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10화 (10/1,497)

〈 10화 〉1부 1장 (9)

"와. 어떻게 서울 가는 버스가 없죠?"

나는 터미널의 옥상에서 적당히 굴러다니던 신문을 챙겨 신문을 살폈다. 신문에는 온갖 소식이 적혀있었지만, 특히 '괴수'와 '히어로'에 대한 정보가 가득했다.

'빨리 스마트폰을 구해야겠는데.'

정보 사회에서 전자의 세계에서 유리되는 것만큼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게 없다. 1년이라는 짧은 시간 만에 세상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게 21세기 현대 사회 아니던가.

"그런데 여기는...."

나는 주변을 훑었다. 전체적으로 발전된 현대의 도시의 전형적인 모습이지만, 군데군데 전투의 여파로 파괴된 흔적이 가득했다.

도시가 죽어가고 있다.

서울 바로 옆의 광역시가 이 지경이면 다른 도시는 말하지 않아도 알 법했다.

'시청사에 괴수가 똬리를 틀고 사는 곳도 있으니.'

그나마 인천은 시청을 거점으로 협회의 히어로들이 상주하고 있어서 상황이 좋았다. 물론 원작이 시작하는 시점에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인천도 괴수들의 땅이 되겠지만.

'앞으로 5년 남았나?'

신문의 발행날짜는 2020년 4월 3일.

이게 오늘 자 신문이라고 가정한다면 원작 시작까지 앞으로 5년 정도의 시간이 남아있다.

'생각보다 빠듯하겠는 걸.'

최악의 가정-이미 원작이 시작된 경우-는 아니었지만 5년이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그리 긴 편은 아니었다.

원작의 시작은 분명 2025년 봄. 특별한 일이 없으면 분명 그때 원작이 시작될 것이다.

'파편도 모두 회수해야 하고 내가 살아남을 방법도 찾아야 하고.'

새삼스럽게 주인공의 비범함에 놀라울 따름이다. 원작이 진행되는 1년의 세월-실질적으로는 약 10개월가량-동안 주인공은 부와 권력과 사랑을 얻고 겸사겸사 세계도 구했다.

'맘 같아선 그냥 원작대로 흐르게 내버려 두고 싶지만....'

아무리 주인공이라도 이 세계의 근간은 미연시. 올바른 '선택지'가 존재하고 올바른 노선을 따라가야만 진엔딩에 도달하는 세계다.

게임에서야 내가 주인공으로 플레이를 했지만, 지금의 나는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을 위해 희생하는 악의 간부 A이지 않은가.

'여차하면 주인공을 직접 키워야 할지도 몰라.'

프린세스, 아니 히어로 메이커가 되는 거다. 나는 신문을 고이 접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

갑자기 머리 위에 그림자가 진다.

"학생. 신서울가는 버스 찾는다면서?"

갑자기 얄상하게 생긴 금발 청년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어디 바닷가에서 선탠이라도 했는지 피부는 살짝 그을려있었다.

'이 새끼 뭐지?'

나는 무시하고 지나가려다 마음을 바꾸고 남자에게 응대했다.

"네. 신서울에 볼 일이 있는데...."

"번호표는 받았어? 보자. 으. 5000번대? 무리야. 아무리 일러도 3개월은 걸릴걸?"

"아, 진짜요?"

이미 알고 있지만 몰랐다는 듯 되묻자, 남자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환하게 웃었다.

잘라버릴까.

"그래! 하루에 신서울로 내려가겠다고 하는 사람만 수천 명인데. 학생도 봤잖아? 아까 누님 한 분 하차당해서 울고불고 난리였던 거."

남자는 소리를 낮추었다.

"그래서 말이야. 우리가 그런 안타까운 분들을 위해 신서울까지 차량을...."

"그거 불법 아닌가요?"

남자의 말을 자르며 묻자 남자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하지만 남자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라에서 그렇게 정했다면 불법이겠지? 그런데 말이야. 괴수 피해 내려온 사람들한테 설마 총 쏘겠어? 같은 한민족끼리 말이야."

그건 맞는 말이다. 총은 안 쏘지. 총은.

"나도 학생이 준법정신을 지키는 새 나라의 착한 어린이라면 더 강요는 하지 않겠어. 하지만 학생. 이 동네에서 신서울가는 차량 돌리는 놈 중에서는 내가 제일 싸게 해줄 수 있어?"

엄지와 검지를 붙이며 상큼하게 웃는 모습이 우스워 나는 속으로 피식거렸다. 물론 겉으로는 경계심이 가득한 척 연기를 하며.

"...진짜 신서울로 가긴 가는 거죠?"

"그래! 아주 약간의 돈만 있으면 말이지. 그런 의미에서 학생, 지금 얼마 있어?"

나는 주머니에 쑤셔둔 지폐를 꺼냈다. 박 노인이 가는 동안 차비하라고 준 세종대왕님 두 장.

"이거밖에는...."

"아. 곤란한데. 택도없이 모자란단 말이지."

청년이 은근슬쩍 내 몸을 아래위로 훑었다. 나는 그 눈을 확 뽑아버릴까 생각했다가 자신의 잔혹함에 화들짝 놀라 마음을 가다듬었다.

감히 내 러블리 엔젤 파랑새를 음흉한 눈으로 바라본다는 생각에 그만.

"어,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방법이 없는 건 아닌데 학생. 부모님 계셔? 아니면 보호자라던가."

"...신서울에 사촌 언니가 있어요. 부모님은 안 계시고."

내가 울먹이는 소리로 말하자 남자는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저 가라앉은 눈동자 안에는 음심이 가득했다.

남자는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벅벅 긁다가 내 손목을 잡으며 이끌었다.

"어쩔 수 없지. 일단 가자. 내가 한 번 사정해서 부탁을-"

"그런데요."

나는 내 손목을 꽉 잡은 손을 역으로 잡으며 미소지었다.

"누가 제 몸에 손대도 괜찮다고 했어요?"

"뭐?"

남자가 순간 멍청한 표정으로 눈썹을 찌푸렸다.

나는 그저 살포시 미소지어주고는

퍼억!

내 손목을 잡은 손을 떼고 발을 들어 차올렸다.

콰직

" "

소중한 무언가가 으깨지는 소리와 함께 남자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고꾸라졌다.

"석필아!!"

"이 미친 년이?!"

문 뒤에 숨어있던 남자들이 하나둘 나타나며 게거품을 물고 쓰러진 금발 청년을 부축했다.

'언제부터 눈치챈 거지?!'

'처음부터요.'

'어떻게! 작전은 완벽했는데?!'

이제 이런 대화가 이어질 게 안 봐도 훤했다.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쉰 나는 그저 안쓰러운 눈으로 금발 청년에게 시선을 보냈다.

'금발에 구릿빛 피부면 100% 히토미 각이지.'

분명히 말하지만, 이 세계의 근본은 오픈 월드 RPG도, 포스트 아포칼립스도 아닌 19금 미연시다.

그것도 순도 100% 순애 계가 아닌 온갖 19금 태그가 난무하는 세계. 눈동자를 맹렬히 굴리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돈 없는 여고생을 상대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사람들 따라가느니 기다리고 말지. 경찰을 부를 거에요."

자. 그러면 감히 피닉스 님의 옥체를 탐하려 한 무뢰배들을 향해 정의(공권력)의 불꽃을-

"야 이 미친년아! 돈 없으면 그 사촌 언니한테 부탁해서 보내 달라고 하면 되잖아!"

"어?"

의식을 잃은 금발청년을 부축하는 동료의 눈에 어딘가 억울함이 느껴졌다.

"저...무슨 일 났어요?"

계단 아래에서 여성이 보자기를 들고 나타났다. 그는 조금 전 강제로 버스에서 하차당했던 이였다.

"누, 누님. 잠시만요. 지금 석필이가...."

"헉?! 정신 차려요!"

터미널의 통로에서 한 명의 남자가 의자에 눕혀져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다. 나는 그저 아무 말 없이 그들의 곁에서 우물쭈물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이게 아닌데...."

나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하늘로 시선을 피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했다.

* * *

"반가워요. 학생. 저는 김상아라고 해요."

자신을 김상아라고 소개한 중년 여성은 습관처럼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내게 건넸다.

금박이 예쁘게 새겨진 명함에는 '라온 로펌 김상아 변호사'라는 문구가 예쁘게 박혀있었다.

"변호사셨어요? 그런데...."

놀란 내 물음에 김상아는 쓰게 웃었다.

"못 볼 꼴 보였죠? 미안해요. 이게 진짜 소중한 거라."

김상아는 보따리에서 앨범 하나를 꺼내 들었다.

"제 전남편이랑 딸이에요. 이혼하고 남편은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갔죠. 딸은 지금 아빠한테 있고."

"신서울로 가려고 하시는 게 혹시...."

김상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평양 터지기 전에 애 아빠가 부산 구경시켜준다고 잠깐 데려갔어요. 그 뒤로는 계속 부산에서 지내게 하고 있고요."

사진을 쓸어내리는 김상아의 손은 변호사의 것으로 생각하기 어렵게 굳은살이 가득했다.

"...그러다가 인천도 더 못 살 것 같아서 내려가기로 했어요. 애 아빠한테는 염치없지만."

"그렇군요."

신서울이라면 모를까 사흘 밤낮으로 괴수가 날뛰는 동네에서 변호사가 예전처럼 돈을 벌기는 어려울 것이다.

후줄근한 옷으로 보아 근 1년은 변호사일 말고 잡다한 일을 하지 않았을까. 그러다 돈이 거의 다 떨어져서 전남편에 의탁하러 가는 거고.

"그...학생은 무슨 일로 신서울로 가는 거예요? 역시 피난?"

김상아의 말에 나는 미리 설정해둔 배경을 이야기했다.

"사촌 언니가 신서울에서 일해요."

"부모님은?"

"......."

"...미안해요. 내가 실언을 했네요."

적당히 사연 있는 척을 하면 알아서 오해해주니 편했다. 이게 교복의 힘인가.

"그런데 머리카락 색이 참 특이하네요. 혹시 히어로?"

김상아는 활기차게 웃으며 계속 대화를 이어나가려 했다.

하긴 그럴 테지. 누가 봐도 꼭 조폭 영화에 나올법한 허름한 사무실에 여자 혼자 있었으니 불안할 수밖에. 그나마 내가 있으니 그 불안감을 덜려고 이렇게 수다를 떨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염색이에요."

"아, 그렇구나. 눈썹까지 색이 같아서 히어로 각성한 줄 알았어요. 설화공주님 머리칼도 하얀 눈 같은 색이잖아요."

"그렇긴 하죠."

이능력을 각성한 히어로가 자신의 힘의 영향을 받아 체모의 색이 변했다는 건 으레 있는 이야기다. 덕분에 내 파란 머리도 조금 눈에 띄지만 유별나다고 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히어로 각성이라."

박 노인은 나를 히어로로 착각했다. 아예 히어로로 등록해버리고 활동할까 하는 생각이 언뜻 스쳐 갔다.

"아. 학생도 히어로가 되고 싶어하나요?"

"...힘이 있는 게 아무래도 낫죠. 이런 미친 세상에서는."

김상아는 녹차를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예전처럼 돈으로 모든 게 해결되는 세상은 아니게 되었죠. 한국이야 이 지경이지만 미국이나 유럽권에서는 히어로가 어떤 대접을 받는지 혹시 아나요?"

"국가에서 관리하는 인간 백정들?"

나는 원작에서 주인공이 골랐던 선택지의 대답을 똑같이 읊었다. 김상아는 얕보는 듯한 눈빛으로 검지를 까닥였다.

"아이돌. 슈퍼스타. 우상.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말 그대로 인류의 '히어로'예요. 학생은 감수성을 좀 풍부하게 가져야 할 것 같네요."

처음 본 사람에게 무슨 시비일까 싶어 반론하려다가 참았다.

"그러게요. 감수성이라."

"그래요. 이런 삭막한 세상일수록 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인류애를 나누고...."

"저기요. 하나 여쭤볼게요."

나는 일부러 김상아의 말을 잘랐다. 김상아는 상당히 불쾌한 얼굴이었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질문했다.

"이런 삭막한 세상에서 사람으로서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정말 뜬금없는 질문이네요."

김상아가 고민에 빠지자, 나는 조금 더 상황을 구체화했다.

"가령 이런 거죠. 내가 가진 건 몸뚱아리 하나밖에 없는데, 세상은 살기 너무 힘들 때. 변호사 님은 이 미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남고 싶으세요?"

"글쎄요. ...제 상황과 뭔가 맞물리는 것 같은데."

김상아가 자조하며 보따리를 끌어안았다.

"저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 같네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신서울을 거쳐서, 부산으로 내려갈 거예요. 제 딸이 있는 곳으로."

"......흐흠."

"아. 혹시나 오해할까봐 분명히 말하는데, 어디까지나 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그런다는 얘기에요. 설마 제가 법을 위반하겠어요? 법조인인데?"

"그러시구나."

나는 창문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을 닫았다. 김상아는 뭔가 초조한 기색으로 내게 말을 붙이려고 했지만, 나는 그 눈치를 무시하며 계속 창가로 시선을 두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건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포함되는 말일까? 나는 그걸 대놓고 묻고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어차피 곧 알게 될 테니.'

나와 김상아는 청년들이 안내한 사무실에서 묵묵히 그들을 기다렸다. 과연 그들이 정말로 신서울로 가는 브로커 일당일지, 아니면 썩어빠진 이 세계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는 첫 사례가 될 지.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어.'

"꼬우면 다 죽여버리면 되니까요."

"네?"

"아, 혼잣말이에요. 신경쓰지마요."

나는 놀란 김상아에게 손을 흔들어 안심시켰다. 김상아는 슬금슬금 소파에서 엉덩이를 움직이며 내게서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그, 학생은 역시 이능력자...?"

벌컥.

사무실의 문이 열렸다. 나는 김상아를 살짝 흘긴 뒤, 문으로 들어오는 청년들을 향해 살포시 웃었다.

"기다렸어요."

정말로.

0