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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25화 (25/1,497)

〈 25화 〉1부 2장 (11)

"와. 짭이다."

등산로를 반쯤 올라가던 나는 하늘에 떠오른 보라색 괴조-쉐도우 피닉스를 보며 감탄했다.

성주는 테라에서 정령들을 세뇌하여 그 마력을 뽑아내 열화판 괴수들을 만들어냈다. 원작에서는 동료로 들어온 간부들을 대상으로 개별 루트에 진입했을 때 해당 정령의 적으로 나오는 잡몹들.

하나하나가 B~S급이기는 해도 개별 루트에 진입한 때면 이미 게임은 극 후반이라, 복제품 짝퉁 괴수들은 주인공 일행의 경험치 공급원일 뿐이다.

'근데 피닉스 것도 있을 줄이야.'

원작에서 겪지 못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날개를 펼치는 쉐도우 피닉스를 보며 괜스레 머쓱해졌다.

'저거 내가 서해에서 하던 짓이랑 똑같은데?'

운장 샤오린을 상대로 날개를 뽐내던 행동을 똑같이 하는 쉐도우가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나는 귀에 손을 갖다 대고 마력을 불어넣었다.

"조덕배 씨? 들리나요?"

- 뭐야?!

놀라는 걸 보니 제대로 연결된 모양이다. 나는 불의 거인이 된 덕배의 위치를 확인하고 손을 흔들었다.

"저 어디 있는지 알겠죠? 이쪽으로 달려와요."

- 거기 뭐 이상한 거 있는데? 딱 봐도 엄청 세 보이는데?

"아. 별거 아니에요. 그냥 제 짝퉁 같은 녀석이라. 그렇게 겁먹을 필요 없어요."

- ...네 짝퉁이면 겁나 강한 거 아니냐?

덕배의 말에 나는 말을 삼켰다. 공기를 타고 전해지는 열기에서 느껴지는 추정 마력치는 S급 중에서도 최상급.

"...음, 펜릴 정도는 되겠는데요? 근데 저랑 비교하면 막 그렇게까지 강한 녀석은 아니에요. 5분만 가지고 놀아도 이길 정도?"

- 뭔 소린지 여전히 모르겠지만 감은 온다. 일단 나보다는 드럽게 강하다는 거군.

"아니 뭐 그렇기는 한데 막 죽어라 강하거나 하는 건 또 아니고...."

그냥 내 짝퉁 주제에 다른 간부들 급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게 조금 찝찝했다. 도대체 어디서 쉐도우가 나올만한 건덕지가-

'또 나야?'

쉐도우는 차원문 너머에 있는 그 원본 정령의 마력에 이끌려 나타난다.

원본을 없애고 그 핵을 취해 원본을 뛰어넘으려는 카피체들의 본능.

쉐도우 피닉스 또한 내가 쉴 새 없이 뿌려댔던 창염의 흔적을 읽고 억지로 차원문을 뚫고 넘어온 것이리라.

'싸우기 귀찮은데.'

이길 수야 있다. 하지만 지금은 싸우기보다 어딘가 조용한 곳에서 차분하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고 고민할 필요가 있었다. 전투로 인해 모습이 노출되는 것도 싫고.

'차원문은 닫혔네.'

최초의 차원문 뿐만 아니라 쉐도우가 넘어온 차원문도 쉐도우의 마력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렸다. 이제 사실상 서울에 남은 위협은 잔챙이 괴수들과 쉐도우 뿐이다.

나는 철저하게 마력을 숨기고 산 정상 근처 나무 뒤에 숨었다. 뒤쫓아온 화속성 마력의 주인은 지금 멘탈이 붕괴된 채 허망하게 쉐도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아니잖아."

- 뭐? 아니야? 너보다 강해?

"당신에게 한 말 아니에요. 일단 이쪽으로 뛰어와요."

독산역에 우물쭈물 서 있는 화염 거인-덕배가 눈에 띄었다. 덕배가 나름 건물을 피해 달려오는 사이, 나는 거의 울기 직전인 남자를 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주인공은 절대 아니다.'

아무리 원작이 꼬여있다고 가정해도 전제 조건 자체가 틀렸다. 주인공은 현재 이능력을 모두 잃어버린 무능력자. 그래서 무능력자이면서도 괴수를 쓰러뜨리는 데 힘을 보탤 수 있는 지휘관의 길을 걷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였다. 다행히 아니었다.

'그럼 그냥 미등장 캐릭터인가?'

A급 화속성 남자 히어로. 1000명이 넘는 동료들을 영입했지만, 그중 저런 히어로는 없었다. 아마 5년 뒤인 원작이 시작되기 전에 죽었거나 은퇴한 녀석일 터.

'괜히 달려왔네.'

확인은 했으니 이제 별 볼일은 없다. 나는 서쪽 산 아래로 빠르게 내려가 달려오는 덕배를 맞이했다.

"이제 멈춰요."

□□□□?!

막 발을 디디려던 덕배가 바로 밑에 있는 나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급하게 멈추려다 발을 헛디딘 화염 거인이 산기슭에서 자빠졌다.

쿠웅!

관악산에 거대한 인간의 모양이 찍혔다. 창염은 쉐도우의 불꽃과는 달리 주변 나무에 불을 붙이거나 하지 않았다.

짝.

내 두 손바닥이 마주치자, 화염 거인의 푸른 불꽃이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숨을 한 번 들이마실 짧은 시간에 화염 거인은 비탈길을 굴러 내려가는 회색의 바윗덩어리만 남기고 사라졌다.

부우웅.

눈에는 보이지 않는 잔여 마력들이 바람을 타고 흘러와 내 손바닥 사이로 들어왔다. 덕배에게 무리하게 짜 맞추어 순수하게 제 힘만을 사용한 정령석은 텅 빈 결정으로 굳어졌다.

'완전히 비었어.'

나는 손바닥 사이에서 굳어진 마력의 결정을 만지작거리며 산을 타고 내려갔다. 비탈길 아래 아름드리 소나무에 회색 바윗덩어리가 걸려있었다.

통, 통통.

"실하네요. 3 초안에 안 튀어나오면 수박 깨버리듯 부숴버릴-"

"으아아악!!"

회색 바위 사이에서 주먹이 튀어나오며 덕배가 솟구쳤다. 회색 피부는 어느덧 연해져 있었다.

"오. C급 정도 되겠다. 진화했네요?"

"그것보다도, 저거 지금 이쪽 보고 있는 것 같은데?"

덕배가 가리킨 방향에는 쉐도우 피닉스가 우리가 있는 쪽, 정확히는 화염 거인이 사라진 방향 주변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하. 내 흔적을 찾는 거예요."

"그럼 이제 들키는 거 아니냐?"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겠죠."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주먹을 말아쥐었다. 괜히 기척을 지우도 숨기라도 했다가는 S 대학 건물에 남겨둔 미니 피닉스와 천가을(추정)이 쉐도우의 습격을 받을지도 모른다.

"괜찮아요. 속전속결로 해치워버리면 되니까."

"청화단 그거 당분간은 조용히 지내야 한다고 하지 않았냐?"

"네. 싸우진 않을 거예요."

"...??"

나는 혀를 차며 산 정상을 가리켰다.

"기본적으로 쉐도우들은 뇌 구조가 단순한 녀석들이라, 제일 강한 원본의 기척을 원본으로 인식하고는 해요."

"그래서."

덕배가 답해줬다.

아무래도 이제 딴지 거는 걸 슬슬 포기한 모양이다.

"제가 마력을 극한까지 숨기고 있어서 저를 찾지는 못할 테고, 방금 조덕배 씨가 자빠져서 터져버린 화염 거인이 저인 줄 알고 착각하고 있는 거거든요?"

쉐도우는 허공에서 날갯짓을 하며 여전히 사냥감-나를 찾고 있다. 그 시선이 슬슬 산비탈 아래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그로를 끌어줄 다른 대상이 필요해요. 우리는 이제 사람 하나 데리고 강원도로 도망쳐야 하니까. 중간에 여의도 들르고."

"강원도를 간다고? 그 위험한 동...아니다. 너보다 위험하겠냐. 그보다 사람 한 명?"

"푸흐흐. 네. 아는 사람...아니 알았던 사람? 아무튼 여자 한 명을 데리고 가야 해요. 그래서 지금 저거랑 안 싸움."

나는 덕배의 후드를 잡고 산 정상을 향해 달렸다. 쉐도우의 시야에 정확히 들어가며 쉐도우가 나를 인지했다.

■■■■■■!!

쉐도우가 괴성을 지르며 이쪽을 향해 날아온다.

"야! 안 싸울 거라며!"

"네!"

"근데 왜 저거한테 달려드는 건데?!"

"쟤가 지금 선빵치려는데 맞아줄 순 없잖아요!"

쉐도우가 정확히 나를 노리며 불꽃을 피어 올렸다. 보라색으로 활활 타오르는 그 색깔은 분명히 이계신의 영향으로 오염된 나의 카피본이었다. 약하지만.

"흐읍!"

나는 덕배를 앞으로 집어 던졌다. 갑자기 앞으로 던져진 덕배가 허공에서 아등바등하는 사이, 나는 덕배의 두 발목을 꽉 잡고 마력을 불어넣었다.

화르르륵!

덕배의 바위 피부가 빠르게 활성화되며 그 틈 사이의 마력에서 푸른 불꽃이 피어올랐다. 내 마력이 들어간 괴인인 만큼 내 마력이 수월하게 옮겨졌다. 마력이 불어 넣어진 덕배는 차려자세의 동상처럼 몸이 굳었다.

■■■■■■■■■■!!

화려하게 타오르는 덕배를 보며 이 아름다운 푸른 불꽃에 질투라도 하는 건지, 쉐도우는 더욱 날갯짓에 박차를 가하며 허공에서 낙하했다.

"미안하지만!"

성주에 의해 미쳐버린 불쌍한 인공정령.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피닉스를 잡아먹고 제가 피닉스가 되려는 그 괘씸함은 봐줄 수 없다.

나는 덕배를 야구 배트처럼 어깨 뒤로 넘기고 풀쩍 뛰어올랐다.

■■■■■!

괴조가 날카로운 부리를 쩍 벌렸다. 혐오스러운 점성이 부리 사이에서 가늘게 끊어졌다.

"내가 좀 바빠서요!"

"으아아악?!"

덕배가 두 팔로 제 얼굴을 가렷다. 나는 날개를 펼쳐 옆으로 슬쩍 비켜섰다.

콰직!

쉐도우가 허공을 씹었다. 서로 스쳐 지나가는 그 짧은 순간에 쉐도우와 나는 눈이 마주쳤다.

"어쭈?"

반투명한 눈동자 사이로 보라색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그 명백한 적의에 나는 활짝 웃으며 보답했다.

"건방지게!"

나는 그대로 사선으로 덕배를 휘둘러 쉐도우의 등을 내려찍었다. 덕배의 어깨가 미끄러지며 쉐도우의 날갯죽지를 긁었다.

콰---앙!

폭음과도 같이 찰진 타격 소리. 내 마력에 의해 휘둘러진 불타는 바위 배트에 등이 움푹 파인 쉐도우는 그대로 산비탈에 꽂혀 굴러가기 시작했다. 타격 부위에 이어진 푸른 불꽃이 쉐도우의 날갯죽지에 닿아 날개를 태우기 시작했다.

"잘 굴러가네요."

나는 제 속도를 못 이기고 관성 때문에 산 아래로 하염없이 구르는 쉐도우를 보며 피식 비웃어준 뒤, 손에 쥔 배트-덕배를 땅에 내려놓았다.

"허억, 허억, 허억!"

마력이 풀려 몸의 제어를 되찾은 덕배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괜찮죠? 이게 '괴인의 무기화'라는 시스템인데...."

"야 이 씨□□아!! 사람을 무슨 빠따처럼 휘두르는 게 말이 되냐! 차라리 좀 말하고 하면 어디 덧나냐?!"

덕배가 성을 냈다. 욕하지 말라는 명령마저 이겨내며-물론 필터링이 돼버렸지만-화를 내는 것에 나는 놀라 손뼉을 쳤다.

"말하면 앞으로 더 해도 돼요? 저 아직 실험해볼 게 13개는 남았는데."

" "

덕배는 입이 떡 벌어지며 할 말을 잃었다. 나는 덕배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근데 얘 또 흠칫하네.

"괜찮아요. 하나는 당신한테 실험할 게 아니니까."

나는 바윗길을 올라가 의식을 잃은 남자를 가리켰다.

"쟤한테 어그로 박아두고 튈 거니까 안심하세요."

저걸로 시간만 벌면 광검이 알아서 정리하겠지. 나는 빈 정령석에 마력을 불어넣으며 싱글벙글 웃었다.

"조덕배 씨, 연극 좋아해요?"

* * *

- 아들아. 너는 언젠가 크게 자라 이 나라의 대들보가 되어야 한다.

흐릿한 의식 속에서 승형은 제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솥뚜껑만 한 손으로 승형을 들고 안아주던 그는 평양사태에 투입되었다가 괴수에게 살해당했다.

- 형님 닮아서 이능력 하나는 좋군. 당에 얼굴마담으로 하면 좋겠다고 연락해.

아버지와 닮은 얼굴이 떠올랐다. 위상은 많이 내려갔어도 이제는 감히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신서울의 왕. 그는 이승형을 아끼는 것 같으면서도 이승형을 제 입맛대로 이용했다.

- 너 그 인간 조카였냐? 거 참.

스승이자 멘토인 유영호는 승형의 배경에 어이없어하면서도 대통령의 조카가 아닌 한 명의 히어로로서 대했다.

승형에게 있어 영호는 어린 시절 돌아가신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그의 밑에서 사람들을 구하며 진정한 히어로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 반가워요. 천가을이에요.

그리고 승형은 사랑을 깨달았다. 어느 순간 거울 속의 남자는 저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며 달려들던 여성들과 똑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 듣고 있나요? 배우업계에서 당신이 얼마나 위험한 위치인지? 히어로에 잘생, 흠흠! 연기력 탄탄한 신인 배우가 선배들 배역만 노린다고 아주 그냥....

천가을과 같은 드라마에 있고 싶어 배역을 빼앗았다. 투덜거리면서도 선배로서 걱정해주는 말들이 사랑스러웠고,

- 다리는 괜찮아요? 촬영 힘들다 싶으면 얘기해요.

괴수 퇴치에서 다친 건 또 어떻게 알았는지 걱정하는 눈빛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졌고,

- 사랑해, 민수야.

가을의 입에서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그 민수가 '이승형'이 되고 싶었다.

차원문을 막고 돌아가 고백을 하고, 받아만 준다면 결혼까지 생각했었다.

■■■■!

하지만 그 모든 꿈은 보랏빛 화마에 휩싸여 사그라들었다. 승형은 차원문 위에서 새롭게 나타난 괴수에게 깊은 공포를 느끼며 굴복했다.

'내가 망설여서.'

사명과 사랑을 두고 저울질하며 망설였다. 그렇게 헛되게 지체한 시간에 괴수들은 승형의 앞을 막았다.

'내가 힘이 없어서.'

주변에서 칭송을 해주며 떠받들어주던 A급이 대단한 건 줄 알았다. 하지만 중간중간 나타난 위험종들은 승형을 몰아세우며 길을 막았다.

'내가...약해서.'

차원문을 찢고 나타난 거대괴조. 보랏빛의 불사조의 형태는 다저스 게이트를 비롯한 전 세계 차원문에서 악명을 떨친 위험종-그중에서도 S급 이상의 위험등급을 자랑하는 '악마종'이었다.

'미안합니다.'

악마종은 승형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승형은 그 굴욕 속에서도 자신을 죽이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느낀 것에 너무나도 다행스러우면서도 저 스스로 화가 났다.

'내가 힘이 없어서....'

- 힘을 원하나?

굵은 남자의 목소리에 승형은 고개를 치켜올렸다.

회색 후드에 청바지 차림의 거한. 하지만 환하게 피어오르는 푸른 불꽃은 거한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 저 악마를 쓰러뜨릴 힘. 원한다면 줄 수 있다.

'당신은 누구지?'

거한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승형과 눈을 마주했다.

- ...태양의 사도. 여명을 밝히는 창염의 기사. 세상은 나를 '청화의 거신'이라 부를지니.

"아."

승형은 푸른 불꽃에 홀려 넋을 잃었다. 거한의 옆에는 거한의 종복으로 보이는 여인이 예를 갖추고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푸른 베일로 얼굴을 가린 여인은 청백의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

거한은 아무 말 없이 여인의 두 손 위에 올려진 정령석을 받아 승형에게 건넸다. 승형은 투명한 보석 속에 끓어오르는 푸른 불꽃에 저도 모르게 손을 올렸다.

- 이 힘을 원하는가?

"이 힘이 있다면, 저 악마를 죽일 수 있습니까?"

거한의 시선이 잠시 여인에게 돌아갔다. 허리를 숙였던 여인은 허리를 펴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 물론. 창염은 그대의 심장에 머물며 그대의 몸을 불태울 심장이 될 것이다. 저 악마가 내뿜는 오염된 마력마저 태워버리는 정화의 불꽃이 될 것이니.

"대가는, 대가는 무엇입니까?"

승형이 정령석을 두 손 꽉 쥐며 물었다. 거한은 다시 여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여인은 더욱 입꼬리를 올렸다.

- 세계의 평화.

거한은 몸을 일으켰다. 산비탈 너머에서 거대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

한쪽 날개가 떨어진 괴조는 타조처럼 달리며 산에 올라왔다. 덜렁거리는 날갯죽지에는 푸른 불꽃이 끊임없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거한이 여인에게 눈짓을 주자, 여인이 허리를 숙이며 사라졌다.

■■■!!

괴조는 여인의 흔적을 좇아 산을 헤집기 시작했다. 거한은 잠시 무언가 고민에 빠진듯하다가 승형을 보며 말을 이었다.

- 만약 그걸 먹지 않으려거든 이 자리에서 죽는 걸 추천하마. 진지하게.

"예?"

거한의 얼굴을 가린 푸른 불꽃 너머로 어딘가 안쓰러운 듯한 눈빛이 보인건 승형의 착각이었을까? 거한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정상 아래로 걸어갔다.

"자, 잠시만요! 청화의 거신 님!"

거한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승형은 땅을 딛고 일어서며 허리를 크게 숙였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흥.

거한-청화의 거신은 그 말을 끝으로 산 아래로 사라졌다. 기척에 민감한 승형이 눈치를 챌 수 없을 만큼 청화의 거신은 신출귀몰하게 사라졌다.

"...그래."

의심은 된다. 하지만 승형은 의심을 거두고 거한-자신을 청화의 거신이라고 지칭한 남자를 믿고 싶었다.

'세계의 평화를 위해.'

승형은 두 손에 쥔 이름 모를 보석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

식도에서부터 화기가 터져 나온다. 뱃속으로 내려간 보석 안에 있던 푸른 불꽃은 승형의 몸을 안에서부터 태워버릴 듯 격하게 타올랐다.

"으윽!"

승형은 이를 꽉 물고 온몸의 마력을 움직였다. 등 뒤로 타오르는 붉은 불꽃의 곰은 창염을 머금고 더욱 몸집을 불려 나갔다.

구오오오오오!!

관악산 정상에 화염의 곰이 세상이 뒤집혀라, 울부짖었다. 푸른 안광을 빛내던 곰은 산을 타고 올라오는 괴조를 향해 적의를 불태웠다.

■■■■■!

괴조는 괴성까지 질러대며 승형을 잡아먹기 위해 달려 산 정상에 다다랐다.

번쩍. 승형의 두 눈동자가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

산을 뒤엎을 듯 커지던 불꽃의 곰은 빠르게 승형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불꽃을 체내에 수용하지 못해 체외에 외투처럼 두르고 다니던 이능력의 한계가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각성. 오랫동안 정체되어있던 이능력이 다음 경지로 넘어가는 단계.

"후우우...."

승형은 조금만 헛디디면 그대로 굴러떨어질 바윗길에 섰다. 괴조는 등산로를 불태우며 승형에게 달려들었다.

"조금만 기다려줘요, 가을씨!"

이제 더는 두렵지 않다. 승형의 주먹이 붉게 타오르며 괴조의 부리와 맞부딪혔다.

콰아앙!!

관악산에 붉은 불기둥이 치솟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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