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1부 2장 (12)
"아하하하하!"
산길을 내려와 강의동 옥상에 차지한 피닉스는 건물이 뒤집혀라 웃었다. 그 뒤를 따라온 덕배는 연회색 피부가 붉어지다 못해 터질 지경이었다.
"청화의 거신, 푸흐흐. 아, 웃겨!"
"지가 다 멘트 정해놓고는. 내가 말했냐?"
"전 아무말도 안 했는데요? 입으로 소리낸 건 다 조덕배씨죠."
덕배는 소심한 딴죽을 걸었다. 하지만 역시 피닉스는 개의치않고 벽까지 짚어가며 낄낄대다가 근엄한 표정으로 덕배에게 손을 내밀었다.
"힘을 원하나?"
"오냐. 네 입 꿰어버릴 힘이라면 얼마든지."
"아 그건 좀."
피닉스가 정색하며 손을 흔들었다. 덕배는 저 촉새의 입을 언젠가 꿰메버리겠다고 굳게 다짐하며, 관악산 정상을 가리켰다.
"그래서 진짜 저거한테 맡기고 도망칠거냐?"
산 정상에는 쉐도우 피닉스가 이승형과 맞붙고 있었다. 날개 한 쪽을 잃었음에도 그 강력함을 과시하는 쉐도우 피닉스에 이승형은 급급히 공격을 피해내며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네. 잘 싸우네요? 역시 화속성. 시간 벌이는 될 듯."
피닉스는 생각보다 공격을 잘 흘리는 이승형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괜히 주인공이 피닉스의 힘 얻고 강해진게 아니었구만.'
피닉스의 근원은 창염, 불속성의 마력 그 자체다. 근원에서부터 직접 전해받은 작은 불꽃은 이승형의 잠재능력을 일깨우고 막혀있던 마력의 맥을 뚫었다.
'잘하면 S급도 되겠는데?'
쉐도우와 싸우며 잠재능력이 급속도로 빠르게 개화하고 있다. 정령석에 담아둔 창염을 영약처럼 흡수하는 이승형은 이제 쉐도우의 발톱에 주먹을 맞부딪히며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저거 너무 강해지는 거 아닌가?"
덕배가 걱정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피닉스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심장을 가리켰다.
"그래서 심장에 폭탄을 박아뒀잖아요.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터뜨릴 수 있게. 쾅! 하고."
심장에 자리잡은 창염은 꺼지지않고 이승형의 불꽃에 힘을 보탰다. 하지만 그 창염은 결코 이승형이 자의적으로 움직이게 할 수 없는 피닉스 고유의 마력이다.
딱.
피닉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이승형이 가슴을 부여잡으며 미끄러졌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쉐도우 피닉스는 남은 날개를 휘둘러 공중에 뜬 승형을 산 아래로 쳐날렸다.
우지지직!
나무들을 기둥째 꺾으며 날아간 승형이 마력을 추스려 비탈길에서 뛰어올랐다. 공중에서 자세를 정돈한 그는 다시 마력을 끌어올려 쉐도우 피닉스에게 달려들었다.
"봤죠? 방금 마력 창염에 영향받아서 잠깐 끊긴거. 제가 일부러 해제하기 전까지는 평생 달고 살아야하는 거에요."
"진짜 악마가 여기있네. 신은 어디서 뭘 하길래 이런 거 안 잡아가고."
"?? 제가 신인데요?"
"네가 신이라고?"
덕배는 머릿속으로 온갖 신성모독의 발언을 욕하지 않고 쏟아낼 준비를 마쳤다. 피닉스는 눈을 잠시 껌뻑이다가 웃으며 대답했다.
"아하하. 조덕배씨를 만든 창조신이죠. 그러니까 빨리 저를 찬양하세요. 신도 2호."
"차라리 죽여라."
"에이. 아직까지 써먹을 곳이 얼마나 많은데 제가 조덕배씨를 버리겠어요? 우려먹고 우려먹고 또 우려먹을 거에요. 후흐흐."
"언제까지?"
덕배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진지한 덕배의 분위기에 피닉스는 웃음을 지우고 대답했다.
"이 세상의 평화를 확정할때까지."
덕배는 피닉스의 말을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의도로 저런 말을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고 알기 싫었지만, 그것 하나 만큼은 확신했다.
눈앞의 이 괴물은 놀랍게도 진심으로 '세계 평화'를 추구하고 있다.
"...됐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덕배가 한숨을 푹푹 내쉬자 다시 미소를 찾은 피닉스가 손을 접었다 펴며 다시 재잘댔다.
"그럼 이제 슬슬 여의도로 떠날까요? 여기서 더 시간 끌리고 싶지 않은데."
"저거 진짜 내버려두려고?"
덕배는 산을 다 태워부술 기세로 움직이는 쉐도우 피닉스와 투닥거리는 승형을 가리켰다.
"혹시나 저게 S급 히어로 되기라도 한다면? 엄청 강해져서 그 심장에 박아둔 제약이 풀리면 어쩔건데? 대책있냐?"
"그런 생각을 왜 해요?"
피닉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국 히어로가 더 강해지면 좋은거잖아요."
"그게 무슨 귀신 시나락 까먹는 소리냐."
"S급이 하나 더 생기면 어디로 오겠어요. 슬슬 서울을 수복해도 되지않을까, 그런 말이 나오지 않겠어요? 그러면 서울에 숨이었던 빌런들이 어떻게 될까요? 도망치거나 하는 애들 말고 아직 미련이 있어서 서울에 남는 녀석들."
피닉스는 슬쩍 구로 방향으로 눈을 돌리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강력한 구심점이 필요하겠죠? 흐흐."
* * *
국가비상사태.
메뉴얼대로라면 '악마종'의 출현은 국가비상사태를 발동해도 모자랄 정도의 위기였다.
"황해 영해 너머에 다수의 히어로 반응! 중국계 히어로들입니다!"
"동해 독도 근처에도 반응이 있습니다! 일본입니다!"
유영호는 찌그러뜨린 캔을 땅에 집어던졌다.
"한 시간내로 처리하면 되잖아! 승냥이같은 놈들이!"
다저스 게이트 이후로 맺어진 전세계 협약. 차원문을 닫는데 실패해 악마종이 출현한 경우, 국가나 국경에 관계없이 타국에서 개입을 하여도 된다는 횡포에 가까운 내용이다. 한국 또한 그 협약에 가입되어 있었다.
"<집정관> 오더! 모든 히어로들은 S8 지점으로 모여! 안양에서 막는다!"
침까지 튀겨가며 외치는 영호의 명령은 오퍼레이터들에 의해 쪼개졌다. 경기 남부 곳곳에 펼쳐져있던 히어로들의 신호가 의왕시로 모이기 시작했다.
'안양이 전부 파괴되는 한이 있더라도...!'
마음같아서는 주민 한 명 한 명 전부 소개를 하고 전투에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모니터 상단에 야속하게 흐르는 타이머는 벌써 55분밖에 남지 않았다.
'중국과 일본이 개입하면 안 돼!'
이미 역사가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양국은 명분만 생기면 언제든지 한국을 괴롭히고 제 영향력 아래에 두려했다. 황해 상공 수송기들 사이로 적토를 탄 무장의 모습도 보였다.
'<운장>까지 왔어. 중국은 지금 진심이다.'
히어로들이 하나둘 지정된 지점으로 집결하기 시작하던 때, 영호의 귀를 거슬리게 하는 신호가 들려왔다.
"뭐야?!"
"괴수대책부에서 급전! <광검>의 파견은 불가하다고...!"
"미친 새끼들이?!"
영호는 욕설까지 내뱉어가며 진심으로 화를 냈다. 전파가 제대로 닿지 않는다는 핑계로 장관의 전화를 끊어버린 것을 이딴식으로 복수하다니.
"강소연! BH에 직접 연락하든 어떻게든 광검을 불러!"
"네?! 하지만 괴수대책부에서 파견을 반려했다면-"
"내가 손진광 그 새끼 모를 줄 알아?! BH에 괜찮다고 구라치고 부산으로 달려가서 일본가는 비행기 탈 새끼야, 그 쓰레기는!"
점점 영호의 언사가 과격해졌다. 전술기획과의 팀장으로 오기 전부터 현장에서 구르던 옛 성격이 서서히 수면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악마종에게서 이상반응?!"
마력을 탐지하는 스크린에 집중하던 오퍼레이터가 소리쳤다. 영호는 워치를 두드려 화면을 크게 키웠다.
악마종의 형태를 드러내는 화상. 마력패턴을 분석하는 레이더는 괴조의 왼쪽 날개가 크게 데미지를 입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누구야?!"
"히어로 반응 없음! 사냥꾼도 아닙니다!"
악마종이 혼자 날뛰다가 다칠리도 없다.
그렇지만 S급 이상의 괴수를, 악마종을 죽일만한 이능력자가 서울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설마 빌런이?'
협회의 눈에서 벗어난 빌런이 서울에 있고, 그 빌런이 지금 악마종에게 상처를 입혔다?
믿을 수 없었다. 최소한 판단의 근거가 될만한 정보는 있어야 했다.
"위성! 위성 화면을 돌려!"
악마종이 데미지를 입었다면 분명 다시 위성 영상이 잡힐 것이다. 영호의 예상대로 악마종에게서 나오는 마력의 파장은 옅어져 위성의 영상이 흐릿하게나마 보이기 시작했다.
"뭐...라고...."
악마종 괴조의 한 쪽 날개가 꺾여있었다. 산비탈을 구르던 괴조는 가까스로 몸을 바로하며 산 정상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관악산의 정상. 영호는 그곳에 누가 있는지 깨달았다.
"이승형!"
트레이드마크인 불곰의 형상은 없었다. 하지만 온 몸에서 피어오르는 불꽃은 그가 새로운 경지에 접어들었음을 보이고 있었다.
"이승형 마력 체크해! 당장!"
영호의 말에 오퍼레이터들이 분주하게 손을 움직였다. 오퍼레이터는 스크린에 뜬 결과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추정치 S! 이승형 요원 각성했어요!"
우와아아아아악!!
본부 전체가 환호성에 휩싸였다. 영호 또한 남들 보이지 않게 주먹을 쥐고 파이팅을 했다.
"이승형! 응답하라, 이승형!"
[여기는 불곰, 크윽!]
본부에 이승형의 목소리가 울렸다. 악마종 괴수의 공격을 피해내면서도 이승형은 계속 본부와 연락을 주고 받으려 안간힘을 썼고, 마침내 연락이 잡혔다.
[강합니다! 아직 혼자서는 힘들어요!]
"유도할 수 있겠나?"
영호가 관악산 남쪽의 루트를 찍었다. 산을 타고 내려온 길의 끝자락에는 반쯤 폐허가 된 종합운동장이 있었다.
"안양 근처에 히어로 40이 대기중이다!"
[네! 가능합니다. 이 녀석, 분명!]
이승형이 크게 뒤로 뛰었다. 낭떠러지 아래로 구른 악마종 괴조는 다른 날개를 퍼득이면서 이승형을 쫓았다.
[저를 노리고 있어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감이냐?!"
[네!]
"그럼 내 루트대로 유인해!"
영호는 광검과 여러 차례 전장에 나서며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S급들의 감각을 신뢰하게 됐다.
"사냥꾼들에게 지원 요청해! 악마종은 안양에서 우리가 처리할테니, 나머지 아직 안 죽은 괴수들 잡으라고!"
악마종만 해결할 수 있다면 사냥꾼들의 사냥은 계속 이어진다. 예상대로 악마종은 산을 불태우며 승형의 꽁무니를 쫓아 남하했다.
"레이드 준비! 날개꺾인 새타입 괴수는 그냥 치킨일 뿐이다! 악마종을 두려워하지마라!"
유영호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각성한 히어로의 닉네임을 새롭게 붙여주는 것은 그를 지휘하는 지휘관의 임무였다.
영호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를 위해 준비한 이명을 상기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S급 히어로, <화권>이 있다!!"
* * *
"오. 내려간다. 이제 더는 못보겠어요. 아쉽게시리."
나는 산 너머로 사라지는 짭닉스에 애도를 표하고 옥상 난간에서 뛰어내렸다. 하늘하늘한 사제복 치마는 마력으로 고정해 뒤집히는 불상사를 막았다.
4층 건물 높이지만 아무 문제없이 화단에 착지한 나는 열려있는 창문으로 들어갔다.
"그럼."
짝. 박수를 치자 창염이 옷에 붙은 흙먼지를 태워버리고 구겨진 부분을 폈다. 창염을 그대로 담은듯한 디자인의 사제복은 가지런하게 펼쳐졌다.
'스킨만세.'
메인 히로인들의 각자 개성에 따라 심혈을 기울여 제작됐다는 다양한 직업군 코스프레 타입의 DLC. 인당 1벌, 총 17벌이 준비되어있다는 이 DLC가 발매됨에 따라 16명 이외의 히로인이 1명 더 있다는게 밝혀졌다.
그 중 창염의 피닉스는 '성녀'라는 컨셉에 따른 사제복 스킨을 가지고 있었다.
'구현하는 방법을 몰라서 교복이나 입고다녔지.'
덕배가 참 여러모로 쓸모가 많다. 덕배를 가지고 이것저것 실험한 덕분에 창염을 다루는데 점점 숙련도가 붙어서, 게임 속 요소들의 일부들을 하나둘 실제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덕배에 마력을 집어넣고 사용한 괴인의 무기화라던지, 의복에 창염을 부여해 스킨의 형태로 바꾼다던지.
물론 교복이 사라진건 아니다. 촘촘히 짜인 마력을 해제하면 사제복은 다시 교복으로 돌아간다.
'비바, 마법.'
자연의 법칙을 무시하는 마법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것만 같았다. 마력을 돌려 사제복을 교복으로 다시 바꾼 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드르륵.
경첩소리조차 나지 않도록 세심히 열었음에도 낡은 문이 덜컹거리며 밀렸다.
새근, 새근.
"진짜 잘 자네."
천가을은 아예 베일을 안아배게삼아 끌어안고 자고 있다.
나는 천가을의 머리맡에 앉아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쓸어주었다.
'옛날 생각나게시리.'
13회차? 아니 14회차였나? 헷갈리기 시작했다. 막 문 너머로 덕배가 성큼성큼 들어오려했다.
"언제 갈 거-"
"쉬이이."
나는 빈 손으로 검지를 들어올려 입술에 붙였다. 덕배는 떫더름한 얼굴로 내 옆에 잠든 여자를 보더니 눈을 찡그렸다.
"TV에서 많이 본 얼굴인데."
"누군지는 알아요?"
"몰라. 근데 그 여자는 왜 납치한거냐?"
나는 마력을 움직여 덕배의 입에 쑤셔 박았다.
"납치라니요. 제가 목숨을 살려준거거든요?"
"크, 커억. 그래. 그렇다치자. 그럼 이제 어쩔거냐? 업어서라도 여의도 갈 거냐?"
"아뇨. 깰 때 까지 기다리려구요. 그 정도는 기다려줄 수 있어요."
나는 천가을의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소중한 사람이니까."
진엔딩을 위한 첫 번째 피스. 내게는 내 목숨 다음으로 소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