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1부 2장 (1)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쿠울."
나는 눈앞 소파에 누워 죽은 듯이 잠을 자는 흑발의 미인을 보다가, 좌절감에 고개를 푹 떨구었다.
정말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른 걸까.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당장 10분, 아니 1분 전이라도 돌아가고 싶다.
"네가 왜 여기서 나와요."
이 타이밍에 나올 캐릭터가 아니었다. 이 시기에 여기에 있을 캐릭터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괴수들의 습격을 받는 것을 도와줬다.
그런데 그게 플래그였나보다.
메인 히로인 중 한 명이 인간불신에 빠지게 되며 이능력을 깨우치는 각성 이벤트.
그걸 내가 구해주게 됨으로써, 각성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원작 꼬였다...."
나 때문에.
어쩌다 이렇게 됐지? 나는 아침부터 있었던 기억을 더듬었다.
* * *
<2020년 4월 4일 오전 9시, 인천시청 인근 건물의 허름한 사무실.>
"그러니까 이걸 지금 다 현금으로 바꿔 달라고?"
백상우는 크로스백 안에 담긴 각양각색의 구슬들을 보며 골머리를 앓았다.
"네. 바로 되지요?"
골칫거리를 가져온 장본인, 피닉스는 싱글벙글 웃으며 탁자 위의 구슬들을 가리켰다.
"아직 코어로 만들지도 않은 싱싱한 물건들이에요. 봐요. 생생하죠? 상처 하나 없죠?"
"그래. 하나같이 깨끗해서 괴수가 여길 당장이라도 습격할 것 같다."
상우는 피닉스가 괴수의 코어를 꺼냈을 때, 진지하게 바로 냅다 도망갈까 고민했었다. 오랜 장물아비 경험으로 그는 육안으로도 코어의 등급을 파악하는 경지에 이르렀고, 그의 직감은 눈앞의 코어들이 C~B등급임을 확신했다.
이곳이 A급 히어로들이 지키는 시청 근처가 아니었다면, 바로 코어 냄새를 맡은 괴수들이 눈을 까뒤집으며 도시로 달려들었을 것이다.
"양이 무슨...."
B급 괴수가 이걸 다 먹어치우면 금세 A급으로 진화하지 않을까? 상우의 걱정을 느꼈는지 피닉스는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에이. 절대 그럴 일은 없어요. 그쵸, 덕배?"
"...그래."
피닉스가 앉은 소파 뒤에 서 있던 덕배는 후드를 벗었다. 들춰진 후드 안에는 피부 전체를 바위로 뒤덮은 괴인이 있었다.
"빌런?"
물론 괴인이 아직 대외적으로 드러난 적이 없기 때문에, 상우는 덕배의 피부를 제 능력을 보이며 과시하는 빌런으로 오해했다. 피닉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변명했다.
"보시다시피 제 호위가 이능력자라. 인천 북부만 가더라도 괴수들 사냥하기 좋은 장소가 널리고 널렸잖아요?"
"그거야 그렇기는 한데...."
상우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덕배와 핵이 든 가방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가 이만한 양의 핵을 모아왔다고 하기에는 뭔가 약해 보였다.
"그럼 혹시 당신도?"
"그런 셈이죠."
피닉스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상우는 이능력자 중에 눈앞의 여인이 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선명한 청색의 머리칼.
능력을 각성하면 체모의 색이 바뀌기 마련인 이능력자 사이에서도 유독 개성이 강한 색이다.
하지만 이런 능력자는 제 기억에는 없었다. 그렇다면 최근에 능력을 각성한 신인이라도 되는 걸까?
"뭐, 당신이 괴수를 잡아 왔던 누굴 죽이고 훔쳐 왔던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고객의 니즈를 빠르게 파악하시는군요. 흐흐."
"제대로 등록된 히어로라면 협회 쪽 창구로 갔겠지? 이런데 이런 거 들고 오는 이능력자면 안 봐도 비디오지."
애초에 떳떳하지 못한 루트로 판매하는 곳이다. 상우는 테이블 위에 놓인 흰 장갑을 끼고 코어를 하나하나 살폈다.
흰 장갑은 짙은 회색의 구슬들 사이로 오다니며 표면을 쓸었다.
"진짜로 C급들인 것 같군. 그리고 이건."
상우는 가방 안쪽에 놓인 세 개의 코어를 조심스레 꺼내 들었다. 다른 코어와 한눈에 비교해보아도 그 크기가 컸다.
무엇보다도 C급들과는 달리 약간의 '색깔'이 있었다. 초록색의 선이 유전자 배열처럼 꼬여 빛을 내는 형태는 분명 B급 괴수의 코어였다.
"B급이에요. 잡는데 애먹었어요."
"둘이서 B급 잡으려면 고생깨나 했겠군. 어디 히어로들이나 사냥꾼들한테 걸리지 않았나? 어디 길드 거 훔쳐 온 거면 나 장사 못 하는데."
"괜찮아요. 절대 걸릴 일이 없어요. 영종도에서 캐온 거니까."
푸웃!
다른 책상에서 커피를 마시던 직원이 그대로 모니터에 커피를 뿜었다. 방안에 찝찝한 커피 향이 흩어졌다.
"방금 그걸 농담이라고 한 건가?"
"믿든 안 믿든 그건 당신 자유에요. 그래서 얼마까지 해줄 거에요?"
"후우. 답답하군. 담배 한 대 태워도 되겠나?"
피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우는 품에서 꺼낸 담뱃갑에서 담배를 하나 물고 라이터를 찾았다.
화르륵.
"...응?"
눈앞에 회색의 연기가 피어오른다. 피닉스의 검지에는 아주 작은 불꽃이 춤추듯 불타고 있었다.
"아. 라이터 찾으셔서."
"허허."
상우는 담배를 쓱 한 모금 빨아당기고 손으로 머리를 넘겼다.
"이건 뭐 제값 안쳐주면 죽여버리겠다는 건가?"
"협박으로 생각하시나요? 친절인데요."
"호랑이가 토끼랑 놀아준다고 그게 친구 사이는 아니지."
상우는 타들어 간 재를 재떨이에 털었다. 평소보다 더 빨리 담배가 타들어 가는 건 기분 탓이 아닌 것 같았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현금으로는 못 준다."
"현금으로'는'?"
피닉스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당연하지. 이거 다하면 얼마라고 생각하는 거냐. D급 시세만 천만 원 언저리야."
"삼천만 원 아닌가?"
침묵을 지키던 덕배가 끼어들었다. 피닉스는 쯧쯧 혀를 찼고, 상우는 한결 편해진 얼굴로 검지를 까닥였다.
"그거야 협회 측 정식 루트로 판매할 때고. 나 같은 장물아비한테 팔아넘기려면 제값 못 받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냐."
"가치가 1/3로 줄어들었네요, 덕배."
"칫."
피닉스의 빈정거림에 덕배가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상우는 담배를 한 모금 당기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C급은 개당 오 천. B급은 5억 쳐주지."
"...? 그만큼 얹어준다고요? 그래서 장사가 돼요?"
피닉스가 의아한 듯 묻자 상우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볐다. 그는 한숨이 절로 나오는 걸 간신히 참으며 커피를 닦느라 정신없는 직원에게 이죽거렸다.
"이거 봐. 얘 꾼이라니까. 시세 후려쳤으면 우리 다 죽었어."
"에이. 죽이지는 않아요."
"예, 예. 그러시겠죠. 그래서 우리 진짜 최소한으로 마진 남겨서, 22억 줄게. 됐지?"
"좋아요."
피닉스가 쿨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상우는 꺼림칙한 눈으로 피닉스를 노려보며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
"더는 네고 없다? 나 녹음 중이야? 계약서에 지장 찍어?"
"그런 건 관심 없어요. 그보다 22억밖에 안 되잖아요? 그런데 현금이 안 된다고요?"
"그래. 얼마 전에 현금을 크게 신서울로 보냈거든."
상우는 믹스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담배 냄새와 믹스 커피의 냄새가 섞여 썩은 내가 풍겼다.
"그쪽이 앞으로 우리 고객님이 될 의향이 있다면 알아두는 게 좋아. 이런 변방에 있는 사무실에서 버는 돈은 최소 경비 빼고 다 신서울의 본사로 간다는 걸. 거래대금도 본사에서 지급되는 거야. 우리는 그냥 중개소 같은 거고."
"오호. 그래서요?"
상우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짓누르며 코어를 가리켰다.
"뭔가 큰 착각을 하는 것 같아서 분명히 말하는데 말이야."
상우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피닉스를 향해 입꼬리를 비틀며, 제 손목에 찬 스마트워치를 가리켰다.
"요즘 세상에 현금 들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있겠냐. 다 여기에 넣고 다니지."
"아."
피닉스가 처음으로 골치 아프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상우는 혀를 날름거리며 뱀처럼 웃었다.
"고객님, 설마 가상계좌도 없는 거야? 아니, 이 21세기 스마트 시대에 진짜로 현금 종이 다발로 들고 다니면서 종이 뿌리면서 다니려고 했어? 신서울이라면 모를까 경인에서 그러고 다니면 어디 으슥한 데 끌려가서 개털 되기 마련이에요."
"잠깐 작전타임."
피닉스는 손을 올려 시간을 번 다음 고개를 돌려 덕배에게 손짓했다.
"여기 스마트폰에 계좌 있죠?"
"있기야 한데 그거 호철 형님 계좌다. 본인 생체인증 안 하면 계좌는 바로 동결돼. 경찰도 바로 추적할 거다."
"그쪽 계좌는?"
"없다. 안 만들었다."
"...아, 젠장. 손가락이라도 잘라올 걸 그랬네요."
'괜히 태워버렸나.'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한 피닉스는 다시 상우와 눈을 마주쳤다.
"좋아요. 이왕 거래하는 거 서비스 좀 팍팍 넣어주실래요?"
"이 흐름이면 내가 엄청 귀찮아지는 이야기가 될 것 같은데."
피닉스는 손뼉을 쳤다.
"주민등록증. 가상 계좌. 그 명의로 된 스마트폰. 앞으로 계속 거래할 사이인데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죠?"
"그쪽이 사실 본 목적 아냐?"
"겸사겸사죠. 흐흐. 그래서 못하시겠다?"
상우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잔뜩 거들먹거렸다.
"2억."
"콜."
"??"
"????"
상우의 뇌 속에 인지 부조화가 발생했다. 내가 지금 잘 못 들은 건가?
"혹시 이해 잘못했나? 내가 너무 줄여서 말한 건가? 그쪽이 말한 조건으로 해주는 대신, 이 가방에 들어있는 핵 값을 20억으로 하겠다는 거야. 방금 2억을 후려친 거라고. 이해해?"
"네. 그게 무슨 문제라도?"
피닉스가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묻자, 상우는 사무실의 다른 이들을 번갈아 봤다. 일행인 덕배는 관심없다는 듯 시선을 돌리고 있고, 직원은 이미 아까부터 모든 행동이 멈춰있었다.
"후우."
상우는 다시 담배를 하나 물었다. 자연스레 푸른 불꽃이 피어오르며 담배가 타들어 갔다. 사소한 배려지만 조금 사양이다.
"......이봐. 돈 놀음 하는 입장에서 이런 말 하면 웃기지만, 앞으로도 계속 볼 사이가 될 것 같으니까 말해주는 거야. 귀담아 들어."
"그럼 굳이 안 말해줘도 될 것 같은데요."
상우는 담배로 피닉스를 삿대질했다.
"돈 귀한 줄 알아. 어?! 아무리 세상이 히어로가 판을 치는 세상이라고 하더라도 돈의 가치는 그대로라고. 아니, 더 올라갔지! 신서울도 이제는 돈 없으면 못 들어가는 곳이니까. 20억? 신서울 외곽 10평짜리 아파트값도 안 나와. 그리고 솔직히 가짜 신분 하나 만들어내는데 2억 하겠냐? 인천 여기서 중국 루트로 만들려고 하면 1억도 안 들어. 아가씨가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나본데...."
"우와. 이게 그 말로만 들었던 꼰대?"
상우가 담배를 집어던지려다 간신히 참았다. 어쨌든 상대는 이능력자. 자신은 무능력자였다.
"나 지금 화내도 되는 거지? 지금? 얘 진짜 인생 막사네. 와, 진짜 내가 돈은 많지만, 힘이 없어서 참는다."
"농담이에요, 푸흐."
피닉스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쿡쿡 웃었다가 자세를 바로잡고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2억을 후려치던지, 아니면 22억을 다 벗겨 먹든 상관없어요. 돈이야 필요한 만큼만 벌면 되는 거니까. 그래서 신분증이랑 계좌, 대포폰 바로 가능하죠? 늦어도 오늘 오후에는 받았으면 좋겠는데. 아, 까먹을 뻔. 하시는 김에 '블랙마켓' 계정도 하나 파주세요."
"하아, 됐다. 언제 한 번 돈 없어서 쫄쫄 굶고 빌빌대봐야 정신을 차리지. 예성아! 서류 가져와라!"
"네, 사장님!"
물티슈로 키보드 사이를 닦아내던 직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캐비닛을 뒤지기 시작했다. 상우는 담배를 끄고 슬쩍 시계를 확인하고는 중얼거렸다.
"음. 1억만 더 쓰면 세 시 되기 전에도 만들 수 있겠는데...."
"그럼 그렇게 해주세요."
"예성아!! 오늘 점심 주문할 때 탕수육 대 자도 추가해라!!"
"예!!!"
예성이 싱글벙글 웃으며 이것저것을 챙기며 사무실을 뛰어다녔다.
"도시가 이 모양인데 배달이 돼요? "
"서울이라면 모를까 인천인데요. 하하. 자, 그러면 고객님. 조금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3억 떼고 남은 19억은 계좌에 넣어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또 필요한 거 있으시면 말씀해주시지요. 금방 대령하겠습니다."
"...갑자기 사람이 달라지지 않았어요?"
"하하하! 3억이나 깎아주시는 우리 호갱, 아니 고객님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죠! 맘 같아서는 신발 끝에 입맞춤도 할 수 있답니다! 하하하!"
"어? 지금 뭐든지 할 수 있다고 했죠?"
피닉스가 눈에 이채를 띄며 두 손을 모았다.
상우는 어딘가 등을 타고 흐르는 싸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떨었다.
"그, 그러니까 제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앞으로도 자주 거래할 테니까, 이것도 같이 팔아주실래요?"
피닉스는 제 주머니 속에 있던 코어 세 개를 움켜쥐어 꺼냈다. C급, B급과는 확연히 다른 선명한 색이 담긴 코어였었다.
"예쁘죠? 이게 A급 괴수면 코어가 각 속성이 강하게 드러나면서 전체를 자기 색으로 덮는데.... 어? 저기요? 듣고 있나요?"
상우는 눈을 비비며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현실인지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A급 괴수의 코어가 날 것 그대로 인천 한가운데에 있다.
"백상우 사장님~ 듣고 계신가요?"
"왜."
"네?"
"왜 괴수 경보가 울리지 않는 거지? 이 정도면 영종도에서 괴수들 냄새 맡고 막 날아오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냐?"
이미 예성은 사무실에서 도망치고 없었다. 잠시 멍하니 구슬을 만지작거리던 피닉스는 상우의 말을 곱씹다가 그의 생각을 이해했다.
"아. 괴수의 코어가 이만큼 있는데 왜 괴수들이 여길 습격 안 하냐고요?"
피닉스는 활짝 웃으며 제 어깨를 손바닥으로 치며 가방에 코어를 던져넣었다.
"말했잖아요. 괴수가 여길 습격할 일은 '절대' 없다고."
상우는 피닉스와 눈이 마주쳤다.
둥근 눈동자 속에서는 푸른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