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1부 3장 (4)
블랙마켓은 암거래의 장인 만큼 정부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활발히 거래가 이루어진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정식으로 협회에 신고되지 않은 괴수의 코어.
관리 부실의 코어는 괴수를 꼬이게 하는 문제의 요인이라 정부에서도 예의주시하며 특별히 관리하는 대상이다.
사흘전, 백상우는 블랙마켓을 구경하다가 누군가 올린 판매글을 보고 판매자를 비웃었다.
- 괴수 코어 팝니다. D급 100개 C급 50개 이상 보유. B급 이상은 수요에 따라 판매.
달리는 댓글들이 하나같이 장난치지 마라, 어그로다는 말 뿐이었다. 상우도 판매자의 닉네임을 보지 않았다면 똑같이 욕했을 것이다.
창염의 피닉스.
19억에 B급 3개를 포함한 괴수의 코어를 팔고간 빌런. 심지어 A급은 상우의 권한이 부족해 사들이지 못했다.
상우는 곧바로 피닉스에게 연락을 걸었다.
'님 지금 블랙마켓에 판매글 올렸나요?'
'ㅇㅇ'
'그거 내리고 저랑 거래하시죠. 제가 바로 사겠습니다.'
'안그래도 귀찮은데 ㅇㅋ'
그렇게 둘은 다시 만났다. 피닉스는 그를 구로로 초대했고, 마침 그 날은 피닉스가 구로의 디지털단지를 점령했던 날이었다.
구로의 괴수들을 싸그리 정리하고 구로 일대를 제 조직 아래에 넣은 것을 보고 상우는 확신했다.
이 빌런과 함께하면 대박을 낼 수 있다고. 곧바로 상우는 본사와 연락을 취했고, 영상통화까지 하며 그것을 확인한 본사에서는 인천까지 달려와 A급 코어를 인수했다.
본사에서는 당연히 판매자와의 연결을 원했고, 고객 또한 본사 측 사람과 대화를 원했다. 상우는 그 둘의 중계 역할을 했다.
그 결과가 지금 이 컨테이너에서의 만남으로 이어졌다.
"그러니까 네 조직 이름이 이고, 우리 와 거래를 하고싶다는거지?"
"네. 이건 선물."
피닉스는 드럼통 위에서 발장난을 치며 더플백을 발로 찼다. 그 안에 든 괴수의 코어가 출렁거리는 것을 보고 밀키웨이의 회장은 침을 삼켰다.
"저거 다?"
"네. 전부. 회장님 직접 오셨으니 차비는 하셔야죠."
회장은 침음성을 흘리며 더플백 안의 코어를 하나 꺼냈다. 영롱한 색을 빛내는 괴수의 코어에 감싸인 푸른 마력의 막은 보석처럼 아름다웠다.
"이 정도 양이면 안전성이나 손실율이 얼마나 되는지는 나중에 따져볼 문제. 중요한 건."
회장이 코어를 피닉스에게 던졌다. 피닉스는 그걸 손으로 잡지도 않고 발등으로 툭 쳐서 열린 더플백 안으로 집어넣었다.
"네가 정말로 이런 자질구레한 것들이 아니라, A급 이상의 것들을 주기적으로 공급할 수 있냐 이거야."
회장은 더플백을 뒤집었다. 괴수의 코어가 컨테이너 바닥을 구르며 흩어졌다.
"이런 잡동사니들 암만 팔아도 돈 안나와. 동전 아무리 모아봐야 수표만 하겠냐. D급 코어 한 트럭을 가져와도 B급 코어만도 못한건 알고 있겠지?"
"당연하죠."
"그래. 그래서 우리도 이걸 일일이 옮기느라 고생하느니 B급, A급 코어를 원하는거야."
피닉스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이런거요?"
피닉스의 손에는 코어 전체가 녹색으로 채워진 구슬들이 들려있었다. 회장은 그 네 개의 코어가 전부 A급임을 대번에 직감했다.
"구로에서 하나. 여의도에서 셋. 강북으로 넘어가면 아주 싹쓸이를 하겠죠?"
"...그래. 한강만 넘어가도 B급이 개미처럼 들끓지."
회장은 머리를 벅벅 긁다가 무언가 떠올랐다는듯 놀랐다.
"잠깐. 여의도에 위험도 S급 있다고 들었는데? 그건 루머냐?"
"...푸흐흐."
피닉스가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무언가를 꺼냈다.
"이미 잡았죠."
메추리알보다 작은 원형의 검은 보석. 피닉스의 검지에 바둑돌처럼 올려진 코어는 사람을 홀리게하는 마성을 띄고 있었다.
회장은 침을 꼴깍 삼키며 물었다.
"얼마면 되겠냐."
"안 팔건데요, 이건. S급이 어디 땅파면 나오는 흔한 애들이에요?"
"내가 차원문 열리고 서울이 개판됐다는 얘기는 들었어도, 여의도에 숨어있는 S급이 퇴치되었다는 얘기는 못 들었거든? 그나마 최근 소식이라면 몇 시간 전에 국회의사당에 불...."
회장이 턱을 쓸어내리다가 웃었다.
"그거 그 쪽이 그러셨나?"
"네. 불이 약점인 괴수였거든요."
"S급이 국회의사당에 있었다고? ...이거 점점 구미가 당기는 얘기인데."
회장이 입맛을 다시며 기억속의 정보를 꺼냈다.
서울을 포기하고 도망갈 수 없다는 당시 제1야당의 대표. 그는 서울에 남겠다는 강한 의지로 제1야당을 지지율 1위에 올렸지만, 정부에서 광검을 신서울로 데리고 떠나면서 정치적으로 사망했다.
현재는 실종사태. 마지막으로 발견된 곳이 여의도 국회의사당.
그의 실종을 시작으로 국회의사당은 들어가기만 하면 사람이 실종되는 미지의 던전이 되고 말았다.
"...당시 제2 야당 대표-현 대통령의 가장 큰 정적이었지. 대통령은 알고 있었나?"
"글쎄요. 하지만 여러모로 크게 이득을 봤죠? 정적도 실종되고, 서울의 주민들이 괴수에 대한 두려움에 신서울로 다 내려가고, 그러면서 더 신서울의 가치가 올라가고. 신서울에 기반을 둔 현 대통령에게는 정말 큰 이득이 된거죠."
"고의? 아니면 우연? 어느쪽이든 제대로 이용해 먹었구나. 무서운 사람이야, 선의철."
"저기, 뭔가 주제가 지금 크게 엇나가는 것 같습니다만."
백상우가 항로를 크게 벗어나는 대화 주제에 딴지를 걸었다. 둘은 그 말을 들은척도 하지 않았다.
"그럼 서울수복작전도 혹시?"
"자신이 제거한 정적들이 살아있는것을 꺼리는거죠. 혹시나 누가 부랑자로 살아있지는 않을까, 혹시나 누가 또 자기 세력의 비리를 쥐고 아직까지 서울에 숨어있지는 않을까."
"그럼 혹시 소나무부대도?"
"그 놈들을 이용해 괴수를 사냥하는척하면서, 미처 처리하지 못한 귀찮은 싹들을 날리겠죠? 소나무부대가 굳이 서울에 상주하던 이유가 있어요. 문제는 서울 수복을 굳이 하지 않으려 했을 경우인데-"
피닉스는 손끝을 비비며 웃었다. 손에서는 불꽃이 살짝 피어올랐다.
"국회의사당 불타면서 발등에 불이 떨어졌죠. 아마 마음같아서는 본인이 직접 국회의사당에 와서 확인하고싶어 할 걸요? 살았는 지 죽었는지."
"아니 무슨 대화가 남극갔다 북극갔다 그럽니까? 코어 거래 얘기하다가 대화가 왜 여기까지 와요?"
백상우가 둘 사이에 끼어들어 지적했다. 이미 그는 대화의 흐름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코어 거래를 하러 왔으면 앞으로 코어 수급은 어떻게, 그리고 거래는 어떻게 할지 생각을 해야지 무슨 대통령이 어쩌고 정적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합니까."
"......그러게요?"
"...아. 상우야, 못 들은 걸로 해라."
피닉스와 회장이 서로를 마주보며 피식 웃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나중에 시간 되면 계속 이야기하기로 하고, 지금은 저 놈 원하는대로 하지. 그래서 앞으로 공급은 어떻게 할 예정이냐?"
"여의도를 중심으로 한강 남쪽을 접수할 거에요. 부랑자들을 모아서 괴수들 퇴치도 하고."
"겨우 그걸로 끝?"
"당연히 아니죠. 적당히 조직이 갖춰지면 경기 북부까지도 괴수들을 밀어낼거에요. 그리고 옛 38선 라인에서 진을 치는거죠. 괴수들 내려오면 사냥해서 정기적으로 코어 수급하고."
회장은 떫은 표정으로 다리를 떨었다.
"누구나 계획은 그럴듯하지. 뚜드려맞고 울기 전까지는. 과연 한강 이남을 점령할 시간이 있을까? 히어로 백은 넘게 서울 수복 작전으로 올라올텐데?"
"누가와도 괜찮아요. 제가 다 이기니까."
피닉스가 우쭐해하자 회장은 스크린을 띄워 그 보라는듯 턱으로 가리켰다.
"너 설화공주 이길 수 있냐?"
스크린에는 신서울에 모습을 드러낸 S급 히어로가 비치고 있었다. 이어지는 기사에는 화권 이승형의 모습도 함께 걸려있었다.
"흐음. 설화공주에 화권...이라? 그러니까 S급 둘이 온다는 얘기죠?"
"그래. 화권 그 놈은 들리는 말로는 원탁급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
"아하하하!"
피닉스가 배를 잡으며 웃었다. 그에 말한 회장이 오히려 무안해질 정도였다.
"계획이 꼬이니까 정신줄을 놓았나?"
"아하하, 아니요. 그런건 아니고."
피닉스가 겨우 진정하며 손사레를 쳤다.
"광검이 올라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잘 됐네요."
피닉스는 낮게 웃었다.
"그 둘이라면 한 손으로도 가지고 놀거든요."
* * *
백발의 소녀는 귀에 이어폰을 낀 채 눈을 감고 음악을 듣고 있었다.
♩♬♪
노래를 들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는게 꼭 그 나이대의 젊음이 느껴졌다. 그 노래의 정체를 알고있는 승형은 마음이 심란해졌다.
"왜 군가를 스마트폰에 넣고 다니는건데, 너."
소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한 쪽 이어폰을 귀에서 떼낸 소녀가 눈을 떴다.
"불만있어요?"
소녀의 두 눈동자는 심해와도 같은 짙은 군청색이었다.
"그냥 아무 노래나 틀어놓은거에요. 들어볼래요?"
"싫어. 너 일부러 나 놀리려고 군가트는거잖아."
"칫."
소녀는 아쉬운 듯 혀를 찼다. 빠진 이어폰 너머로 들리는 기상나팔소리에 승형은 입이 바싹 말랐다.
"장난은 그만치고 빨리 말해. 너 도대체 여긴 왜 온거야?"
승형이 진지한 표정으로 묻자, 소녀도 스마트폰을 끄고 자세를 고쳤다.
"당연히 서울 되찾으러 왔죠."
S급 히어로, 석하랑. 설화공주라는 이명으로 더 유명한 그는 고향인 부산을 잠시 떠나 신서울에 발을 들였다.
당연히 신서울과 부산은 희비가 교차했다.
신서울은 부산에 틀어박혀있던 S급 영웅의 깜짝방문에 환호했고, 부산은 설화공주가 신서울로 올라옴으로써 생기는 괴수에 대한 위험에 벌벌 떨었다.
더욱이 그 목적이 '서울 탈환'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하랑이 부산을 비우는 시간은 꽤나 오래 걸릴지도 몰랐다.
"아저씨도 이제 S급 됐잖아요. 언제까지 서울을 괴수들 놀게 놔둘수도 없는 노릇이고. 쇠뿔도 단김에 뽑으라고 하잖아요?"
"...하아. 정말."
승형이 관자놀이를 검지로 문질렀다. 화이팅 포즈를 취하는 하랑의 태도는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듯 가벼웠다.
그러면서도 하랑은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같은 경지에 올라서 그런지 하랑의 마력에서 전해지는 투기에 승형의 눈이 게슴츠레 변했다.
"너 그 시청사의 용 때문에 그러지? 복수하려고."
"윽."
하랑이 정곡을 찔렸다는듯 코를 찡그렸다.
"무, 문제있어요? 내가 못 잡은거 마저 처리하겠다는데!"
"많지. 이제 성인이 된 애가 서울 한 복판 전장에 뛰어드는거잖아. 목숨걸고. 스무살 짜리가."
승형은 하랑의 나이를 지적하자, 하랑은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탕 치며 역정을 냈다.
"한 살 더 먹어서 21살이거든요! 그러는 아저씨도 26이잖아요!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네!"
"나이 차이도 얼마 안나는데 아저씨라고? 좀 너무한 거 아니야?"
"흥. 아저씨는 마음씨가 올드해서 안 돼요. 저한테 오빠소리 듣고싶으면 저보다 강해져서 오세요."
"들으면 곤란해지는 말하지 말고...."
승형은 근처 테이블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그들의 대화를 듣고있는 다른 히어로들과 기자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왜 나를 얘 호위로 붙여가지고...."
"저 따라서 서울에 가라는 거죠. 정부도 정부인데, 협회도 이번에 엄청 필사적이에요."
하랑은 제 몫의 아이스티를 빨대로 쭉 들이키고 말을 이었다.
"서울의 부랑자들과 아직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 구하는 것도 물론이거니와, 이번 기회에 서울에 숨어든 빌런들 뿌리를 뽑을 생각이더라구요."
"빌런?"
하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원문, 화마룡. 안 그래도 위험한 서울에 더 큰 위험까지 생겼으니, 제 목숨을 가장 아끼는 빌런들이 과연 서울에 계속 남아있을까요? 어떻게든 서울을 탈출해서 인천이나 경기 남부로 퍼지겠죠."
하랑은 빌런들의 행태를 지적하며 현상을 이야기했다.
"이미 광명이랑 성남쪽에서 수배중이던 빌런들이 발견되기 시작했어요. 빌런들의 엑소더스가 시작되는거죠."
"...끔찍한데."
사실상 현재 대한민국의 빌런은 모두 서울에 몰려있다. 정부가 손을 놓은 무법지대인 동시에, 괴수를 사냥해서 얻는 코어로 일확천금을 노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빌런들이 서울을 벗어나기 시작하면 사태는 겉잡을 수 없이 커진다.
빌런은 빌런대로 잡아야하고, 그 빈 자리를 노리고 남하나는 괴수도 상대해야했다.
귀찮은 일이 발생하기 전에 모두 체포해버리자. 그리고 그 중 쓸만한 녀석은 '재사회화'를 통해 전력으로 써먹자.
"그게 협회에서 집정관을 부산에 파견하면서까지 저를 올려보낸 이유에요."
"빌런들을 다 얼려버릴 셈이야?"
하랑은 어깨를 으쓱였다. 햇빛에 미지근해진 아이스티는 하랑의 손이 닿자 다시 차가워졌다.
"아뇨. 빌런은 체포해야죠. 얼려서 죽이는건 어디까지나 괴수만."
하랑이 낮게 웃자 승형은 어딘가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 주변 온도가 1도 정도는 순간적으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탁.
하랑이 아이스티를 휘휘 젓다 빨대를 들어 승형에게 겨눴다.
"그러니까 아저씨도 괜히 빼지말고 서울로 같이 가요. S급 되고 마력 컨트롤 연습하는데 이만한 기회가 또 없으니까."
"조언은 고맙다."
승형은 제 컵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런데 굳이 너랑 나, 둘이나 갈 필요가 있을까? 한 명만 가도 되지 않아?"
"...광검님께서 그러셨어요. 반드시 셋 다 가야한다구요."
하랑은 입술을 샐쭉 내밀며 빨대로 얼음을 괜시리 툭툭 건드렸다.
"서울에 큰 위험이 나타났으니, 힘을 최대한 모아야한다면서. 나 혼자서도 충분한데."
서늘하게 웃는 하랑의 눈에는 자신감이 흘러 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