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1부 2장 (3)
<2020년 4월 4일 오후 1시, 인천시청 인근 버려진 태권도장.>
"지수화풍의 4 속성. 그럼 그 외의 3 속성이 뭘까요?"
나는 마력을 실은 주먹을 내질렀다. 순수한 마력의 파동은 덕배의 바위 피부를 스쳤다.
"큭! 몰라!"
덕배는 피하면서 숙인 몸 그대로 나를 덮쳤다. 덩치를 이용한 숄더어택은 황소가 돌진하는 것처럼 위압감이 느껴진다.
피하면 그만이다.
"첫 번째 정답. 하나는 빛. 광검이 대표적인 예죠."
나는 발을 살짝 뒤로 빼고 몸을 비틀었다. 덕배는 그걸 눈치채고 어떻게든 주먹의 방향을 바꾸려 했지만, 이미 내 팔꿈치가 덕배의 옆구리를 찌르고 있었다.
콰앙!
덕배는 그대로 허공을 날아가 바닥을 굴렀다. 덕배가 낙법으로 자세를 잡을 때까지 기다린 나는 신발 끝으로 툭툭 바닥을 두드렸다.
"두 번째는 어둠. 대부분 괴수가 이 속성이죠. 빌런들이 가진 흔한 속성이기도 하고."
한걸음에 자리를 박차고 뛰어올라, 허공에서 다리를 높이 치켜올렸다. 이미 피하기에는 늦었음을 깨달은 덕배는 머리 위로 두 팔을 교차시켰다. 팔에는 마력을 두른 듯 바위 피부가 굳건히 자라있었다.
쿠-웅!
마력을 실은 내려찍기에 덕배의 몸 전체가 살짝 내려앉았다. 방어에 성공한 덕배는 교차한 팔 사이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잡았다!"
덕배의 손이 내 발목을 낚아채려 했다. 느렸다.
"그럴 땐 잡아놓고 말하는 거예요!"
손은 허공을 갈랐다. 이미 내 등 뒤에는 불꽃의 날개가 펼쳐져 있었다.
"!!"
덕배는 내 날개를 보자마자 다시 가드를 올렸다. 좋은 판단이다. 이미 피하기에는 늦었으니까. 나는 날개를 퍼덕이며 연속으로 덕배를 내리찍었다.
쾅! 콰광! 쾅!
신발이 팔을 두드릴 때마다 폭음이 울린다. 덕배의 발이 대리석 바닥을 깨뜨리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자, 크게 갑니다!"
날개를 세게 펄럭이며 몸을 반 바퀴 돌렸다. 상하로 이어지던 공격에서 횡으로 이어지는 돌려차기.
"칫!"
덕배는 재빨리 왼쪽으로 가드를 내렸다. 이미 바위 피부는 너덜너덜해져 있으면서도 청록의 마력 실이 빛나고 있었다.
타격점에 온 마력을 집중한 방어. 나는 발등 전체의 마력을 살짝 일으켰다.
화르륵!
발에서 푸른 불꽃이 피어오르자 덕배가 화들짝 놀랐다. 당연히 촘촘히 짜여있어야 했을 마력이 순간적으로 풀어졌다.
쿠웅!
돌려차기에 맞은 덕배의 몸이 그대로 날아가 벽에 박혔다. 다행히 벽에는 미리 짜놓은 마력의 그물이라 큰 충격은 없었다. 아마도.
"마지막은 환(幻)속성이에요. 환술, 환상, 이런 것들. 텔레파시나 마인드 리딩같은 초능력계 이능력들? 그런 게 다 여기에 속해요."
나는 손뼉을 쳐 덕배의 눈앞에 일곱 가지 불꽃을 만들어냈다.
"사람마다 고유의 속성에 반응하기는 하는데 간혹 여러 속성에 재능이 있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 사람들은 복합속성을 타고나거나, 완전 다른 속성으로 발현되기도 해요. 화속성과 풍속성이 섞여서 뇌전의 이능력을 깨우친 히어로 '라이트닝'처럼."
"하아. 하아. 설명 좀, 그만."
덕배는 마력을 갈무리하여 바위 피부를 해제했다. 온몸을 덮고 있던 바위가 사라지자 덕배의 맨몸이 드러났다.
아직 피부는 회백색이고 청록색 마력의 관이 혈관처럼 드러나 있다. 후드가 벗겨진 머리는 형광등 불빛에 반사되어 빛나고 있었다.
과연. 괴인이 되어도 머리는 다시 자라지 않는 건가. 새로운 지식이 늘었다.
"뭔가 기분 나쁜 생각을 한 거 같은데?"
"전혀요. 일단 쉬었다가 하죠. 3분 지났으니까."
나는 미리 뜨거운 물을 부어둔 컵라면-물은 내 불꽃으로 끓였다-에 올려둔 삼각김밥을 치웠다. 원래 세계의 메이커와는 전혀 다른 상표의 것들이라 왠지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덕배는 슬그머니 내 맞은편에 앉아 데워진 핫바를 깨물었다.
"그리고 말이죠. 조덕배 씨는 상사를 대하는 태도가 글러 먹었어요. 어떻게 다른 사람 앞에서 그렇게 주인을 부끄럽게 할 수 있죠? 그게 부하 2호의 태도인가요?"
"아니, 밥 먹을 때는 좀 입 다물고 먹자."
덕배가 성을 내며 핫바를 물어뜯었다.
나는 할 말이 턱밑까지 차올랐지만, 라면 한 젓가락과 함께 뱃속으로 밀어 넣었다.
한 가지 오해를 풀자면 나 혼자 먹으려고 편의점의 음식들을 긁어모은 건 아니다. 주인이 되었으면 최소한의 복지를 챙겨줘야 하지 않겠는가.
괴인 1호는 자급자족을 하도록 명령했으니 알아서 더 잘 먹을 거다. C급 괴수만 하더라도 맛만 따지면 괴인에게는 1등급 한우 이상이니까.
나는 테이블 위에 올라온 라떼음료를 집어 드는 덕배의 손목을 붙잡았다.
"잠깐. 딸기는 내 겁니다."
"...어휴."
덕배는 인상을 찌푸리며 옆에 있는 다른 음료를 챙겼다.
"그렇게 이게 먹고 싶다면 퀴즈를 하나 내도록 하죠. 맞추면 이거 줄게요."
"더러워서 진짜."
말은 험하지만, 몸은 솔직했다. 덕배는 집어 든 음료를 내려놓았다.
"그럼 퀴즈. 흔히들 불꽃의 컬러는 '붉은색'일 텐데, 왜 제 화염은 '푸른색'일까요?"
"...? 그러게?"
덕배가 고민에 빠졌다. 나는 그사이에 딸기우유의 입구를 뜯었다.
맞힐 리가 없지. 나도 피닉스 루트 진입하고 피닉스에게서 직접 들은 문제인걸. 이제 딸기우유는 나의 차지다. 하하하.
"파란색이 좋아서?"
"......."
나는 아무 말 없이 딸기우유를 덕배에게 집어 던졌다.
* * *
<오후 2시. 백상우의 사무실.>
"여기. 물건들."
상우는 백팩을 건넸다.
"신분증, 가상계좌, 그리고 휴대폰. 스마트워치는 서비스다."
"우와. 고마워요."
피닉스는 가방 안에 든 물건들을 찬찬히 살피다 스마트워치를 손목에 찼다.
"말했다시피 계좌에는 19억이 들어있다. A급 코어에 대한 건은 본사에서 반려했다. 역시 출처를 알 수 없는 코어는 신뢰도 할 수 없고 유통할 수도 없다더군."
"첫 거래니까요. 이해합니다."
피닉스는 손에 쥔 코어 셋을 만지작거리다 가방안에 대충 쑤셔넣었다.
상우는 피닉스의 폭거에 정신이 아뜩해졌다.
"만약 당신의 명성이 높아지고 우리 쪽과 신뢰가 쌓이면 B급보다 더 높은 등급도 거래할 수 있겠지. 그때 A급을 들고 돌아오도록. 살아있다면."
"명성, 인가요?"
피닉스는 제 신분증을 앞뒤로 살폈다. 인천 외곽 소재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장소와 00년생이라는 나이.
그리고 '피 닉스'라는 이름.
"그래. 그리고 블랙마켓의 계정은."
상우는 자신의 스마트워치를 조작했다. 피닉스는 멀뚱멀뚱 있다가 상우의 눈치에 똑같이 스마트워치를 조작했다.
지잉-
달걀보다 작은 크기의 기기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네 방향으로 쏘아진 빛은 두 사람의 사이에 각각 사각형으로 된 화상을 띄웠다.
"워치에 있는 기능으로 이렇게 접속할 수 있어. 물론 고객님은 접속만 가능하고 내부 인원의 '추천'을 받아야만 가입을 할 수 있지."
상우가 제 단말의 화면을 이곳저곳 두드리자, 피닉스의 화면에 작은 알림창이 떠올랐다.
"'[인천보따리]님이 대화방에 초대하셨습니다'?"
"나다."
"그거야 알겠는데 이거 수락하면 되는 거죠?"
"그래. 그전에 하나 해야 할 게 있지."
피닉스는 알림창을 선택해 초대에 응했다. 잠시 화면이 지직거리더니 무언가 데이터를 빠르게 내려받기 시작했고, 화면의 색이 검게 변했다.
"그게 블랙마켓이다. 장물, 코어, 괴수 부산물, 히어로에 대한 정보 등등 온갖 걸 사고파는 곳이지."
상우는 피닉스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쪽이 해야 할 거는 이 블랙마켓에서 사용할 '닉네임'을 설정하는 거야. 한 번 정하면 못 바꾸니까 신중하게 만들라고."
"그럼 간단하죠."
피닉스는 제 화면에 떠오른 키보드를 빠르게 입력했다. 이미 검게 물든 화면을 보던 상우는 자신이 초대한 상대의 닉네임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끝. 됐죠?"
"[창염의피닉스]? 뭐야 이 닉네임. 요즘 이능력자들 이명이 중2병스럽게 나오는 게 대세인가?"
"중2병이라뇨. 그게 제 진짜 이름인 걸요."
상우는 턱수염을 긁적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능력자들 상대로 상식을 요구하는 건 무리지. 근데 괜찮겠나? 그쪽 성격 봐서는 제대로 된 활동은 안 할 테고, 행여나 빌런으로 찍혀서 현상금 박히면 이 닉네임이 올라갈 건데?"
"바라던 바에요. 오히려 숨길 생각은 더 없고요. 아, 이왕 하는 거 '조직등록'도 가르쳐주세요. 지금 바로 가능해요?"
"완전 날로 먹으려 하네."
"나중에 코어 모으면 백 사장님한테 바로 팔게요."
"립서비스라도 고맙네. 일단 이 탭으로 들어가서...."
상우와 피닉스가 서로의 화면을 번갈아 가며 블랙마켓을 탐방하는 사이, 벽에 기대어있던 덕배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재잘거리는 주인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이 녀석의 정체는 뭘까.'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땅에서 솟아난 것도 아닐 텐데 어디서 이런 괴물이 튀어나온걸까. 덕배는 새로운 문물을 접하는 어린아이처럼 놀라는 피닉스의 태도가 영 가증스러워 당장이라도 이곳을 떠나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 거지 같은 명령만 아니었어도.'
죽은 인간을 되살려 괴인으로 만들 수는 있지만, 충성심까지는 강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덕배는 제 의지가 닿는 선에서 소심한 반항을 해봤지만, 결국 피닉스가 내키는 대로 이용되었다.
덕배가 사색에 잠긴 사이, 상우는 모든 설명을 끝마쳤다.
"흐음. 알겠어요. 이제 조직 이름만 정하면 된다는 거죠? 흐흐. 뭔가 길드 만드는 것 같아서 재밌네."
"그렇게 가볍게 여길만한게...하아."
상우는 커피를 홀짝이며 검지를 들어 올렸다.
"잘 들어. 블랙마켓에 조직으로 등록을 한다는 건 진짜 이름을 내건 '빌런'으로 활동한다는 얘기야. 어설프게 다니면 현상금 사냥꾼들한테 잡혀서 감옥 간다고. 특히 이렇게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피닉스 씨 같은 뉴비들은...."
"네. 알겠습니다. 새겨듣도록 하겠습니다."
피닉스는 빠르게 조직 이름을 등록했다. 상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새롭게 등록된 조직 리스트를 확인했다.
"[청화단]?"
"네. 악당들 조직치고는 상당히 그럴싸한 이름이죠?"
피닉스는 자신을 악당이라 부르면서도 여전히 웃고 있었다.
* * *
거래를 마친 우리는 백상우의 사무실을 빠져나와 시청 인근의 카페로 들어갔다.
덕배는 이런 카페에 들어오는 게 상당히 어색한 듯 우물쭈물하고 있었지만, 내 명령에 따라 무사히 트레이에 올려진 음료들을 가져오는 데 성공했다.
"신기하네요."
나는 왼쪽 손목에 찬 스마트워치를 두드렸다. 블랙마켓에 들어갈 때와는 달리 옆으로 작게 떠오른 화면에는 조금 전 계산대에서 이루어진 결제 내역이 고스란히 적혀있었다.
"인천만 해도 이런데 신서울로 가면 완전 신세계겠죠? 차도 자율주행으로 날아다니고?"
"그거 농담이냐?"
"설마요."
괴수의 코어를 에너지원으로 만든 기기들은 인류 문명의 큰 발전을 가져왔다. 괴수라는 막대한 장해 요인을 가졌음에도, 마력이라는 새로운 에너지원을 이용하게 된 인류는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 문턱에 서 있었다.
다만 그것은 신서울이나 부산 같은 대도시에 한정된 이야기였고, 괴수의 습격이 빈번한 외곽지역은 상대적으로 발전이 더뎠다.
"서울이 제 기능을 하고 있었다면 신서울이 생길 이유도 없었겠죠?"
"그래서 그게 서울로 가야 한다는 거랑 무슨 관계인데?"
덕배가 내키지 않는다는 듯 지적했다.
그랬다. 나는 청화단을 조직한 뒤 덕배에게 내가 가야 할 목적지를 말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걸 다 일일이 설명하려고 하면 여기서 날밤을 세야 할걸요? 일단 당장은 이것만 기억해 두세요. '청화단'의 목적은 전 세계에 흩어져있는 수많은 보물과 유물의 수집. 그중에서도...."
나는 각설탕 하나를 들어 포장지를 벗겼다.
"딱 요만한 크기의 큐브를 찾는 것. 기괴한 문양이 박혀있어서 한 눈으로 봐도 범상치 않은 물건이라고 알 거예요."
"그걸 수집하는 게 네 목적이란 말이지."
덕배는 커피를 얼음째 입안에 털어 넣었다.
"고작 장난감 수집하는데 사람 죽이고 되살리고 해야 할 이유가 있었나?"
"장난감? 푸흐. 이봐요. 그 장난감 하나만 있어도 지구를 멸망시킬 수 있어요. 그건 그런 물건이니까."
괜히 신의 코어가 아니다. 나는 각설탕을 커피 속으로 떨어트렸다.
"이능력의 증폭, 이능력의 각성, 무한한 에너지 추출. 현재까지 연구된 결과로는 그 정도만 알 수 있겠지만...."
나는 트레이에 올려진 티스푼으로 덕배를 향해 겨눴다.
"괴수의 제작, 인간의 괴인화, 정신세뇌, 자연 붕괴. S급 손에 들어가면 온갖 이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마법의 물건이에요. 그건."
"혹시 네가 그걸 손에 넣으려는 이유가...."
덕배가 침을 꿀꺽 삼켰다. 나는 티스푼을 내려놓으며 커피를 휘휘 저었다.
"그래요. 세계 평화를 위해-"
"그걸로 세계 정복이라도 하려는 거냐?"
"...사람을 뭐로 보고. 제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요?"
덕배가 안 그래도 사나운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입을 오물거렸다. 꼭 뭔가를 말하고 싶은데 겨우 말을 참는 것 같았다.
"괜찮으니까 말해봐요. 명령입니다."
"사람을 벌레처럼 여기며 태워죽이는 괴물이 세계 평화는 무슨, 흡."
덕배의 의지와 관계없이 덕배의 본심이 쏟아져나왔다. 나는 티스푼을 내려놓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쓰다. 왜 설탕을 넣었는데도 쓰라릴까.
"한 가지 오해를 풀어야겠네요. 지금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나는 커피잔을 탁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게 다 세계의 평화를 위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