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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21화 (21/1,497)

〈 21화 〉1부 2장 (7)

"약 먹었나?"

나는 이상한 소리를 내뱉으며 의식을 잃은 여자의 손을 발로 툭 밀어버렸다. 치마를 잡았던 손이 떨어지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부랑자는 아닌 것 같은데."

서우ㄹ-아니 S 대학교에 숨어든 부랑자치고는 미묘하게 깨끗한 행색이다. 옷차림도 조금 수수한 대학생 느낌이라 갓 지방에서 상경한 신입생 같은 느낌이었다.

"쯧."

무슨 이유인지도,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그냥 떠나기에는 어째서인지 찝찝했다.

"베일이야 또 하나 더 만들면 되니까."

나는 목에 두른 베일에 내 마력의 잔향을 뿌렸다. 내 기척을 고스란히 새겨두었으니, 괴수라면 그것을 눈치채고 절대로 베일 근처로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사락.

나는 여자의 위에 베일을 대충 던져두었다.

'가는 길에 괜히 오지랖 부려서는.'

이미 올라오면서 도망치는 사람들을 습격하는 괴수들을 태워버리고 온 지 오래다. 테라에서 직접 넘어오는 괴수 중 일부는 이계신의 영향을 받아 '혼돈속성'을 가지게 되고, 그로 인해 생긴 파괴 의지와 지성은 오로지 인간을 농락하고 '살육'하는 데에만 쓰이게 된다.

주차장 한편에 으깨진 밴이 눈에 띄었다. 이미 죽은 사람은 어쩔 수 없었다.

"자, 그럼 이제......."

허전해진 목을 만지작거리며 막 날개를 펼치려던 찰나, 나는 시야 끝에 걸린 여자가 은근히 신경 쓰였다.

넓은 주차장. 쓰러진 여인. 그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베일.

"...끄응."

나는 여인을 들어 올려 주차장 인근 벤치에 눕혔다. 베일이 내뿜는 따스한 열기에 둘러싸인 여인은 요람 속의 아기 새처럼 곤히 숨을 쉬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베일을 여인의 목 뒤에 감고 그대로 길이 끝까지 몸 위로 늘어뜨렸다. 나는 여인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서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얘 근데 천가을 되게 닮았네? 대박."

나는 피식 웃으며 여인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돈했다. 천가을에서 표독스러움과 세상에 대한 증오만 딱 빼버리면 딱 이런 모습이 되리라. 조금 더 주름살도 지고. 농후한 원숙미도 좀 더 하고.

본인일 가능성? 없다. 천가을은 이런 동안이 아니다. 비교하자면 최소 10년은 더 늙었다.

"...에이. 설마."

나는 양손으로 뺨을 탁탁 치며 잡생각을 지웠다.

마스커레이드. 가장무도회라는 이명을 가진 히로인 중 한 명.

사람 죽이기를 우습게 아는 그 마녀가 그런 순둥이일 리가 없다.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말도 안 되는 가정을 지워버리며 빠르게 건물 사이로 뛰어올랐다.

...가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다행히 10초 남짓한 시간 사이에 나타난 괴수는 없었다.

'일단 어디 숨겨두자.'

진짜 천가을이라면 차원문 따위는 이제 중요치 않다.

나는 주차장 한복판에 놓인 천가을(추정)을 안아 들어 그나마 온전한 강의동 건물 안으로 달렸다.

* * *

<2020년 4월 4일 오후 6시 35분, 히어로 협회 대한민국-신서울 본부.>

"소집에 응한 히어로 수는?!"

"광명에서 일곱! 안양에서 다섯! 성남에서는 아직 아무도 반응이 없습니다!"

"휴대폰이든 뭐든 당장 전화해! 내려오지 못하도록 방어선 구축해야 할 거 아니야!"

강소연은 초조함에 손톱을 엄지로 물어뜯었다. 대한민국에서 세 번째로 발생한 차원문은 하필이면 가장 대처가 곤란한 서울 한복판에 생기고 말았다.

"젠장...!"

스크린에 뜬 차원문 발생 지역을 다시금 확인한 소연은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차원문도 차원문이지만, 저 장소는 하필이면 그들이 오늘 촬영을 하러 가기로 한 장소였다.

"팀장님! 지금 문의 전화가 계속!"

"받지 마! 그냥 무시해!"

이미 협회 외부 창구의 전화는 한 시도 쉴 틈 없이 울리고 있다. 언론, 개인, 나아가 소속사 관계자에 이르기까지 발신 내역은 수많은 이들의 문의 전화가 빗발쳤다.

소연은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을 켜 포털의 첫 화면을 확인했다. 이미 검색어 순위부터 언론 속보까지 차원문에 대한 이야기로 줄을 세우고 있었다.

[속보] 관악산에서 차원문 발생 (3보)

[속보] <마지막 사랑> 촬영팀 관악선에서 연락 두절

[속보] 협회, 인근 히어로를 총동원해 차원문 파괴를 약속

[관련 뉴스] 서울에서의 드라마 촬영, 위기의식 부재는 여전

"아아악!!"

소연은 머리를 헝클이며 히스테리를 부렸다. 본부에 있던 이들 모두가 소연의 히스테리에 동정을 보내면서도 시선을 피했다.

"내가 그러니까 이거 절대 안 된다고 했잖아! 왜 꼭 하지 말라는 거 해대서 난리냐고!!"

현재 한국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드라마 <마지막 사랑>. PD는 그 드라마의 주인공들의 첫 데이트 장면을 꼭 S 대학교에서 하고 싶다고 협조를 요청했다. 소연은 코피를 쏟아가면서까지 서울에서의 촬영 불가를 열변하며 한사코 반대했다.

- 서울에서의 촬영이...그렇게 어렵습니까?

S대 출신인 대통령은 첫 데이트 장면이 S대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유감을 표했다, 라고 정부에 불려간 협회 관계자는 증언했다.

그런데도 소연은 강단 있게 불가능을 외쳤다. 그 의견에 불꽃 같은 가능을 성토하며 서울 촬영을 관철한 건 다름 아닌 촬영 당사자, 이승형이었다.

"돌아오면 확 무릎 까버릴 거야, 나쁜 놈."

소연은 끓어오르는 속을 찬물을 들이켜 진정시켰다.

"팀장님! BH입니다!"

"...아오."

직원에게 전화를 넘겨받은 소연은 자세를 바로잡고 전화를 받았다.

"네! 히어로 협회 신서울 본부소속 강소연입니다!"

[반갑습니다. 강소연 요원.]

흠칫. 소연은 귀에 들려온 목소리에 이를 갈았다.

"...예, 장관님."

[그...VIP께서 각별히 당부하셨습니다. 이번 촬영 건으로 문제가 생기는 일이 없도록....]

소연은 이를 갈았다. 차원문이 생겼는데 지금 촬영이 어쩌고 어째?

"예. 장관님. 이미 히어로들이 긴급 소집에 응했습니다. 신서울에서도 곧 히어로들을 파견할-"

[그거야 그쪽에서 알아서 할 문제고. 우리 이승형 요원, 다치는 일 없이 무사히 신서울에서 봤으면 합니다. 가능하겠죠? 허허.]

"장ㄱ-"

소연이 잡고 있던 전화기를 갑자기 누군가가 낚아챘다. 두 눈에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앉은 중년 남자는 전화를 이어받았다.

"차원문 발생에 따른 비상사태입니다. 효율적인 작전을 위해 외부와의 불필요한 통신은 차단됩니다."

[뭐? 야! 너 누구야!]

"용건이 있다면 공문을 보내십시오. 그럼."

뚝. 전화를 끊어버린 남자는 스마트폰을 완전히 꺼버리고 직원에게 내밀었다.

"근무 중에 쓸데없는 전화 받지 마라."

"장관 전화를 어떻게 안 받아요."

"너 나라에서 세금 받아먹는 공무원이냐? 불만 있으면 직접 오라고 해. 국외추방 시키던가. 안 그래도 바쁜데...."

남자는 신경질적으로 캔커피 뚜껑을 따서 들이켰다. 푸석푸석한 흰 가운의 가슴팍 명찰에는 '히어로 협회 전술기획과 팀장 <유영호>'라는 문구가 박혀있었다.

"강소연. 마이크."

"네, 네!"

유영호는 강소연이 내미는 마이크를 받아 귀에 끼고 눈앞에 화상 지도를 띄웠다.

그는 압도적인 힘을 가진 히어로인 동시에 그 히어로들을 지휘하는 '지휘관'의 재능도 가지고 있었다.

"산 아래에는 이 정도면 충분하고."

관악산을 크게 둘러싸듯 인근 히어로들의 신호를 옮겼다. 지도를 통한 이동 명령은 오퍼레이터들의 중계하에 빠르게 전달되어, 각지의 히어로들은 명령에 따라 위치로 이동했다.

"아아. <집정관>이 전달합니다. 차원문 닫는다. 다들 명령대로 행동해. 절대로 죽지 마라. 이상."

무심한듯한 영호의 말과 표정과는 달리, 그의 손은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며 히어로들 하나하나의 배치를 선정하며 명령을 전달했다.

치직, 치직.

지도의 중앙, 산 중턱에서 녹색 히어로의 신호가 포착됐다. 협회에 등록된 A급 히어로의 신호였다.

"뭐야. A급? 쟤 누군데?"

차원문 중심으로 펼쳐진 거대한 마력의 파동이 신호를 방해했다.

히어로 정보가 나오지 않아 화면을 딱따구리처럼 두드리는 영호의 모습에 강소연은 재빨리 히어로의 정보를 띄우며 대답했다.

"히어로 불곰이 여기 있었습니다! 현재 신호가 잡히지 않아 연락되지 않지만, 분명 차원문을 막으러 갔을 겁니다."

"불곰? ...이승형?"

유영호는 혀를 차며 시계를 확인했다.

차원문 발생 시각으로부터 약 15분가량이 지난 시각. 마지막으로 이승형이 있었던 위치와 그의 능력을 바탕으로 유영호는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짰다.

"그런데도 아직 안 닫혔다고?"

S 대학 부지에서 관악산 정상까지 히어로라면 10분은 채 걸리지 않을 거리다. 심지어 육체강화계 히어로인 이승형이라면 5분 내로 주파할만한 거리였다.

그런데도 아직 차원문이 닫히지 않았다는 것은 두 가지 상황을 의미했다.

차원문에서 나온 강력한 괴수에게 발이 묶여 있거나, 차원문으로 인해 대피하지 못하는 사람을 구하러 다니고 있거나.

"그런데 왜 이승형이 지금 서울에 있지? 걔 드라마 촬영하느라 바쁘다며. 괴수 토벌 의뢰라도 나갔냐?"

"저, 그, 그게...."

소연은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눈앞의 남자가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후폭풍을 감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 말 안 해도 알겠다. 됐어."

영호는 빠르게 눈치를 채고 숨을 골랐다. 열의만 보고 자신이 직접 뽑아오기는 했지만, 능력이나 배경이나 상당히 골치 아픈 히어로였다.

"이승형...후우."

유영호는 그를 처음 봤던 그 날의 강의를 떠올렸다. 제 동기들 앞에서 당당히 차원문을 막으러 가겠다고 선언한 호기로운 청년.

그리고 수많은 히어로를 양성하고 지휘한 집정관의 감으로 판단하건대, 승형 같은 부류의 인간은 대게 실제상황에서 공언한 말과 다른 행동을 하기 일쑤였다.

범생이 타입이 사고를 칠 때 크게 치더라. 그게 영호의 지론이었다.

'빨리 닫아야 해. 한국은 차원문 키워서 잡아먹기가 안 되니까.'

미국 같은 히어로 강대국에서는 차원문을 일부러 키워 괴수의 핵을 한계까지 긁어모은다고 하지만, 한국은 현실적으로 그런 짓을 저지르기에는 억제력을 가진 히어로가 부족했다.

그렇기에 속전속결로 차원문을 닫는다는 가정하에 전술을 설정했다.

"...믿어야 하나?"

영호는 고민에 빠졌다.

1안. 히어로들 전부를 투입하여 차원문을 막는다.

차원문을 빠르게 파괴할 수야 있겠지만 히어로들 틈새로 새는 괴수들의 습격은 감내해야 했다.

2안. 승형이 차원문을 닫을 거라는 가정하에 거대한 괴수 방어망을 펼친다.

A급 히어로의 힘으로 차원문은 빠르게 닫힐 테고, 방어선을 구축한 히어로들에 의해 사상자는 거의 0에 가까울 것이다.

머릿속으로는 2안이 가장 효율적이며 적절하다고 생각되지만, 그 망할 놈의 감은 이승형에 대한 일말의 '불신'을 외치고 있었다.

"......믿어야지."

제발 내 감이 틀렸기를. 영호는 순식간에 히어로들의 배치를 지역방어 형식으로 늘어뜨리고 초조히 신호를 기다렸다.

삐이이이익---

"무슨 신호야?!"

차원문이 닫혔다는 신호는 아니다. 오퍼레이터 하나가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덕산역 근처에서 괴수 반응! A급입니다!"

유영호의 지시에 화면에 덕산역을 비추는 화상들이 일제히 띄워졌다. 하늘 높이 치솟는 푸른 불꽃의 기둥.

고오오오오----

족히 40m는 되어 보이는 불꽃의 기둥은 점차 사람의 모습을 갖추며 불타올랐다.

"갑자기 무슨?!"

강소연이 비명을 질렀다.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A급 괴수가 나타나 버렸다. 신서울 한복판에 S급 괴수가 나타났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로 놀랍지는 않을 것이다.

"팀장님! 사냥꾼들이 방향을 괴수 쪽으로 틀었습니다!"

"어느 괴수?!"

"덕산역 A급이요!"

지도에 반짝이는 작은 마크들이 일제히 덕산역을 향해 움직였다. 우군이지만 어디까지나 사냥꾼들은 돈이 될만한 곳으로 움직였다.

"지침 변경!"

유영호가 마이크에 마력을 불어넣으며 소리쳤다.

"사냥꾼들의 지원은 없다고 생각해! 항상 하던 대로 우리끼리 방어선을 구축한다! 안양팀은 A, B팀으로 나눈다! A팀은 덕산역 A급을 요격, B팀은 방어선을 유지! A팀이 빈 곳은 이쪽에서 커버한다!"

유영호의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였다.

"불곰이 차원문을 막을 때까지, 버텨라! 이상!"

징조도 없이 열린 차원문.

뜬금없이 나타난 40m 크기의 거인형 괴수.

우연일까. 유영호는 찝찝한 기분을 도저히 떨쳐버리지 못했다.

'보험이 필요해.'

혹시나 불곰이 차원문을 닫는데 실패한다거나, A급 거인형 괴수와 같은 규격 외의 사태가 벌어진다면, 서울은 불바다가 되고 말 것이다.

"강소연."

"네!"

"그 분께 상황을 말씀드려."

"그 분이요?"

유영호가 절박한 목소리로 외쳤다.

"광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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