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1부 3장 (5)
잠시 뒤.
"그러면 그렇게 계약하는거로 하죠. 우리가 코어나 괴수 부산물 납품하면, 그쪽은 그 가격에 맞게 물자를 보내주는 걸로. 됐죠?"
피닉스가 드럼통 위에 올라섰다. 회장은 진지한 눈으로 계약서를 정독했다.
"뭔가 이상해."
스크린에 준비된 계약서는 밀키웨이 측에서 직접 준비한 표준 계약서였다. 그럼에도 회장은 계약서가 잘못된 곳 없나 수 차례 찬찬히 살폈다.
수 백 수 천억 이상의 돈이 움직이는 계약이라 당연하기도 했지만, 피닉스는 무작정 서명란에 이름부터 작성했다. 오죽하면 회장이 계약서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을 해줄 정도로.
회장은 뒤에 서있던 상우와 속삭였다.
"상우야. 함정같은게 있는 거 아닐까? 넌 어떻게 생각해?"
"코어 수급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이 없으면 이런 계약 못하죠. ...괜찮다고 봅니다. 저희도 언제까지 협회랑 사냥꾼 등쌀에 치여서 웃돈주고 살 필요없이 물량을 확보할 수 있으니까요."
"그치? 그래서 더 의심가."
시선을 돌린 회장이 피닉스에게 스크린을 두드리며 말했다.
"이봐. 정말 3개월 안에 이 정도 코어 수급이 가능하다고 확신하는거야? 이 물량이면 대한민국에서 1년동안 쓰고도 남을 양이라고."
"충분해요. 그리고 못 구해다주면 S급 코어 주기로 했잖아요?"
"그 쪽이 너무 손해보는 장사라서 그렇지. 식량이랑 의류, 거기에 구호품 다해봐야 얼마하겠냐. 어디 서울에 난민 구호소라도 차릴 생각이냐?"
회장은 대금 지불 방식으로 피닉스가 제안했던 것을 지적했다. 피닉스는 막대한 금전 대신 정기적으로 식량과 구호물품들을 서울로 보내줄것을 요구했다.
"난민 구호소라뇨. 서울은 말이죠, 전초기지로 쓰일 곳이랍니다."
"한국 정부 상대로 싸움거는거면 나 계약서 찢어도 되지?"
피닉스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국 정부랑은 안 싸워요. 제가 한국인인데 왜 한국 정부랑 싸워요?"
"...그 쪽이 한국인이라고?"
회장의 눈에는 의심이 가득해졌다. '피'성을 가진 한국인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이름을 '닉스'라고 붙인 눈앞의 소녀는 아무리봐도 동양계 얼굴이 아니었다.
"네. 뭐 신분이야.... 과거를 세탁할 필요가 있는 사람, 정도로 생각해주시면 돼요. 흐흐."
피닉스는 적당히 얼버무렸다. 회장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너 뭐 현 대통령한테 원한졌거나 그런 거 아니지? 비극적인 과거를 가지고 있다거나. 하지만 조국을 위해 한국으로 돌아왔다거나."
"저는 아닌데요. 좋을대로 생각해요. 중요한 건 우리가 파트너십을 맺었다는 거니까."
피닉스가 회장에게 다가가 손을 건넸다. 회장은 떨떠름한 얼굴로 악수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유성의 회장 아가씨."
"...?!"
회장의 눈에 당혹감이 서렸다. 동시에 회장 옆에있던 여비서가 재빨리 총을 꺼내 피닉스에게 겨눴다.
탕!
경고도 없이 방아쇠는 당겨졌다. 마력이 깃든 총탄은 피닉스의 이마를 향해 빛처럼 쇄도했다.
스윽.
피닉스의 머리위에 걸린 베일의 끝이 총탄을 감싸쥐었다. 9mm의 총알은 베일에 낚아채여 힘없이 구겨졌다.
"대응 좋네요. 혹시나 몰라서 두 대나 가져온 건가?"
화르륵.
피닉스의 손에서 피어오른 불꽃이 회장을 집어삼켰다. 회장이 당황해 손을 빼려고 했지만, 그보다도 빨리 창염이 회장의 전신을 집어삼켰다.
[기능...정지....]
치직. 치지직.
기름타는 냄새와 함께 앙상한 몰골을 드러낸 회장은 기계로 된 골격만 남은 채 바닥에 쓰러졌다. 피닉스는 자신과 악수하고 있던 회장의 기계팔을 내던졌다.
철푸덕.
구겨진 기계팔이 회장의 옆에있던 여비서의 구두 옆을 스쳤다. 여전히 총구를 피닉스에게 겨눈 여비서의 눈동자에 금색의 별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너 누구야."
"말했잖아요. 창염의 피닉스라고."
피닉스는 드럼통에서 뛰어 천장의 구멍으로 빠져나갔다. 여비서는 번개같은 몸놀림으로 그 뒤를 쫓아 컨테이너 밖으로 빠져나왔다.
"...."
피닉스는 시원한 바닷바람을 만끽하며 여비서를 맞이했다. 등 뒤에는 작은 불꽃의 날개가 달려있었다.
"블랙마켓 닉네임도 같은거니까 심심하면 종종 연락해요. 다음에는 인형이 아니라 그쪽과 직접 이야기를 하고 싶네요."
피닉스는 그 말을 끝으로 하늘높이 치솟았다. 육안으로 따라갈 수 없는 그 속도에 여비서는 총구를 내렸다.
* * *
"......저거 뭐야?"
소녀는 VR 기기를 벗어던지며 몸을 일으켰다. 마력의 뇌파로 연결된 '자동인형-X로이드' 중 큰 덩치의 사내로 연결된 선은 끊어져있었다.
"백상우. 너 알고 있었어?
[...죄송합니다, 회장님. 저도 몰랐습니다.]
소녀가 침대 위에서 시트를 비비며 고민에 빠졌다.
"그럼 내 정체를 어느정도 알고 있다는 얘긴데...."
[일단 호위로 데려온 용병들은 처리하겠습니다.]
"아냐. 그냥 흔적 지우고 인형만 회수해. 쪽도 못쓰고 기절했으니 계약금은 반 까버리고."
[네.]
소녀는 교신을 끊고 침대에 다시 쓰러지듯 누웠다. 금을 녹여낸듯한 머리칼은 산발처럼 흩어졌다.
"안 그래도 회사 때문에 머리아픈데...."
그저 혼잣말로 놀랐을 뿐인데 상대는 신이 난듯 그에 대한 비사를 떠벌렸다.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며 얻어낸 그 말도 안 되는 정보는 괜히 섣불리 나섰다가는 큰 역풍을 맞을만한 내용이었다.
"후우."
소녀는 블랙마켓을 뒤지며 상대를 찾아냈다. 창염의 피닉스. 이미 블랙마켓 SNS에는 온갖 욕설과 비난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소녀의 손가락이 '친구 추가'탭을 누르려다 간신히 멈췄다.
"...그래. 괜히 건드릴 필요는 없어."
중요한건 그가 이쪽에 공급해줄 막대한 량의 코어다. 굳이 뒤를 캐내어 긁어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다.
언젠가 필요하다면 이쪽에서 직접 만나 정보를 캐내면 될 일이다. 혹시나 방금처럼 고급 정보나 비사를 신나서 떠벌릴지도 모르니까.
진실에 가까우면 이득을 취하고 거짓이면 가십으로 치부해버리면 그만이다.
똑똑똑.
"아가씨. BH에서 호출입니다."
"뭐? 씨이. 무슨 일로?"
"유성을 비롯하여 KS, UJ 등 재계 인사들을 초청했습니다. 아마도 서울 수복 작전에 대한 출자를 요청하는 거로 생각됩니다."
"...어휴. 알았어. 준비할게."
소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인형들과의 연결을 모두 끊어낸 소녀의 오른쪽 눈동자에는 별빛이 흐르고 있었다.
"다음에 만나면 인형값 물어내라고 할 거야."
* * *
석양이 진다.
63빌딩 옥상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의 모습은 또 새로운 느낌이다. 후에는 유성공화국이라 불리우는 그룹의 회장이자, 히로인 중 한 명과 만나서 그런지 감정이 또 싱숭생숭했다.
우우웅-
그래서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높은 곳에서 바람을 쐬며 전경을 구경했다.
'남쪽으로 보면 아직 그나마 사람사는 동네 느낌이 나지만.'
북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야말로 전쟁통의 폐허를 떠오르게 할 정도로 시설들은 많이 파괴되어있다.
한강을 기점으로 두고 남북이 차이를 보이는 이유. 그것은 서울시청사에 또아리를 튼 한 괴수 때문이다.
'서울의 주인.'
서해무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대괴수. S급의 대괴수는 서울 시청에 자리를 잡고 서울 북쪽 전체를 제 영역으로 삼았다.
괴수들은 자연스레 그 괴수의 영토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대신 그 영역을 피해 다른 루트를 타고 한강 이남으로 내려왔다.
다리를 통해.
한강 사이사이에 놓인 수많은 다리들. 그 다리는 여의도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마포대교를 제외한 모든 다리는 파괴되었다.
어떤 다리는 히어로와 괴수간 전투의 여파로 파괴되었다.
또 어떤 다리는 막대한 괴수들의 파도를 막기위해 눈물을 머금고 공병을 불러 폭파시켰다.
결국 인간의 이로움을 위해 만들었던 대교들이 괴수들의 육상 진격로가 되자, 당시의 대통령은 신서울을 포기함과 동시에 과격한 결단을 내리게 된다.
- 신서울 철수 이전에 서울을 지나는 모든 교량을 폭파하라.
신서울로의 수도 이전에 더한 그 충격적인 결정에 많은 반발이 있었지만, 몰려오는 괴수의 파도에 작전은 강행되었다.
선의철이 최소한 다리 하나는 남겨야한다는 주장했고, 마침 공병을 파견할 수 없게된 여의도 마포대교를 제외한 모든 다리는 한강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아직 다리를 건너지 못한 국민들을 버릴 셈이냐?!
책임을 통감하고 자리에서 물러나겠습니다.
한강 북쪽의 주민들을 모두 버리는 비정한 결정에 대통령은 신서울에서 스스로 하야했다.
그 빈 자리를 선의철의 세력이 메꾸고, 선의철은 기지를 발휘해 대통령이 되었다.
"이미 대통령이라기보다는 종신 지도자같은 느낌이지만요."
단임제나 중임 금지같은 헌법이 힘을 발휘하기에는 선의철이 보여준 능력과 카리스마가 너무 뛰어났다.
국회를 장악한 선의철의 세력은 핀포인트로 현직 대통령의 중임 제한을 철폐하는 개헌을 시도했고, 신서울 많은 주민들의 지지를 얻으며 선의철은 두 번째 임기를 한창 구가하고 있다.
'5년 뒤에는 레임덕이 제대로 오지만.'
2012년의 평양사태, 2014년의 수도이전.
원작인 2025년까지 무려 햇수로 12년의 시간동안 서울을 수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신서울까지 불안해지기 시작하니, 자연스레 대통령의 자리도 위태위태해졌다. 하지만 지금은 2020년이다.
'아직까지는 그 세력이 강하다.'
괜히 신서울의 왕이 아니다. 그리고 그 왕은 서울을 되찾기 위해 전력을 쏟아부을 것이다.
"설화공주에 화권."
설화공주, 석하랑.
여성 히어로이면서 S급인 동시에, 메인 히로인 중 한 명. 운장과 마찬가지로 영입전부터 S급인 히로인이라 싸우기는 껄끄럽디만 당장 적이 되었으니 상대를 해야한다.
그리고 화권. 이승형이라는 이름의 히어로.
"...천가을이랑 썸타는 사이였다고."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검색 기록을 다시 살폈다.
[종합] 화권 이승형, 고 천가을의 상주맡아
[연합] 현지역 역은 누구에게? 제작사 "아직 정해진 바 없어"
내가 심장에 폭탄을 심어둔 그 히어로는 차원문이 열리기 직전까지 천가을과 멜로 드라마를 찍었고, 키스신을 앞두기까지 했었다.
쩌적.
걸터앉으며 난간에 둔 왼 손이 옥상 난간을 깨뜨렸다.
나는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뺨을 쳤다.
"정신차리자."
'천가을이 내 옛날 여자친구도 아닌데.'
히로인들의 과거를 모두 신경쓰기 시작하면 머리가 폭발할 것이다. 게임에서의 만남은 어디까지나 게임. 그러니 절대로 유치하게 질투하지 말자. 절대로.
삐비빅.
스마트워치에 알람이 울렸다. 스크린에 덕배의 얼굴이 비쳤다.
"무슨 일이에요? 연락을 다하고."
[등대가 찾았다. 네가 찾던 그 장소.]
"어, 진짜요?"
나는 난간에서 일어나 뛰어내렸다. 난간을 뜀과 동시에 날개를 펼쳐 구로의 아지트로 날았다.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은 저녁 노을빛에 몸을 숨기며 아지트에 내려앉기까지 약 10초. 구멍난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나를 본 덕배가 전화를 끊었다.
"어디있다 이제 왔냐."
"잠깐 높은데서 서울 구경 좀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김지화씨는요?"
회장실을 아무리 둘러봐도 등대가 보이지 않았다. 덕배가 아래층을 가리켰다.
"과로로 쓰러졌다. 그러게 아무리 괴인이라도 적당히 굴리지 그랬냐."
"역시 한 명한테 맡기기에는 너무 많은 양이었죠?"
"전직 대리였다잖냐. 한 조직 전체가 굴러가도록 일을 맡겼으니 안 쓰러지는게 비정상이지."
능력에 비해 과중한 일을 맡기기는 했지만, 내게 잘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무리를 하기도 했을것이다.
"나중에 A급 코어 구하면 줘야겠네요. 그러면 그 장소는 조덕배 씨가 알고있겠네요?"
덕배가 고개를 끄덕이며 스마트워치를 두드렸다. 내 워치 위로 떠오른 스크린에는 서울을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지도가 있었다.
"네가 말한 강남 방향을 중심으로 살핀 결과, 이 장소가 가장 유력한 것으로 나왔다."
아직까지는 히어로들과 사냥꾼들이 몇이나마 상주하며 극소수의 인원이 살고 있는 강남, 그 한 가운데 등대가 찍어둔 마크는 내게도 익숙한 건물에 박혀있었다.
"오."
기억속의 원작 속 정보와 얼추 일치한다.
흔히 말하는 '빌런연합'은 사람이 들락날락거려도 의심받지 않을 장소에서 회담을 하기를 좋아했고, 등대가 찾은 비밀회담 장소도 딱 그 조건에 부합되는 곳이었다.
"그리고 네가 언급한 인상착의의 남자."
마치 장례식에 온것같은 검은 중절모의 신사가 주차장에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보였다.
"맞네요."
빌런연합 소속이자 강남 거대 파벌의 우두머리, <하늘성>.
그가 들어가는 건물은 병원이었다. 나는 슬쩍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6시 30분.
"회담은 오늘 자정 즈음이겠네요."
악당들의 모임은, 원래 야밤에 이루어지니까.
* * *
<같은 시각, 신서울 정부 청사의 회의장.>
유성그룹의 회장, 은재민은 사람 좋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번 서울 수복 작전에서는 정재계, 그리고 협회의 많은 여러분께서 도움을 주시길...."
회의장 상석에 앉은 선의철 대통령의 긴 연설이 끝났다. 이어질 구체적인 내용에 앞서 잠시 휴식시간이 생겨, 은재민은 슬쩍 자리에서 일어섰다.
"응? 재민군. 어딜 가시는겐가?"
옆에 앉아있던 KS의 회장이 물었다. 휠체어를 타고 포토라인에 섰던 그는 지금 아주 생생한 얼굴로 회의장에 앉아있다.
코어에서 추출한 에너지로 만드는 자양강장제. 온갖 건강 식품과 보조제에 코어 에너지를 담아내는데 성공한 KS 산하 제약회사의 결실은 당장 그 회장부터가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었다.
"...잠시 화장실에 갑니다."
"그런가? 허허. 알겠네."
쌀쌀한 은재민의 말에 KS 회장은 곧바로 옆의 참석자에게 말을 붙였다. 은재민은 제게 쏟아지는 시선을 슬쩍 피하며 회의장을 빠져나왔다.
"......."
화장실을 향해 걸어가던 은재민의 발걸음이 멈췄다. 눈 앞에는 백발의 소녀가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어딜 도망가시려고."
"...화장실도 못 가나?"
풍선껌을 쩍쩍 씹으며 길을 막아선 설화공주, 석하랑이 남자화장실 방향을 가리켰다.
"언니 이쪽으로 들어가면 경범죄인거 알지?"
은재민의 시선이 황급히 주변을 훑었다. 주변에는 오로지 둘뿐임을 확인한 은재민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하랑아. 언니가 이능력 쓸 때는 맞춰달라고 했던것 같은데."
"둘밖에 없잖아."
은재민의 눈에서 빛이 흘렀다. 기계로 된 안구에서 쏘아진 스크린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금발의 소녀가 나타났다.
"일단 잠깐 어디 조용한 곳으로 가자. 여기서 얘기하기에는 좀 그러니까."
은재민, 아니 은재민을 꼭 닮은 인형을 원격으로 만지작거리던 은유하가 복도 끝의 휴게실을 가리켰다. 하랑은 장난스러운 얼굴로 제 스마트워치를 가리켰다.
"언니 그러다 나랑 또 스캔들나고싶어?"
"시끄러. 오늘 네 장난 받아줄 여력 없으니까 빨리 따라와."
하랑은 저벅저벅 걸어가는 유하의 인형 뒤를 따라 휴게실로 들어왔다. 휴게실에는 다행히 선객이 없었다.
쪼르르르.
고급 커피 머신에서 내려진 알싸한 커피향이 휴게실에 퍼졌다. 하랑은 씹고있던 껌을 휴지에 뱉어 쓰레기통에 버리고 커피를 홀짝였다.
"으, 씁다."
"그냥 마셔. 요즘 세상에 이런 원두 구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아니?"
"커피면 그냥 캔커피 마시면 되는거 아니가? 내는 믹스도 맛있기만 하드만."
스크린 너머에서 커피잔을 들어올리려던 유하의 손이 떨렸다. 저도 모르게 사투리가 튀어나온 하랑은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잘 들어. 네가 커피를 잘 몰라서 그러나본데...."
"네, 네. 저같은 촌 가시나는 알고싶지 않은 세계니까 됐네요."
"너 내가 S급 되면 죽어 아주. 마력으로 조종해서 삼시세끼 물 대신 커피만 먹일거야."
"풉. 언니야가? ...아니, 알았어. 미안해."
두 손을 모으며 고개를 숙이는 하랑의 태도에 유하의 화가 누그러졌다. 하랑은 장난기가 심했지만 그 정도라는걸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어쩌다 이런 애한테 정체를 들켜서...."
"나만 아는거 아닐걸? 광검님도 알아. 언니 만나는 S급들은 바로 느낄걸?"
하랑은 양 손을 쥐었다 피며 마력을 터뜨렸다.
"S급되면 싫어도 사람 마력을 읽게 되거든? 근데 언니가 조종하는 인형들에는 마력은 있는데 뭐랄까, 생기같은게 안 느껴져. 아무리 정교하게 만든 인형이라도 S급쯤 되면 바로 알아. 아, 저거 뭔가 이상하구나. 그러다 딱 만져보면 대번에 알지. 언니 나한테 악수했다가 들켰잖아."
"아."
유하는 무언가 깨달았다는듯 잔을 내려놓았다. 청색의 폭군은 분명 제 인형과 만나자마자 악수를 청했다.
"...그럼 진짜로?"
유하가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만의 고민에 빠지자, 하랑은 마력을 움직여 공기중의 물을 정제해 제 잔 안에 부었다. 농축된 에스프레소는 커피향을 담은 음료수가 되어가고 있었다.
은재민의 인형까지도 고민에 잠긴 자세를 취한 순간, 휴게실의 문이 열렸다.
"아. 여기있었네. 역시...유성의 회장님?"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는 이승형이었다. 하랑은 황급히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은재민 회장님이랑 나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아뇨. 그건 아니고...."
승형의 눈이 반쯤 감겼다. 하얀색으로 타오르는 그 안광에 하랑이 황급히 탁자에서 일어나다 커피를 바닥에 쏟았다.
쨍그랑.
잔이 바닥에 박살나며 휴게실 바닥에 커피가 튀었다. 하랑은 그대로 몸이 굳었다.
바닥에 부딪혀 튄 커피는 은재민의 흰 정장 바지 밑단을 적셨다.
"......어?"
멍하니 있던 은재민의 눈에서 금색 별빛이 번쩍였다 사라졌다. 하랑과 바닥, 그리고 새롭게 들어온 승형을 번갈아보던 은재민의 표정이 굳었다. 이승형. S급.
"잠시만요."
승형이 마력을 일으켜 손에 불꽃을 피어올렸다. 화마룡을 일격에 날려버린 백염에 은재민은 그것을 홀린듯 바라보고 있었다.
백염은 바닥의 커피와 커피잔을 그대로 소각시켰다. 재나 그을음없이 마치 태워서 그 존재를 없애버리는것만 같았다.
"실례합니다."
승형의 백염이 은재민의 바짓단에도 붙었다. 그 순백의 불꽃은 그을음없이 커피 얼룩만을 정확히 태워 없애버렸다.
"어, 진짜네. 대박사건."
하랑이 박수를 치며 놀랐다. 은재민의 인형을 통해 상황을 지켜보던 유하 또한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진짜 안에 다른 색깔 불꽃이 있네요? 예쁘다."
"그치? 역시 너도 이게 보이는 구나."
"...예?"
유하의 반문에 승형이 웃으며 불꽃을 다시 검지에 피어올렸다. 인형의 눈을 통해 보이는 불꽃은 분명히 얼룩 한 점 없는 순백이었다.
"이게 S급 되면 보이는 것 같더라구요. 하하. 아참. 하랑아. 부회장님이 너 급하게 찾으시더라."
"진짜? 아직 시간...헉. 망했다."
하랑이 옷을 단정히 정돈하며 휴게실 문을 열려다, 승형의 옷을 잡아당겼다. 손에 마력까지 실어 잡아당기는 그 힘에 승형은 그대로 휴게실에서 끌려갔다.
"어? 어어? 저기, 회장님은-"
"회장님 잠시 사업으로 고민하실 거 있으시대요! 아저씨는 나랑 같이 가서 나 좀 도와줘! 혼자 들어가면 또 눈치 엄청 줄거란 말이에요!"
두 S급 히어로가 휴게실을 벗어나 회의장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홀로 남게된 은재민, 유하는 심각한 얼굴로 고민을 이어갔다.
머릿속에는 자꾸만 피닉스가 언급한 말이 맴돌았다.
"저 두명을 한 손으로 가지고 논다?"
자신은 범접할 수도 없는 경지에 있는 재능의 괴물들을 상대로 오만한 자신감을 보이던 그 빌런이, 왠지 너무나도 불안해졌다.
만약 진짜로 서울 수복 작전을 망가뜨리고 서울에 게 깃발을 꽂는다면?
머릿속에는 자꾸만 셋이 서울 한복판에서 싸우는 광경이 그려졌다. 고민에 빠졌던 유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형을 자리에서 일으켰다.
'돈 되는 쪽이 내 편인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