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1부 2장 (14)
가을이 깨어나기까지의 그 잠깐.
나는 빈 강의동의 칠판을 이용해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마그마 속에서 세웠던 계획들 중 당장에 처리해야할 급한 것 부터 하나 둘 리스트를 적어나가며 우선순위를 정했다.
1. 여의도의 큐브 회수.
큐브이 어디있는지 장소는 알고 있다. S급 필드보스가 숨어있는 프리 던전. 그냥 가서 목을 따고 큐브흘 회수하기만 하면 된다.
2. 서울의 빌런들을 규합하기.
원래는 땅따먹기를 하듯 하나하나 힘으로 굴복시키며 천천히 힘을 늘려나가려 했다.
하지만 예기치못한 차원문의 발생으로 빌런들을 청화단의 아래에 두는 계획을 대폭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차원문을 두려워해서 쉽게 도망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빌런들은 북쪽에서 내려오는 괴수들의 방파제 역할을 해줘야한다. 평양의 괴수는 큐브의 힘으로 끊임없이 괴수를 생산해내는데, 이 괴수들이 대부분 D~B급이라 코어 장사를 하기에 딱 좋은 공급원이다.
'그리고 그 자금은 주인공 키우는데 요긴히 사용될 예정입니다.'
겸사겸사 신서울에 땅도 좀 사고 건물도 좀 사고 카페도 하나 차리고 임대 사업도 하고 슈퍼카도 좀 몰아본다는 아주 부수적인 목표도 있지만, 세계평화를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전세계를 돌아다녀야 하기도 하니까. 음. 무죄. 문제없음.'
거기에 큐브까지 다 모아야한다. 한반도 밖에만 24개가 있으니, 그걸 다 모으려면 5년동안 비행기건 기차건 수도없이 타고 다녀야했다.
직접 날아가면 안 되냐고? 모택평 같은놈한테 미사일로 배빵맞는건 다시는 사양이다.
'그리고 마지막이....'
나는 내 두 손을 잡고 눈을 껌뻑껌뻑 거리는 천가을을 흐뭇하게 보며 말했다. 천가을은 내 '뉴페이스'발언에 상당히 당황해했다.
"천가을 씨. 이능력자신가요?"
"...아니요?"
천가을은 무능력자다. 이능력을 각성하고 제대로 성장만 한다면, 환속성 88%라는 친화력을 바탕으로 A급 이능력자 상위권에 들만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죄송합니다. 제가 그 플래그 부쉈네요.
"네. 무능력자죠. 배우로써 뛰어날지는 몰라도, 신서울까지 여자 혼자의 몸으로 무사히 내려갈 수 있을까요?"
"그건 피닉스 씨가 조금 도와주기만 하면?!"
"제.가.왜.요?"
나는 일부러 한 자 한 자 끊어서 말했다. 잡힌 손에서 미약한 떨림이 느껴진다.
"제가 가을 씨를 도와줘서 무슨 이득이 있죠? 히어로 협회에 데려다 달라구요? 예상하시다시피 저희 빌런인데?"
나는 가을의 두 손을 놓고, 두 팔을 내 어깨위로 활짝 펼쳤다.
"우와! 가을 씨는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원수로 갚는군요! 저는 그저 지나가다가 사람을 구해주고 선의로 히어로에게 인계했다는 것 만으로 감옥에 갇히게 생겼어요!"
"그, 그러면 사냥꾼들한테라도 보내주세요! 사냥꾼들은 괜찮잖아요!"
점점 가을이 어깨까지 몸을 떨기 시작했다. 나는 덕배가 발로찬 의자 위에 서서 한 발로 섰다.
"덕배 씨, 사냥꾼들이 제일 좋아하는게 뭐죠?"
"돈."
"만약에 우리가 현상금 걸려있다면?"
"바로 신고하겠지."
덕배의 대답에 나는 그 보라는듯 손짓하고 의자를 발로 튕겨 바로 세웠다.
"어머. 그럼 사냥꾼들도 안 되겠네요. 저희들 보면 무조건 신고부터 할테니까. 그럼 도망가야하는데 협회에서 끈질긴 추적이 시작되겠죠? 그런 귀찮은 일은 사양이네요. 남은건...."
나는 덕배와 나를 번갈아 가리켰다.
"저희같은 '빌런'들일텐데, 괜찮으시겠어요? 저야 뭐 이제 그런 쪽으로 관심없고, 덕배는 고자-야!-앗 깜짝이야. 저쪽 벽에 가서 손들고 서있어요."
귀청이 떨어질뻔 했다. 나는 덕배에게 체벌을 내렸다. 덕배는 얼굴로 씩씩거리면서도 로봇처럼 움직이며 벽을 보며 두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흠흠. 아무튼 어지간한 빌런은 가을씨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걸요? 수면제나 최음제 먹이고 기절시킨다음에 강간하려는 쓰레기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알아요? 그렇죠, 조덕배 씨!"
"...ㅁㅁㅁ."
음소거 필터링이 된다는걸 안 이후로 대놓고 욕설을 내뱉으려한다. C급으로 진화해 마력이 늘어났다는 반증이기는 하지만 건방지다.
나는 조만간 덕배에게 더 큰 제약이 걸린 명령을 내리기로 마음먹고, 사색이 되어가는 천가을에게 다가갔다.
"히, 히익?!"
"기적적으로 빌런을 피할 수 있다고 가정해봐요. 그럼 이제 뭐가남았을까요?"
이제는 이까지 떨며 천가을이 공포에 질렸다. 나는 천가을을 방금처럼 꾹 끌어안아주며 토닥였다.
"괴수중에는 말이에요, 인간을 먹이로 여기는 괴수 말고도 성적 노리개로 생각하는 것들도 있어요. 아참, 여기에 남녀 구분은 없답니다? 구멍만 있으면 얼마든지 박겠다는 괴수가 한 둘이 아니에요. 나중가면 괴인에 박겠다고 가능하다고 하는 인간들도 생겨나는데...아차. 커트."
괴인 관련 발언은 아직 NG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천가을의 등을 두드렸다. 다행히 두근거리는 심장은 조금씩 박동이 잦아들었다.
"그래서 생각을 해봤어요. 제가 천가을 씨를 신서울까지 안 모셔다줘도 되고, 천가을 씨도 무사히 신서울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후우. 좋아요."
천가을이 슬쩍 나를 밀어냈다. 나는 그 약한 힘에 부응해 포옹을 풀고 거리를 벌렸다.
"말해봐요. 내가 할 수 있는거라면 뭐든지 할게요. 은혜도 갚을거구요. 피닉스 씨 말한대로 원수로 갚거나 그러진 않을거에요. 절대로."
"뭐, 특별한 건 없고. 간단해요. 천가을씨 노력에 달려있는거니까."
나는 등 뒤로 창염의 날개를 펼쳤다. 일부러 크기를 키워 강의실 전체를 채워 능력을 과시했다.
가을은 아닌척하면서도 화들짝 놀라했다. 불안함에 꼬물거리던 손가락이 굳어있었다.
"힘이 있으면 괴수나 빌런에게 습격당할 일도 없겠죠?"
"...네."
그것은 가을 스스로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으리라. 당장 괴수한테 죽을뻔 했으니까.
"그럼 힘이 생기면 되겠네요?"
"그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잖아요?"
가을이 두 주먹을 불끈쥐었다. 촉촉히 젖은 눈에는 억울하면서도 결연한 의지가 엿보였다.
"제가 할 수 있는건 '연기'밖에 없어요. 재력? 재산이라고 해봐야 신서울에 있는 집 한채 뿐이에요. 권력? 고작 배우 하나가 무슨 힘이 있겠어요?"
"몸이 있잖아요?"
짝.
볼이 얼얼하다. 고개는 돌아가지 않았지만 내 볼에는 가을의 손바닥이 닿아있었다. 정확히는 1cm 떨어진 허공에.
"아아...!"
가을이 제 손을 부여잡으며 고통스러워했다. 이미 가을의 손과 내 볼 사이에는 아주 얇은 마력의 벽이 생성되어 있었다.
아무리 상대가 천가을이라고 할지라도 피닉스의 옥체에 손을 대게 할 수 없다.
"의지는 알겠어요. 몸은 팔기 싫다는거죠?"
"당연하죠! 어떤 여자가 좋아서 몸을 팔겠어요! 다른 방법이 있으면 그걸 선택하지!"
나는 저 말이 다른 누구도 아닌, 천가을의 입에서 나온다는것에 기분이 싱숭생숭해졌다.
"후우. 좋아요. 가진 거라고는 몸밖에 없는 사람이 그마저도 팔기 싫다?"
나는 책상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천가을을 동료로 맞이했던 당시의 세상을 향한 증오와 절규가 떠올랐다.
"한 여자가 있었어요."
히어로의 도움을 받지도 못했고, 사람들에게 배신당해 홀로 괴수들 한 복판에 남은 여자. 생의 첫 경험을 괴수들에게 강간당해 장난감처럼 돌려지다가 가까스로 살아남은 일반인.
내가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커뮤니티에서 들었던 천가을의 과거. 나는 5년 동안 그녀가 겪은 단편적인 이야기들을 하나 둘 읊었다.
"기적적으로 지나가던 이들에 의해 괴수들로부터 살아남았지만, 저런! 비극은 끝나지 않았죠. 여자를 살려준 사람은 지하에 숨어살던 부랑자들. 짐승같은 남자들은 여자를 전리품처럼 챙겨 몇 년을 윤간했죠. 그 유산이...몇 번이더라?"
세 번인지 네 번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내가 직접 천가을에게 들었던 것도 아니고, 정리글을 읽기만 해도 불쾌한 설정이었으니.
그런데 천가을의 표정이 점점 굳어가고 있다. 역시 자신이 겪을뻔한 미래를 들으니 느낌이 달라지는걸까?
"그렇게 노예처럼 살다가 여자는 이능력을 각성했어요. 남자들은 괴수들과 마찬가지로 여자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 또다시 괴수들에게 버려버렸어요. 남자들은 숨어서 여자가 괴수들에게 당하는걸 낄낄대며 지켜봤죠."
천가을의 과거 설정이 밝혀지고 그녀가 메인 히로인이라는게 알려지며 자연스레 커뮤니티는 불탔다.
비록 게임이라고 할지라도, 굳이 이렇게까지 한 인간에게 심한 고통을 줘야 했느냐.
"하지만 괴수에게 죽을 뻔한 여자는, 그 순간에 정말 기적적으로 이능력을 각성했어요."
마스커레이드. 가을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비웃던 남자의 이능력을 복사해 괴수들을 죽이고, 남자들을 죽였다. 그게 천가을의 각성의 날이요, 첫 살인의 밤이었다.
"능력을 각성한 여자는 자신을 강제로 취했던 이들의 목숨을 취했어요. 뭐 그중에는 남자 말고도 여자도 있었는데...그건 중요한게 아니고."
나는 날개를 해제하고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멀리서 느껴지는 마력의 파장은 쉐도우 피닉스가 히어로들과 큰 전투를 일으키는 것 같았다.
히어로들 마력 파장이 개판인걸 보니 좀 더 패놓을걸 그랬나싶다. 나는 베일을 꼬며 마저 말을 이었다.
"여자가 그 몇 년 동안 제일 많이 배운게 뭔지 알아요? 몸을 쓰는 방법이에요. 아양을 떨고, 교태를 부리고, 가지고 있는 가치라고는 제 몸밖에 없으니까. 다행히 여자가 몸매는 좋았거든요."
나는 가을과의 잠자리를 떠올렸다. 5년동안 그 고생을 했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가을은 몸 관리에 철저했다.
게임상에서 가을에게 안티에이징 드립을 치던 동료 하나는 그 과거를 알고 무릎까지 꿇으며 사과했었다.
"...그."
덕배가 나를 보며 표정이 일그러졌다. 나는 그게 마음에 들지않아서 손가락을 튕겨 덕배를 날려버렸다. 덕배는 벽을 뚫고 복도를 굴렀다.
"......."
가을의 표정이 이제는 울것같았다. 슬슬 약발이 드는 것 같다.
"자. 이렇게 이야기는 끝. 더 듣기도 싫을테니까 적당할 때 끝내도록 하죠. ...길어요? 흠. 맘같아서는 더 할 수도 있기는한데-"
"그만해도 돼요!"
가을이 울먹이면서까지 소리쳤다. 나는 가을의 마음이 꺾인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이정도 얘기했으면 혼자 서울 돌아다니겠다고 하지는 않겠지.
"그러면 이제 다시 원제로 돌아가죠. 아무튼 가을씨는 당신이 가진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할 필요가 있어요."
"그, 제 몸을-"
"아니요. 당신 몸매 좋은건 알지만, 당신의 그 환속성 친화력. 88%면 어느정도인지 알아요? A급 최상급이에요. 이게 어느정도냐면 영약같은거로 2%만 올려도 S급-"
"잠깐만요!"
가을이 손을 저으며 말을 끊었다.
"그러니까 피닉스 씨 말씀은 저한테 이능력자의 재능이 있다는거죠?"
"네. 아. 이게 재능이라고 표현하기는 좀 그런데요. 인간은 누구나 이능력자로 각성할-"
"그래서 결국에는 제가 이능력자로 각성해서 스스로 신서울로 돌아가라는 말인가요? 그때까지는 같은 조직원으로 있어달라?"
"......네."
갑자기 우울해졌다. 딸기케이크를 마지막에 먹으려고 일부러 남겨둔 딸기를 빼았긴 기분이다.
"...천가을 씨 말씀대로. 가을씨가 이능력을 각성할 때 까지 저희 청화단과 함께 해주셔야 된다는 말입니다."
가을이 뭔가 생각에 잠긴듯 고개를 숙였다. 나는 너무 몰아 세웠나 싶어 가을을 위로했다.
"그.... 너무 상처받지 마요. 그냥 그런 일도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니까. 다만 현실적으로 가을 씨를 이능력자로 각성시키는데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지금 제한적이라는것도 이해해주셔야 해요."
"도와주신다구요? 이능력자 각성을?"
나는 창염을 피워올려 동그랗게 만들었다.
"가을씨 친화력 중에 50 넘는게 풍속성도 있거든요? 환속성은 말할 것도 없고. 제가 화속성 친화력 50 넘기는 사람들 이능력자로 각성 시킬 수 있듯이, 풍속성이나 환속성도 마찬가지거든요?"
"뭐?!"
막 다시 들어온 덕배가 큰 충격을 받은것처럼 굳었다.
"마력에 속성 일곱 개가 있다며?! 너 빼고 너같은 놈이 여섯이나 더 있다는 얘기냐?!"
나는 박수를 짝짝짝 치며 덕배를 칭찬했다.
"우와! 조덕배 학생, 수업태도는 불량한데 이해력은 우수하네요! 네. 저같은 애들이 저말고 여섯 있어요."
다크 레기온의 7간부. 지금쯤 전 세계 곳곳에서 암약하며 정체를 숨긴채 각자의 세력을 만들고 있을 것이다. 세뇌된 상태로.
"아무튼 걔들만 만나면 천가을씨도 이능력자가 될 수 있다, 그 말입니다."
"제가...이능력자가 된다구요?"
가을이 두 손으로 입을 덮으며 경악했다. 나는 가을에게 다가가 구겨진 베일을 정돈해줬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이능력자로 만들어주고 신서울로 보내주고싶어요. 그런데 당신이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는 상태에서 이대로 보내준다면, 제가 참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아서 그래요."
혹시나 또 괴수에게 습격을 당해 죽을 위기에 처한다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현재 메인 히로인 중 이능력자가 아닌 사람은 천가을이 유일하다. 제 한 몸 지킬 힘을 가지게 할 때 까지는 계속 달고 다닐 계획이다.
쫑긋. 남쪽에서 거대한 마력의 파장이 퍼졌다. 슬슬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모양이다.
"...5분. 생각할 시간 5분 드릴게요. 그럼 그동안 고민해보도록 해요. 우리를 따라올지, 아니면 그냥 홀로 서울을 탈출할지."
나는 창문쪽으로 다가가 창문을 마력으로 부쉈다. 슬슬 차가운 밤공기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조덕배 씨는 천가을 씨 지켜요. 무슨 엄한 짓하면 진짜로 재미없을 줄 아세요."
"......알았다."
저건 또 왜 분위기잡고 난리람. 나는 그대로 창문틀을 짚고 옥상을 향해 뛰어올랐다.
"엇차."
난간을 짚고 옥상에 발을 디딘 나는 마력을 움직여 하늘을 날아다니던 미니피닉스를 불렀다. 내 부름에 미니피닉스는 재빨리 내 손 위로 날아와 착지했다.
"저 남쪽에 느껴지죠? 짝퉁이 싸우고 있는 곳. 저쪽으로 날아가주세요."
-알겠다는 거시야.
미니피닉스가 날개를 펼치며 남쪽,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곳으로 날아올랐다. 연결된 마력을 통해 내 시야는 미니피닉스와 연동되었다.
관악산을 타고 내려가는 아래, 쉐도우 피닉스가 산을 내달리며 만든 길을 따라간 끝에는 한창 전투가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쪼렙들 막싸움만큼 재밌는게 또 없죠."
나는 마력을 움직여 흔들의자를 만들고 그 위에 누웠다.
팝콘이라도 있으면 좋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