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1부 2장 (2)
<2020년 4월 4일 오전 10시, 시청 근처 공원.>
결국 A급 괴수의 코어는 판매하지 못했다.
'게임에서는 그냥 S급도 막 팔고 그랬는데.'
왜 이런 데서 묘하게 현실적인 부분을 강요하는 걸까. 백상우는 A급 괴수의 코어가 가진 위험성을 열변하며 한사코 매입을 거부했다.
'내가 먹어봐야 의미는 없고.'
괴수의 정점에 있는 게 일곱 간부다. 그 간부 중에서도 '최강'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게 창염의 피닉스다.
괜히 A급 괴수의 코어를 먹었다가는 정순한 마력이 오염될 뿐이다.
'그럼 덕배한테 먹여?'
그것도 기각. 성장이 더뎌서 A급은커녕 C급도 아직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고 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끼지 말고 A급으로 괴인이나 만들 걸 그랬다.
'성공할 줄 알았으면 무조건 A급으로 만들었지.'
다음에 괴인 만들 일이 있으면 무조건 A급, 아니 S급 괴수의 코어를 사용해보자. 나는 덕배를 지긋이 노려봤다가 다시 스마트폰으로 눈을 돌렸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당장 신서울로 들어갈 필요는 없다. 그래서 일단은 서울, 그중에서도 여의도로 가장 먼저 가야 했다.
'여의도에 그게 있으니까.'
신의 파편. 성주가 이계신을 소환하려고 들고왔다가 파괴당해, 전 세계로 흩어지게 된 이계신의 신물(神物).
이계신의 코어라고도 할 수 있는 그것은 27개의 큐브 조각으로 흩어져, 전 세계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절반은 각국 협회에서 연구 중이고 나머지는 숨겨져 있지.'
파편 하나의 크기가 각설탕 한 개만 한 정도다. 마력 탐지로도 찾을 수 없는 그 물건을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찾으려면 막대한 인력이 필요했다.
'하나라도 남김없이 싹 다 파괴한다.'
최종보스인 성주를 죽이면 이야기는 끝이 난다.
하지만 그건 으레 있는 노멀 엔딩에 불과하고, 성주가 소환하는 이계신의 화신까지 쓰러뜨려야만이 진엔딩을 맞이할 수 있다.
성주가 페이크 보스라면 이계신은 진 최종 보스. 그리고 피닉스는 오로지 진엔딩에서만 살아남는다.
'노멀 엔딩으로 끝내면 찝찝하게 끝난다는 거지.'
마치 이계신이 지구를 포착하고 언젠가 넘어올 것 같은 문구를 남기며 끝.
성주를 죽이고 엔딩을 맞이해도 언젠가 이계신은 지구로 찾아온다. 그 실마리가 되는 게 신의 파편, 큐브. 제 육체의 흔적을 찾아 지구로 넘어오기 전에, 모든 파편을 회수해 파괴해야 했다.
'일단 소재지가 명확한 것부터 찾자.'
한반도에는 총 세 개의 파편이 잠들어있다.
하나는 대전에, 하나는 평양에, 하나는 서울-여의도에.
'근데 여의도는 좀 가기가 껄끄럽다는 말이지.'
막상 가고 싶어도 썩 내키지는 않는다.
서울의 중심에 있는 작은 섬. 신의 파편이 숨어있는 이 섬은 한국에서 벌어지는 전장 중 메인 스토리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전장이다.
'창염의 피닉스가 죽는 장소.'
게임에서는 태평양을 횡단해 날아온 피닉스는 국회의사당의 잔해에 내려앉는 것을 시작으로 전투가 시작된다.
여의도 일대 전역에서 벌어진 주인공 일행과의 전투 끝에, 모든 동료가 쓰러진 주인공과 피닉스는 마주하게 된다.
자멸을 각오하고 봉인해둔 힘을 풀어낸 주인공.
폭주하며 정령이라는 정체성을 자각한 피닉스.
막 깨어나 세뇌가 풀리는 피닉스를 다시 세뇌하려는 성주.
세 명의 이 능력이 한군데 뭉쳐 폭주하는 가운데, 피닉스는 성주에 대한 복수를 위해 제 모든 힘을 주인공에게 넘기고 소멸한다.
'나도 그런 미래를 겪을 수 있어.'
어쩌면 내가 죽을지도 모르는 장소.
정말로 내키지는 않지만, 큐브를 회수하려면 여의도로 가긴 가야 한다.
'그래. 일단 큐브부터 모으고 생각하자.'
꼬르륵.
"...그래. 일단 밥부터 먹어야겠죠?"
영종도를 떠난 이후로 무언가를 제대로 먹은 적이 없다. 나는 주머니를 뒤져 지폐 두 장을 꺼냈다.
'2만원이면 두 명 먹을 값은 충분할 거다.'
나는 벤치에서 일어나 저 멀리 맞은편 벤치에 앉아있던 덕배에게 다가갔다. 덕배는 잠시 잠에 들었는지 미동조차 없었고, 그의 머리 위에는 작은 참새 한 마리가 후드를 쪼아대고 있었다.
찌르르.
자연물을 근간으로 한 괴인이라서 그런지, 야생동물들이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저 새들은 정말로 덕배를 큰 바위덩어리 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퍼드득.
내 손길이 다가가자 새가 화들짝 놀라 하늘로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덕배가 눈을 떴다.
"무슨 일이냐."
"깨어 있었네요?"
덕배는 후드 위를 정리하며 벤치에서 일어섰다. 2m 언저리에 달하는 키에 내 위로 그림자가 생길 정도였다.
"애초에 안 자고 있었는데."
"그런가요? 그럼 이제 밥 먹으러 가죠."
"…. 밥?"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사내복지 하나만큼은 철저하게 하거든요."
"네가 밥을 산다고?"
나는 웃으며 공원 너머의 건물을 가리켰다.
"네. 시간 때울 겸 겸사겸사 여러 가지 가르쳐주기로 하고."
* * *
"안녕히 가세요."
기우는 나가는 손님을 쳐다도 보지 않고 인사하고는 의자에 앉았다. 그가 판매대에 앉고 나서 두 시간 만에 찾아온 첫 손님이었지만 기우는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오늘 텄네.'
인천이 이 모양이 되고 기우는 부모님에게 지방으로 내려가자고 주장했다. 할머니 집이 있는 전주의 시골로.
하지만 그날 기우는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얻어맞았다. 인천에 있는 건물 수 채와 영종도의 상가들을 그냥 두고 갈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깟 건물이 사람 목숨보다 중요한가?'
기우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잠시 시골에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면 되는 일이다. 화를 잠시만 피하면 괴수들도 퇴치될 것이고 인천은 다시 원상복구 될 것이다.
이 편의점도 기우 부모님 소유의 건물 중 하나였다. 그들에게는 아르바이트생을 구할 돈이야 넘쳐났지만, 정작 최저시급의 배를 준다고 해도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도 도망가야 되는데."
부모님 밑에서 돈을 펑펑 쓰며 자란 기우는 부모의 명령을 거역하고 혼자서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을 일절 하지 못했다. 덕분에 하기 싫음에도 알바없는 편의점을 지키며 팔자에도 없는 점주 노릇을 하게 되었다.
"뭐 재미있는 거 없나."
그나마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낼만한 것은 역시 U튜브였다.
아직 건물의 인터넷 선은 끊어지지 않았다.
"인기 동영상...오."
온갖 히어로들의 섬네일이 가득한 가운데, 조회 수가 억대에 이른 영상이 눈에 띄었다.
[중국의 군신! 일격에 S급 괴수를 베어버리다?!]
"이건 또 무슨 TV야?"
기우는 영상을 재생했다. 듣기 싫은 멘트를 적당히 넘겨버린 그는 본격적인 영상이 시작되는 부분에서 손을 멈췄다.
"쩐다."
녹색의 전포를 두르고 가면 아래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대장부. 대한민국 남자라면 모를 수 없는 군신, 관운장이 현대에 히어로가 되어 현신했다고 하는 중국의 대영웅.
운장은 말없이 언월도를 들고 사막 위를 걸어갔다. 그 끝에는 잔뜩 성이 난 흑색 빛깔의 괴수가 흉포하게 날뛰고 있었다.
"흑전갈?!"
예전에 보았던 개체보다는 작지만 분명한 S급 괴수 흑전갈이었다. 꼬리에 있는 독침에 찔리면 B급 히어로도 한 번에 훅 간다는 악랄한 괴수.
운장은 그 괴수를 상대로 아무런 겁 없이 언월도를 빙빙 돌리며 다가갔다. 마치 산책을 나온듯한 발걸음에 성이 난 흑전갈은 운장을 향해 두 집게를 벌리며 달려들었다.
꼬리가 가면을 찌르기 직전. 빙빙 돌아가던 운장의 언월도가 푸른 선을 그리며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서걱! 서걱!
키에에엑!
마치 예초기에 잘려나가는 잡초처럼 흑전갈의 꼬리가 잘려나갔다. 꼬리 끝에 묻어있던 독액은 운장이 만들어내는 풍압에 옆으로 흩어졌다.
푸슈우욱.
사막의 모래마저 순간적으로 녹여내는 극독은 운장의 몸에 전혀 닿지 않았다. 운장은 돌리던 언월도를 꽉 쥐고 사선으로 높이 치켜들었다.
"와! 필살기!"
히어로들마다 시그니쳐라고 할 수 있는 '필살기'. 운장 이전 중국의 대영웅이었던 '전귀'가 자신의 필살기를 무쌍이라 칭한 이래로 운장 또한 그 필살기를 이어받았다.
서걱!
언월도가 초승달을 그리며 흑전갈을 갈랐다. 일격. 운장은 딱 한 번을 휘두르는 것으로 제자리에 멈춰 섰다.
"엥?"
기우는 기억하고 있던 운장의 필살기를 떠올렸다. 분명 피겨스케이터가 트리플 악셀을 발 듯 세 번 회전하며 언월도를 휘두르지 않았던가?
뭐지. 컨디션이 좋지 않은 걸까.
캬아아악....
라는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흑전갈은 단말마와도 같은 괴성을 지르며 움직임을 멈췄다. 언월도의 참격이 지나간 궤적을 따라 상체가 미끄러지듯 땅으로 쓰러졌다.
"우와!"
내가 지금 뭘 본거지. 기우는 손으로 입을 막고 영상을 멈췄다. 온몸에 소름이 돋다 못해 등을 타고 흐른 짜릿한 전율이 사고를 멈출 정도였다.
"뭐야, 뭐야!"
기우는 다시 영상을 돌렸다. 영상 속 운장은 정확히 단 한 번의 참격으로 흑전갈을 통째로 갈라버렸다.
"히야. 진짜. 원탁도 정도가 있지."
원탁.
성별, 나이, 피부, 국가, 그리고 이념을 초월한 세계구급 히어로. 영국의 히어로 <가웨인 경>의 주도하에 명명된 이 집단은 오로지 '세계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조직이었다. 중국의 <군신>처럼 국가의 영향을 많이 받는 이도 있었지만, 그들은 분명히 최고라 자부할만한 영웅들이었다.
"중국이랑 일본도 한 명씩 있는데...어휴."
동아시아권 자존심 대결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안타깝게도 12인의 원탁 히어로 중 한국인은 없었다.
"그나마 있는 두 명도 사라지면 어쩔 뻔했어. 으휴."
광검과 설화공주. 대한민국에 단 둘 뿐인 S급 히어로.
"S급이 한 명이라도 더 있으면 진짜 좋을 텐데."
워낙에 귀한 인재다 보니 각자 국가의 요충지에서 신줏단지 모시듯 보호를 받고 있다.
광검은 신서울, 설화공주는 부산.
서울이나 인천에 이 둘에 준하는 히어로가 있었다면 중부 지방이 이 정도까지 망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안전한 곳을 찾아 그 둘이 상주하는 도시로 거처를 옮겼고, 특히 서울이 가장 빠르게 인구가 줄어들었다. 광검이 정부의 요청에 응해 신서울로 거처를 옮기게 되면서.
결국 서울, 인천, 경기 남부에 남은 이들은 두 부류뿐이었다. 다른 도시로 넘어갈 재산도 없거나, 모종의 이유로 도시에 남은 자들. 기우의 가족은 후자 중에서도 '부동산'이라는 이유로 서울에 남았다.
딸랑딸랑~
"신서울은 외곽도 아파트 한 채에 20억 한다는데...."
나도 히어로코인이나 도전해볼까. 히어로 채널에서 아무 히어로나 하나 찍어서 후원을 빵빵하게 한 다음 그 히어로가 대박이 터지는 거다. 잘만하면 후원금의 몇백 배를 얻었다는 지인의 소식이 아직도 기억났다.
"에이. 나도 히어로 됐으면 다 손 터는데."
로또 1등도 매주 5~6명 가까이 당첨된다던데 히어로는 그것보다 더 극악의 확률이다.
누군가는 잠자다가 각성하고 누군가는 괴수의 습격에서 각성해 살아남았다고 할 정도로 히어로 각성의 메커니즘은 아직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았다. 만약 그가 히어로 각성의 방법만 안다면 억만금을 주고서라도 그 방법을 시도할 것이다.
"그러니까 말이에요. 히어로 각성은 사실 별거 없어요. 마력에는 일곱 종류가 있거든요? 그 일곱 종류의 마력 중 자기 체질에 맞는 마력을 느낄 수 있느냐 없느냐가 히어로로 각성하는 방법이에요."
이게 무슨 참신한 개소리 이론이지. 기우는 이상한 영상이 재생되었나 싶어 태블릿을 확인했다. 영상이 일시 정지된 태블릿 너머에는 온갖 먹을 것과 생필품을 잔뜩 매대에 쌓은 푸른 머리칼의 여고생이 있었다.
"누, 뉴구세요?"
기우는 너무 놀라 혀까지 씹었다. 소녀는 매대 위에 올라온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가리켰다.
"계산해주세요."
"아, 네. 네."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상품의 바코드를 하나하나 찍었다.
손이 굼뜬 것은 절대 중간중간 소녀를 힐끔 거리기 위함이 아니다.
소녀는 옆에 함께 온 거한을 보며 끊임없이 재잘거리고 있었다. 기우는 그 목소리가 꼭 새의 지저귐 같았다.
"마력에는 '속성'이라는 게 있어요. 게임 좀 해봤어요? 아, 안 해봤다고. 그, 예전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했던 4원소설은 알아요? 뭐 따스함, 습함 그런 것들로 원소가 구성되어있다는 건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발견한 것은 원소의 특징이 아니라 마력의 특징이었다고 해요. 간단히 불, 물, 바람, 흙-지수화풍의 네 가지 마력. 사실 그게 아니긴 한데 이 세계에서는 그런 설정이에요. 쓸데없이 설정을 꼬아둔 거죠."
소녀는 설명을 이어나가다 목이 마른 듯 가까이에 있던 라떼 음료 하나를 같이 올렸다. 거한은 그 음료를 슬쩍 보더니 옆에 있던 음료도 같이 올렸다.
"뭐에요. 좋아하는 음료?"
"......1+1."
거한의 쇠를 긁는듯한 목소리에 기우는 화들짝 놀라 막 찍으려던 캔콜라를 떨어뜨렸다. 바닥을 구른 캔은 기우의 신발에 부딪혔다.
"바, 바꿔드리겠습니다! 잠시만요!"
제 실수에 기우는 한걸음에 냉장고에서 같은 음료를 꺼내 매대로 돌아왔다. 후드를 푹 눌러쓴 거한이 자신을 노려보는 것만 같아 캔콜라를 가지고 오면서도 손이 벌벌 떨렸다.
"흠. 아무튼 그 네 가지 마력이 제일 보편적인 속성이에요. 속성이야 고정되어 있어도 이능력이 어떻게 발현되는지는 사람마다 달라요. 당신은 굳이 따지자면 지속성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멈칫. 소녀의 말에 기우는 눈동자를 열심히 굴렸다. 그 말인즉슨 저 거한은 히어로란 말인가?
"아? 저요? 당연히 화속성이죠. 제가 화속성 아니면 달리 무슨 속성을 가지겠어요. 타오르는 푸른 불꽃! 태양 그 자체! 그게 바로 저랍니다."
마치 연극을 하듯 손을 천장에 뻗는 소녀를 보며 기우는 심장이 폭발할 것만 같았다. 자신감 넘치는 웃음이 몹시 사랑스러웠다.
"...헛소리."
거한은 그런 소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몸을 돌려 다른 상품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소녀는 잠시 굳었다가 팔을 내리고 기우와 눈을 마주했다. 기우는 막 마지막으로 바코드를 찍었다.
"담아드릴까요?"
"네. ...아니. 잠시만요."
소녀는 계산대를 구경하다 한 문구를 보고 얼굴을 와락 구겼다. 그 찡그린 표정마저 아름다웠다.
"봉투값, 진짜. 이런 것까지 똑같이 하고 말이죠."
소녀는 축 처진 어깨로 산더미 같은 음식들을 가리켰다.
"...담아주세요. 아, 정말."
기우는 그냥 돈을 받지 않고 봉지에 담아줄까 생각도 했다가 이내 포기했다. 그의 부모는 인천이 망한 뒤로 봉투 한 장도 철저히 따지며 판매했다. 걸리면 죽음이었다.
"다 합쳐서 이만 이천 백 원입니다."
"...어."
소녀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혹감이 서렸다. 막 주머니에서 꺼낸 현금은 녹색 이파리 두 장뿐이었다.
"자, 잠시만요."
소녀는 주머니를 마구잡이로 뒤지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주머니 속에는 먼지만 툴툴 흘러나왔다.
"아, 하하, 하. ...몇 개 빼야 하나."
소녀는 상품을 가져온 매대의 가격표를 흘깃거리며 비닐 속 물건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청록색 목도리에 반쯤 가려진 목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잠깐."
거한이 매대로 돌아왔다. 소녀는 거한을 보며 구세주를 본 듯 환하게 미소지었다.
"역시! 당신도 도움이 되는...어. 손에 그거 뭐에요?"
소녀는 거한의 손에 들린 핫바 두 개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 기세가 금방이라도 쌍시옷을 다발로 내뿜을 것만 같았다.
"어휴. 지금 너무 많이 집어 들어서 몇 개 빼야 하는 와중에 거기다가 더 얹으면...."
"비켜."
"응?"
"비켜보라고."
소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거한을 바라봤다. 거한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핫바를 계산대에 올렸다.
"어? 잠깐만요. 지금 돈 모자란다니까요? 돈 계산도 못하는 바보예요?"
피식. 거한의 비웃음 소리가 들린 건 기우의 착각이었을까.
거한은 제 주머니에서 오천 원을 꺼내고는 소녀에게서 돈을 뺐어 들었다. 세 장의 지폐를 건네받은 기우는 포스기를 두드리며 잔돈을 꺼내기 시작했다.
"2만 5천 원 받았습니다."
"거스름돈 알아서 챙겨라."
거한은 당연하다는 듯 제가 집어온 핫바를 집어 들었다.
"...이게 지금?"
소녀가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고 있자 거한은 핫바의 껍질을 쓱 벗겨내고는,
"알아서 데워먹던지."
전자레인지에 돌아가지도 않은 핫바를 소녀의 손에 끼워주고 음식이 담긴 봉지를 챙겨 그대로 몸을 돌려 편의점을 나가버렸다.
"저기요."
소녀는 제 손에 들린 핫바를 노려보며 기우에게 물었다.
"이걸로 때리면 저거 죽을까요?"
"...아니요?"
기우가 반문하자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편의점을 빠져나갔다.
딸랑딸랑.
흔들리는 종이 손님이 나갔음을 알렸다. 기우는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에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요즘 세상에 현금 쓰는 사람도 다 있네."
기우는 목덜미를 쓸어 잡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저기요! 잔돈 받아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