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1부 2장 (6)
<2020년 4월 4일 오후 6시 40분, 광명시청 인근 '사냥꾼의 쉼터'.>
이능력자들은 크게 히어로 또는 빌런으로 구분되지만, 그 사이의 회색과도 같은 이들이 존재한다.
이능력을 각성했지만, 히어로로서 활동하지는 않는자. 그러면서도 이능력을 이용해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 자.
그 어느 쪽에도 발을 걸치지 않는 이들은 극히 일부분을 제외하고 자신의 이능력을 이용해 괴수들을 사냥했다. 사람들은 정부에 자신의 이능력을 신고하고 정부가 관리하는 데이터베이스에 이름을 등록한 이들을 두고 이렇게 불렀다.
사냥꾼(Hunter).
괴수를 사냥해 그 부산물을 판매하는 것을 업으로 삼은 자들. 협회 측에서는 이들에 대해 골머리를 썩이면서도, '괴수를 잡는다'는 공동 목적하에 사냥꾼들과 공생의 관계를 맺었다.
특히 그 제휴는 이번과 같은 차원문의 발생에서 더욱 돋보인다. 히어로들이 차원문 제거에 집중하는 사이, 흘러나온 괴수들을 사냥꾼들이 처리하는 것이다.
"야! 짐 챙겨!"
김성오는 동료 사냥꾼들을 재촉하며 제 장비를 다시 점검했다. 서울에 상주하는 사냥꾼들의 파티는 그들 말고도 수없이 많았다.
"대장! 협회 측에서 지도 보냈어!"
부하의 말에 성오는 스마트워치를 두드려 지도를 열었다.
관악산의 조감도가 평면으로 그려진 와중에, 괴수들이 내려올 것으로 예상되는 방향이 붉은 화살표로 그려져 있었다.
"과천 쪽 애들 꿀 빨겠네. 쳇."
인간이 만들어놓은 등산로를 따라 내려오는 괴수들의 대부분 남쪽과 동쪽으로 향했다. 북서쪽 서울대학교 방면으로 향하는 괴수들은 그 수가 산발적인 대신에 어째서인지 위험 표시가 되어있었다.
"뭐야 이거? 위험종이야?"
"그런 것 같습니다."
"미치겠네. 코어 못 벌면 이번 달 적자인데."
성오는 바닥에 침을 뱉으며 트럭 뒤에 올라탔다. 언제든지 괴수의 습격에 대처할 수 있게 개조한 트럭은 사냥꾼들의 필수품이었다.
"어디 B급이라도 나왔으면...."
"대장! 저기!"
부하의 고함에 성오는 욕지기를 내뱉으려다 할 말을 잃었다.
"뭐야 저게?"
남쪽에서 솟아오르는 거대한 불기둥.
거대한 푸른색의 불기둥은 족히 수십 미터는 2km 거리에 있는 이 사냥꾼들의 본거지에서도 한눈에 보였다.
"...벌써 저런 괴수를 쏟아낸다고?"
도망칠까. 혀를 날름거리던 성오는 새롭게 울리는 괴수 출현의 알림에 인상을 찌푸렸다가 입을 쩍 벌렸다.
- 독산역 인근에서 A급 출현! 위험! 신속히 대피하시길 바랍니다!
성오와 사냥꾼들이 서로를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심 봤다!"
관악산을 향하던 사냥꾼들의 트럭들이 일제히 독산역의 불기둥을 향해 핸들을 꺾었다.
* * *
"하아, 하아!"
천가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래로 달렸다. 달리지 않으면 괴수에게 잡아먹혔다.
"으아악!"
예상보다 빠르게 산을 타고 내려오는 괴수들의 속도에 놀란 촬영 스태프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함께 도망치던 이들은 다리가 엉켜 넘어진 그를 보면서도 부축할 정신이 없었다.
스태프는 저를 버리고 가는 동료들을 보며 절망에 빠졌다. 다리가 삔 고통보다 한솥밥을 먹으며 지내온 동료들에게 버림받았다는 심적 고통이 더 컸다.
부르릉!
촬영감독을 시작으로 저마다 차에 오른 이들이 황급히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자신이 타고 온 차량마저 자신을 버리고 주차장을 떠나가는 뒷모습에 스태프는 울분을 삼켰다.
그런 그의 팔을 잡아당기는 손이 나타났다.
"뭐해요! 일어서요!"
카메라 너머에서나 보던 곱디고운 손. 천가을은 낑낑대며 스태프의 팔을 잡아당겼다.
"야! 너 미쳤어?!"
"욕할 시간에 도와주기나 해요!"
매니저는 발을 동동 구르다 가을의 옆에 붙어 스태프를 부축했다.
"뛸 수 있겠어요?!"
"어, 어떻게든!"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면서도 도망쳐야 했다. 당장 그들을 도와줄 히어로는 지금 더 큰 위험을 막기 위해 관악산 정상으로 향해있으니까.
"이승형...! 그냥 우리 도와주고 가면 될 것을!"
스태프가 울먹이며 말하자, 그를 부축하며 달리던 가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냥 괴수면 그랬겠죠. 하지만 차원문이잖아요."
어째서 차원문이라는 게 나타는지, 그리고 그 진짜 이름이 다른 차원으로의 연결을 의미하는지조차 모르지만, 인류는 차원문을 그대로 두면 더 큰 위험의 괴수가 나타난다는 것만은 명확히 알고 있었다.
"서울에 아직 사는 사람들 많아요. 그분들을 위해서라도 승형 씨가 차원문 막으러 가는 게 맞아요."
"그러다 우리가 지금 다 죽게 생겼잖아!"
매니저가 주차장 가장 구석에 주차된 밴으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가을은 입술을 꽉 깨물며 스태프를 부축해 밴으로 끌었다. 이미 다른 차들은 주차장을 빠져나가 대로 쪽으로 내려갔다.
쿵! 쿵! 쿵!
그들의 뒤편에는 이미 대학부지까지 내려온 괴수가 있었다. 오랑우탄을 닮은듯한 그 괴수는 건물의 옥상에서 가슴을 두드리며 괴성을 질렀다.
캬아아아아악---!
"흐억?!"
괴수가 마력을 실어 내뿜은 포효에 스태프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귀에서는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으윽?!"
가을은 흔들리는 몸을 겨우 바로 세웠다. 기절해버린 스태프를 버리고 당장 밴 위로 뛰쳐 오를까 하는 생각이 순간 스쳐 갔지만, 이를 꽉 물고 스태프의 어깨에 손을 집어넣어 그를 밴 안으로 끌어당겼다.
"야! 빨리타!"
매니저는 한껏 초조한 기색으로 차키를 돌렸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은 긴장때문인지 아니면 죽음의 공포 때문인지 시동을 거는것 조차 몇 번 실패할 정도였다.
부르르릉-
낮은 엔진소리가 울리며 차에 시동이 걸렸다. 젖먹던 힘까지 다해 스태프를 차문 안까지 들어올린 가을은 숨을 헐떡이며 매니저를 향해 소리쳤다.
"도와줘요, 오빠! 나 혼자서는 못하겠어!"
"뭐? 너 지금 뭘...?!"
콰앙!
어느새 바로 근처까지 뛰어온 괴수가 건물위에서 뛰어내렸다. 육중한 밴이 잠시 떴다가 내려앉는 충격에 매니저는 패닉에 빠져 기어를 변경하며 소리쳤다.
"야! 버려!"
가을은 순간 충격에 빠져 굳어버렸다.
스태프를 버리라는 말. 그것은 스태프를 미끼로 도망치자는 말이나 똑같았다.
"하, 하지만...."
"하지만이고 자시고! 살 사람은 살아야지!"
매니저가 침까지 튀기며 소리쳤다. 하지만 가을의 두 손은 스태프의 어깨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쿠구구궁!
지축이 흔들리며 괴수가 달려오기 시작했다. 가을은 저를 향해 달려오는 괴수의 위압감에 저도 모르게 스태프를 잡은 한 손이 차 문으로 향했지만, 그보다 매니저가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게 더 빨랐다.
구와아아앙!
급발진 소리와 함께 차체가 앞으로 쏠리며 가을의 손은 허공을 붙잡았다. 차 문에 반쯤 걸쳐있던 스태프는 그대로 차에 끌려가다 차가 회전하며 튕겨 나가며 주차장을 굴렀다.
"아."
가을은 허망하게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차를 보며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역배우 시절부터 십몇 년을 동고동락하던 매니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홀로 차를 몰고 도망가버렸다.
크르르릉.
가을은 벌벌 떨리는 눈으로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코를 벌름거리며 가을과 떠나가는 차량을 번갈아 보는 진보랏빛 털의 괴수가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크르릉.
입꼬리를 비틀이며 웃는 건 가을의 착각이었을까. 콧김을 뿜은 괴수는 무릎을 웅크리고는,
캬아아앙!!
괴성을 지르며 하늘 높이 뛰어올랐다. 족히 강의동 하나를 넘을만한 높이로 뛰어오른 괴수는 주차장을 빠져나가려는 차의 바로 앞에 착지했다.
"으아악!"
갑작스레 눈앞에 나타난 괴수에 매니저가 놀라 핸들을 옆으로 꺾었다. 괴수는 두 팔을 쭉 펼치고 제 옆을 스쳐 지나가려는 차를 몸으로 막아 세웠다.
끼이이익....
괴수의 몸을 뒤로 약간 밀어낸 차는 그대로 멈췄다. 매니저는 어떻게든 액셀러레이터를 밟았지만 차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 으아."
매니저는 창문을 사이에 두고 괴수와 눈이 마주쳤다. 괴수는 매니저의 공포를 즐기는 듯 유리창을 향해 침을 튀기며 웃다 주먹을 하늘 높이 치켜올려 운전석을 내려쳤다.
콰지직!
무언가가 짓눌려 찌그러지는 소리는 차체만의 소리가 아닐 것이다.
뜯어져 나간 차 문 사이로 힘없이 떨어지는 매니저의 왼팔에 가을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크르릉. 크릉.
주먹에 묻은 피를 제 털에 쓱쓱 닦아낸 괴수는 발을 구르며 천천히 가을에게 다가갔다. 이미 가을의 두 다리는 풀려 제대로 힘조차 들어가지 않았다.
크륵.
괴수는 그런 가을을 보며 손을 사타구니에 집어넣었다. 수북한 털 사이로 집어넣은 손으로 꺼내진 기둥은 역겹고도 흉측했다.
"우읍."
가을은 턱밑까지 차오르는 구토감을 참아내고 몸을 돌렸다. 생존본능에서 오는 경고는 가을이 초인적인 힘으로 괴수로부터 등을 돌리고 도망치게 할 수 있었다.
크르륵. 크륵.
" "
하지만 눈앞에는 조금 전의 괴수와 똑같이 생긴 괴수가 두 마리 더 있었다. 가을은 믿기 싫은 현실에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그러니까 내가 이런데 안 온다고, 흑!"
죽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있는 돈 없는 돈을 모두 끌어모아 부모님을 모시고 신서울로 기어들어 갔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만 걸까.
크르륵.
점점 다가오는 괴수들의 목소리가 어쩐지 제 처지를 비웃는 듯 느낌에 가을은 눈물을 닦아내고 일어섰다. 하이힐을 벗어 거꾸로 쥔 가을은 구두 굽을 휘두르며 괴수들을 위협했다.
"오, 오지마!"
크르크큭.
명백한 비웃음. 하지만 가을은 손을 벌벌 떨면서도 괴수들을 향해 겨눈 하이힐을 놓지 않았다.
쿵.
가을의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화들짝 놀란 가을이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다른 괴수보다 2~3배는 더 큰 덩치의 괴수가 가을을 노려보고 있었다.
괴수는 커다란 손으로 가을을 움켜쥐어 공중에 들어 올렸다.
"아악!"
붙잡힌 와중에도 가을은 하이힐을 거꾸로 쥐고 괴수의 손을 수차례 찍었다. 상처는커녕 피부조차 뚫지 못하고 자꾸 옆으로 빗겨나갔지만, 가을은 힘이 풀려 하이힐을 놓칠 때까지 찍고 또 찍었다.
크르륵.
거대 괴수가 하이힐을 놓친 가을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아스팔트를 구른 가을은 격한 충격에 바닥에 쓰러지며 기침했다.
"어흑! 커억!"
기침에 피가 섞여 튀어나왔다. 가을은 몽롱해지는 의식 속에서 다가오는 거대 괴수를 보며 자조했다.
'아직 죽고 싶지 않아.'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기억 속에서 떠오른 한 남자. 저보다 훨씬 높은 사회적 위치에 있는 그는 대본 리딩을 하던 날부터 끊임없이 관심을 표시했다.
- 무슨 일이 있어도 너는 내가 지킬 거야.
어쩌면 그가 나를 구하러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동화처럼 괴수들을 무찌르고 위기에 빠진 공주를 구하러 오는 왕자님.
하지만 현실에 히어로는 있어도 신데렐라는 없었다.
'그래. 히어로니까 당연히 차원문을 막으러 가야지.'
가을은 지금까지 사람 한 명의 목숨보다는 서울 시민, 인류 전체의 생명을 위협하는 요인을 제거하러 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을은 애써 강한척하며 승형을 차원문으로 향하게 했다.
히어로로서 사명을 다하라는 그 말이 제 죽음으로 이어질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만약에 살아서 다시 본다면.'
제 머리를 향해 쇄도하는 거대괴수의 주먹을 끝까지 노려보다 고개를 돌렸다.
♩♪♬----!!
순간, 새의 울음소리 같은 소리가 고막을 흔들었다. 동시에 거대괴수의 몸이 폭발에 휩싸였다.
"피닉스 킥!"
폭발의 연기를 뚫고 거대괴수의 가슴팍에 꽂히는 드롭킥. 거대괴수는 그 덩치 그대로 강의동으로 날아갔다.
콰앙!
십 수 미터를 날아간 괴수는 그대로 건물의 벽을 부수며 넘어졌다. 고개를 돌린 가을은 제 눈앞에서 타오르는 푸른 불꽃에 넋을 잃었다.
캬아아악!
발광하기 시작한 괴수들이 빠르게 가을-의 앞에 나타난 소녀를 덮쳤다. 날카로운 손톱을 세우고 달려드는 괴수들의 눈동자에는 죽어서라도 반드시 죽이겠다는 결연한 의지마저 엿보였다.
"느리네요."
소녀의 등 뒤로 푸른 불꽃의 날개가 펼쳐졌다.
날개를 펼치는 그 풍압만으로 괴수들은 점프한 그대로 거대괴수처럼 날려가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뭐야, 혼돈속성이잖아. 쟤들 핵 안 나오는데. 텄네."
소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가을은 저 푸르게 타오르는 날개로부터 전해지는 열기가 너무나도 따스해 저도 모르게 긴장을 풀 것만 같았다.
"갈 길 바쁘니까...소각."
소녀는 옆으로 뻗은 손가락을 튕겼다.
딱.
화르르륵!!
경쾌한 소리와 함께 괴수에게서 피어오른 푸른 불꽃이 괴수를 한순간에 재로 만들었다. 족히 3m는 되어 보이던 거대 괴수조차도 일격에 재로 사그라드는 광경에 가을은 소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응?"
치마를 잡힌 소녀가 고개를 돌렸다. 가을은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듯한 푸른 소녀의 얼굴을 보고는 넋이 나갔다.
"천사...?"
그 말을 끝으로 가을의 의식은 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