회 본부.>

"......."

승형은 지친 몸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본부 그의 숙소에 비치된 최고급 매트리스는 요람처럼 그의 몸을 포근히 감싸안았다.

"미치겠어. 정말."

하루가 왜 이렇게 긴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에게 서울 수복 작전에 참여하는지 묻는 이는 또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선의철...."

이미 그에게 선의철은 피가 이어진 타인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혈육이라는 족쇄를 이용해 승형을 인형처럼 다루려했다.

삐빅. 9시입니다.

스마트워치의 알람에 승형은 스크린을 띄웠다. 눈 앞에는 정장 차림의 여성이 보도 데스크 앞에 서있었다.

- 안녕하십니까, JBS 9시 뉴스입니다.

바쁜 와중에도 뉴스를 챙겨보는 것은 그의 소소한 취미생활이었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기 위해.

"아. 이런."

자막으로 뜬 첫 헤드라인을 보는 순간, 승형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 선의철 대통령은 오늘 기자 간담회를 통해 서울 수복을 공식적으로 선언했습니다. 여기에는 설화공주, 화권을 비롯한 많은 히어로들이 참가를 예고....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승형이 몸을 일으켰다. 이미 그의 참전은 언론에 의해 기정사실화되어 있었다.

- ...오늘 부산으로 내려가는 집정관 유영호는 "히어로의 참전은 전적으로 히어로 본인의 의사에 있다"는 SNS를 남겼습니다. 이에 대해 히어로 전문가 도교수님 모시고 말씀 나눠보겠습니다.

턱에 기름기가 가득찬 안경의 교수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 반갑습니다, 도교수님. 교수님은 서울 수복 작전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 당연하지요. 서울이 어떤 곳입니까. 8년전까지만 해도 우리 대한민국의 수도였어요. 이미 숱한 역사 속에서 수도를 빼았긴 아픈 경험이 있지만, 우리는 결국 수도와 나라를 되찾았습니다. 이제는 그 대상이 다른 나라가 아니라 괴수일 뿐입니다. 저는 서울을 수복하는 것이 우리 히어로, 나아가 대한민국의 사명이라 생각합니다. 히어로 강국의 위상도 함께 되찾는거죠.

- 그렇다면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집정관의 SNS.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두 가지로 해석을 할 수 있죠. 하나는 히어로들의 서울 수복 작전 참여를 독려하는 멘트. 다른 하나는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모종의 의도가 숨겨져 있는 불만의 표시죠. 저는 후자라고 봅니다.

- ...후자라고 하심은?

- 이승형 히어로가 내심 서울 수복 작전에 참여하기를 꺼려한다는거죠.

라이브 영상의 하단에 작게 띄워진 댓글창에는 난리가 났다. 의견에 대한 욕설부터 시작하여 교수 외모에 대한 욕설까지.

승형은 댓글창을 꺼버리고 교수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 화권이 각성한지 고작 일주일이죠. 저는 그가 배우, 고 천가을 양에 대해 상당히 애틋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봅니다. 상주 역할도 대신 할 정도로. 지금 이승형 요원에게 필요한 것은 서울 수복 작전에 참여할 의지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에 대한 슬픔을 위로할 시간....

똑똑똑.

"네!"

문너머의 노크소리에 승형은 뉴스를 끄고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워치를 두드리자 문이 벽 사이로 들어가며 열렸다.

"내가 방해했나?"

"아, 아닙니다 선배님!"

문을 막고 선 중년을 본 승형은 재빨리 침대에서 일어나 자세를 바로세웠다. 정장 차림의 중년 남자는 오른 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오늘 한 잔 하지."

"저, 선배님. 본부 안에서 음주는...."

규정을 언급하며 안절부절 못하는 승형에 남자는 껄껄 웃으며 승형의 천장 구석에 있는 CCTV로 손을 올렸다.

우우웅-

CCTV의 카메라 앞에 하얀 빛으로 반짝이는 빛의 구름이 만들어졌다. 마력조차 느껴지지 않는 그 현상에 승형은 감탄해 혀를 내둘렀다.

"역시 선배님 마력 컨트롤은 진짜 대단하십니다. 이제서야 보이네요. 그 세심한 컨트롤의 먼 발치가. 정말 존경합니다."

"나같이 마력 모자란 놈들이야 효율 따지는거지. 자네는 마력이 충만한데 효율을 따져서 무엇하겠나. 내 확신하네. 지금 S급 중에는 자네가 마력량은 제일 많아."

"선배님, 그건."

승형이 몸둘바를 몰라했다. 남자는 승형의 방을 제집처럼 들어와 탁자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자네 숙소는 영 삭막해. 장식 하나 없고 말이야. 어서 빨리 돈 모아서 숙소 탈출하기를 추천하네. 여기는 사람 살 곳이 아니야. 수용소지."

비닐봉지 안에서 안줏거리를 꺼낸 남자는 오징어다리를 질걸질겅 씹었다. 승형은 남자의 맞은편에 다소곳이 무릎을 꿇어앉았다.

"편히 앉게. 무얼 그러는겐가."

"제가 감히 하늘같은 선배님 앞에서 어떻게...."

"지금 당장 편히 안 앉으면 방금 그 말 하랑이 앞에서 그대로 읊어주지."

승형의 자세가 빛처럼 빠르게 풀어졌다. 남자는 껄껄 웃으며 캔맥주를 건넸다.

"마시게. 필요할거야."

승형은 금방 냉동실에서 나온듯한 캔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손에서 느껴지는 냉기에는 아주 약한 마력의 기운이 남아있었다.

"...숨긴다고 숨겼는데 다 들켰네요."

"자네가 우리를 느끼듯이 우리도 자네를 느끼는게지. S급이 되면 이게 피곤해. 사람사이는 서로 겪어가면서 알아가야하는데, 마력의 성질부터 본능적으로 느끼니까 싫어도 생각이나 감정을 읽게 되는거지."

승형은 애써 마력을 갈무리했다. 이미 들킬대로 들켰지만 이미 그가 내뿜는 마력의 흔적에는 진한 슬픔이 묻어있었다.

깡.

청량한 소리와 함께 마개가 따였다. 남자는 승형에게 자신이 든 캔맥주를 밀며 웃었다.

"힘을 얻고 사랑을 잃은 이 불쌍한 청년을 위해."

"...그거 선배님이 말씀하시기에는 조금 그렇지 않나요?"

남자는 어깨를 으쓱였다.

"겪어본 사람만 아는 슬픔이지. 세상 모든게 원망스럽고, 신이 있다면 멱살잡고 진창에 처박고 싶은 그런 때. 이 힘을 가지게 된 나 스스로가 혐오스럽고. 내 오지랖인가?"

"...아뇨. 비슷하십니다."

승형은 캔맥주를 부딪혔다.

"저 각성할 때 누군가 나타나더군요. 힘을 줄테니 세계 평화를 위해 힘써달라고."

"누군지는 몰라도 참 바른 사람일세. 그런데 그거 아는가?"

남자는 승형의 심장을 가리키며 웃었다.

"각성이라는게 사람마다 제각각 겪는 현상이 다르지만 본질은 같지. 제 무의식속의 자아가 어떤 형태로 나타나 객관화하는 거지. 이능력의 메타인지 같은게야. 평소에는 의식조차 못하다가 각성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각하지."

"선배님은 어떻게 각성하셨습니까?"

승형의 질문에 남자가 인상을 찡그렸다. 승형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사랑."

"네?"

남자의 얼굴에는 씁쓸함과 그리움이 묻어있었다.

"사랑을 했지. 평생을 잊지못할 아주 짧은 사랑."

"...첫사랑이셨습니까?"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승형은 눈앞의 남자가 속세에서 벗어나 해탈한 자연인처럼 보였다.

"그래서 선배님 20년 동안 미혼으로 계속-"

"자네 말을 좀 막하는구만. 나는 그 여자와 결혼했었어. 10달간 아주 세상 불태울 정도로 뜨겁게 사랑했지."

"혼인 신고는 안 하신거로 알고 있습니다만."

"동사무소가 괴수한테 박살났는데 어떻게 신고하겠나. 흐흐."

남자가 오징어다리를 까득 깨물었다. 마력까지 실려 질긴 오징어다리가 한 순간에 잘렸다.

"...아직까지 이 가슴에 남아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품에 안겠나. 그건 그 누구에게도 예의가 아니야. 나에게도, 그 사람에게도."

진지한 남자의 말에 승형은 숨을 골랐다. 마력의 영향으로 술에 취하지도 않지만, 어딘가 남자가 풍기는 애잔함에 취하는 것 같았다.

"선배님은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극복? 그런 거 없어. 평생을 짐처럼 달고 사는거지."

남자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평생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사는거야. 나중에 죽어서 저승에서 만났을 때 떳떳하게 만날 수 있도록. 저승에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그런건가요."

고민에 빠진 승형에 남자는 머리를 긁적이다 말을 덧붙였다.

"자네는 아직 젊으니까 괜찮을 거야. 어쩌면 더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날 수 있고, 나처럼 평생동안 못 잊는 사람이 생길 수 있지. 청승맞은 꼰대 오지랖이라고 걸러들어도 좋아."

"...아닙니다. 새겨듣겠습니다. 다만."

과연 그렇게 뜨거운 사랑을 줄 수 있을만한 사람이 또 나타날 수 있을까. 승형은 내심 아니라 확신했다.

"선배님."

"왜."

"설화공주에게 들었습니다. 설화공주와 저, 그리고 선배님까지 무조건 세 명이서 서울로 가야한다고."

흠칫. 남자의 손이 멈췄다.

"그건 어째서입니까? 오늘도 단지 위로만 하러 오신건 아닌듯 하십니다만."

"...벌써부터 마력을 감응하기 시작하는건가? 빠르군. 화염술사 놈들은 왜 다들 하나같이 재능이 넘치는지 모르겠어."

투덜투덜 거리던 남자가 승형과 눈을 마주했다.

"그래. 자네를 설득하고 나도 서울로 올라가려고 왔다. 영호녀석에게는 이미 들었거든. 자네가 서울로 가고싶지 않다고 하던거."

"영호 형님에게는 선배님 얘기는 못 들었는데...."

"당연하지. 내가 얘기를 안했으니까. 자네한테 두번째로 얘기하는게야. 하랑이 고것을 청사에서 만나지만 않았어도 됐는데. 쳇."

남자는 혀를 차며 설화공주의 행동에 대해 궁시렁거렸다. 여자애가 조신하지 못하다, 낭창하다, 체신머리없다.

승형은 남자의 중얼거림을 끊고 물었다.

"하랑이는 시청사의 괴수를 마무리하려는 목적이 있죠. 하지만 선배님은 무슨 연유로 서울 수복에 참가하려 하시는겁니까?"

아무리 선의철이라도 눈앞의 남자를 신서울 밖으로 빼지 않을 것이다. 그건 남자 본인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로 가고싶다고 얘기하는 것은 신서울을 공백으로 만들면서까지 남자가 가야할 모종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궁금한가?"

흠칫.

남자의 눈동자에 빛무리가 흘렀다. 승형의 눈동자에도 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승형은 저보다 훨씬 작은 남자에게서 거대한 기세를 느꼈다. 금방이라도 목을 찌를듯한 빛의 칼날들이 승형의 전신을 옥죄는 것 같았다.

고고고고-

승형의 눈동자에 비치던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그에 남자는 곧바로 기세를 풀었다.

"하아, 하아!"

"...역시. 자네한테는 알려줄 수 없겠구만."

남자는 혀를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승형은 갑자기 쌀쌀맞아진 남자의 태도에 당황했다.

"저, 선배님?"

"대통령도 하랑이도 아직 모르는 진실이야. 자네도 아직 이 진실을 감당하기에는 아직 약해."

"...약하지 않습니다. 설령 약하더라도 힘이 될 수 있습니다. 화마룡이 다시 나타나도 제가 이길 수 있습니다."

승형이 투지를 불태웠다. 남자는 그 투지에 비웃음을 날리며 문을 열었다.

CCTV를 가렸던 빛무리가 남자의 손짓에 사라졌다. 남자는 문이 닫히기 전, 아무 표정없이 승형에게 한 마디만 남기고 사라졌다.

"이 세상의 진정한 위기가 정녕, 차원문이나 악마종따위라고 생각하는가?"

* * *

<같은 시각, 청화단 구로 아지트 옥상.>

"조덕배씨. 제가 너무 충격적인 말을 한건가요?"

"당연하지. 선의철 대통령은 생긴것과는 다르게 인품이 좋다고 소문난 사람이었어. 넌 그 환상을 들쑤시고 실체를 까발린거다."

피닉스는 옥상의 벤치에 앉아 다리를 앞뒤로 흔들었다.

"관상이라는게 참 무서워요. 언론을 통해 이미지 메이킹을 해도 그 본질이라는게 감으로 확 보이니까."

"그것도 천가을한테 말한 그 미래 지식인가 뭔가하는 그거냐?"

피닉스는 베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셈이죠. 어차피 5년 뒤까지도 선의철은 여의도 공략 못해요. 오히려 서울 전체를 빼았기죠. 그래서 미리 챙겼어요. 그 인간한테 주기는 아까우니까."

"그 양반 열 좀 받았겠어. 그런데...."

덕배는 피닉스가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는 큐브를 가리키며 물었다.

"너 지난번에 그걸로 이능력자도 각성시킬 수 있다고 했지?"

"네."

"그럼 그걸로 천가을 바로 각성시키면 안 되냐?"

피닉스의 행동이 멈췄다.

"거의 모든 걸 할 수 있는 거라며. 죽은 사람도 다시 괴인으로 되살리는 능력을 가진 녀석이 요술램프같은 보물까지 들고 있는데, 굳이 천가을 본인보고 각성하라고 괴롭힐 필요가 있나?"

"요술램프라니, 조덕배씨 상당히 취향이 올드하군요. 결론부터 얘기하면 가능은 해요. 하지만...."

피닉스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가을은 스스로 각성해야합니다. 큐브에 의한 이능력 각성은 성장한계가 너무 낮아요. 재능이 없는 일반인도 C급까지 성장시킬 수 있지만, 역설적으로 A급 재능을 가진 사람도 C급까지만 각성시키는거죠."

"천가을의 재능이 아깝다? 고작 그거?"

덕배가 콧방귀를 뀌었다.

"넌 도대체 천가을에게서 뭘 원하는거냐? 그냥 자기 힘 지킬 정도? C급만 되도 나라에서 어이쿠야하고 챙겨주는데? 천가을이 꼭 A급이나 그 이상으로 올라갈 필요가 있냐?"

"당연하죠. 이걸로 각성한 이능력자들이 어떻게 되는지 나중을 생각하면...."

피닉스가 뒷말을 삼켰다. 말하기 좋아하는 그가 설명을 꺼리는 모습에 덕배는 생경하기까지 했다.

"그냥.... 이걸 쓰는게 불안해서요. 혹시나 천가을씨가 잘못되면 어쩌나 싶어서."

"됐다. 말하기 싫으면 말아라. 나중에 말할 때 되면 신나서 얘기해주겠지."

"...안 그럴건데요?"

"퍽이나. 아무튼...."

덕배가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무슨 고민 있으면 조금이라도 말해라. 혼자 끙끙 앓고있다가 괜히 감당못할 큰 사고 치지말고. 그 왜,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잖냐."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은요?"

"네가 운전대를 다른 사람한테 넘겨주거나 할 사람은 아니지. 안 그래?"

피닉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덕배는 민망한듯 시계를 자꾸 쳐다보다 등을 돌렸다.

"아무튼! 슬슬 시간됐다. 다 쉬었으면 내려와서 작전이나 짜. 혼자 몰래 가서 난동부릴 생각하지말고."

"......칫."

피닉스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 덕배는 저가 지적하지 않았으면 분명히 부나방처럼 S병원으로 달려갔을 미래를 생각하며 혀를 찼다.

'괜찮을까.'

청화단이라는 차에는 엑셀러레이터만 있을뿐 브레이크페달과 내비게이터가 없다. 그나마 천가을이 브레이크 역할을 하고 있지만, 과연 천가을이 사라지고 난 뒤에는 괜찮을 것인가.

"내가 알 바는 아니지."

한 번 죽은 목숨이다. 다시 살아난 뒤로도 죽지 못해 사는거니, 세상에 어찌되든 덕배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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