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1부 3장 (1)
<잠시 뒤, 구로 디지털 산업단지 고층건물.>
"으아악! 온다!"
남자는 여의도를 향해 비추던 눈을 덮고 책상 아래로 숨었다.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강화된 <등대>의 이능력은 구로를 넘어 여의도까지 닿아, 활활 타오르는 국회의사당이 훤히 보였다.
"국회의사당에 불지른 미친 년이 온다!"
등대, 김지화는 그저께 제 영역을 습격한 괴한들을 떠올리며 공포에 빠졌다.
괴인 될 시간이다!
한낮에 지화가 자는 사이 창문을 깨부수며 난입한 그들은 한순간에 지화를 괴물로 만들고 그의 조직을 굴복시켰다. 그리고 지화-이제는 괴인 <등대>가 된 남자에게 온갖 명령을 내렸다.
- 돌아올 때 봉화 올릴거니까 그렇게 알고 점심 준비해요.
'봉화로 나라 건물에 불지르는 사람이 어디있어!'
신서울이 새로 생겼다고 할지라도, 지화에게는 아직 서울이 수도였다. 비록 제 영토가 구로에 한정되어있었지만 국가의 기반 건물들을 파괴하거나 손대지는 않았다.
비상식의 괴물에 의해 구로에서 '회장'이라고 불리던 남자는 야근에 치여살던 평사원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와장창!
유리창 깨지는 소리에 지화는 고개를 무릎 사이로 박았다. 20층 높이 건물의 꼭대기층에 유리창을 깨면서 들어오는 자들은 지화의 기억에 한 사람밖에 없었다.
"응? 어디갔죠?"
차가운 바람을 타고 온 목소리에 지화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역시 그 놈 목소리였다.
"김지화 씨~ 지금 저랑 숨바꼭질하자는 건 아니죠?"
'제발 꺼져!'
김지화는 두 손으로 귀마저 막았다. 그래서 그는 불꽃이 튀기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딱.
심장을 떨리게하는 저 핑거 스냅 소리. 지화는 본능적으로 탁자를 박차고 나왔다.
"허어, 허억!"
예상대로 탁자의 위에는 푸른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최고급 흑단나무로 짜인 책상이 한 순간에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괴인 3호는 술래는 재능이 있어도 숨는건 영 못하네요."
"히, 히익!"
회장용 의자에 걸터앉은 피닉스에 지화는 잔뜩 겁을 먹었다. 그런 지화의 어깨에 가늘고 흰 손이 내려앉았다.
"겁주지 말아요. 부하라면서요?"
"가, 가을 님...!"
지화는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가을을 구세주처럼 올려다봤다. 검은 자위와 흰 자위가 반대로 되어버린 악마같은 눈에 가을은 슬쩍 시선을 피닉스에게로 돌렸다.
"아니, 제가 뭐 일부러 놀래킨것도 아니고...."
"어떻게 죽였는지 생각하면 트라우마가 아닐 수 없지."
덕배는 털레털레 걸어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게 오히려 더 트라우마를 자극했는지 지화의 몸이 더 떨렸다.
"그래도 한 번에 죽었으니 다시 죽으면 처음보다는 덜 아플 걸요?"
"지가 죽어봐야 어떤 느낌인지 알지."
덕배가 빈정거리자 피닉스가 중지와 엄지를 붙였다. 마력을 움직여 튕기려는 순간, 가을의 눈초리를 흘렸다.
피닉스는 슬쩍 붙였던 두 손가락을 비비며 발로 바닥을 쭉 밀었다.
끼이이익.
의자가 대리석 바닥을 긁으며 지화의 앞까지 다가왔다. 지화의 격한 떨림이 손을 타고 가을에게까지 닿았다.
"이봐요, <등대>씨. 이제 어디까지 보여요?"
"구, 구로랑 영등포 일대는 전부다 보입니다! 무리 좀 하면 반경 8km 정도는 다 볼 수 있습니다!"
"나쁘지않네요. 조금 더 성장에 탄력을 붙여도 되겠어요."
피닉스가 주머니에서 괴수의 핵을 하나 꺼냈다. 코어화하지 않은 핵들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러면 이제 '이상한 사탕' 노가다 시간입니다."
"네, 네!"
떨리던 지화가 콧김까지 뿜으며 자세를 바꿨다. 무릎까지 꿇으며 하악거리는게 꼭 간식을 기다리는 강아지같았다.
피닉스가 떨떠름하게 핵 하나를 지화에게 건넸다. 지화는 건네받은 핵을 마치 마약처럼 냄새를 크게 들이마시고는 입에 넣었다.
"...그래서 부하들은 잘 준비하고 있나요?"
"하아, 네! 아직까지는 저를 '회장'으로 여기면서 특별히 의심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 말고는 굽신거리기까지 하며 피닉스를 따르는 지화의 모습에 덕배는 요 며칠 사이의 일을 떠올렸다.
피닉스는 구로에 진입하자마자 등대가 있는 이 층으로 날아와 지화를 습격했다. 유리창이 깨지며 그 파편이 자고있던 지화를 덮쳤고, 지화는 피닉스에게 멱살을 잡혀 고통스러워했다.
피닉스는 언급했다. 등대는 자신에게 꼭 필요한 인재라고.
모. 목숨만은 살려주, 꾸웩.
성격이 강약약강의 전형이었기에 힘으로 제압하려고 했는데, 멱살을 쥔 힘이 너무 강해 저도 모르게 지화를 죽이게 된 것이다.
- 그래서 지나가다 주운 B급 괴수의 핵으로 괴인을 만들었습니다.
졸지에 구로의 회장에서 괴인'이 되어버린 지화는 당황했지만 금방 굴복했다.
이능력을 각성하기 전까지 회사의 톱니바퀴에 불과했던 그는 피닉스라는 거대한 불합리의 폭력에 항거하지 못했다.
"흐음. 제가 내린 명령대로 다 하던가요?"
"네!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다들 순조롭게 괴수를 사냥했습니다. 어제는 D급도 잡았구요. 단장님께서 각성시킨 화염술사들이 가장 명령을 잘 따르고 있습니다."
"좋아요. 계속 그렇게 성장시켜주세요. 우리 청화단의 말단 전투원으로 활용될 예정이니까."
"그...제 부하들이 말단이면 저는...."
어딘가 우물쭈물하면서도 지화는 기대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피닉스는 한숨을 내쉬며 약속했다.
"이번 '회담'의 장소만 알아낸다면 간부 직위를 만들어줄게요."
"감사합니다, 단장님!"
지화가 절까지하며 방을 나섰다. 덕배는 그런 지화를 보며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건 도대체 저렇게까지 좋아하는 이유가 뭐야? 악의 조직 간부라는 자리가 그렇게 좋은건가?"
"조직은 통째로 저한테 뺐겼어도 부하들보다는 윗 계층에 있고 싶은거죠. 사장 밑에는 전부다 직원이지만, 그 직원들 사이에서도 계급이 있는것처럼."
"...그게 아니에요."
가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당신에게 또 죽을걸 아니까 그러는 거에요. 무서워서."
"흐응. 그렇군요."
"그렇군요? 지금 사람을 죽여놓고 그런 말이 나와요?"
가을이 쏘아붙였다. 피닉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왜요. 저 처음에 등대랑 교섭하려고 했어요? 그걸 바로 무시하고 부하들을 보내 죽이려고한건 저 남자구요."
"그렇다고 당신이 사람을 죽인게 아닌건 아니잖아요!"
"...그 얼굴로 그 얘기하니까 되게 괴리감이 심하긴 한데, 일단 얘기할게요."
피닉스는 계속 의자를 돌리다 가을쪽으로 멈췄다.
"미래의 천가을이 끔찍한 미래를 겪는 곳이 바로 이곳, 구로에요. 당신을 주웠던 부랑자들은 이 등대의 난민들이고. 당신은 등대에게 깔려 몇 년을 그렇게 지냈고. 저는 지금 당신이 그런 일을 겪는걸 막아준거에요? 결과적으로."
"결과적으로는 그렇겠죠. 하지만."
가을이 두 주먹을 불끈쥐고 피닉스를 노려봤다.
"설령 그렇다고해도 사람 죽이는 걸 예삿일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세계 평화를 말하는거, 저는 모순이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빌런이라고 해도."
"...흥."
피닉스는 콧방귀를 뀌며 깨진 유리창 밖으로 뛰었다. 등 뒤에 푸른 날개가 펼쳐지는 것으로 보아 또 옥상으로 가는 것이리라.
"하아."
가을이 긴장의 끈을 놓자 두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덕배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게 왜 설득을 하려고 하냐. 애초에 저건 말이 통하는 부류가 아니야."
"그러니까요. 정말 얘기를 하면 할수록 제가 더 이상해지는 기분이에요."
표정에서 느껴지는 피닉스의 진심이 가을은 너무 무서웠다. 위악(僞惡)으로 하는 발언이 아니라, 정말로 피닉스는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고 있었다.
"덕배씨는 괜찮아요? 엄청 괴롭힘 당하잖아요."
"...일단 나도 괴인이라는 입장이라, 명령을 거부할 수 없다. 난 이미 포기했어."
덕배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미 그는 저와 함께 지내던 이들을 모두 제 손으로 터뜨리고 온 순간부터 모든것을 포기한 지 오래였다.
"난 오히려 저게 여태까지 너를 안 죽이는 이유가 궁금하다. 너 도대체 쟤한테 뭐냐? 뭐 전생의 연인이라도 돼냐?"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자기는 미래를 안다면서 저러는데."
가을이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쥐어뜯었다. S대 주차장에서 자신을 구해주던 천사같은 모습에 반해 속았다.
피닉스는 천사의 탈을 쓴 살인귀였다.
"내가 왜 그런 바보같은 내기를 해서...."
가을은 피닉스에게 홀린 날의 자신을 원망했다.
이능력자로 각성하면 신서울까지 보내주겠다는 그 말도 안 되는 내기.
가을은 아직까지 이능력자로 각성하지 못했다.
* * *
"......남의 속도 모르고."
나는 난간에 걸터앉은 그대로 뒤로 누웠다. 하늘에는 잔뜩 먹구름이 끼어 금방이라도 비가 올것같이 흐렸다.
"안그래도 울적한데 하늘까지 흐리네요."
나는 손을 하늘로 뻗었다. 피닉스의 손은 백옥같이 희고 아름다웠다.
"앞으로 이 손에 묻힐 피가 얼마나 많은데."
앞길을 가로막는자, 맞서 싸워야할 자, 반드시 죽여야 할 자.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만 수십 명이다. 그들은 신의 파편이 파멸을 불러오는 씨앗임을 모르고 손에서 놓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그들의 손을 잘라서라도 빼았아야했다.
그래서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천가을이 자꾸 딴지를 거는것이 너무 어색하고 이상했다.
난 당신을 위해 죽어줄 수 있는데.
모습은 다르지만 본질은 같다. 마스커레이드로서의 천가을은 내 의견에 아무런 토를 달지 않고 그대로 따랐다. 죽으라면 진짜 죽었을지도 모를 정도로.
'안 돼. 정신차리자. 지금 천가을은 네가 알던 그 여자가 아니다.'
끔찍한 과거를 겪기 전 순수했던 시절의 인간이다. 그리고 천가을을 그런 인간으로 만든 이는 다름아닌 나다.
'이해해야 돼. 이해.'
나는 몸을 일으켜 난간 위에 섰다. 서쪽으로 떨어지는 해는 아직 지평선 아래로 사라지지는 않았다.
"후우."
천가을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나중에 생각하자. 지금 당장은 블랙마켓을 통해 들어온 정보에 대해 온 정신을 쏟아야할 때다.
"역시 시작하는구나."
서울수복작전.
백상우로부터 사들인 그 작전의 결행일, 4월 15일까지는 앞으로 나흘 남았다.
* * *
<같은 시각, 신서울 정부청사.>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이승형 히어로님."
경호실장의 인도에 따라 승형은 복도를 걸었다. 청사에 들어온 순간부터 승형을 눈치챈 이들이 모두 승형을 두고 수군거렸다.
- 세상에, 이승형이잖아? 여기는 왜 와?
- 대통령 조카잖아! S급까지 됐으니 불렀겠지.
- 진짜 잘생겼어.
- 지가 천가을 뭐라고 상주를 해.
놀람. 질시. 선망. 증오. 사람들의 목소리와 감정은 더욱 진하게 승형을 찔렀다.
"......후우."
승형은 크게 심호흡하며 들끓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제 만날 남자는 평정심을 가지고 만나지 않으면 안 될 사람이다.
"안 쪽입니다."
경호실장은 문 너머의 작은 방을 가리켰다. 승형은 익숙한 발걸음으로 방으로 들어갔다.
"왔나?"
작은 집무실에서 펜대를 움직이던 남자, 선의철은 서류철을 접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승형의 가슴팍에 이를 정도로 선의철의 키는 작았지만, 그는 이미 이 신서울의 정상이 되었다.
"앉지."
"예."
자연스레 선의철이 상석에 앉고 승형은 그 옆에 앉았다.
"먼저 S급이 된걸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승형은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그가 S급이 된지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지만, 아직까지 승형은 선의철과 직접 대면하지 못했다. 아니 않았다.
선의철은 승형의 가슴팍에 걸린 명찰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
"아직까지도 외가의 성을 고집할거냐?"
"...아버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본디 선승형이었을 이름은 평양 사태 이후 작고한 그의 부친의 유언에 따라 외가의 성을 따르게 됐다.
그것이 선의철은 지금까지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람들의 상상력은 참 대단하지. 성씨가 다른 숙부와 조카. 누구는 혼외자니 뭐니 떠들기까지 하더군."
"......."
승형은 그저 침묵을 지켰다. 그것은 빨리 본론을 말하라는 무언의 항의이기도 했다.
선의철은 혀를 차며 스마트워치의 스크린을 띄워 넘겼다.
"서명해라."
"싫습니다."
승형이 선의철과 눈을 마주했다. 선의철은 날카로운 삼백안을 번뜩이며 소리질렀다.
"서명해!"
"거부합니다. 저는 협회 소속의 히어로입니다. 대한민국 정부 소속이 아니죠."
"협회를 믿고 강짜를 부리는거냐, 지금?"
아무리 범국가적 조직인 히어로 협회라도, 그 나라의 정부의 입김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특히 한국은 아직까지 협회보다 정부의 힘이 더 컸다. 평양 사태 이후 협회가 한국에 대한 지원을 줄여나가며, 역설적으로 정부의 힘은 더욱 커졌다.
"서울을 수복할 기회야! 서울과 신서울, 부산으로 이어지는 신경부선으로 우리는 다시 일어날 수 있어!"
"취지는 이해합니다. 괴수의 땅이 된 서울에 저를 배치해서 서울을 다시 부흥시키려는 계획. 하지만 말입니다."
승형의 두 눈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정말 대통령님께서는 서울의 난민들을 구하기위해 서울을 수복하려는 겁니까? 대통령님께서는 서울을 수복했다는 것으로 얻을 다른 이득을 더 많이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부정은 하지 않는다."
S급 히어로의 기세에도 선의철은 눈하나 꿈뻑이지 않았다.
"서울 수복에 따른 국가 전체의 사기 고취, 서울 전역에 흩어진 괴수들의 코어, 서울을 수복하는데 성공한 대통령. 그 외에도 엄청난 이득이 있지."
선의철은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이득이다. 궁극적인 목적은 이 나라, 대한민국의 부국강병이다."
선의철의 목소리에 울분이 섞이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미사일을 쏜 걸 뻔히 알면서도 아무말 못했던 심정을 이해하나? 언제까지 중국과 일본 사이에 치여서 무시당하며 살아야하나. 서울을 수복하면, 전 세계는 다시 우리를 주목할거다."
선의철의 손가락이 승형을 가리켰다.
"마치 네가 원탁의 공석 주인으로 거론되는것처럼."
"...당치도 않은 말입니다."
승형의 두 눈에 타오르던 불씨가 꺼졌다.
"저는 그저 사람 하나 제대로 구하지도 못했던 애송이일 뿐입니다. 그러니 저를 중심으로 짠 이 작전, 취소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승형은 스크린을 닫았다. 선의철은 그럴줄 알았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명심해라."
선의철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너는 분명 나흘뒤, 서울로 진격하는 부대의 선봉에 있을테니."
"그럴 일, 절대 없을겁니다."
승형이 벌떡 일어나 문을 나섰다. 항상 둘의 대화는 이렇게 짧은 시간에 서로의 감정만 상하며 끝났다.
"......."
승형은 경호실장의 눈치를 흘리며 하릴없이 청사를 빠져나왔다.
신서울의 하늘은 승형의 마음처럼 우중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